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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1) (김정원)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5. 12. 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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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처음. <내 몸을 좀먹는 너의 이름은 '진리'>




 김정원*


 

뜨뜻한 물이 샤워기를 통해 샤-하고 쏟아져 내린다. 긴 머리칼을 후다닥 적시고는, 500원 동전크기만큼의 샴푸를 손바닥에 짠다. 채 일지 않은 거품으로 참으로 대충 머리를 감는다. 헹굼질을 잠시 멈추고는, 샤-하고 쏟아지는 뜨뜻한 물에 가만 서 있다. 이제 좀 노곤 노곤 해진다 싶지만, 여유가 없다. 뻣뻣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채 일지 않은 거품으로 역시나 대충 몸을 닦아낸다. 깊숙한 이곳 저곳을 조금 더 샤-하고 싶지만, 정말 여유가 없다. 여유를 부리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14분의 시간이 지났다. ‘미안해, 북극곰아……’   

공기밥은 200, 바나나는 100, 피자 2쪽은 380, 아메리카노는 0. 스물 예닐곱부터 시작된 철저한 칼로리 계산은 여느 수학자보다 날카롭다. 분명 스물 예닐곱엔 ‘내 안의 여신’을 발견하는 작업 또한 시작되었고, ‘결국엔 아름다움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진지한 고백이 있었다.[각주:1] 그런데, 오늘 낮에 먹은 478 칼로리의 머핀이 영 거슬린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며, 있지도 않은 살을 요리보고 저리 보다가, 저녁은 굶기를 작정한다. ‘미안해, 페미니즘아…….’  


         학문을 하는 것은 맘 편히 살지 못함을 말한다. 맘이 편치 못하다는 것은 몸이 편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를 태워가며 썼던 논문이 고스란히 몸의 수고와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나 개인의 ‘존재론적 방법론’이며, 이는 ‘맘이 곧 몸’ 이라는 주장에 대한 간증이 된다. ‘애를 태우다’ 에서의‘ ‘애’가 창자를 뜻하는 ‘腸’에서 기원한 것을 보면, 애초부터 애태운 것은 실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나 보다.

         생태학과 관련된 논문을 쓴 뒤로, 하루 걸러 맘이 즉, 몸이 편치 못하다. 뜨끈한 물로 길게 샤워 좀 할라치면 먹이를 찾아 얼음 기슭을 어슬렁거리는 북극곰이 떠올라 이내 관두고 만다. 생태학은 나의 일상을 갉아먹으며 내 안에 서식한다. 구멍 난 양말은 그 구멍이 그 양말의 정체성이 돼 버리듯, 생태학으로 갉아 먹인 내 일상은 결국 더욱 또렷해진 생태학이다.

         고기를 먹는 순간, 전기장판을 트는 순간, 에어컨 아래 있는 순간, 테이크아웃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이 죄책감으로 물들여진다. 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토끼처럼 먹으려 노력하고, 추위를 참느라 이를 닥닥 거리기도 하며,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기로 평생을 작정한다. 생태학은 이처럼 나의 몸뚱이를 고생시켜가며 나의 일상에 역사한다.

         약간 되바라진 어린 여성 목사에게 페미니즘이란, 저항 담론임과 동시에, 그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존재론적 물음 그득한, ‘my story book’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사회정치적 관계에서 수집 되어진 숱한 정체성을 너머, 그저 ‘나’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신경증적 예민함을 장상 끼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리에서는 쌈닭 같은 존재로 ‘전향’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만치는 아니어도, 나름의 ‘충실성’(fidelity)[각주:2]을 간직한 페미니즘적 주체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남는 문제가 있다. 바로 ‘살’.

         ‘먹어도 돼’와 ‘먹으면 안돼’라는 두 사유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페미니즘은 이 사유의 거리를 천 자(千 秭)나 늘려놓는다. ‘먹음’은 페미니즘을 향한 ‘충실성’의 긍정적 작동이다. 반대로, ‘안 먹음’은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며, 실패다. 즉, 가짜 페미니즘에로 나가 떨어지는 순간이다. 먹음과 안 먹음의 간극은 ‘먹음’ 으로서만 채울 수 있다. 이 사유의 전개는 코기토와 구조를 같이하나 꽤나 부끄럽다.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살찐다’. 또는, ‘나는 살찐다’ 고로 ‘나는 아름답지 않다.’. 보다 반성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날씬한 여자로 살고 싶다’ 고로 ‘나는 가짜 페미니스트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먹을 땐- 살이 찔 염려로 인해 위염을 앓고, 안 먹을 땐- 가짜가 된듯한 패배감에 장염을 앓는다. 페미니즘은 나의 위장을 좀먹으며 내 안에 머문다. 위장의 망가짐으로 못 먹기도, 안 먹기도 하는 일의 반복은 ‘날씬한 여자’를 만들어내지만, 이제는 ‘날씬함’ 이란 언사에서 죄책감을 발견하고는 망연해진다.

