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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위대한 두 진리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 김희헌 옮김 | 동연)

새책 소개

by 제3시대 2010. 12. 27.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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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두 진리』
-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종합

지은이 :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옮긴이 : 김희헌
펴낸날 : 2010년 12월 9일
분  야 : 인문
판  형 : 신국판
페이지 : 264쪽
정  가 : 12,000원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ISBN : 978-89-6447-128-9 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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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아직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와의 화해는 요원하다. 이 책은 과정사상가이며,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과정신학의 계보를 잇는 존 캅의 제자이고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운영했던 지은이의 책이다.

근대 이후 그 골은 더욱 깊어져,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논리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끌어들여서 때때로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그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온 두 전통 모두가 위대한 진리 즉, 보편적 정당성과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왜곡되어 왔으며, 또한 과학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비전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핀은 과학 또는 그것이 정당하게 전제해 온 형태의 자연주의와 기독교 복음이 지닌 본래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 온 기독교 신앙 이 둘 사이에 본래적인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정사상으로 모색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기독교의 본래적인 믿음과 가르침을 유신론적 자연주의로 복원시켜낼 수 있는가? 그리핀이 던진 이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뿐만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지성인에게도 매우 낯선 것이다. 근대 후기(19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된 세계관 즉,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에 맞서 교회는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유신론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 적대적인 관계는 불가피한 것인가? 이 책에서 그리핀은 서구 지성사에서 벌어진 기독교 신앙과 과학/철학과의 관계를 살펴 양자의 애증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관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그리핀은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자신의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을 전개한다. 탁월한 과정사상가인 그리핀에게 이 작업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철학의 핵심적 이상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전통주의적 신학에 익숙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핀의 통합적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렸던 17세기가 지나고, 기독교 신학이 이신론deism으로 굳어져 가던 18세기에 과학과 종교는 갈등과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학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의 파고를 넘기 위해 이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시도한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신학 방법론이 열정의 진실함에서는 의심할 바 없지만 해명의 깊이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만일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기독교 교회는 19세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결코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없는 왜곡된 자연주의(Naturalismsam)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 이후 기독교 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평화로웠던 (17, 18세기적) 과거의 기억(이신론)으로 회귀하여 안전(무신론으로부터의 문단속)을 도모했던 유아론적 시대 역행이다. 이 시대착오적 흐름은 교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재등장한 옛 정신으로서 자기 시대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밖에 없었다. 이 전투적인 정신이 근본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승리할수록, 교회는 시대정신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이탈한 정신은 결코 안전할 수도 없다는 뚜렷한 가르침만 남겼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성을 흡수했지만, 그 방법론(과학적 자연주의의 활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과제를 “독립”시켜, 기독교 신학의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어쩌면 이것은 밀려오는 시대사조에 대한 소심한 대응이요, ‘진정한 진리는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직관을 언어에 담으려고 했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에서 이탈한 현상학적 차이에 대한 호소라고 하겠다.

이안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에서 “갈등”도 “독립”도 “대화”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통합” 모델을 제시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갈등의 독선으로, 독립의 순수만으로, 대화의 열정만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위치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헤쳐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리핀처럼 이안 바버 역시 과정철학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챈 사람들은 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적 사유체계로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목표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정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핀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며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훑어가다 보면 초자연주의에 경도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사고방식이 지닌 편향을 보게 될 것이고, 과학적 자연주의가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겪게 된 변화를 이해할 때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사적 가치와 한계를 알게 될 것이며, 유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리주의적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경험하고 보다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실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오늘 신봉하는 교리보다 훨씬 크다. 책임 있는 기독교 신학은 교리를 단순히 “희화화해서 전복”시키려하지 않고, 교리의 잘못된 기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긍정”을 통해서 전통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갈 것이다. 그리핀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르침primary doctrine”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취해 온 과정신학의 이 전통에 충실하다.

이 책은 그리핀 박사가 은퇴할 무렵에 출판된 것(2004년)으로, 그의 사상적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저술에 비해 비교적 작은 분량으로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핀의 과정신학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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