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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자크 데리다’ 특별기고: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해체론적 독법 (I)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6. 1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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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특별기고[각주:1]
: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해체론적 독법 (I)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한국의 천안함 침몰 발표

 

얼마 전  (2010 5 20) 저는 천안함 침몰에 대한 한국정부의 공식 발표를 인터넷을 통해 접했습니다. 천안함 침몰사고 원인을 조사해온 민군합동조사단(이하 합조단) "북한에서 제조한 고성능 폭약 250kg 규모의 중어뢰에 의한 수중폭발로 (천안함이) 침몰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합조단은 북한 어뢰가 분명하다고 주장하며 '북한체 글씨 1'이 새겨진 어뢰 추진부 뒷부분을 결정적 증거물로 제시하더군요. 합조단은 또한 "100m 높이 물기둥 봤다...수병 얼굴에 물 튀었다"라고 하면서 천안함 침몰의 직접원인을 어뢰에 의한 폭발임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곧이어 청와대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 군 통수권자로서 결연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 응분의 책임을 묻기 위한 단호한 (대북 제재) 조치를 곧 결심할 것이다.”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

 

나는 대표적인 한국의 수구언론이라 알려진 조선일보의 반응이 궁금해졌습니다. 조선일보는 國論 하나로 모아 안보 비상 상황 넘자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사설을 달았습니다: “정부는 오늘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한다. 대한민국은 이 발표 위에 서서 국가적 차원의 비상(非常)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북한이 어뢰로 우리 군함을 두 동강 내 장병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사실상 대한민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런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훗날 더 큰 도발을 부를 수 있다.”[각주:2]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발표

천안함 침몰과 관련된 일련의 한국정부와 한국사회의 대응을 접하면서 나는 몇 해전에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오버랩되면서 머리끝이 쭈뼛해졌습니다. 2003년 봄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며 내세운 명분은 이라크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숨겨져 있어야만 하는) ‘대량살상무기제거였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를 뒷바침하기 위해 부시는 2003 5월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For those who say we haven’t found the banned manufacturing devices or banned weapons, they’re wrong, we found two trailers. Them being Iraq’s supposed mobile bio weapons labs”[각주:3] (금지된 생산장비나 금지된 무기를 찾지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습니다. 저희는 2대의 트레일러를 찾아냈습니다. 그것들은 이라크에서 이동화학실험실이라 알려졌던 것을 말합니다)

2006 4 12일자 워싱턴 포스트는[각주:4] 미 정보관리들이 당시 부시의 발표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관여했던 한 정보관리의 증언에 의하면 정보국에서 문제의 2대의 트레일러가 화학무기 제조와 상관이 없는 것임이 밝혀졌다는 보고를 부시에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악관은 이를 묵살하고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허위 발표를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트레일러는 기상관측용 기구에 수소가스를 주입해 띄우는 시설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당시 조사관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 화장실(the biggest sand toilets in the world)’로 불렀던 사실로 미루어 분뇨탱크, 즉 똥차가 아니었을까 재치있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똥차였다면 코메디같은 일이죠. 아니 코메디보다 더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지구방위대 미국이 이라크에 있는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위해 장엄하고 숭고하게 깃발을 올리고 진군을 하는데 그렇게 고대하던 대량살상무기가 고작 똥차 2대였다니……이건 정말이지 거침없이 지붕뚫고 하이킥보다 더 웃긴 시트콤 아닙니까?

 

물론 당시는 부시가 재임된 이후였고 후세인도 체포된 다음이었습니다. 차기 대선을 위한 공화.민주 양당의 밑그림이 그려질 무렵이었죠. ‘대량살상무기제거라는 이라크 침공에 대한 정당성은 이미 허구였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였으니 새삼 놀랍거나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부시와 그 일당들의 악랄함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던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이 그 엄청난 거짓을 가능케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처벌 내지 문제제기 없이 부시와 그 일당들은 어떻게 무사히 그 시기를 넘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미국의 정치가들이 섹스스캔들 혹은 뇌물스캔들로 정치적 생명을 접는 경우가 허다한데, 수 백만명의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전쟁의 명분을 거짓으로 조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부시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있음을 직감케하는 대목입니다. 정녕, 부시를 지지했던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의 영발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것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해 내야 합니다.

