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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신학과 과학을 잇는 다리? (민기욱)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1. 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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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과학을 잇는 다리?



 

민기욱
(GTU 박사과정)


 


       성탄절을 몇 주 남겨둔 12월 초에 나는 박사논문 Proposal을 앞둔 마지막 단계인 종합고사 구술시험을 간신히 치러냈다. 엘리뇨 현상 때문에 올 겨울은 덥고 비도 많이 온다고 하던데 역시 하늘은 꾸물꾸물 대며 시험을 앞둔 준비가 덜 된 수험생의 심정을 잘 안다는 듯이 심란했다. 종합고사 위원회 4명의 교수 가운데 한 분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을 하루 전에 통고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그리 밝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나와 공저로 책을 출판까지 했던 절친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인지라 나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망은커녕 내가 85세의 미안해하는 노신학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위로와 기도뿐이었다. 

       지도 교수인 Robert Russell과 Ted Peters 교수, 그리고 Skype를 통해 Outside Reader인 미국 중부에 위치한 Concordia College의 Ernest Simmons 교수는 법정의 피고마냥 나를 2시간가량 고기 굽는 집게처럼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합고사를 위해 준비했던 130페이지 가량의 페이퍼들을 잘 발전시키면 훌륭한 박사논문이 될 거라 격려했다. “휴~”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네 인생에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거야.” 2시간 정도의 종합고사 구술시험 후 또 다시 1시간 정도 박사논문에 대한 조언을 들은 후 밖을 나서는데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12월의 차가운 비였지만 눈송이처럼 달콤했다.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적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이 곳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at Berkeley, CA)에 온 지 이제 10년을 넘어섰다. 석사과정 후 박사과정 6년차의 한국유학생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시절 “이안 바버(Ian G. Barbour)에 의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를 목회학 석사 학위논문으로 쓰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유학의 길을 떠나 이곳 GTU에서 다시 석사 학위 논문으로 “God, Nature, and Quantum Theory”를 썼었다. 감사하게도 이 논문에 관심을 가졌던 Kenan Osborne 교수 (전 교황인 라칭거와 한스 큉의 제자다!)의 제안으로 2014년 1월 “Science and Religion: Fifty years after Vatican II” 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어 “신학과 과학”이라는 학문에 첫걸음을 디디게 됐다.  

       그러나, 이 분야를 공부하며 큰 보람과 의미를 곱씹었던 순간은 학위 논문과 책 출판으로 인해 생겼던 저작권료가 아닌 지역 신문에 15차례에 걸쳐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으로 인한 반응을 목격하던 때였다. 각주 하나, 과학 공식 하나 없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사는 한인 이민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자로서 매주 아주 짧을 글을 쓰며 겪었던 고민과 반응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한인 이민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1회성의 세미나에 나섰다가 멱살을 잡힐 뻔한 경험은 오히려 “그래 내가 잘 하고 있구나!” 하는 보람을 안겨주었다. 책에 파묻혀 있던 내게 “전투력”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 지면에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이 분야의 탁월한 학자도 아니고 글재주가 훌륭한 사람도 못된다. 그저 “서당개 3년”이라고나 할까! 몇 회에 걸쳐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니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또한 이 지면이 학문의 진득한 향연을 펼치는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신문에 칼럼류를 쓸 만한 이 분야의 대가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일기처럼 “과학과 신학”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가 공부하고 독서하고 토론하다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을 모아다가 조금 정리해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라 여겨주길 바란다. 당연히 학문적인 글을 위해 인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 조금 더 깊고 넓게 공부하고 싶은 이들은 혹은 재미있는 꿍꿍이가 있는 이들은 연락을 주길 바란다. 내공은 깊지 않으나 놀기는 정말 좋아하니까. (이어지는 글은 예전에 한국일보에 내가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의 일부에서 왔다.)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 “기독교 신학과 과학기술”의 연구는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학자들은 급변하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인해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자못 심각한 고민을 오늘까지 해 오고 있으며, 이러한 고민과 연구는 앞으로도 상당히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한신대학교 종교와 과학센터의 최근 출범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미래가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신학, 종교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신교계는 이런 변화에 대해 무심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어쩔 수 없어 그냥 막연히 쳐다보거나, 또는 아예 반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예를 들면, 10여 년 전, 한국의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해 국가 이익의 측면에서 무한한 부가가치를 예상해 국가가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을 무렵, 그리고 그 연구의 지나친 과장, 확대로 인해 재판까지 갈 때까지 한국 기독교 교계는 각 교단의 헌장에 “줄기세포(stem cell) 연구”에 대한 변변한 문구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그 이후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그 저변에 있을 정치, 경제적 계산을 미루더라도 이미 미국 신학계의 경우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이미 상당 부분 확보했음을 볼 때 한없이 부러웠다.  

       이런 거대 담론을 제쳐두고서라도 우리와 같은 소시민이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과학과 신앙”의 고민, 즉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고민거리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이에 나는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이자 도반으로서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을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그 고민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혹은 그 고민과 갈등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것임을 깨달아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는 일에 내가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과학기술자로 한평생을 사셨던 내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실험이 끝난 어느 오후 무렵, 40대 중 후반의 후배가 책상에 엎드려 그야말로 “엉엉” 울고 있더란다. 집안에 불상사가 생겼나 걱정돼서 물었더니, 과학자와 기독교 신앙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에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울고 있다고 말하더란다.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아버지는 자못 심각하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이 갈등이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내가 하는 공부가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GTU는 여러 개의 신학교가 유기적으로 연대하고 있는 연합신학대학원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침례교뿐만 아니라 몇 개의 가톨릭 신학교가 서로 긴밀하게 협업을 하는 유기적 공동체를 꿈꾼다. 덕분에 GTU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는 자연스레 여러 교단을 넘나드는 에큐메니칼 스승을 두게 된다. 내 경우 United Church of Christ 목사인 Robert Russell이 지도교수이고,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목사인 Ted Peters와 Franciscan 신부인 Kenan Osborne 이 스승이다. GTU 소속 Pacific School of Religion 캠퍼스의 마당에서 보면 멀리 금문교가 보인다. 내 지도교수인 Robert Russell이 설립하고 내년이면 35주년을 맞이하는 CTNS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의 로고 그림은 금문교다. 두 곳을 잇는 것이 다리인 것처럼 “신학”과 “과학” 혹은 “종교”와 “과학”을 잇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안 바버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량적 역할을 통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왜일까?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잇고, 서로 오고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자, 그러면 “신학”은 이쪽에 “과학”은 저쪽에 있다 하자. 신학 하는 이들은 과학 혹은 기술 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때론 적극적으로 경고한다. 이에 과학 하는 이들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간섭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내 스승인 Robert Russell 교수는 Creative Mutual Interaction 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신학”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장한다. 그러나 내 인상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종사하는 이들의 바램일 뿐 “과학”은 그야말로 “무심”하다. 물론, “신학과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러 학자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유형을 묘사해 오고 있다. 나중에 이 유형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전히 뭔가 자꾸 만족스럽지 않은 게 남는 까닭은 뭘까?  

       한국에 계신 아버지의 소원을 기억한다. 그것은 전 세계에 있는 “다리” 사진을 찍는 거였다. 무슨 “대교” 이런 것도 있겠지만 크게 꾸미지 않은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찍고 싶은 거였다. 부전자전이랄까? 나는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놓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그저 유랑하면서 찍고 싶은 건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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