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서구신학을 쏘다
자기의 윤리 vs. 타자의 윤리
‘자기의 윤리학’으로 세상의 눈물과 회한을 닦을 수 있을까? 레비나스의 의심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개인을 그 규범에 종속시키려했던 기존의 윤리에 맞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이 ‘자기의 윤리학’을 전개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그의 시도는 근대적 주체가 지녔던 자율성(autonomism)에 반하는 타율성(heteronomism)의 추구라 할 수 있다. 1
윤리는 그동안 세상의 억압과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자율적 주체의 윤리적 행위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타자의 윤리학은 그 주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가 작동된다고 주장한다. 니체류의 윤리학이 서구 형이상학이 시도했던 초월에 반대하여 자기 안으로의 내재를 전략적 도구로 취했다면, 레비나스는 오히려 서구 형이상학의 초월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적 해석과 실천으로 그것이 지녔던 병폐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즉, 초월적 세계 저편에 있는 타자를 통해 바로 이곳에 있는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이곳의 문제를 다시 바라본 것이다. 이때의 타자란 레비나스에 의하면 억압받고 소외된 경계 밖의 사람들이다. 2
결론과도 같은 서론으로 ‘자기의 윤리’와 ‘타자의 윤리’간의 굵직한 논쟁거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윤리와 다른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윤리의 쟁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로젠츠바이크로 대표되는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번 웹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 다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통적인 레비나스 연구의 경향을 따르지도, 레비나스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도 지양할 것이다. 그보다는 레비나스의 서구형이상학을 향한 비판, 신학이 어떻게 악(고통)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추적, 그 고리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렸던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본회퍼의 타자론 간의 비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자의 윤리가 기독교 윤리학 안에서 차지하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예단하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전체적 그림이다.
그 전에 일종의 워밍업 차원에서 지난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라깡의 사유와 레비나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는 서구 전체성을 비판하는 레비나스가 지닌 비난의 탄착군이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와 라깡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 시기였다. 계몽이성의 빛은 몽매한 중세의 두터운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고, 인류에게 번영과 진보를 약속하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른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이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주체와 객체로 분류하고 주체로 하여금 대상을 지배하게 하는 논리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 주체와 객체간의 간극은 헤겔에 의하면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절대정신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형이상학이 지녔던 주술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를 서양철학이 걸어온 ‘전체성의 향수’ 라 지적하고, 개인들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제거하는 폭력적인 개념이라 비판하면서, 3 홀로코스트를 서양철학의 전체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지목한다. 4
우리는 지난 호 웹진에서 라깡에게 있어 타자가 상징계 속의 타자와 실재계 속 타자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았고, 상징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 실재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과 구분하여 향유라고 불렀음을 기억한다. 라깡적으로 해석하면 홀로코스트는 전체성의 철학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창조하겠다던 현실의 기표와 욕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재였는지가 확인되었던 순간이, 이성의 법칙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실재계속 대상소타자가 우리에게 불쑥 다가 온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이렇듯, 라깡이 말하는 타자성의 진면목은 상징계속 타자에 갇히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레비나스의 표현대로라면 동일성의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연기되면서 미끄러져가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볼 때, 라깡이 말하는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기존의 서양철학의 전체성으로 타자를 포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양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서구 전체성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두 사람은 일정 부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구체적 분석 틀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레비나스와 라깡은 공히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등장하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전유와 배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일성의 폭력안으로 말려들어가지 않는 타자를 다시 정초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양자는 길을 달리한다. 라깡이 의미의 결정을 계속 연기시키며 미끄러져가는 타자를 상정함으로 전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반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급격한 초월, 즉 계시의 단계까지 끌어올림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전체성과의 과격한 분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 본격적으로 레비나스의 전체성 비판, 특별히 서구 기독교가 어떻게 그것의 옹호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서구신학은 어떻게 전체성을 옹호하였나?
신정론(Theodicy, 神正論)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근대적 이성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타자를 향한 동일성의 폭력을 정당화한 사례라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정론은 인간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타자들(죽음, 고통, 악)을 신앙의 동일성안으로 끌어들였던 또다른 폭력이었다고 레비나스는 평가한다. 5
돌이켜보면 서구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에 있어 각 시대마다 다른 해법이 있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정론적인 전제로 묶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제도화 과정에서부터 중세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계시신학,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중세신학을 완성한 스콜라철학은 자연의 조화를 인식함으로써 신에 이를 수 있다는 자연신학을 낳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스콜라적인 신학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신에 이르는 ‘십자가 신학’을 모토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다시 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을 추방시켰다면, 칸트는 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제외시켜 물자체의 영역으로 등극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양자는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거울단계’에서 엄마와 아이가 상상적 양자합을 이루는 것과 같이 서로에 기대고 있다. 하나는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내재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수 있겠지만 ‘궁극적 실재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틸리히)’ 이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서로의 거울이며 그림자이다. 헤겔은 이런 해묵은 종교 갈등을 ‘세계는 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이라는 말로 통합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치열하게 신론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고난과 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양자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범박하게 표현하면, 신의 섭리와 은총 안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주장과 신이 우리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간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정점에는 공히 십자가신학이 있다. 어쩌면 십자가 신학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악의문제를 신앙인들이 직면할 때 마다 그 사건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준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6
레비나스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등 총체성에 입각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목도한 후, 고통의 신학화를 통해 이루어낸 고난의 유의미성, 절대정신으로 나가기 위한 발전단계로서의 고난, 신적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되는 고난에 대한 낙관적 해석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한다. 만일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신정론이 현재의 고난을 미래의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고난을 신앙적으로 무마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맑스의 종교 폄하발언, 즉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 다음 호 웹진에서 레비나스 사상을 대변하는 키워드인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과 ‘타자의 얼굴’을 고찰함으로써 서구신학 내지 서구윤리에 대한 반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7
ⓒ 웹진 <제3시대>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