 

지젝에 묻다

 

합조단에서 발표한 어뢰 추진부 뒷부분에서 새겨져 있다는 북한체 글씨 1과 부시가 말하는 대량살상화학 무기를 탑재한 트레일러 2는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동일한 기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요즘 뜨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와 기표 사이에 작동하는 함수관계를 폭로하면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의 초기작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1989)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각주:5] 지젝에 의하면 기표란 단지 떠돌아 다니는 무엇입니다. 기표들이 풀려있다가 어떤 이데올로기적 매듭에 의해 통일된 장으로 구축된다는 것이죠.[각주:6] 그렇게 고정된 기표들의 세계를 라깡은 큰 타자라 부릅니다. ‘큰 타자는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상징적 질서의 권위가 우뚝 발기되어 있는 그 무엇입니다. 지젝은 그런 것은 없다고 하면서 조소를 날립니다.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예화를 들죠.

 

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가 뭡니까?”

, . 그것은 맥거핀(MacGuffin)입니다.”

맥거핀은 뭐죠?”

그건 스코트랜드 고원지대에서 사자 잡을 때 쓰는 연장입니다.”

하지만, 스코트랜드 고원지대에는 사자가 없는걸요.”

그래요,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닌가 보네요. 아님, 말구!”[각주:7]

 

맥거핀 (스코트랜드 고원지대에서 사자 잡을 때 쓰는 연장), 북한체 글씨 1 (천안함을 침몰시킨 북어뢰 추진부 뒷부분에 새겨져 있었다는 문자), 대형 트레일러 2 (대량살상화학 무기를 탑재한 이라크의 테러 및 전쟁을 위한 장비)는 각각 괄호 안의 상징적 질서 안에 묶여 있는 기표들입니다. 실재계(the Real)에서는 존재치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으로, 체제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의 폭압으로,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그 기표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우리들에게 행사합니다. 서울시청 광장에 모인 해병전우회, 재향군인회, 한기총이 집단으로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미국을 찬양하고 좌파척결을 다짐하는 푸닥거리가 한국사회에 만연한 대표적인 상징계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죠. 지젝은 기표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일련의 효과들 속에서 항상 왜곡되고 빗나간 방향으로만 현존하는 원인[각주:8]의 역할을 한다고 꼬집은 후 상징적 체계의 권위를 지워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비워진 공간 (탈 중심화된)은 무엇으로 매워야 할까요? 우리의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데리다는 2004년에 세상을 세상을 떴습니다. 이번 달과 다음 달 웹진을 통해 2회에 걸쳐 ‘자크 데리다 특별기고’란 제목으로 글이 연재됩니다. 물론, 졸고는 가상입니다. 데리다의 시선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천안함 침몰 사이에 있는 상동성을 밝히는 것이 이번 달 웹진내용이라면, 다음 호 에서는 실재에 대한, 아니 우리가 실재라고 믿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론적 독법이 갖는 함의에 대해 다룹니다. [본문으로]
  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9/2010051902551.html [본문으로]
  3. http://www.bushwatch.com/bushlies.htm [본문으로]
  4.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6/04/11/AR2006041101888.html ;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graphic/2006/04/12/GR2006041200165.html [본문으로]
  5. 작년도 웹진 9월호(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18)에 지젝과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 미국에서 출판되어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지젝에 관심있는 분을 위해 다시 한번 옮겨 적습니다: “한국에서도 지젝에 대한 열풍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지젝은 미국에서도 광범위한 메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답니다. 지젝의 글쓰기는 가히 인문학의 종합선물세트라 불립니다. 저와 함께 시카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작년(2009년) 5월에 Ph.D 학위를 받은 Adam Kotsko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가 재 작년에 미국에서 진보적 신학책을 출판하기로 유명한 t&t clark출판사에서 Zizek and theology (2008)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Adam Kotsko는 시카고 신학교를 대표하는 학자라 할 수 있는 Reading Derrida/Thinking Paul (2006)의 저자 Ted Jennings 교수의 제자로서, 작년에 Zizek and theology 출판을 계기로 미국 진보신학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책은 지젝 사유를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989), The Ticklish Subject (1999) , The Fragile Absolute (2000) 에서부터 신학관련 주제를 논술한 The Puppet and the Dwarf (2003) 까지 지젝이 지닌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신학적 물음과 대답, 그리고 비판을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젝을 이해하려면 많은 총알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칸트와 헤겔을 읽어야 하고, 프로이트와 라깡을 정복해야 하며, 맑스의 기운까지 느끼고 있어야 그때 비로소 지젝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사람들이 겁을 줍니다. Adam Kotsko가 쓴 Zizek and theology는 저와 같이 지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빙빙 지젝 주변을 서성이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지젝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재작년 후반기에 이 책의 안내를 받은 후 지젝의 처녀작인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읽었습니다. 라깡에 대한 전이해가 있어야 되는 책이었는데, 지젝 사유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되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래에 Adam Kotsk가 쓴 Zizek and theology에 대한 책 소개를 링크합니다. http://www.amazon.com/Zizek-Theology-Philosophy-Adam-Kotsko/dp/0567032442 /ref =sr_1 _ 1? ie=UTF8&s=books&qid=1244730560&sr=8-1” [본문으로]
  6.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87. [본문으로]
  7. Ibid., 163.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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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12 11:52
    이상철 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만 님의 지젝 해석과 전유의 방식에 상당한 왜곡과 문제점이 있기에 이 지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젝은 라캉의 타자 개념을 극단화시켜서, 이 지점에서 이웃을 위한 확고한 사유와 이에 바탕을 둔 폭력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이에 바탕으로 정통의 지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고찰합니다.

