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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바울신학가이드10] 바울과 종말론 II - 바울과 신비주의 II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4. 9. 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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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0]

 바울과 종말론

바울과 신비주의 II (슈바이처의 바울신학)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나?

    지난 웹진에서 바울의 구원론(또는 칭의론)을 논함에 있어서 종말론적 긴장을 빼고서는 또는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신학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과 바울의 율법론을 논할 것이다. 슈바이처는 종말론적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현대 바울의 구원론을 수정하고 있다.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나타나있는 선택받은 자의 구할 것들이 있다. 일용할 양식(주의 만찬과 연관), 죄를 사함(세례, 구속), 유혹에서 벗어남(환난을 피함), 악에서 구원(종말론적 구원) 등이 그것이다. 여기 짧은 주기도문 안에 구원에 관한 4가지의 요소들이 함께 나옴을 볼 수 있다.[각주:1]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눈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는 필수적인데, 하나는 예수가 선택 받은 자들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새로운 시대를 지배할 메시아여야 한다. 원래 묵시문학에는 속죄적 능력은 메시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보다는 선택 받은 자들의 믿음에 달려 있었다. 이는 제사전통과 예언전통 (특히 이사야서)의 대속적 제사장으로서의 모습에 메시아를 종합할 때 가능한 것이었고, 바울은 이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각주:2] 문제는 임박한 종말의 시대가 지연됨에 따라 원래는 “한 쌍이었던 속죄적 죽음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위한 죽음의 의미가 갈라지게 된 것이다.”(62) 

    그러므로 바울에게 속죄적 죽음에 대한 전승과 메시아니즘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속죄적 죽음은 이후 칭의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메시아니즘 또한 케노시스(자기비하: 자기를 비움)기독론 등으로 구체적인 윤리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각주:3] 하지만 속죄적 죽음의 기본적인 배경에는 종말사상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종말의 시대가 오면 하나님은 심부름꾼들에게 맡긴 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그 종말의 선언에는 유대의 율법 또한 포함되어 있다.(갈 4:1-11) 그러므로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 된다는 뜻은 이미 끝나버린 세계의 군주에게 복종한다는 뜻이 된다. 즉,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바울이 율법을 반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슈바이처는 주장한다. 여기에서 슈바이처는 그 이후에 칭의론 논쟁을 낳았던 바울의 율법폐기론이나 새관점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간다. E.P. 샌더스, 제임스 던, 톰 라이트가 바울의 율법관이 율법적 공로주의가 아니라 계약적 율법주의라 보고 바울이 공격한 것이 유대 민족의 민족적 우월감이라거나, 선교적 전략이라거나, 전혀 다른 종교적 운동이라 함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바울신학의 종말론적 긴장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고 본다. 율법의 시대는 선택 받은 자들에게는 끝이 났다. 그러나 그 효과는 지속된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의 메시아 등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울이 때로는 율법을 호되게 비판하고, 때로는 그 유용성을 인정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이유도 율법이 가지는 종말론적 긴장 때문인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는 율법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폐기론의 의미는 율법의 완전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보다 더 강한 자 곧 예수 앞에서 율법의 지배는 힘을 잃어 버림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율법아래 있는 인간이 있고, 그보다 더 강한 자의 권세아래 있는 자가 있다. (막 3:27) 하지만 이 종말론적 긴장을 엿가락처럼 늘여버리면 율법은 마치 좀비처럼 남아서 움직이는 죽은 자로써 남게 되고, 재림하지 않는 메시아의 자리를 하나님이 직접 채우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바울의 율법관이 헬라의 이원론적 영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말한다.[각주:4] 연약한 인간은 늘어진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달콤한 지혜의 열매를 먹고 육체가 없고 영만이 숨쉬는 삶을 살수 있다고 믿게 된다. 

