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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I): '빗금 그어진 주체($)' 안에 숨겨진 함의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2. 10. 2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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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
: ‘빗금 그어진 주체($)’ 안에 숨겨진 함의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프롤로그:  지젝 연재를 시작하며

소원을 말해봐 니 마음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 봐
니 머리에 있는 이상형을 그려봐 그리고 나를 봐.
난 너의 지니야 꿈이야 지니야~
<중략>
I'm Genie for you, boy!
I'm Genie for your wish!
I'm Genie for your dream!
I'm Genie for your world!

소녀시대가 부른 ‘소원을 말해 봐’의 노래가사 중 일부다. 9명의 소녀시대 멤버들이 내게로 와 소원을 말해보라고 속삭인다. 실제로 그녀들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노래가사처럼 램프에 숨어있던 지니가 ‘뽕’하고 나타나 나의 모든 쾌(快)를 만족시켜 준다면? 아마도 미쳐 터져버리지 않을까?
실제로 그 소원을 끝까지 밀어부쳐 실행한 사람이 있었다. Sadism의 어원이 된 사드(Sade)가 바로 그다. 사드는 칸트와 동시대 인물이다. 하나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타당한 입법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설파했던 엄숙한 성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우리의 쾌락의 도구로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우리 행동의 보편적인 준칙으로 삼자”[각주:1]고 주장했던 가학적 성 도착증환자 취급을 받는 자다. 라깡은 이 둘을 교차시키면서 정신분석학의 윤리를 정초하려 했고,[각주:2] 이는 현재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로 이어져 ‘실재의 윤리’로 각색된 채 인문학 전 분야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각주:3]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지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재될 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재의 윤리’[각주:4]가 무엇이고, 왜 그것이 이 시기에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지젝으로 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신학함과 어떻게 다른지? 에 대한 신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라깡과 지젝을 지날 때 만나게 되는 몇 가지 용어와 개념에 대한 정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각주:5] 특별히, 라깡과 지젝간의 이론적 접점이라 할 수 있는 실재(the Real)를 규명하는 일이 그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각주:6] 라깡-지젝에게 있어 실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말하는 ‘the Real’이 사상사의 흐름속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실재, 즉 궁극적 진리, 만물의 원인, 혹은 모든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그 ‘실재’와는 의미와 위치가 전혀 다른 새로운 실재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획득된 실재로부터 주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시작되고, 욕망에 대한 시각은 교정된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지젝 사상의 밑그림이라 평가받는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Y: Verso, 1989)中 Ch3 ‘Che Vuoi(케보이)?’에 나와있는 라깡의 악명높은 욕망그래프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먼저 살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성취된 지젝식 주체, 욕망, 실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필자는, 이 글이 진짜로 노리는 지젝식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신학이 지닌 함의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예상했겠지만) 앞으로 쓰게 될 원고들의 대부분은 지젝의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각주로 채워진다. ‘이론을 어떻게, 얼마만큼, 어느 정도의 깊이로 글에 투여해야 할런지?’ 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이론에 함몰되어서도 안되지만, 이론에 쫄아서도 안된다. 이론은 혈액세포로 따지면 체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 제거를 담당하는 적혈구와도 같다. 산소를 원할히 공급하여 세포의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쓸데없는 분비물을 제거해 신체리듬을 원할히 유지하게 하는 적혈구처럼, 이론은 글의 과잉과 부하를 조절하고 글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한국처럼 이론의 유행이 급격하게 변하는 학문풍토 속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한 천착은 근본주의 혹은 교조주의라는 불명예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론에 안착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지적일 수는 있어도, 이론을 넘어 횡단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단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지젝 전공자도 아니고, 지젝을 따로 시간을 내어 심도있게 공부한 연구자도 아니다. 단지, 지젝이라는 소문에 귀가 솔깃해 있는 정도의 수준이랄까. 그러기에 지젝을 읽어나가면서 많은 오독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끔한 질책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바라기는 지젝에 대한 글을 앞으로 웹진을 통해 연재하면서 현재 지젝이라는 소문에만 의지하고 있는 내 지식의 얄팍함이 지젝을 직접보고 대화하는 경지로까지 고양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너무 큰 꿈을 꾸나? 어쨌든… Are you ready?  

