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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인가? (황용연)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5. 10. 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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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인가?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민중신학이 성립되던 초기에 나온 민중신학 비판 글의 제목이었다. 당연히 저런 질문을 던져 놓고 긍정적으로 답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 글의 내용이야 굳이 돌아볼 필요가 없다 치더라도 저 글의 제목에는 뜯어 볼 것이 조금은 있다. 비판 글을 쓰면서 제목을 저렇게 달았다는 것은 ‘신학’과 ‘한국적’이라는 요소가 민중신학의 핵심 요소라고 봐서 그것을 비판하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민중신학은 좋든 싫든 간에 ‘한국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니, 저 비판 글을 쓴 사람이 헛다리 짚은 것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고. 

    그렇다면 저 질문에 대해서 적절한 답은 어떤 것일까. 과연 민중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신학’인 것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한국적’인 것일까.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나와 있는 답들이 있다. 민중의 고난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언했기에 ‘신학’이며, 특히 한국 민중의 고난에 주목하고 그 고난의 흔적을 한국 특유의 개념(대표적인 예로 ‘한’)과 문화 유산 등에서 발견해 냈기에 ‘한국적’이라고. 이러한 답들이 물론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위의 질문들에 접근해 보려 한다. 


    2. 

    우선 민중신학이 ‘신학’인가라는 질문부터 뜯어 보기로 한다면, 이 질문에 따라올 수 있는 다른 질문이 있을 것이다. 과연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길래 민중신학은 스스로를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그냥 놔 두면 사방팔방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다할 수 있게 될 테니 일단 여기서는 ‘구원’이라는 한 가지 지점에 집중하기로 한다. 즉, 구원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구원에 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보통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민중메시아론’이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이 용어는 통속적으로는 “(예수와 동일한) 민중이 메시아다” 혹은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 메시아다”라고 이해되며, 그 때문에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민중신학이 과연 신학 맞냐는 보수적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난에 대한 민중신학자들의 대답은 일반적으로는 ‘사건’이란 용어를 도입해 “민중메시아론은 민중사건이 메시아적 사건, 즉 구원사건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이 메시아다”라고 말하건, “민중사건이 메시아적 사건”이라고 말하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때 과연 ‘메시아’란, 즉, ‘구원’이란 무엇이냐고 말이다.

     민중신학의 태두 서남동 목사는 일찍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겠냐고 말이다. 그리고 서남동 목사 자신은 그 대답을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말을 민중신학의 다른 태두인 안병무 박사도 한 바 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는 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럴 터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구원’은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을 바꿔 본다면, ‘비명을 질러서 듣게 하는 것’이 구원이라면, 이 때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서남동 목사의 말을 빌리면,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자신 앞에 불러 세운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됨을 발뺌할 수 없게 드러낸다. 함께 하느냐 외면하느냐. 그래서 각자의 인간성이 실현되느냐 아니면 질식되어 버리느냐.

     이렇게 본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할 때, 구원이란 말은 어떤 ‘성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게 된다. 차라리 ‘폭로’와 ‘걸림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와 ‘우리’, 그리고 그 ‘나’와 ‘우리’가 만드는 ‘사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폭로’함으로써, 지금까지 가던 길에 브레이크를 걸게 되는 ‘걸림돌’ 말이다.

