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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관용 이후의 선교 1]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로서의 선교학 (홍정호)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5. 9. 1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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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이후의 선교 1]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로서의 선교학




홍정호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공부모임에 가면 자연스럽게 전공을 묻는 질문을 받습니다. 보통 신학이라고 짧게 답하고 관심사를 나누는 대화로 이어지지만, 세부전공을 묻는 분들에게는 ‘선교학’이라고 말합니다. 간혹 발음을 잘못 듣고 “신학에는 그런 전공도 있느냐”며 화색(?)을 드러내는 분도 있지만, 대개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간혹 선교학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는 분도 만납니다. 한 마디로 ‘그런 것도 학문이냐’는 것이지요. 심지어 선교학은 식민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말도 듣곤 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나는 법이라니, 선교학을 두고 이런 거친 반응을 보이는 걸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경험에 의한 편견이 상식으로 고착된 결과일 테니까요.


    학문으로서의 선교학은 종교적 타자와의 만남을 신학적으로 주제화하는 작업입니다. 서양 근대 신학의 분과학문체계가 선교학에 할당한 역할은 주로 방법론적인 실천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선교학은 타자와의 만남이 일으키는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 신학, 종교간 대화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 아시아신학, 세계기독교 신학, 상호문화 신학 등 연구의 주제와 대상에 따라 조금씩 그 이름과 내용을 달리하는 이들 신학의 바탕은 기실 선교학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학문들은 모두 종교적 타자와의 만남을 신학적으로 주제화하려는 시도, 곧 선교적 실천으로부터 비롯된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성찰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선교학의 연구와 분리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선교학은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적 실천으로 제한하려는 근대 신학의 과학적 사유의 한계에 저항하면서, 분과학문의 전문성을 침범하는 통합적 사유를 촉진합니다. 선교학은 ‘모든 것으로서 아무 것도 아닌’ 신학적 정체성을 지향함으로써 근대 신학의 붕괴 이후에 도래할 새로운 신학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선교학이 그러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할 수 없는 그곳에서, 선교학은 그 특유의 잡스러움과 탈경계적 지향성을 통해 하나의 ‘전공’으로 안착하는 데 성공한 근대 신학의 자기 완결적 주체성을 뒤흔드는 탈구축(de-construction)의 사도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합니다. 말하자면, 선교학은 신학(Theology)으로부터 신학적인 것(the theological)으로의 이행을 통해 존재-신학(Onto-theology)의 붕괴 이후의 신학적 사유와 실천을 주제화하는 일군의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신학 운동의 전위대로서의 선교학의 역할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지리적 경계를 넘어 타자와 만나는 선교사의 실천과 상응합니다. 선교사가 이미 설정된 지리적 경계 너머의 타자를 향하듯 선교학은 근대 신학의 지리적이고 인문학적인 경계를 넘는 탈구축의 사유와 실천을 지향합니다. 이를 위해 선교학은 지적 세계의 소통의 문법으로 자리 잡은 익숙한 사유의 구조화 방식, 곧 과학주의적 사유의 문법과 결별하고, 그 체계 내에서의 권위를 스스로 반납함으로써만 선교적인 실천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역설과 마주합니다. 학문성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학문적이지 않아야 할 이중의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 신학에서 신학적인 것으로의 이행의 전위대를 자처하고 나선 선교학의 운명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선교학’(New Missiology)이라고 명명해야 할지도 모를 이 선교학은 시체 해부나 다름없는 존재-신학과 그 유산의 정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죽은 신을 두고, 그 구성과 체계를 논하거나, 애도의 담론을 재생산해 내는 따위의 일은 저들의 몫입니다. 선교학의 관심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와 다른 것으로서의 살아계신 하나님과 날것으로서의 신의 타자성이야말로 선교학이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입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the Other)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렇기에, 말해진 것(the said)으로서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와 다른 것’의 말함(saying)에 대한 탐색, 그리고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와 다른 것)의 총체성을 더듬어나가는 타자성의 주제화야말로 선교학이 관심을 기울어야 할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어떤 분들은 그런 건 윤리나 종교철학이지 선교학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새롭다고 말해야 할 선교학이 실천신학의 범주에 오롯이 안착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텐데, 그런 분들에게 저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미나마 모랄리아』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아카데미라는 사유의 조직체가 갖고 있는 권력은 너무나 커서 그 바깥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을 허공을 향해 외치는 불평꾼으로, 자화자찬하는 요설가로, 그리고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는 사기꾼으로 몰아간다.”[각주:1] 이 말을 뒤집어보면, ‘불평꾼’, ‘요설가’, ‘사기꾼’이라도 아카데미라는 사유의 조직체 안에 머무는 한 정통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네요. 나아가 아도르노는 “자기 유지의 정신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철학 본연의 임무”[각주:2]라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학문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자기 유지의 정신과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이겠습니다. ‘선교’ 뒤에 따라붙는 ‘학’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선교학은 자기 유지의 정신과 보다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재의 제목을 ‘관용 이후의 선교’로 정해보았습니다. 선교가 관용은커녕 배타주의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여전히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관용 ‘이후’가 웬 말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관용은 한 번도 ‘제대로’ 실천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억지로’ 실천될 수 있을 뿐입니다. 관용은 언제든 깨지기 쉬운 주체중심의 윤리, 즉 타자의 타자성을 주체의 효율적 관리 아래 두기 위한 자유주의적 기획의 도덕주의적 구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용 담론에서 주체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으며, 타자는 대상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관용 이후의 선교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관용 담론의 신학적 내면화를 통해 주체 중심의 윤리가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체의 지배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자리매김할 것이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주체의 지배가 일으키는 문제는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한 것이라면) 서양적 주체를 한국적 주체로 자리바꿈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이 “자기 유지의 정신”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은 이 자기 유지의 정신을 통해 재생산되는 주체의 견고한 자기중심성의 지속을 위한 알리바이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관용이 문제가 아니라, 관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주체의 견고한 자기중심성이 문제인 것입니다.


    관용을 통한 주체의 지배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서입니다. 자기중심적 배타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배타주의’와 자기중심성의 계기를 드러내는 ‘포괄주의’와 달리, ‘종교다원주의’는 관용을 전면에 내세우기에 그 은폐된 자기중심성을 망각하기 쉬운 기만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종교에 관한 자유주의적 관용 담론은 개별 종교의 정체성에 각인된 차이를 존재론화(ontologize)하고,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차이를 자연화(naturalize)하는 식민담론을 재생산해 냄으로써, 관용을 통한 주체중심의 통치의 지속에 기여합니다. 이 점에서 관용 이후의 선교에 관한 탐색은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에 관한 모색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은 선교는 관용의 이념을 신학적으로 내면화하려는 주체중심의 실천을 넘어서는 선교(학)의 타자 윤리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앞으로 그 이야기를 조금씩 해 보겠습니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 웹진 <제3시대>

  1. 아도르노,『미니마 모랄리아』, 96. [본문으로]
  2. 앞의 책. 1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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