케보이(Che Vuoi): “소원을 말해 봐!”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워밍업 차원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소녀시대의 ‘케보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케보이’는 주체의 대타자[각주:7]를 향한 질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소녀시대의 열혈팬클럽 회원이다. 소녀시대라는 확고한 대타자가 제공하는 질서속에서 쾌락을 누리고 있던 나는, 어느 날 은밀하게 다가와 ‘소원을 말해 봐!’를 속삭이는 소녀시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후 묘한 충동과 고민에 빠진다. 나는 그 동안 대타자 소녀시대의 명령과 바램에 순종하고 부응해왔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뭐가 부족했었나? 내가 그녀들의 바램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녀들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그럼,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욕망해야 되는 걸까?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주체는 상징계의 질서안으로 편입되던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무의식을 떠올리고, 억제되고 차압당했던 본능을 다시 되살린다. 사실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되기 위해 나는 팬클럽 규정을 잘 준수했어야 했다. 사진을 찍을 때 다정한 포즈를 취할 수는 있지만, 너무 몸을 밀착한다거나 과도한(섹슈얼한) 애정표현은 자제했어야 했다. 개인 홈페이지에 따뜻한 응원의 말은 올릴 수 있지만,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발언은 삼가한다. 그녀들의 숙소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릴 수는 있지만, 스토커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저 대타자 소녀시대는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그 법칙을 인정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소녀시대의 팬클럽이 될 수 있었다. 소녀시대를 브라운관에서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짜릿함과 뭔가 설명할 수 없었던 꿈틀거림을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대타자 소녀시대를 더 가까이서 합법적으로 품기 위해 나는 애초 그 욕동의 일정부분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소녀시대 팬클럽 회원이라는 상징계의 질서 안으로 편입하기 위해 거세당해야 했던 나의 본심들(?)이 ‘소원을 말해 봐’라고 속삭이는 그녀들의 음성을 들으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What does this mean? 이 지점이 바로 라깡의 유명한 욕망이론이 펼쳐지는 진원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제, 악명 높은 라깡의 욕망그래프로 가야 할 시간이다.[각주:8]
진짜로, Are you ready?

빗금 그어진 주체($) 曰: “나는 지난 여름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일단,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라깡의 주체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이성의 능력으로 모든 우주의 법칙을 관조하는 근대적 주체와는 달리 분열되어 있고 균열이 많은 주체이다. 특별히 라깡에게 있어 주체의 문제는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익혀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상징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제시하는 규범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고, 대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대타자의 욕망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주체는 상상계의 유아에서 상징계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태초의 본능과 욕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상징계의 질서가 부과하는, 즉 대타자의 욕망을 내면화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어떤 면에서는 훼손당한 존재다.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를 ‘빗금 그어진 주체($)’로 라깡은 표기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라깡의 욕망그래프는 이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주체가 사후적으로 탄생한다는 말이다.[각주:9] 이 부분에서 설명이 좀 필요한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속류 히치콕 영화 혹은 스릴러, 잔혹 복수극, 여성주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패턴이 하나 있다. 극 중 어느 특정 장소에서 현재에서 과거로 오버랩 되는 경우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길을 가다 갑자기 무엇인가 필요해서, 혹은 갑자기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문방구(or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그 점방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찾으며 가게 안을 두리번 거리는데 갑자기 몸이 떨려오고 가슴이 급하게 뛰기 시작한다. 순간 주인공은 정신을 잃고, 화면은 급하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20년 전 혹은 30년 전 그 문방구(가게)로 카메라는 시간이동을 한다. 주인공의 어렸을 때로 오버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5~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똑같이 그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씬이 나오고, 물론 그 여자아이는 주인공의 어렸을 때를 상징한다. 