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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옷에 대하여 (강창헌)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09. 3. 19.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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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 대하여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 사무국장)


성직자나 수도자가 그 신분을 버리고 세칭 ‘환속’했을 때, 우리는 보통 “옷을 벗었다.”는 표현을 쓴다. 어디 성직자나 수도자만 ‘옷’을 입고 벗겠는가마는, 어떻든 이 표현에는 성직이나 수도직이 하나의 ‘옷’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사실 우리도 옷을 단순히 입을 거리로만 인식하기보다는 지위를 나타내거나 멋을 표현한다고 여기기에 기왕이면 ‘좋은 옷’을 입으려고 한다. 좋은 옷이 어떤 옷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그것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아마도 자기에게 맞는 옷인가 하는 것일 게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알몸의 상태로 와서 자기에게 맞는 ‘옷’을 찾는 과정이며, 종국에는 그 옷의 주인인 육신이라는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좋은 옷에 열광하는, 이른바 문명사회일수록 동시에 알몸에도 환장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좋은 옷’이라는 포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반영일 것이다. 옷은 아무리 좋아봐야 옷일 뿐이며,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그것은 언젠가 벗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옷을 위해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 옷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옷의 기원과 종착지는 알몸이다.

오늘날에는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입는 옷 속에서 청빈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알다시피 그들의 옷이 가리키는 바는 겸허함과 가난이었다. 천주교 사제들이 입는 검은 수단은 자신의 봉헌과 죽음을 의미하며, 수도자들의 수도복에는 청빈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사정은 불교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스님들이 입는 가사는 본래가 똥걸레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옷을 입다가 떨어지면 기워 입고, 그 다음에 걸레로 사용하다가 더 이상 걸레로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똥을 닦아서 버렸는데, 초기 수행자들이 그런 것을 주워서 기워 입었던 게 가사이다. 역설적이지만, 몇 십 만원을 호가한다는 가사는 본래 무소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보면, 아무래도 오늘날 종교인들이 입는 옷은 종교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고 포장해버리는 기득권자들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만 같다. 종교인들의 옷에서 묻어나는 어떤 특권이나 차별성은 종교의 타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는데, 종교인들의 옷만큼 “존재를 배반한 삶”을 잘 보여주는 예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기는 그렇게 비싼 옷을 걸치고 있으니 옷을 벗어 알몸으로 세상과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거룩한 장소에서만이 아니라, 예토(穢土)에서도 ‘신발’을 벗는 겸허한 종교인을 만나기란 이제 영영 틀려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김수환 추기경이 육신의 옷을 벗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명동성당과 추기경이 묻힌 성직자 묘지에는 그를 추모하는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추기경을 따라서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한 사람이 급격히 늘었고, 천주교회의 예비자들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국장을 방불케 했던 추기경의 장례식에 이어 엄청난 추모예식과 그에 따른 천주교회의 ‘성공’ 소식을 접하고 있자니, 천주교 신자로서 불편한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추기경에 대한 평가는 역사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그를 추도하는 방식이 꼭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인의 ‘옷’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예의는 과연 지켜질 수 있는 것인가?

정황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기념은 용산 철거민들이 당한 죽임을 덮는 데 크게 작용했다. 기념은 죽임을 상당부분 은폐시켜 주었다. 천주교회가 추기경의 죽음을 통해서 좋은 이미지를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장례를 성공적으로 조성해가면서, 그리고 그의 죽음을 이용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용산참사를 제거하려는 시도들 앞에서, 용산에서 희생된 철거민들은 점점 빠르게 잊혀져갔다. 초호화판 거대 신전을 짓기에 앞서 정부와 토건재벌과 용역깡패가 철거민을 상대로 벌인 우발적(?) 희생제의는 너무도 쉽게 망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러한 기념과 망각을 통해서 이득을 보는 이들은 누구일 것인가? 그들은 장례식에서 예를 갖춘 다음 뒤돌아 나와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다.

추기경은 박정희의 장례식장에서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남겼다고 한다. 이 기도문은 추기경 자신을 포함해 ‘옷’을 걸치고 살다가 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기도이다. 우리도 그를 따라서, “이제 추기경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알몸’으로 주님 앞에 선 김수환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드릴 수 있을 것이다. 추기경과 용산에서 죽임을 당한 철거민들은 이제 옷을 벗고 알몸으로 그분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알몸으로 그분 앞에 서 있는 그들의 마음, 우리의 가련한 마음은 아마도 시인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
이 시간의 물결 위
잠 못들어
뒤채이고 있는
병 앓고 있는 사람들의

그 아픔만이
절대한 거.” (신동엽의 금강 중에서)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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