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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공동체를 넘어 삶으로 (심범섭)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5. 10. 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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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넘어 삶으로



심범섭



    미국 소설가 헤이븐 키멀(Haven Kimmel 1965 ~ )은 2002년 <일찍 떠남의 위안 (The Solace of Leaving Early)>이라는 작품을 출간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랭스턴(Langston)은 서른 살이 다 된 미혼 여성인데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박사 학위 취득 직전에 몹쓸 일을 겪고선 공부를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다. 이제 그가 하는 일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다락방에서 시와 소설과 다른 심오한 글을 쓰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린 두 딸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총기 사고로 죽고 만 것이다. 두 아이는 갑자기 고아가 되었고 이들을 누가 돌보아야할 지 난감한 상태이다. 이때 랭스턴의 어머니가 딸에게 이 두 아이를 적어도 몇 달 동안 돌봐주라고, 시 쓰는 것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며 강권한다. 랭스턴은 그 일은 자신의 천성에도 안맞고 집필 일정과도 전혀 조화가 안된다고 하며 반발한다. 화가 난 나머지 이제 집을 나가겠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울기까지 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하지만 사실 이건 너, 나, 심지어 그 아이들의 문제도 아니야. 이건 인생의 문제야, 랭스턴. 인생이 무턱대고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 . . (But really this isn't about you or me or even those children, it's about life, Langston, the way life just bears down upon us and we are forced to withstand its weight . . .) [각주:1]  


    랭스턴 어머니의 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고아가 된 두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큰 일, 당사자의 삶에 크게 간섭하는 일이 그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에서 쓰이는 부정은 문자 그대로 부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긍정하는 요소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랭스턴 어머니는 삶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원리, 개인을 넘어서는 원리를 딸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이 원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있고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반응이 지극히 당연함을 “강요받는다(are forced to)”라는 표현이 전달한다.  

    다른 사람을 돕는 동기가 그의 개인적 특수성이 아니라 삶의 원리라면 이때 돕는 사람의 개인성 또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삶이 본질이 될 때 돕는 ‘나’도 사라지고 도움 받는 ‘너’도 사라진다. 도움은 필요한 곳으로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물처럼 곧바로 흘러들어갈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양의 옛 철학자 맹자가 제시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에 대한 논의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각주:2]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이 곤란에 처한 것을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다고 맹자는 주장한다. 사람에겐 이런 이타적인 마음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원리를 랭스턴 어머니의 말을 참조해 삶의 원리라고 이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맹자가 이런 이타적인 반응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곧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로 여기고 있음은 그가 이 가상의 상황에서 아이를 구하는 사람의 동기를 기술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리 이얼리(Lee Yearley)라는 학자가 지적하듯이 맹자는 여기에서 돕는 사람의 동기를 부정적으로 정의한다.[각주:3] 곧 그 사람의 동기가 아닌 것을 나열하지 그 동기를 긍정적으로 집어 말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맹자는 이 동기 자체를 굳이 명시적인 표현을 통해 규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맹자가 언급하는 세 가지 이유, 곧 새로운 인간 관계 형성, 더 좋은 평판 얻기, 현재 평판 유지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인과 관련이 있다. 특정한 사람과 인간 관계를 맺고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자신의 특수성을 의식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개인’이다. 도움을 받는 아이도 특정한 사람을 부모로 둔 특수한 개인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아이를 구할 때 이런 이유들이 부정되는 것은 돕는 사람과 도움 받는 사람의 개인성이 부인됨을 뜻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도 그를 구하는 나도 개인이 아니다. 또한 인간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인을 부정하는 것, 다시 말해 관계적 인간을 부정하는 것을 우리는 공동체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인간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맹자의 논의에서 우리는 고유한 자아를 잊은 인간, 공동체적 인성을 넘어서는 인간을 만난다.  