그 여자아이가 물건을 찾고 있는 사이 주인 아저씨가 가게 문을 닫고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주인 아저씨는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주면서 인형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인형을 공짜로 받은 여자아이는 기뻐서 아저씨와 함께 인형놀이를 신나게 하는데…아저씨가 인형 옷을 하나씩 벗기더니 자기 옷도 벗고 내 옷도 벗긴다. 아저씨는 인형을 만지고 나서 그 아이 몸도 만진다. 그때 아이는 ‘어, 뭔가 수상한데…이 아저씨가 왜 이러지?’라고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인형놀이를 하는 것이니까~’라는 방어기재를 작동하여 그 순간을 덮고 넘어간다. 문방구 사건 이후 20년, 30년이 흘러 성인이 된 주인공이 그 사건에 대한 혐의를 발견하면서 영화는 긴장과 반전을 거듭하며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너무나 우리들이 많이 봐 왔던 영화 속 한 장면이다. 위의 기사는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욕망 그래프 I: “주체는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Graph I>[각주:10]

위의 그래프는 라깡 Graph I이다. S에서 S’로 이어지는 벡터는 기표(ex. 말, 목소리)의 진행과정을, △ 에서 $로 이어지는 연쇄는 주체의 진행과정을 상징한다.  S-->S’벡터와 △--> $ 벡터
가 만나는 접점을 편의상 A, B라고 했을 때, S쪽과 가까운 접점을 B, S’쪽과 가까운 접점을 A라고 하자. 성인이 된 주인공이 문방구에 들어가 공포를 느끼는 지점은 B이고, 어린 주인공이 가게 아저씨와 인형놀이를 하면서 성추행을 당한 지점은 A이다. A(억압된 것, 어린 주인공이 당한 성추행 사건)가 원인이고 B(성인이 된 주인공이 뒤 늦게 어렸을 적 사건의 의미를 깨닫는 것)가 증상으로서 A의 효과라면, 아래 그래프 I은 원인(A)을 선행하는 효과(B)를 나타낸다.[각주:11] 즉 주체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A)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주체는(B) ‘빗금 그어진 주체($)’로 남겨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리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이미 완성된 채 계속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무엇인데, 여태까지 내게 알려지지 않았던(모르고 있었던) 그 진리가 어느 날 문득 내게 다가왔다”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진리란 원래 과거에 그 차제로서는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시간이 흘러 미래의 어느 시점인 현재에서 소급적으로 진리는 주체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이고,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구성한 그 주체는 과거에 사건을 맞딱드렸던 애초의 주체와는 다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이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라깡의 Graph I은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체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말은 주체란 언어적,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빗금 그어진 주체’($)로 등장한다는 말이고, 그 주체에서부터 모든 사건은 다시 출발되고 다시 해석된다. 이 말은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라깡이 인용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발언: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각주:12]를 상기시킨다.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그 동안 배제되어 왔고, 잊혀져 왔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영화 속 장면처럼 한 여인이 어렸을 때 문방구 아저씨로부터 당했던 성추행일 수도 있고, 남자아이들의 경우 성장기에 학교(or 동네)형들에게 끌려가 금품을 갈취 당하고 집단구타 당한 후에,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삥 뜨기고 돌림빵 당한 후에, 무릅이 꿇려 복종을 강요당해야 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모든 억압되었던 것들은 귀환한다’고 했다지? 억압되었던 것의 부활은 위의 예에서처럼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 억압의 차원도 마찬가지다.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살육은 아무리 집권자들이 숨기고 감추려 했어도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를 쏟게 했다. 아니,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 정권들어 용산에서 혹은 쌍용차에서 불타 떨어진 사람들의 넋들은 다시 우리사회로 증환이 되고 예언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역사는 이 사실을 계속 증언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아픔뿐일지도…. 그것이 이 어두움을 건너 우리를 해방케 하리라’를 읊조렸던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당했던 개인적, 집단적 억압이 끝까지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곳을 찍고 와야 한다. 그 자리로 돌아가 그것들과 대면한 후, ‘그때는 내가 어리고 약하고 무지하여 당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비웃어 주고 그곳을 유유히 빠져 나와야 한다. 물론, 그 주체는 애석하게도 에덴에서 지녔던 태초의 순수함와 충만함을 상실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 주체, 즉 ‘빗금 그어진 주체들’에 의해 시간은 계속 이어지고 역사는 다시 쓰여진다. 이것이 바로 라깡의 욕망그래프가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다. (계속)

P.S 다음 웹진에서는 ‘빗금 그어진 주체’로부터 시작되는 라깡의 욕망그래프 II에 나와있는 상상적 동일시, 상징적 동일시에 대해 알아보고, 그래프 III에 나오는 ‘케보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Let us take as the universal maxim of our conduct the right to enjoy any other person whatsoever as the instrument of our pleasure.”-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9. [본문으로]
