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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마음의 우묵함에 관하여 (유경종)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5. 9. 1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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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우묵함에 관하여

 



유경종

(본 연구소 회원)



    어릴적에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 가면 또래가 비슷한 사촌형제들이 우리 형제를 반겨주었다. 우리들의 놀이터는 마을 뒤편의 돌산이었다.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돌을 캐 간 흔적들이 널려 있는 돌산은 조금은 위험했지만 재밋거리가 가득한 산 속 본부였다. 돌산 한 구석에는 작은 돌샘이 있었다. 바위가 깨진 틈새로 촉촉한 습기가 배어들고, 그 물기가 바위 아래의 우묵한 자리에 고여 들어 만들어진, 작은 돌절구만한 샘이었다. 물은 맑고 깨끗했다.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이들 몇몇이 놀다가 마른 목을 축이기에는 그만이었다. 돌샘가 비밀장소에 숨겨놓은 작은 쪽박으로 서너 바가지 떠서 돌려 마시면 물은 금새 바닥을 드러냈다. 물이 다시 고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어느 날인가는 조바심을 갖고 물이 차기를 지켜봤지만 한없이 지루했다. 돌샘의 물 따위는 잊어버리고 한바탕 놀다가 와 보니 어느 새 물은 아까처럼 고여 있었다. 시간과 함께 천천히 고이는 물이 어린 눈에도 신기했다.


1. 고임, 그리고 우묵함


    뭔가가 고인다는 말 속에는 어딘지 은근한 느낌이 배어있다. 갑작스레 몰려들어 가득 채우는 것은 고인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폭우로 홍수물이 들어 찬 광경을 보며, 물이 밀어닥쳤다고 말하지 고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언제 채워졌는지 모르게 천천히, 눈에 보이지 않도록 시간을 잡아먹고 모여들어야 비로소 고여 들었다고 말할만하다. 망각의 뒤켠에서 은밀히 수위를 높여가는 것이 고임의 전략이다.

    속도와 함께 중요한 것은 고임의 자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뭔가가 고이려면 고이는 자리가 우묵해야 한다. 평평하거나 기울어진 곳에서는 아무것도 고일 수 없다. 우리 몸도 군데군데 우묵한 자리가 있어서 사람 노릇을 하는 이런 저런 고유한 특징들이 고여 든다. 짠 눈물이 고이는 눈두덩도 우묵하고, 수줍은 미소가 고이는 보조개도 우묵하고, 섹시함이 흘러 고이는 배꼽도 우묵하고, 퇴근시간이면 하루의 피로가 고여 드는 발바닥 가운데도 우묵하다. 신체뿐인가. 생각해보면 우묵함은 모든 숨 쉬는 것들을 보듬고 기르는 기본적인 형태다. 산새의 둥지도 우묵하고 토끼의 굴도 우묵하다. 짭쪼름한 바다 향을 품은 꼬막껍질도 우묵하고 선홍빛 알덩이가 고여 있는 게껍질도 우묵하다. 생명을 보듬고 키우는 자리가 이렇듯 우묵해서일까, 온 인류의 생명에 관심을 두고 이 세상을 찾아온 아기 예수도 우묵한 구유를 골라 누울 자릴 잡았나보다.

    비단 생명체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욕망이 중력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에 맞서 뭔가를 시도하려면 우묵함의 유용성에 기대어야 할 때가 많다. 형태가 굳어지지 않은 것들은 늘 움직이고 흐르고 흩어진다. 그 유동적인 것들을 어르고 달래서 잠시나마 한 장소에 함께 머물도록 다독이는 형태가 바로 우묵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가 고여 든 우묵함에는 흩어지려는 본능과 붙들어두려는 힘 사이의 긴장이 항상 존재한다. 공기가 고여 들어 배를 띄우는 나룻배 바닥의 우묵함에서도, 찌개가 끓으며 맛을 고이게 하는 뚝배기의 우묵함에서도, 진동이 고여 들어 소리를 품어내는 만돌린 울림통의 우묵함에서도 아슬아슬한 물리적 긴장이 함께 머문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리 없이 고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마음의 풍경이다.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는 간질간질한 마음도, 누군가가 꼴 보기 싫어지는 냉랭한 마음도 하루아침에 황톳물처럼 밀어닥치기지 않고 대개는 돌샘물처럼 소리 없이 고여 든다. 내 마음에 고이는 것이지만 나도 잘 감지를 못한다. 이상하다 싶어 들여다보면 이미 찰랑찰랑, 여차하면 넘쳐날까 겁날 정도로 가득 고여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의 풍경도 우묵함 없이는 고여 들지 못한다. 동일한 시간 속에서 동일한 경험을 해도 누군가에게는 강렬한 의미가 남고,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인상조차도 남지 않는 차이가 바로 마음의 우묵함을 지녔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2. 내 마음이 평평해졌다.