         부끄럽게도 전통과 사회의 지배 아래 존재하지 않기 위한 의식투쟁은 ‘살’ 앞에 종결된다. 그저 퇴락한 ‘익명의 세상 사람(das Man)’[각주:3]으로 살지 않겠다던 다짐은 하이데거의 기억과 함께 소멸된다. ‘본래적 자기’를 찾고자 애를 쓰던 존재투쟁이 겨우 ‘칼로리’ 앞에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은 읽고 쓰는 행위로 시작 될 때가 다반사이지만, 책상에서 시작 된 사유 노동은 나의 온 존재를 간섭하고 일상을 감찰한다. 엘리베이터를 맘 편히 못 타니, 하이힐을 신고서 계단을 오른다. 이러한 몸의 불편함으로 생태학을 향한 ‘진정성’이 획득된다. 바꿔 말하면, 생태학적 사유정지로 인해 얻어진 ‘편안함’은 죄책감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그 ‘진정성’을 얻기 위해서는 ‘날씬함’보다는 ‘건강함’을 선택해야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위경련이 올 것만 같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선포가 나의 피곤하고도 왜곡된 실존에 ‘틈과 균열’을 가지고 올는지는 여적 모를 일이다.


         다만 ‘오늘의 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를 더 ‘안다’라는 것이 몸이 한 번 더 ‘고생’스러울 것의 전조라는 것이다. 앎이 곧, 고생이다. 즉, 사유는 이러한 고생을 작정하는 일인 셈이다. 사유의 시작은 몸의 불편함을 조장하고, 이러한 몸의 불편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죄책감에서 해방시킨다. 위장이 탈이 나서 꺼억꺼억 하는 순간에도, 나의 존재가 ‘진짜 진짜 존재자(Dasein)’[각주:4]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편한 것을 편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진리 사유’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똑똑한 ‘몸’이 현재의 ‘비진리’ 안에 머물고 있는 ‘나’를 거부하는 데에 있으리라. 즉, ‘나’라는 존재자가 ‘비진리’로 인해 ‘은폐’되거나 혹은 ‘위장’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각주:5] 가벼워진 죄책감과 진리로의 방향전환은 몸부림이 주는 짭짤한 선물이다.


         장자는 말한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각주:6]


         내 발에 생태학이 어찌나 안 맞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토록 안 맞으니 생태학을 잊지 못하다 못해 노상 시달리기까지 한다. 내 허리에 페미니즘이 어찌나 안 맞는지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얼마나 안 맞으면 식욕을 거세하려 할까.

         장자의 말은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의 사유노동의 계속됨은 필연적으로 ‘발’과 ‘허리’를 인식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고통의 몸부림도 쉬 그치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즉, 존재자와 죄책감과의 대결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투쟁의 계속됨을 의미하며, 위장 장애로 인한 구토와 곽란 또한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어쩌면 ‘진짜 진짜 존재자(Dasein)’를 꿈꾸는 자에게 자유는 ‘옆 집 개 이름’ 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마르키 드 사드의 소설이 일러 준 것- 인간의 육체적 고통이 가장 높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각주:7] 몸의 고생스러움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존재론적 방법론일 것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행위들은 일상을 침탈하고, ‘자유케’ 되기는커녕 고통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씁쓸하고도 불행한 존재론적 사유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 한 줌’을 얻게 되는 것에서 오는 위안 때문일 것이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참고: 현경, <결국엔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1, 2> [본문으로]
  2. 참고: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본문으로]
  3. 참고: 마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본문으로]
  4. 참고: 마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본문으로]
  5. 참고: 마틴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근원에 관하여> [본문으로]
  6. 장자 <달생(達生>, 19 : 13 [본문으로]
  7. 참고: 마르키 드 사드 <소돔 120일>, <규방 철학>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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