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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미미한 울림 (나상윤)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0. 6. 1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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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한 울림

나상윤
(본 연구소 회원, 목사)


1

석가탄신일 낮에 열리는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 전북 익산으로 향하는 하객전용좌석버스에 올라탔다. 비교적 편안한 자리를 확보한 뒤, 눈을 지긋이 감고 바로 잠들고자 애를 썼다.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가장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자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날 일부러 최선을 다해 밤새우고 나서 버스를 탔다. 잠자기에 최적의 몸을 만들어놓은 상태인지라, 수없이 많은 꿈을 꾸며 무척 단 꿀잠을 잤던 것 같다.

한 서너 시간 가량 잤을까. 자는 게 좀 지겨워지고 바깥바람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할 즈음,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버스 안의 하객들이 “어떡해” “어떡하냐” 하며 소란스레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나서야 사람들이 왜 걱정스러워 하는지 파악이 됐다. 길이 차들로 온통 꽉 메워져 있었던 것이다. 차 안에는 각양각색의 탄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일은, 익산의 어느 교회에서 낮 1시에 결혼식을 시작하기로 돼 있는데, 12시 반이 되어도 하객들을 왕창 태운 대형좌석버스는 아직 경기도권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서울에서 출발한 하객들 모두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혼식이 벌써 끝나버렸다는 현지 특파원의 보도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서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익산까지 꼭 가야만 하는가? 식도 다 끝난 마당에... 아님 서울로 그냥 돌아갈까? 축의금은 은행계좌로 보내주면 되니까... 그래도 신랑신부 얼굴은 보고 축하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저렇게 좌충우돌하며 여러 얘기가 오간 뒤, 신랑과 통화하여 절충안이 발표됐다. 신랑의 고향인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신랑신부를 만나, 다함께 삼계탕을 먹고 단체사진 찍고 곧바로 헤어지기로...

삼계탕을 잘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흥미로운 상념에 잠겼다. 목적지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면서, 이 버스 안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제 시간에 이르지 못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 앞뒤로 꽉 막힌 상황이 답답해서 죽는 시늉을 하는 이들, 생리적 신호가 오는 걸 감지하고 언제 터질지 모를 불상사를 어떻게든 지연시키고자 가진 애를 다 쓰는 이들, 그리고 이런 저런 소리 듣다 시끄럽고 귀찮으니 그냥 부족한 잠이나 더 채워 자려고 하는 나.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았다.


2

말도 못할 정도로 복장 터지는 일들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텍스트들이 넘쳐난다.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둘러싸고 서로 끊임없는 논쟁을 한다. 그렇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 말잔치 안에서 대상화된 타자가 겪은 아픔을 몸으로 느끼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내가 직접 비슷한 일을 겪어보지 않고선,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무언가를 접하고 마음이 울리는 체험을 할 때가 있다. 나아가 무딘 마음이 그 울림으로 녹아들어가, 급기야 그 무언가에 나 자신이 융화되어, 내 속에서 그것이, 그것 속에 내가 살아가게 되는 체험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함께하고 서로의 삶이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고 믿는 집단을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의 비극적인 사건에 우리 마음이 울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사건의 당사자와 우리를 공동체로 엮을 수 있는 감정의 끈이 너무도 가늘어져 너무도 미미한 울림 외에는 일어날 수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대중 모두가 좋아서 함께 따라 부르며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노래가 거의 없다는 것도, 우리 주변의 이름 모를 이웃들과 공동체의식을 공유하기 힘든 상황을 반영하는 게 아닌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아무리 많이 반복해서 듣게 된다 한들,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이웃의 몸과 내 몸이 공명(共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 가운데 그처럼 진부한 얘기를 계속 들어줄 만큼 마음이 한가한 영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랑’이란 게 도대체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비극을 접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임을 통감하며 아파하는 노래들을 듣고 부르다가, 타자의 아픔에 공명하며 함께 울다 간 흔적들, 그 눈물꽃이 피었다 진 자취를 발견하며 감동하게 되는 일이 있다. 나는 특히 김지하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금관의 예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림)를 부르다 그런 체험을 할 때가 간혹 있는데, 가냘프고 메마른 떨림으로 무겁고 참담한 어조를 내뱉으며 이 노래는 시작된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 대한 나의 음악적 인상을 한번 소개해보고 싶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가단조 4분의 4박자 곡으로,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리고 벌스(verse)와 코러스(chorus)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벌스는 부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둡고 깊게 침잠하면서 체념적인 단조의 정서가 지배적인 데 반해, 코러스는 장조화성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음높이가 점진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고 올라가면서 점점 더 절박한 감정을 격정적으로 쏟아내게 한다. 그러다 후렴구 끝자락에 와서야 급격히 격정을 가라앉히며 노래를 마무리 짓게 한다.