    지젝의 논리의 틀은 결국 라캉의 상징계와 법의 문제 그리고 법에서 정초되는 타자성의 문제에 천착합니다. 라캉의 정신 분석학을 이어받아서 어떻게 현실의 자본주의적 욕망의 체계에서 어떻게 자꾸 상상계로 퇴행하며 이 지점에서 대타자로 향한 욕망을 끊임없이 유보하며 결국 다양한 소타자들(상품적 물신숭배 혹은 속물적 욕망의 체계들)에 대한 도착 속에 메여있는지를 폭로합니다. 결국 지젝은 라캉의 정신 분석학이 가지는 기술적 지점을, 당위적인 차원으로 가져오려 합니다.이 지점에서 자아가 욕동의 체계에서 해방되어서 진정한 타자를 욕망하며 사랑의 폭력을 강제할 수 있는가를 고려합니다. 지젝에게서 이웃의 얼굴이란, 상징계에 구성된 법의 지점으로서 대타자와, 실재계에서 만나는 구체적 대상과, 상상계에서 애매하게 섞여있는 소타자등이 한데 뒤엉켜서, 환원될 수 없으며 동시에 잉여를 남기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포인트는 결국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에서 어떻게 우리가 도착에서 벗어나서 대타자로서의 법을 욕망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결국 자아의 숭고화에 기반을 둔 레비나스류의 이웃 사랑은 비판 받습니다.)

    결국 지젝이 이야기하는 바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소타자들의 욕동을 제공하는 도착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다시 우리가 접하는 이웃에게서 대타자의 지점을 발견하고 이룰 위한 보편적 사랑을 신적 폭력을 통해서 동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젝의 주요 관심입니다. 하기에 남근적 대타자 따위는 없으며 우리의 구체적 물질성에서 해방을 추구하자는 포스트콜로니얼적 퀴어이론(알트하우스 리드 류의) 적인 지젝 해석은 참신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지젝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지젝은 라캉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유물적 차원을 최소하고 하고 논리적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전통을 따르는, 동시에 헤겔적 변증법을 가져오는 보편성의 철학자 입니다.