    율법을 벗어버린 상태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더 강한 자 메시아에게 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메시아의 재림에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럼 그 빈 공간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어떻게 인간은 자신이 메시아 재림 시에 구원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율법없이, 유대교라는 테두리 없이. 슈바이처의 결론만 미리 말하자면 오직 하나다. Being-in-Christ. 이전 웹진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메시아 왕국으로 나아가는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세례로부터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 안에 (Being-in-Christ) 거하게 되는데 이는 율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문제는 바울이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 어떤 율법적인 언사도 쓸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율법은 필연적으로 행위(doing)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된다. 율법은 이러 저러 하게 하라는 법률을 통하여 공동체를 몸과 삶으로 느끼게 한다. 종말론적 공동체는 옛 시대 속에 불현듯 나타난 새로운 시대를 보는 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합일의 신비이다. 그래서 바울은 행함(Doing)의 반대말인 믿음(believ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각주:5] 가장 큰 이유는 히브리 성서(구약성서)에 이미 그 예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창 15, 하박국 2장 4절- 의인은 믿음으로 인해 살리라.) 문제는 여기서 믿음(faith)이 의(righteousness)를 얻는 길로써 오해되므로 구원이 마치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사건으로 오해될 때 일어난다. (219)

   어린 시절 주일학교로부터 우리는  ‘구원은 하나님의 것’이라든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의를 얻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면 흔히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토록 혼동되는 ‘믿음’이라는 표현, 과연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공로주의인가? 아니면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순수한 의식적 상태일까? 슈바이처는 이를 단지 바울이 율법적 표현을 피하기 위해 쓴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각주:6] 종말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는 메시아로써 세상에 왔다.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불현듯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부활한다. 바울은 부활의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의미를 고찰한다. 바로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 죽음이므로 속죄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고 죽음과 부활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구원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부활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근본적인 속죄와 칭의가 예수가 새로운 육체로 부활했음에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육체는 죄와 사망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법의 영역에 속하여 있으므로 진정한 의로움과 구원의 가능성이 예수의 부활에 의하여 명확해졌다. 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목표로 한 것이다.[각주:7] 슈바이처가 바울에게 예수의 죽음의 속죄적 효과를 믿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의 공동체가 예수가 걸었던 희생을 내면화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믿음이 행위로 구현되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라 슈바이처는 말한다.[각주:8] 그러나 이러한 칭의론은 바울의 신비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일 뿐 그 뿌리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바울에게 칭의론은 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의 지지 논리 (Support Statements)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각주:9] 필자는 이에 동의하는데, 제임스 던이나 톰 라이트 등도 바울의 칭의론이 바울의 서신에서 율법적 칭의를 반박하는 데에 사용될 뿐, 그의 신학의 중심이라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칭의에 대한 슈바이처의 결론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바울은 유대주의 전통에 따라 예수의 죽음이 대속의 효과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 육의 지배를 벗어나 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아니라 Being-In-Christ가 바로 구원과 칭의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육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데에 있다. 거룩한 율법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동시에 유대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이미 율법이전에 존재하면서 율법 안에 숨겨져 있는 단어인 ‘믿음’이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이른바 율법주의적 종교를 비판적으로 수용/극복했다는 것이다.[각주:10] 슈바이처는 바울이 논리적 구원론을 쓰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의 신학의 정수가 종말론과 신비주의인데 이를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에게 ‘믿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앙의 자세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각주:11] 비극은 바울의 믿음을 개인적이고도 독립적인 것으로 바꾸어 칭의론을 구성한 데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한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주고받는 거래처럼 그려진다.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순수한 영적 거래와 같은 논리가 오히려 공동체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바울의 신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슈바이처는 비판한다.[각주:12]

   

