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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욕망의 습격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0. 6. 1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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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습격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창세기」 6장 2절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은 다섯 개 묵시록의 묶음집인 『에녹1서』의 첫 번째, 「파수꾼의 책」에서 매우 흥미롭게 해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타락했다는 생각이 역사 속에 등장한 것입니다. 신의 영역은 거룩하며 정의롭고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붕괴되고, 그곳조차 부패하여 죄로 오염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침투하게 된 것일까요. 이 물음은 그 시대에 대한 물음과 함께 해명할 때 보다 설득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여러 견해들 가운데, 제가 주목하는 시기는 헬레니즘 제국 시대,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기원전 3세기입니다. 우선 사람의 아들들이 땅의 여자들과 결혼하여 네피림을 낳았는데 그들은 ‘용사들’이었다는 「창세기」 6장 4절은 하나의 단서입니다. 얼핏 보아도 그리스 신화들과의 유사성이 돋보입니다. 신과 영웅 사이의 긴밀한 연계는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 신화의 두드러진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문화권의 제국인 마케도니아의 통치자가 세계의 지배자가 된 이후, 이러한 그리스적 영웅 숭배는 의례로서 발달하게 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그 전형적 예를 보여줍니다. 이 국가의 창건자는 자기를 ‘소테르’라고 불렀지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을 숭배하는 국가의례를 발전시켰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라이벌 국가인 셀류커스 제국도 그런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한 통치자는 자신의 이름을 ‘에피파네스’라고 불렀습니다. ‘화육(化育)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는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티나를 지배하고 자신에 대한 숭배를 제도화하던 시기인 기원전 2세기 초보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기원전 3세기가 신의 영역에 대한 불신이 생겨난 시기로 봅니다. 그것은 에피파네스의 시대에 제국과 유대 족속 사이에는 군사적 분쟁이 일어났는데, 「파수꾼의 책」은 군사력에 의한 폭력보다는 경제적인 압박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 팔레스티나는 평화로웠습니다. 또한 경제적 발전이 두드러졌습니다. 특히 국제무력이 전례 없이 활발해집니다. 이것은 계층분화를 급속화시켰고, 특히 노동에서 자유로운 소자산가층의 범위를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한데 제국 수도에서 시행되던 대대적인 도서관 건립 과정에서 제국 전역에 서기관의 수효가 크게 늘어나고, 소자산가층에서도 문자 전문가인 서기관이 굉장히 많이 배출됩니다.

팔레스티나에서도 이런 현상은 예외가 아니었고, 바로 그 무렵에 지혜문학들이 활발하게 저술됩니다. 그것은 특히 사회를 보다 광역으로 통합하는 지식체계가 체계화가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지혜운동을 통해 유대적 야훼신앙 사회는 옳고 그름, 아름답고 추함, 현명하고 어리석음 등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한데 동시에 「욥기」나 「전도서」 같은 비판적 지혜들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을 주시하기 바랍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일반적인 지혜의 가르침과는 달리,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경건한 이가 재앙을 겪고, 불의한 이가 풍요를 누리는 사회, 그런 일이 너무나 흔하다는 문제의식이 이들 비판적 지혜의 공감대였습니다.

바로 이런 비판적 지혜가 회자되던 시기에, 묵시적 문서들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묵시적 문서들이 그 부조리함을 제기하는 방식의 하나를 천사의 타락에 관한 「파수꾼의 책」의 해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천사장 아사엘이 ‘신의 비밀’, 특히 야금술을 사람들에게 발설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벌였고, 또 장신구를 만들어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맞물리는 현상입니다. 전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향락을 위한 욕망의 산물입니다. 많은 통치자들이 내걸었던 방어적 전쟁 이데올로기는 명분일 뿐입니다. 욕망은 전쟁을 낳고, 전쟁은 더 강한 욕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전쟁과 욕망의 악순환이 역사를 비극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신의 비밀을 가지게 된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문명사적 원리가 되었습니다. 네피림, 신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한 중간적 존재인 영웅들이 중심에 있고, 모든 인간이 그 원리의 충실한 수행자입니다. 묵시가는 이 문명사적 원리 아래 모든 이들이 자기 파괴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직시합니다. 그 욕망의 질주는 자멸의 질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이는 그것을 종말적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데 그것에 제동을 걸 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천사 아사엘은 심판을 받지만, 그 종말을 되돌이킬 이는 부재합니다. 어느 인간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천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신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재앙 이후 역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뿐입니다. 욕망의 침입은, 그 절정에 이르면 이렇게 환원 불가능한 파멸로 인간을 몰아간다는 것,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 그 욕망의 질주 시대를 맞아 「파수꾼의 책」을 저술한 한 묵시가의 문명비평적 고언입니다.