    이런 인간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논의하고자 한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읽어보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는 예수와 한 율법교사의 대화가 있고 그 안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알려진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이 드는 요소가 있다. 예수가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꺼내게 된 이유는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 ”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이웃이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할 이웃을 말한다. 곧 내가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베푸는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이웃이다. 이 의미 구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를 자신처럼 사랑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마친 다음 예수는 이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문답을 요약하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를 도운 사람이다’가 되는데, 이 명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A의 이웃이 B일 때 A는 B에게서 도움을 받았(는)다’가 될 수 있다. 이를 위에서 먼저 제시한 추상 명제와 비교해 보면 A와 B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이었다가 두번째 명제에서는 이웃이 나를 사랑한(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누구의 이웃을 정의하는 방식은 미세한 차원에서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어긋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신학적 윤리학자 폴 램지(Paul Ramsey)는 이 어긋남을 통해 “당연히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한 사람 자신이 이웃이 되야 한다는 구체적 요구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이미 존재하는 이웃이 누구인가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램지는 주장한다. 저기 어딘가에 먼저 이웃이 있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섬길 때 이웃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웃에 대한 사랑(love for neighbor)”이라는 표현은 이웃이 누구인가 따지게 하므로 더 이상 쓰지 말고 대신 “이웃으로서의 사랑(neighbor-love)” 또는 “이웃적인 사랑(neighborly love)”이라는 표현을 써야한다고 말한다.[각주:4]  

    그런데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이러이러한 조건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웃의 조건을 나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위험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하기 편한 사람을 ‘내 이웃’이라는 범주의 (주요) 구성원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산상 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47)  


    여기에서 예수는 사랑하기 편한 사람만 사랑하는 쉬운 사랑의 예를 보여준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간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런 사랑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편의주의적인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램지의 해석처럼 이웃이라는 범주의 선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미리 설정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이웃이 되는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특수성이 개입하지 않는 사랑, 관계적 인성을 넘어서는 사랑이며, 따라서 공동체 개념을 넘어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역사, 전통, 관습, 이야기(서사) 등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런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관점, 전제, 해석, 의미, 시간의 흐름 등도 넘어섬을 뜻한다. 비록 사람은 이야기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야기와 의미는 때로 우리가 본질적인 원리를 인식하고 그를 실천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우리에게 소속감과 의미있는 서사를 제공하는 중요한 원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사랑이 활달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로막는 경직된 범주가 될 수도 있다. 공동체는 익숙함과 편안함의 강한 인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키멀의 소설 한 구절, 맹자의 논의 한 대목, 누가복음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서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어려움이 키멀의 글과 누가복음 텍스트에 이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비록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위기에 처한 타인을 반사적으로 돕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자신을 도움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랭스턴이며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을 슬쩍 피해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에서도 전혀 사심이 없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 마음의 참모습이다. 저명한 천주교인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그의 자서전 <긴 외로움(The Long Loneliness)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이기적인 동기도 숨어 있었음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 . .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 모든 것에 얼마나 큰 야심과 얼마나 많은 자기 추구가 있었던가!”[각주:5] 

    그러나 완벽할 수 없다고 해서 완벽을 향한 노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 도저히 100점 만점은 받을 수 없는 시험이라 하더라도 90점을 받는 것이 70점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법이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대상의 특수성이 강조되는 이러한 범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동시에 이러한 범주를 해체하고 넘어서서 삶의 원리에 먼저 주목하고 그에 바탕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삶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 곧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원리이다. 위의 누가복음 텍스트 앞부분에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이르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더하여 우리 곁에 이러한 성숙하고 담대한 사랑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랭스턴 어머니가 딸에게 했듯이 더 근원적인 시각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미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했듯이 이런 사랑의 예화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우리 이와 같이 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Haven Kimmel, The Solace of Leaving Early (New York: Doubleday, 2002), 137. [본문으로]
  2. 신영복, 강의 (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4), 224-25. [본문으로]
  3. Lee H. Yearley, “Ethics of Bewilderment,” Journal of Religious Ethics 38.3 (2010): 436. [본문으로]
  4. Paul Ramsey, Basic Christian Ethic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0), 93. [본문으로]
  5. Dorothy Day, The Long Loneliness: An Autobiography of the Legendary Catholic Activist (New York: HarperCollins, 1952),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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