     구원을 폭로와 걸림돌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구원은 어떤 안정적인 예측과 파악이 가능하다기보다는 갑자기 일어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러한 구원은 앞에서 언급했던 ‘사건’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구원사건’으로 파악될 것인데, ‘사건’으로 파악된다면 그 사건은 사건 참여자들의 속성에 의해 파악되기보다는 그 참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난 것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민중신학은 그러한 ‘구원사건’을 두고 ‘민중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민중사건’을 ‘신이 현존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어떠한 ‘집단’으로 이해되고 민중신학 안에도 그러한 이해 경향이 꽤 강하게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사건’이란 용어를 도입하게 되면 민중이라는 말을 이러한 사건들에 나타나는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최근의 한 민중신학 글에서는 “민중이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은 어떻게 출현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이 주목하는/주목해 온 ‘속성으로서의 민중’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체로 합의할 수 있는 대답은 “사회 체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기/거부하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복음서에서는 “오클로스”라는 귀속성 상실의 현상으로 나타났고, 1970년에는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한다던 정부나 민주주의에 일로매진한다던 야당 어느 쪽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전태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경제력”과 “능력”이라는 정당해 보이는 단어에 의해 ‘배제’라는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무능력자’로 나타나기도 하며, 또는 ‘세월호 사건’이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해 사건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하는 정부와 지배자들에 의해 ‘욕심많은 불순분자’로 취급당하는 ‘세월호 유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거부’라는 속성을 문제삼는 것은 곧 ‘거부’라는 현상을 낳은 ‘체제’를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원이 ‘폭로’와 ‘걸림돌’이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체제’를 문제삼는 것은 그 체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을 문제삼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이라는 것이 특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고, ‘죄’라는 것이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거부’와 ‘체제’와 ‘사람들’을 문제삼는 이 지점은 ‘죄’에 대한 물음이 가능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부’를 문제삼으면서 ‘죄’의 문제를 묻는다면, ‘거부’함으로써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상황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질문은 ‘거부’당한 ‘죄인’과 ‘거부’하는 ‘죄인 아닌 사람’들의 자리를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술이 가능하다. 구원이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죄가 없음을 알게 되고, 반대로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이러한 구원은 ‘거부당한’ 사람들이 어떤 문제 해결의 능력을 발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굳이 ‘능력’을 발휘했다면 차라리 ‘살아남는’ 능력을 발휘한 것일 터이다. 그래서 그들의 ‘살아남음’이 이 세상의 걸림돌이 됨으로써 구원이라는 것이 발생한다는 말일 터이다. 따라서 이렇게 볼 때 ‘민중메시아론’이란, ‘민중’이 예수 ‘대신’ 혹은 예수’와 함께’ 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민중이 이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방법 말고는 ‘구원’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즉 ‘구원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구원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 뒤따르는 것은 민중신학에 의하면 ‘증언’이다. ‘증언’은 어떠한 일이 일어난 뒤에 나오는 ‘응답’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응답’을 하기로 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응답’을 하는 주체의 ‘변화’이기도 하다. 각 사람(그리고 어쩌면 ‘신’까지도)은 이러한 ‘구원사건’과 ‘증언’의 연쇄에 어떤 지점에서는 촉발자로, 어떤 지점에서는 증언자로, 어떤 지점에서는 그 증언을 듣는(그리고 다른 이에게 말하는) 자로 연루될 것이다.


     3.

     민중신학의 ‘신학’성이 이렇게 해명될 수 있다면, 다음으로 ‘한국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한국적 신학’이라고 할 때, ‘한국적’이란 말의 의미는 어떠한 ‘요소’로 이해되거나, 혹은 신학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한국적’이라고 이해되는 어떠한 (주로 문화적인) ‘요소’를 신학에 도입하거나, 혹은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응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려 할 때 그것을 ‘한국적 신학’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닐 터이다.

     방금 짚어 본 두 가지 의미에서의 ‘한국적 신학’이란 기준으로 민중신학을 살펴 본다면, 우선 후자의 차원, 즉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대응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이라는 것은 거의 자명한 수준에 가깝다. 전자의 ‘한국적 요소’에 관련된 차원에서 보더라도, 민중신학이 한국적인 사회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신학에 도입해 온 신학이라는 점에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민중신학은 한국적 요소를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요소로 ‘번역’하기보다는 그 자체를 신학의 형성 요소로 삼아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동등한 대당을 이루는 방식(‘두 이야기의 합류’) 혹은 그 둘이 형성하는 또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방식(‘화산맥’)으로 신학을 했다는 점과, ‘한국적 요소’를 찾으려 할 때에도 그 ‘한국적 요소’에서 ‘한국적’이라는 점만 찾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요소 안에 담겨 있는 사회적 갈등과 균열의 흔적을 찾아내려 했다는 점은 지적해 둘 가치가 있다.