‘한나라당의 독주에 제동을 건 시민의 승리.’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많은 이들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 역시, 대반전의 스팩터클을 통해 드러난 선거 결과에 고무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난무했던 전화여론조사가 퍼뜨린 위장된 여론의 정치가 얼마나 심각한 맹점을 갖고 있는지를 공부하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시대의 징후가 있습니다. 천안함의 정치, 과학주의의 형식을 빌려 전 세계를 향해 타전된 북한 테러리즘에 대한 폭로의 정치가 뜻밖에도 한국의 시민사회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선거 때마다 등장했던 이른바 ‘북풍’은 무력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하면, 정부가 주도한 천안함의 과학주의적 네러티브가 신냉전주의로 귀결되는 것에 시민사회가 주저한 것이라고 합니다.

한데 나는 시민사회가 북풍에 휘둘리지 않은 것이 과연 신냉전주의에 대한 반대로 인간 것인가에 의문을 품습니다. 즉 이데올로기적 견해 차이가 주된 이유라는 해석에 공감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줄곧 민주화 이후 우리의 시민사회가 과하게 시장화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해 왔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소비사회는 역사적으로 민주화와 겹쳐있고, 이는 민주화가 소비사회적 요소들과 분리할 수 없이 얽히면서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소비사회는 우리를 욕망의 존재로 호출합니다. 그리고 욕망은 우리들 개개인의 사적 취향을 극도로 고양시킵니다. 정부는 국민의 이런 고양된 욕망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썼고, 오히려 욕망을 부추기면서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습니다. 그 맥락에서 민주적 제도화의 과정에 자본의 개입은 너무 강했습니다. 자본은 민주화에 의해 거의 제동되지 않은 채 시민의 영혼 속에 들어와 욕망을 마구 부추겨댑니다.

소비는 급속도로 커졌고, 신용카드의 활성화는 욕망을 소비하는 능력을 크게 진작시켰습니다. 부동산의 거품은 신용카드 부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였고, 동시에 더 엄청난 규모의 채무자의 대열로 우리를 불러 세웁니다.

이때 부채는 개인의 능력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근데 이 개인의 능력이 동시에 재앙이기도 하다는 것을 직시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IMF 재앙은 부채의 공포를 직시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시민사회는 욕망 억제의 전략보다는 분출의 전략을 통해 위기 타개의 비전을 갖도록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부추김 받습니다.

이렇게 부동산 거품을 통한 욕망 분출의 공식은 이제 거의 모든 ‘우리들’의 삶의 전략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이러한 욕망에 의해 달리는 무한궤도의 열차가 되었습니다. 한 사회학자는 어떤 계산법도 이 질주하는 욕망의 열차에 제동을 걸 수 없다는 비관적 진단을 내립니다. 이제 이 열차에 제동을 걸 사회적 주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능력이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재앙 혹은 기적이 있을 뿐......

어쩌면 이번 선거도 그런 해석에서 그다지 벗어나 있지 않다는 해석을 내려야 할지 모릅니다. 시민사회가 선거를 통해 보여준 것은 MB 정부의 토건주의적 행보에 제동을 건 것이 아니라, 신냉전주의적 정치의 호전성이 담고 있는 정치적 불안에 대한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정부의 일방적 토건주의 정치가 오히려 더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대인지도 모릅니다.

해서 나는 MB 정부의 토건주의에 대한 우려 못지 않게 우리 자신의 욕망 분출의 전략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MB의 토건주의를 좌초시키는 데 성공할지라도 우리는 또 다른 ‘MB’를 불러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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