그동안 나는, 이러한 곡 전반부와 후반부의 극명한 대립이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 대립이 양쪽 정서를 극대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면서, 노래하는 이의 감정을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선율이 지닌 울림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부르다 눈물이 울컥하기 일쑤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잘 되는 건,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아마도 나락에 떨어진 정서로부터 솟구치길 원하는 대중의 갈망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최근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부르다, 이 곡이 지닌 흥미로운 비밀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됐다. 바로,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서 계명 “미”가 지니는 위상이 범상치 않게 다가온 것이다.

우선,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 쓰인 음 가운데 “미”가 가장 많이 쓰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벌스에서 가단조의 화성이 전개될 때, 으뜸화음인 ‘A minor’ 코드(chord)에서 “미”는 5도 음의 위치를 차지하는 데, 으뜸음인 “라”보다 “미”를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그 정서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저항적 의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리고 다장조로 전조된 상황의 후렴에서, “미”는 으뜸화음 ‘C’ 코드 가운데 장3도 음으로서, 장3도 음이 지니는 밝지만 불안정한 느낌을 선사한다. 요컨대, 이 곡에서 “미”는 체제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려 애쓰는 반항적 주체의 표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미”는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서 가장 높은 음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후렴에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선율이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주여”를 외칠 때와, “여기에 우리와 함께”를 외칠 때, “미”로 가장 높은 음을 부르게 함으로써, 고음이 지닌 특유의 긴장과 함께 불안정한 떨림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지금 이곳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그 간절함이 하늘을 닿을 듯 절정에 이르며, 이 울림을 통해 혁명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끝으로,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미”(low)로 시작해서, “미”(high)로 가장 높게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미”(low)로 마무리 된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이 얼어붙고 태양마저 빛을 잃은 듯, 자연으로부터도 철저히 버림받은 듯한 이들에 대해, 처음에는 비록 “미미”한 떨림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작은 울림들이 모이고 모여 큰 울림을 이루고 난 뒤, 다시 미미(微微)한 울림을 낳을 수밖에 없는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드라마적 구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나는 일상 가운데 미미하게 떨려오는 울림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 비록 그 소리의 내력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한 소음으로 흘려버리기 십상이지만, 그 소리들로 인해 부지불식간 연주하게 되는 내 몸의 떨림, 그 미미한 울림이야말로, 그것과 연루된 수없이 많은 타자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런 연대를 통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권력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혁명의 씨앗인 것이다.

3

전혀 예상치 못한 교통 정체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각자 내면의 지옥을 만들고 그 속에서 괴로워한다. 불안하고 답답하기만한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하나 같이 불쾌하게 다가온다. 그러한 개인의 고통을 경감하고 회피하기도 버거운 판에, 남들이 겪는 고통이 어떻게 마음에 와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내어, 내 몸이 끊임없이 연주하는 미미한 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그 울음소리에 진정으로 공명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몸을 조율해보자. 그렇게 주파수를 맞추는 가운데 도처에 수없이 많은 울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우주와 몸이 어우러져 거대한 울림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진정 음악이요, 구원체험이 아니겠는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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