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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자기의 윤리(II) – “주체여, 다시 한번!”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12. 27.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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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윤리(II) – “주체여, 다시 한번!”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프롤로그: 한국땅에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울화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도덕과 윤리는 늘 재미가 없었다. 회상해보라, <바른생활 (초등학교) -도덕(중학교) -국민윤리(고등학교)>로 이름을 달리하여 불렸던 그 과목들이 얼마나 지루했었나를! 그것은 한국이라는 집단병영(?) 시스템 속에서 독재자들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새마을 운동(박정희)’정의사회 구현(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슬로건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왔다.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유신정권의 국면전환용 구호와 오랜 윤리적 주제였던 정의를 자신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끌어들여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정언명령으로 각색한 제5공화국의 그것은 서구윤리 사상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는 에피쿠르스학파-영국의 경험론-공리주의로 계승되었고, 후자는 스토아학파-대륙의 합리론-칸트로 이어지면서 윤리적 논쟁을 벌여왔음을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 있었던 서구 윤리사상의 발전이라는 장에서 우리는 이미 배웠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전혀 섞일 수 없는 이 두 가지 윤리적 전략을 아우르는 절대적인 음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분단이다. 한국의 분단체제, 반공이데올로기는 수 천 년간 이어져왔던 서로 다른 윤리적 행위의 원칙을 간단히 하나로 화해시켰다. 그리하여 적어도 남한 땅에서 국민윤리란(북한도 마찬가지겠지만) 북과 맞서는 거대한 상징의 체계,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며 엄하게 타이르던 아버지의 권위,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는 금기의 영역으로 등극한다. 어쩌면 한국은 이러한 틀 속에서 집단과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의식의 세례가 거의 무방비적으로 이루어지는, 얼마 전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의 표현대로 야만의 사회이고, 반면 그 이데올로기가 지닌 음모가 놀라우리만큼 약발이 받지 않는 문명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만일, 의식과 집단(체제), 의식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천착했던 푸코가 이렇듯 기이한 한국땅에서 활동했다면 뭐라 말했을까? 이제서야 겨우 본론으로 넘어간다.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드디어, 푸코와 만나다

 

푸코는 1984 5 25,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몇몇 뭉클한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1995년 레비나스가 죽었을 때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영전에서 행한 아듀, 레비나스라는 추모사이다.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둘이었지만 점점 본인 사상의 후반으로 갈수록 레비나스에 다가갔던 데리다였기에 그의 슬픔은 더했다. 레비나스가 죽기 10년 전 푸코가 죽었고, 레비나스를 데리다가 추모하듯, 푸코에 대한 추모는 그의 절친했던 친구인 들뢰즈의 몫이었다. 들뢰즈는 별다른 말없이 푸코가 병상에서 최후로 완성한 성의 역사2권인 <쾌락의 활용>, 3 <자기배려>의 서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간다.   

 

데카르트가 보편적이면서도 무역사적인 코기토적인 주체를 말하고, 칸트가 경험에 주어진 한계를 이성을 통해 묶음으로 선험적 주체의 탄생을 기획했다면, 푸코는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에서 이런 근대적 주체와는 구분된, 그 자신의 독특한 성과이자 사상사의 전개 과정에서 주체논의의 새로운 물꼬를 틀었다고 평가받는 자기 soi/self’ 개념을 기존의 주체 subject’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후 푸코의 자기개념은 지난 호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주체의 죽음이 운운되는 시대속에서 다시금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기를 부여하였다.[각주:1]

 

그래도, 주체는 계속된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 즉 인식주체의 인식대상을 향한 포섭과 간섭에 강한 능력과 권한이 부여되었던 그 시대! 인식주체가 기획한 구성아래 세계 축조의 가능성이 조심스레 예감되던 그 시절! 근대적 인간이란 루카치의 표현대로라면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소설속 주인공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무협지의 단골 내용으로 등장하는, 어렸을 때 원수로부터 부모를 여의고 하인 (어김없이 하인은 도망 중 장렬히 사망하고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약간 흘린다) 등에 업혀 산사로 피신한 주인공(인식주체)과 같다. 그는 산에서 우연히(아니, 필연적으로) 신의 음성을 지닌 스승을 만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경지에 이른 후 터미네이터가 되어 하산한다. 그 후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들(인식대상)을 찾아 하나씩 제거하는 내용이 무협지 후반에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삽입되어야 하는 것이 인정투쟁이다. 원수는 성장하여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주인공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어렸던 네가…! 그때 내가 너를 죽였어야 할 것을분하다!!”, 주인공은 이를 받아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가 아느냐? 내 칼을 받아라!” 노예의 복종(내지 패배)과 주인의 선포(내지 승리)가 만방에 알려지는 순간이다.   