    몇 달 전 직장에 취직을 했다. 사십대 중반이 되도록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 본 적이 없이 비정규 단순직이나 소규모 자영업을 하면서 적당히 먹고 살아왔는데, 어찌하다 보니 시절의 인연에 이끌려 작은 지역신문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뒤늦게 시작한 직장생활은 하나부터 열까지가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내 이름이 박힌 명함이 어색했고, 서로를 직함으로 부르는 이들이 생경했다. 더군다나 지역신문사의 형편이 뻔해서 전문적인 업무 분담은 언감생심이고, 일당백의 정신으로 서너 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야 겨우 하루가 마감되었다. 영업도 뛰고, 인맥도 챙기고, 수금도 하고, 가끔씩 기사도 쓰고, 행사도 기획하고, 배달도 하고, 노가다도 뛰고... 하는 일의 멀티스러움에 비해 보수는 무척 섭섭하지만, 이게 다 내 삶의 행동반경을 넓혀줄 수 있는 경험이 되어 주려니 스스로를 독려하며 버티고 있다. “솔직히 니 나이와 니 주제에 그 정도 직장이면 감지덕지”라는 주변 친구의 애정어린(?) 말에 반박을 하기도 힘들고, 내 스스로도 더 이상 불안정한 삶의 형태를 지켜내기가 겁도 나고 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바쁘게 몇 달 살다보니 최근 들어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 뭔가가 고이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징후는 여기저기서 감지되었다. 오래간만에 휴일의 느긋함을 즐기려고 도서관에 갔는데 읽고 싶은 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 빨리 자기를 찾아내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던 책들은 다들 어디로 간걸까. 신문 신간면이나 이런 저런 책 정보를 슬슬 훑어보기만 해도 읽고 싶은 책과 사귀고 싶은 작가들이 우묵한 마음에 고여들곤 했었는데, 거의 두어달만에 찾은 도서관에서 우물 뚜껑을 열어보니 흥미를 사로잡은 책과 작가의 리스트가 고이지 않은 것이다. 억지로 책 몇 권을 골라서 대출절차를 밟았지만 메마른 돌샘 바닥을 스텐 컵으로 긁는 소리가 나는 듯 했다. 내 안에서 책에게 내어 주었던 우묵했던 고임자리가 평평해진게 분명했다.

   얼마전엔 아무도 없는 예배실에 들어갔는데 기도가 나오질 않았다. 예전에는 뭘 기도했었는지, 누굴 위해 기도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찬송가 가사처럼 나 예수께 조용히 나가 내 모든 짐 내려놓으려 해도 마음이 안 열리고, 유치부 친구들의 노래처럼 샛별 같은 두 눈을 사르르 감아보아도 꽃잎 같은 입술이 가만히 열리지 않았다. 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뻘쭘했다. 대중기도나 합심기도, 통성기도는 적성이 안 맞는 관계로 일찌감치 끊은 탓에 그나마 유일하게 유지해 온 기도의 끈이 홀로 넋두리하는 기도였는데, 그 길마저도 막혀버린 것이다. 기도꺼리의 고임자리도 평평해졌다.

   두세달에 한 번 정도 스마트폰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들을 정리한다. 버릴 건 버리고, 모아두고 싶은 사진들은 성격이나 장소별로 구분해서 포토앨범에 저장하곤 한다. 그런데 최근엔 몇 달만에 갤러리를 정리하면서도 앨범 하나를 만들지 못했다. 일 때문에 찍거나 주고 받은 너저분한 사진들을 싸그리 모아서 삭제했더니, 갤러리에 소장하고픈 사진이 몇 장 남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사진도 고이지 않았구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도, 붙들어두고 싶은 인상도 없이 시간이 휘발해 버렸다. 사람은 엄청나게 많이 만나는데 거꾸로 일상 속의 의미의 고임자리는 평평해졌다.

   늦은 저녁 사무실 책상에 앉아 오래간만에 뭔가를 끄적거려보려고 다이어리 폴더를 열었는데 좀처럼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 생각이 고이지 않았다. 예전에 편의점에서 일할 땐 뭔가를 쓰고 싶은 욕망이 수시로 고이곤 했었다. 카운터에서 책을 읽거나 잡념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고여있던 생각이 넘치면 급한대로 포스기의 얇고 긴 영수증을 잘라서 그 위에 단상들을 끄적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끄적인 단상들을 모았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 다이어리 폴더를 열어 넘침의 흔적들을 옮겨놓곤 했다. 지금도 책상 서랍 어딘가에는 편의점 카운터 시절의 영수증 낙서를 모아놓은 종이봉투가 처박혀 있을 거다. 그런데 명색이 글을 다루는 직장에 다니면서 오히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메말라버린 것이다. 생각의 고임자리가 평평해졌다.