바울신학의 쟁점과 현대적 의미

  1) 성례전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전 장에서 개신교의 핵심으로 부상했던 칭의론이나 성령론 등이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다루어져야 함을 보았고 정작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어떻게 개인이 구원을 받느냐가 아니라 옛 것이 지나고 새것이 시작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였다. 그렇기에 슈바이처는 바울 신학의 핵심은 칭의론이 아니라 성례전과 윤리학이라고 말하는듯하다. 슈바이처는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를 설명하고, 칭의론이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에 지지담론임을 밝힌 다음, 그의 저서의 마지막 두 장을 할애하여 성례전과 윤리에 대하여 논한다. 이제는 신약신학의 주변담론이 되어버린 성례전과 윤리를 다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성례전이라 하면 카톨릭교회에서 활발히 연구되었던 주제였다. 개인의 결단과 신앙을 강조하는 개신교 전통 이전의 카톨릭 교회는 사제가 행하는 성례전 (세례식, 성찬식 등)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례는 더 이상 개인의 믿음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유아세례라는 방식까지 허용되게 되었다. (복잡한 이유로 현재의 개신교회도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슈바이처 당시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유대주의 전통에는 성례전이 없다는 것이었다.[각주:13] 그도 그럴 것이 성례전에는 신비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유대주의에 카발라라는 독특한 신비주의 전통이 있지만 율법적 공통체라 할 수 있는 유대교에게 보통의 고등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과의 교통을 뜻하는 성례전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합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경이다. 결국 많은 학자들이 성례전적 전통은 헬라니즘에서 시작되어 기독교에 흡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이후로 신학적 담론이 헬라적 우주론으로 재편되면서 성례전은 신과 교통하는 신비주의적 심볼(Symbol)의 의미를 띄게 된다.(필자의 공부가 부족하여 슈바이처가 말하는 심볼리즘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폴 틸리히가 말한 심볼리즘의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기호, 언어, 모양, 형태도 심볼이 될 수 있는데, 심볼이 하는 일은 바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신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심볼에는 죽음 심볼과 살아있는 심볼들이 있는데 로마의 신전의 신들의 동상이 죽음 심볼에 해당할 것이다.) 

    슈바이처는 전통적인 성례전 이해에 반기를 들고 유대주의적 배경에서 성례전을 이해하고자 한다. 비록 고고학적 연구의 한계가 있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나 쿰란 공동체의 공동체에 입회하기 위한 목욕의식 등은 종말론적 공동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성례전적 행위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슈바이처는 바울이 이러한 유대 전통의 몸 씻음과 주의만찬을 바울이 받아들여 그의 신비주의에 통합시켰다고 말한다.[각주:14]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만찬의 전통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중세에 와서 화체설이다. 아니다 여러 논쟁이 있었고, 보통 루터와 칼빈의 성만찬 이해 등이 성례전 연구에 중요한 분량을 차지 하지만, 슈바이처의 질문은 간단하다. 어떻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주의 만찬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그 당시에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에 대한 신비적 유비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대답은 간단하고도 단순하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공동체가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식탁 공동체를 발전시켰다면 그 이유는 메시아적 축제 (Messianic Feast)를 반복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를 기다리며 그의 부활을 축하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의 만찬이 다른 종교전통에서 옮겨운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의 종말론적 전통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각주:15] 그러므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참여하는 만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 속에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각주:16] 종말의 시대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방법,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세례와 주의만찬이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2) 윤리

    흔희들 윤리나 윤리학이라고 하면, 착하게 사는 또는 올바르게 사는 방법 정도로 생각하거나 정의가 무엇이고 선(The Good)이 무엇인지 묻는 학문으로 본다. 만약에 바울의 윤리를 바울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이라고 한다면 슈바이처는 이것이야말로 바울 신학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보통의 칭의론이나 구원론에서 시작한다면 윤리학의 시작은 회개로 시작해서 회개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구원에 대한 개인의 확신과 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연히 관심은 ‘회개’라는 특정한 변화에 쏠리게 된다. 그러나 칭의론의 생산자인 바울은 좀처럼 ‘회개’란 말을 쓰지 않는다. 공동체와 삶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 삶 자체가 윤리를 포괄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비주의 (Being-in-Christ)에 비추어 보면 윤리란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함 자체이다. 바울의 윤리는 회개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자체가 아니었던가 (갈 5:22).[각주:17] 