    위에 읽으신 글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것은 자아의 대타자를 향한 욕망의 구조를 기생합니다.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로서 대타자의 역할을 하는 지점에 대한 소거에 있지요. 하지만 지젝이 라캉의 길을 가는 이상, 자아가 가지는 욕망의 구조- 상징계에 형성된 대타자를 소타자를 통해서- 상상계에서 재구성되고 실재계에서 만나지는- 욕망하는 근본적 욕망의 구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반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의 가능성이 지젝에게서 긍정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구테여 님의 글에 딴지를 거느냐 하면, 바로 남근적 대타자 따위는 없다와, 남근적 대타자가 오염되었다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님은 지젝을 대타자의 부정으로 읽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로서 대타자의 오용과 이에 대한 교정- 하기에 이 지점에서 지젝이 기반을 두고 있는 라캉적 틀에서 완전히 결별해서 지젝을 전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젝의 최근의 시점까지 고려한다면, 대타자는 여전히 거기 있으며, 이 대타자는 이웃사랑을 위해서 전유되어야 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혁명적 정치학의 정통의 지점과 신적 폭력이 긍정되는 것입니다. 하기에 지젝은 이 지점에서 대타자없는 모든 도착적인 자유주의의 기획에서 결별하고, 레닌적인 혁명적 정통의 전위당과 이에 기반을 둔 폭력 정치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하기에, 지젝의 사유는 가장 유럽중심적이면서 남근적인 사상이며, 이 지점에서 미놀료 등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은 여전히 서구적 담론의 틀을 가장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민중 신학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고 민중 신학자도 아닙니다. 민중 신학을 논할 때에 애초에 입장권 따위는 박탈당한 인간이지요. 하지만 적어도 한국 신학에서 이어져 내려온 변혁적 관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자꾸 물어 뜯고 되도 않는 딴지걸고 꼬장 피우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서구의 담론을 우리의 지점으로 가져올 때, 가장 첨단의 위치에 있는 민중 신학이, 적어도 그 논의의 핵심적 사안들을, 우리의 현장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시사점을 동시에 고민하면서, 가져오는 것이야 말로, 그것이 식민성에 기댄 권위가 아니라면, 우리 현장을 최대한 존중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 신학은 그 자체로 진보 담론을 생산한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담론의 영역에서 헤게모니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특권이 실질적인 해방을 불러오는 헤게모니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제가 보기에는 좀 더 책임있는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상철 님께서 아마도 한국의 민중 신학계를 이끄실 분이고 또 그것을 위해서 체계적인 정도를 받으시는, 어떤 면에서 민중 신학계의 기대주이시기에, 이 지점에서 이상철님의 앞으로의 더 훌륭한 연구의 성과와 지적-신학적 리더쉽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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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12 13:26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민중 신학의 헤게모니에 대한 발언은 어떤 면에서 오바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자인 위치에서 보기에, 민중 신학은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한 대항 담론의 위치에서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많은 이론가들을 보유한 영향력 있는 이론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지만, 민중 신학이 스스로가 섹타리안적인 배타적 이론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한 지점은 민중 신학은, 이 지점에서 여전히 그것의 영향력의 확장에 대해서 고민하는 지점을 가질 수 밖에 없겠지요. 단순히 진보 진영에 갇힌 소수의 진보적 이론가들의 장난감으로서 민중신학이 아니라, 단순히 서양의 이론가들의 담론에 의존하는 또다른 수입산 진보 담론이 아니라, 창조적 연구가들의 창조성의 발산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보통 기독인들의 삶을 뒤흔들, 그러한 토착적이면서 변혁적인 담론을 기대해봅니다. 저기 저 쪽에 있는 덜떨어진 복음주의 형제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 이론 말이죠. 덜떨어진 바보들이고 억압적인 또라이들이라고 손을 뿌리치기 이전에, 어떤 면에서, 근본주의의 그러한 투박한 지점들을 변혁적으로 이끌 방안은 없을까를 고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야만적 신자유주의의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투박한 충실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들이 이상철 님 같은 분이 하시면 감사하겠지요.