 

위의 무협지 플롯은 근대적 인식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이다.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잠식해가는 과정이 진보이고 획득이며 발전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하에서 객체는 무릎꿇어 인식주체를 향해 패배와 복종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객체는 자연일 수 있고, 식민지 국가일 수 있으며, 당시에는 세상속에 섞여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으나 지금은 사라진 정신병자, 부랑아, 동성애자, 히피들그 밖에 인식주체와는 다른 무리들, 즉 타자라 할 수 있다. 근대는 체제에 의해 타자를 향한 인정투쟁의 거대한 망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다. 그 망을 통과한 자만이 체제안으로 편입되고 망에 걸린 무리들은 버려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푸코의 근대비판은 시작되는데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등으로 대표되는 푸코 초기 계보학적 연구들이 역사적으로 힘과 지식의 역학속에 구성된 주체의 허위를 폭로했던 작업이라면, 성의 역사로 대변되는 푸코의 후기 작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허물이 벗겨져 탈영토화된 주체를 어떤식으로 재영토화 시키는가의 문제, 즉 자기가 자기를 형성하는 방식에 관한 몰두로 그 관심이 바뀌었다. 이를 윤리적 화두로 전환하면, 근대 주체 철학 위에 서있었던 도덕이 보편에 개별을 맞추는 입법의 차원이었고, 그러한 도식속에서 윤리란 그 명법을 내 것으로 끌어당겨서 (자발적, 의식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보편을 향해 투항하게 만드는 그런 주체를 위한 윤리였다. 반면, 푸코의 후기사상에 나타나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보편보다는 개별에 포커스가 있다는 점에서, 칸트류의 의무론적 윤리나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의 도덕과는 사고의 지점도 다르고 전개양상도 판이하다.

 

푸코는 근대 프로젝트 안에 펴져있던 총체적 난맥의 첫 단추를 주체규명에서부터 찾았고, 이런 이유에서 주체대신 자기를 제안한다. ‘자기라는 말은 기존의 철학에서 말해왔던 주체개념과는 다른, 자기의 욕망(혹은 본색)이 더 충실히 반영된, 즉 체제가 선사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기름이 빠진 주체라 할 수 있다.[각주:2] 비록 근대적 주체는 사망했지만, ‘자기라는 이름이 부여된 새로운 주체가 등장한 셈이다. 이는 데카르트이래 등장한 근대적 주체가 절대적 주체로 등극한 이래 한차례도 흔들리지 않았던 서구 주체중심의 철학에 대한 의식적이고도 악의(?)적인 반동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고대 그리스로!

 

서구 현대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 많은 경우 고대 그리스를 향해 회귀한다는 점이다. 마치 교회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를 외치는 듯 말이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그랬다. 서구 형이상학에 대해 평하면서 존재망각의 역사였다고 비판하던 하이데거가 내세운 전략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의 귀환이었다. 이는 근원적 존재체험과 기원에 대한에 여전한 미련과 애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 안에 깃들어있는 사상적 혹은 미적 보수성을 엿볼 수 있다.[각주:3]

 

푸코 역시 자기의식의 단초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끌어온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문제제기 후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고대그리스의 존재체험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던 하이데거와는 달리,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를 오히려 고대그리스의 존재 체험에 기대어 전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자는 확연히 구분된다.[각주:4]

 

고대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선함이란 착함보다는 좋음이었다. 즉 내게 쾌를 선사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내게 불쾌를 선사하는 것은 악한것이다.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쾌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정신적인 영역까지를 포함한 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 했을 때 이는 전적으로 좋음을 의식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푸코가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적인 좋음을 다시 현대의 윤리적 테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어떤 보편과 규범에 의해 개인이 함몰되지 않고, 자기가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의 추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에게 있어 윤리란 미학적 성격을 띤다.[각주:5] 전통적 의미에서 미적 판단력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받아 예술작품 안에 스며있는 이데아의 순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방(복사)의 정도가 정교할수록 진품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현대 미학에서는 미적 주체와 미적 대상간의 일치라는 전통적인 미에 대한 의식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데아가 지닌 아우라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감동, 새로운 가치 창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푸코는 이러한 현대 미학의 패러다임을 그의 윤리학으로 초대한다.

 

에필로그: 결국, 자기의 윤리란?

 

윤리학은 자고로 본질주의와 토대주의에 입각해 이데아를 상정한 후 윤리적으로 그 본질에 따라 사는 삶을 안내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윤리학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생성으로 보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시간의 경과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동일성안으로 들어온 창조와 변화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성과 창조의 과정속에서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의 도덕을 어느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윤리를 보편성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설득과 대화와 연대의 과정 모두가 윤리학의 범주가 된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윤리학이 등장한 셈이고, 이에 대한 발전과 도전과 응전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자기에 대한 실천에 있어 그 실천의 주된 목표는 자기와의 관계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로의) 전환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이동을 뜻한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4-65. [본문으로]
  2. “자기체험은 단순히 통제된 힘이나 언제나 반항할 준비가 된 힘에 대한 지배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기쁨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자신의 현 모습에 만족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다.”-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66. [본문으로]
  3. 하이데거가 걸어갔던 그리스전통에로의 복귀에 대한 부분은 2009년 9월 25일 웹진에 게재되었던 졸고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3)”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119)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성의 역사』 2권과 3권은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도덕을 다루면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시도하는데, 특별히 자기이해와 고대 그리스와의 연관에 주목하려면 아래 부분에 주목하기를: Michel. Foucault, 『The Care of the Self - Vol 3 of The History of Sexuality』, Translate by Robert Hurly. (New York: Pantheon Books, 1986), 57이하. [본문으로]
  5. “왜 우리의 삶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가? 사물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왜 그렇지 못하는가?” - Michel. Foucau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An Overview of Work in Progress’ in 『The Foucault Reader』, Edited by Paul Rabinow. (New York: Pantheon Books, 1984), 3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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