  2. 라깡 세미나 7권 <Ethics of Psychoanlysis>(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와 라깡 <Ecrits>trans. Bruce Fink (New York: W.W. Norton, 2006)중 ‘Kant avec Sade 사드와 함께 칸트’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3. 포스트모더니즘 윤리학의 세가지 경향 (자기의 윤리-타자의 윤리-실재의 윤리)에 대한 논의는 졸고 <탈경계의 신학>(동연, 2012)중 ‘포스트모던 윤리의 지형’(140-143쪽)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본격적으로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에 입각한 ‘실재의 윤리’를 선보인 책은 주판치치에 의해 2000년에 출판된 Ethics of the Real (NY: Verso, 2000)이다. 지젝은 이 책의 서문에 참여하였고, 본인의 독일어 저작인 Die politische Suspension des ethisch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5)에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5. 지젝을 구성하는 이론적 층위는 크게 세가지라 볼 수 있다. 맑스-레닌으로 이어지는 꼼뮨주의, 칸트-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 전통, 그리고 라깡주의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라깡을 경유한 지젝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6. 흔히 라깡의 사상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젝은 라깡 후기 사상인 실재(계)와 욕망에 집중하고 있고. 하지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구분이 두부모 자르듯 선명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얽히고 중첩되고 겹쳐있다. 그러므로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연속적인 한 스펙트럼 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난 웹진 33호(2011년 3월)에 실린 ‘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웹진 34호(2011년 4월)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웹진 35호(2011년 5월)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 기사가 라깡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7. 대타자(the big Other)에 대해 지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타자는 주관적 전제라는 위상속에서 비실체적, 혹은 문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며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대타자는 주체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깡>, 박정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21쪽. 결국, 지젝에게 있어 대타자는 실체가 아니라 가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대타자가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식 대타자의 명령은 한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법칙이다. 마치 그것이 실제하는 것 처럼 우리는 행동한다. 그래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명박이 아무리 개판으로 나라를 망쳐놔도 나랏님이기에 감히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우리는 뷸효자, 배은망덕한 제자, 그리고 종북좌파 빨갱이가 되고 만다.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살기 피곤해 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군사부일체’라는 텅 비어있지만, 상징적 세계에서 실질적 힘으로 작동하는 대타자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으로]
  8. <에크리> 마지막 부분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서 라깡은 4회에 걸쳐 그래프를 그려나가면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한다. Graph I 은 정신분석학에서 진실이 어떻게 소급적으로 구성되는지? 에 대한 기본문법을 언어학(ex. 기표와 기표의 관계)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Graph II 는 완성된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부분이고, graph III는 케보이, 즉 상징계 속에서 안주 못하는 주체와 그 과정에서 밝혀진 대타자의 비밀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깡은 graph IV에서 본인의 욕망이론을 완성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9. “The effect of meaning is always produced backwards, après coup.”-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101 [본문으로]
  10. Ibid.,101. [본문으로]
  11. Ibid.,56-57. [본문으로]
  12. “Wo es war, soll Ich warden (Where is was, I am to become)….That ‘I’ which is supposed to come to be where ‘it’ was, and which analysis has taught us to evaluate, is nothing more than that whose root we already found in the ‘I’ which asks itself what it wants.”- Jacque Lacan, The Seminar of Jacques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Vol. Book VII)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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