    슈바이처는 바울이 관심 없었던 주제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바로 바울이 칭의론의 구원과 그의 윤리론을 연결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둘을 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연결시켜 버리면 바울의 윤리론은 율법주의가 되어버린다. 바로 이러한 우를 범했던 것이 복음주의적 개신교회가 아닐까? 바울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에서는 윤리가 바로 구원의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성도가 어찌 완전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의 윤리가 그의 구원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완전한 새시대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각주:18] 온전한 하나님의 시대가 시작되지 않았기에 바울은 그의 신학에서 세가지 요소를 앞에 둔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사랑이 가장 최고의 덕목이 되고 그의 윤리의 핵심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소망은 온전함이 오면 사라질 것들이다.[각주:19] 오직 사랑만이, 아직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언젠가 마지막 나라에는 완전해 지는것,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 그 사랑은 이미 예수의 산상설교에 나타나 있는 것이며 그 완전한 형상은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만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쯤 되면 왜 저명한 신학자이자, 음악가이자, 의사인 슈바이처가 모든 것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원한 것, 바울이 말한 사랑을 담고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슈바이처는 바울의 가장 큰 업적은 윤리적 삶이야 말로 성령과 연합하는 삶임을 정의하고 사랑이야 말로 성령의 가장 높은 현전의 상태라고 본 것이다.[각주:20] 지금이야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윤리-성령-사랑을 연결시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상상력과 세계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랑이 최고라면 타종교나 철학에도 그러한 가르침이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슈바이처는 친절하게도 이에 직접 답한다. 바울의 윤리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의 윤리가 종말론적 기대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사랑의 윤리가 필연적으로 메시아 그리스도의 삶과 영에 연합될 때 구체화 됨을 뜻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특이성(Singularity)을 불어넣음으로써 종말의 시대에 완전함으로 달려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영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바울의 사랑을 보편적 의미로 바꾸려 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적어도 바울신학에게는 그렇다. 또한 바울이 사랑이 의미하는 종말론적 긴장을 제거하고 구원의 특이성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실수이다.  다원화 시대의 종교다원주의적 담론이나 칭의론에 치우친 복음주의적 담론이 바울의 종말론을 잊어버리면 범하는 우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 신비주의의 헬레니즘화

    헬레니즘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신학에 여러 자취를 남겼고 이에 대해서는 끝없는 역사적 해석이 있을 것이다. 슈바이처에게는 아마 헬레니즘적 영향이 반갑지 않았을 것인데, 헬레니즘은 종말론적 긴장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기독교안으로 들어와서 바울의 종말론적 긴장과 신비주의를 헬레니즘적 이원론이나 영지주의적 구원론으로 덧칠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바울의 그리스도적 신비주의는 종말론적 메시아주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종말론적 긴장이 사라지면서 예수의 인격자체에 구원의 확실성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각주:21] 곧 새 시대와 완전한 사랑을 믿는 신앙이 예수라는 개인을 믿는 신앙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원래 예수의 중요성은 종말론적 신앙의 효용성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인데 말이다.[각주:22] 이미 헬레니즘의 유입을 슈바이처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의 개념을 포기한 헬라화된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의미하는 삶의 의미를 집어던지게 되었고, 이후 헬라화된 기독교가 윤리적 가치와 영적 의미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각주:23]


ⓒ 웹진 <제3시대>



  1. Albert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60–61. [본문으로]
  2. Ibid., 63. [본문으로]
  3. Ibid., 64. [본문으로]
  4. Ibid., 73. [본문으로]
  5. Ibid., 207.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222. [본문으로]
  8. Ibid., 218. [본문으로]
  9. Ibid., 220–221. [본문으로]
  10. Ibid., 225. [본문으로]
  11. 여기에서 필자는 시카고신학교의 테오도르 제닝스 교수의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고 ‘loyalty’라고 번역한다. 또한 의를 ‘righteousness’가 아니라 ‘justice’라고 번역한다. [본문으로]
  12.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220. [본문으로]
  13. Ibid., 227.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248. [본문으로]
  16. Ibid., 271. [본문으로]
  17. Ibid., 294. [본문으로]
  18. Ibid., 301. [본문으로]
  19. Ibid., 306. [본문으로]
  20. Ibid., 309. [본문으로]
  21. Ibid., 335.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3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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