   전문적인 내공을 가진 분들은 예외일 수 있겠지만, 나처럼 보통 사람의 경우 일과 스케줄에 쫓기는 삶을 살다 보면 책도, 기도도, 사진도, 생각도 고여 들지를 않는다. 마음의 자리가 평평해지는 것은 아주 합리적인 우리 몸의 선택능력의 결과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자꾸만 고여 들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스러운 것들이 고여 들지 못하도록 우묵했던 마음의 자리를 평평하게 펴 버리는 것이다. 삶의 형태가 우리 마음의 형태를 수시로 교정하는 것이다.


3. 슬픔도 분노도 고이지 않는 세상


    시선을 조금만 넓게 열어보면, 나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우묵함을 잃어버린 듯하다. 사회적 고임의 자리가 잘 감지되지를 않는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이런 평평하고 밋밋한 사회적 감성의 조짐이 내 기억속에 처음으로 감지된 사건이 용산 참사였던 것 같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망루에 올라간 이들이 불에 타 죽었는데도 사회적 슬픔과 분노가 제대로 고여들지를 않았다. 이상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우리사회가 만들어내는 공포영화 시리즈는 장르와 버전을 변주하며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공포와 충격의 종류도 일일이 열거하기가 참담할 정도로 다양했다. 선거 부정을 저지른 이가 버젓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가 하면, 수많은 이들이 죽음의 벼랑으로 내 몰리는데도, 아니, 실제로 어이없는 죽음이 이어지고 있어도 슬픔도 제대로 고이지 않고, 분노도 제대로 고이지 않는다. 피가 끓다가도 잠시 뿐, 눈물 흘리다가도 잠시 뿐, 분노도 애통도 시간과 함께 고이기는커녕 평평하게 흘러내려 메말라버린다. 정당한 분노, 정당한 슬픔에 대한 고임의 자리를 지켜내기에는 우리 삶의 기초가 너무도 불안정하기 때문일까.

    지금과 비교하면 예전에는 세상 이 구석 저 구석이 지금보다는 좀 더 우묵했었던 것 같다. 노인들이 하릴없이 돌아다녀도 흉이 되지 않는 동네도 우묵했고, 학생들이 적당히 공부하던 교실도 우묵했고, 주말부터 청년들이 히죽거리며 모여들던 교회도 지금보다는 우묵했다. 도처가 우묵한 세상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정보나 감각들이 고이고, 필요할 때는 함께 모아 낸 감각들을 서로가 제 그릇만큼 떠다가 썼던 것도 같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가 보이지 않는 전파를 타고 촘촘하게 공간속을 날아다니면서 엄청난 저장고를 만들어내는 시대를 맞아서 고전적인 사회의 우묵함은 거추장스러워졌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간의 우묵함 대신, 보이지 않는 가상 공간의 우묵함을 우리 손으로 선택하고 구축했다. 포털도 우묵하고, 클라우드도 우묵하고, 이런 저런 SNS도 얼마나 우묵한가. 우묵하다못해 움푹하고 아득할 정도로 깊다. 그런데 정작 홍수가 나면 마실 물이 없다고, 그 깊고 아득한 공간에 마실 물이 가득하니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슬픔과 비웃음과 분노와 조롱이 한 웅덩이에 섞여 마실 물 한 모금을 찾을 수 없다. 오늘의 웃음과 눈물은 오늘에 털어내야지 내일의 웃음과 슬픔이 또 들어 찰 공간이 비워진다. 그렇게 매일의 웃음과 슬픔과 분노를 숨가쁘게 처리하는 사이에 이 사회의 고임 자리는 평평해졌고, 우리들 역시 눈두덩도 평평하고 발바닥도 평평한 환자들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어버린게 아닐까.


4. 심심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졌다. 사실 사회적 우묵함에 대한 고민은 내가 들먹일 깜냥을 넘는 주제다. 나는 다만 내 안에서 말라버린 고임의 자리가 슬프고 섭섭할 뿐이다. 그래서 다시금 내 안의 우묵함에 집중하고 싶고, 거기에 책이나 기도나 생각이나 영화나 노래처럼 뭔가 잡다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이 고여 들기를 차분히 기다리고 싶을 뿐이다. 내가 내 자신의 우묵함을 회복해야 타인의 우묵함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사회의 우묵함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고 언급을 할 자격이 비로소 생긴다는 게 나의 궁색한 변명이다. 그러기 위해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다시 좀 더 게을러지고, 좀 더 심심해질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들을 찾아내야 하리라. 그리고 그 게으름과 심심함의 시선으로 내 주변 사람들의 우묵함도 들여다보고 싶다. 마음의 우묵함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서로에게 격려의 눈빛을 보내며 이런 덕담도 건네보고 싶다. 게으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가 우묵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심심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우묵한 마음에 잡다하고 빛나는 것들이 고여 들 것입니다.


* 필자소개

    몇 달 전부터 고양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신도제일교회에서 청년들과 생각을 나누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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