    저는 많은 지점에서 김재준의 신학 방법론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준이, 세계의 보편교회와의 협력 속에서,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성서적 전통으로 소급해서, 근원적인 신학적 질문들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 한국인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신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점에 대해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기독교 장로회는, 한국 교회의 역사를 공부해 볼 수록, 한국 교회의 기독교의 토착적이고 변혁적인 영성을 담지한 창조적 소수여 왔습니다. 아무쪼록 그 재능있는 창조적 소수가, 투박하고 덜떨어진 그리고 부패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저 한국 교회의 다수의 형제들과 그들과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대성을 기억하고, 이 지점에서 민중신학을 함께 재구성하는 그러한 날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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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13 19:07
    과객님께서 밝힌 민중신학이 당면한 과제와 민중신학을 향한 바램을 통해 민중신학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특별히 민중신학이 혹 빠질 수 있는 '배타적 이론 공동체'로서의 가능성을 염려하는 대목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국을 떠나기전(2004)까지 제가 접했던 한국 진보진영의 생리는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한 강력했던 투쟁의 전통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부적 의견수렴과정에서 조차 투쟁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철저함이 필요했겠지만, 원활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면도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이점을 과객님께서 걱정하시며 열린 민중신학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기독교인들의 삶을 흔들고, 복음주의도 수용하고, 근본주의적 요소들까지 변혁적 방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민중신학에 대한 과객님의 요청은 한편으로는 버릴 수 없는 바램일 수 있으나 너무나 가혹한 황금율이 아닌가 합니다. 민중신학이 애초부터 보통의 기독교인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방식을 엿보면서 호박에 줄긋는 방식으로 변신했다면 수박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민중신학은 부단히 세계에 대해 열린 자세로 열려있는 보수진영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하여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가 만나는 교량의 역할을 자처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이유로 (민중신학을 비판하는 사람 혹은 옹호하는 사람 모두가) 시대가 변했으니 민중신학도 변해야 된다고 아우성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민중신학의 외연을 어떻게 넓힐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지, 민중신학의 담고 있는 체제의 음모에 대한 비타협적 요소에 대한 완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민중신학 진영의 힘이었고, 그것이 민중신학이 당당하게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타인과 대화하는 장으로 자신 있게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재준 목사님과 기장교회에 대한 과객님의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준 목사님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저로서는 (김재준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희 교회 원로목사님이셨거든요, 목사님 장례식도 저희 교회에서 치루었고, 당시 어린 저에게는 그냥 인자한 할아버지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나중에 공부하면서 그 분을 알아가면서 소름이 끼쳤던 것 지금도 생생하네요), 그리고 현재 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인 저로서는 우쭐 할 수 있고 자부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화려한 훈장이고 죽은 놈 뭐 만지는 격이라 약간 씁쓸합니다. 현재 기장교회는 과객님이 과찬처럼 한국 교회의 창조적 소수로써의 역할을 포기한지 오래이고 한국의 많은 교단 중 하나있는 군소교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그것이 다 시대가 변했으니 기장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아우성을 따라간 결과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듯이, 수박에 있는 줄을 지운다고 수박이 호박이 되지는 않습니다. 기장 교단의 울타리 안에 있는 진보적 유전자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진보란 열려있음을 전제로 변혁을 꿈꾸는 정신성이고 부단히 삶의 자리에서 실행되어야하는 구체성이죠. 과객님의 지적처럼 민중신학과 기장의 전통이 이러한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담당했던 대표적 진보진영으로서, 창조적 소수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그날을 저 역시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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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7.13 19:17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일단 글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음 웹진 25호에 이 글의 후속편이 나갑니다. 완성된 텍스트를 접하고 다시 한번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평을 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젝에 대한 부분은 과객님의 문제제기를 참고하여 제가 따로 조만간 글을 기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오늘은 과객님이 지적한 민중신학에 대한 부분에 집중하여 답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과객님의 민중신학을 향한 따뜻한(?) 발언 감사합니다.우선 저는 민중신학의 기대주도 민중신학을 이끌만한 위인도 못됩니다. 민중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도 남루하구요. 그 말은 또 민중신학이 무슨 기대주나 이론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흘러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아 살짝 마음이 당혹스럽네요.

    제가 갖고 있는 민중신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미천해서인지, 저는 오히려 과객님의 민중신학에 대한 지적에 적잖이 놀라고 있습니다. 님의 민중신학에 대한 언급에 있어 민중신학이 단순히 서구 담론을 이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한국사회에서 담고 있는 시대적 함의를 담아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구요.


    그런데 님께서 말하신 민중신학이 담론의 영역에서 헤게모니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지적은 제가 잘 이해를 못하겠군요. 그말은 제게 두가지 의미로 들립니다. 하나는 전 시대 민중신학 진영이 지녔던 영향력이 여전히 유효하다거나, 아니면 민중신학은 계속 시대적 요구에 맞춰 진화를 거듭해 왔으므로 여전한 강호의 고수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 둘다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중신학은 전시대의 영향력안에 갇혀 있어서도 안되고, 여전히 민중신학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과객님이 갖고 계신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는 일정 부분 과장된 표현이고, 민중신학 진영이 처한 고민을 실질적으로 품지 못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