     ‘한국적’에 대한 이러한 의미의 계보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적 요소’에 대해서 묻는다면, 지금 현재 ‘한국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를 들어, 판소리와 소녀시대의 노래 중에서 지금 더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느 쪽이든 답을 고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의 변화와 그 변화의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답을 고르든지 간에, ‘한국적’이란 말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답을 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오히려 어떤 것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어떤 맥락에서 ‘한국적’이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가를 해명해내는 것이 ‘한국적인 것’에 대한 답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한국적인 것’의 두 가지 차원, ‘한국적 요소’를 찾는다는 차원과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라는 차원은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된다.

     이 점을 전제한다면,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이런 물음으로 바뀔 수 있다. 민중신학의 ‘신학성’은 과연 한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앞에서 살펴 본 민중신학의 신학성은 ‘성취’와 ‘회복’보다는 ‘폭로’와 ‘걸림돌’에서 구원의 현상을 읽어 내려는 경향에 있었다. 그리고 그 ‘폭로’와 ‘걸림돌’이 겨냥하는 것은 ‘거부’라는 현상을 낳는 체제였고, 그 체제에 연루되어 ‘거부’를 실제로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에서, 한국 사회의 갈등에서 어느 편이 옳은 편인지를 식별하고 그 편을 든다는 방식보다는, 그 갈등까지도 ‘거부’를 낳는 한국 사회의 체제의 구성 메커니즘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거부당하는/거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탐색하는 방식 쪽이 민중신학의 신학성에 더 친화적이게 된다.

     이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파악하는 가장 흔한 용어 중의 하나가 된 ‘갑을관계’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물론 갑을관계라는 말이 일상적/미시적 관계 안의 권력의 문제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긴 하며 거시적 권력 관계와의 연관 관계를 드러내는 데에도 상당 부분 효용이 있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갑을관계’라는 말이 애당초 ‘계약관계’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권력 관계의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을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끼리의 관계로 묶어 두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체성의 변화를 탐색하는 핵심 고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점을 민중신학은 주목해 왔다. 민중신학적 시각에서는, 이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개인과 국가와 거래할 수 있고, 그 거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민주화의 진전을 말할 수 있으나, 이 민주화가 자본주의의 심화와 동시에 진행됨에 따라 욕망의 거래 구조에 낄 자격이 있는 ‘개인’과 끼기를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갈라지는 현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거부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불법체류자’,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 노동자의 경우(최근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에서 전체 노동자의 경우로 확장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등 – 이러한 거부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상당히 만연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경향들 속에서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길로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개인”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을 찾기가 힘들다고 점점 더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무능력자’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이들을 거부하는 ‘합리적’ 이유 – 경우에 따라서는 그 거부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 있는 ‘나’조차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하는 – 에 대한 성찰까지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이 ‘무능력자’들이 현실적으로 취급받는 방식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 가령, ‘비정규직’과 ‘양극화’ 등의 언어 자체를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 않은가 – 오히려 이들을 ‘사회적 문제’로 인지함으로써 “나도 그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라는 개인/체제의 자기정당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 가령, ‘서민’ 혹은 ‘민생문제’라는 단어가 한국 정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상기해 보자 – 것임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노동개혁은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필요한 자세는 ‘무능력자’의 편을 든다기보다는 ‘무능력자’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설령 ‘무능력자’의 편을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능력자의 편은 이렇게 드는 것이다’라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한 것인지 아닌지 아니면 앞에서 지적한 ‘구원사건’과 ‘증언’의 연쇄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무능력자’가 처한 위치가 ‘강도 만난 사람’이 처한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 즉 그 사람을 직면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민중신학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써 온 방식대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러한 효력에 공명이 일어난다면, 그 공명이 일어나는 만큼 민중신학은 ‘한국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민중신학이 ‘신학’이며 ‘한국적’이라는 의미가 이런 것이라면, 이런 신학에서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이란 어쩌면 ‘버티기’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이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죄인임을/죄인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만드는 체제도, 죄인이라고/죄인이 아니라고 바로 받아들여 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아니, 사실 구원이란 것이 근원적으로 ‘약한 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면, 그러한 구원을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버티기’를 시작한 이후의 삶이 그 이전의 삶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삶의 크기만큼, 그 삶이 다른 ‘버티는’ 삶과 연결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그 삶에 직면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구원의 시작이라고, 이 시작점을 거치지 않고는 구원이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고, 그렇게 구원을 얻는 ‘한국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한국적’이라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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