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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복음서 : 저자의 죽음과 텍스트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해청)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1. 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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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 저자의 죽음과 텍스트의 즐거움을 위하여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서구의 모든 신념과 믿음은 이 재현에 대한 자신감을 걸고 도박하였다. 

기호는 의미의 심층을 지시할 수 있고 기호와 의미는 서로 교환되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교환에 무엇인가가-물론 신이-보증을 서준다. 

그러나 만약에 신 자체가 시뮬라크로 되어질 수 있다면 

즉 신 자신이 보증을 서주는 기호들의 하나로 축소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장 보드리야르-  


     전통적으로 저자란 책의 의미를 보증해주는 자였다. 그렇기에 저자보다 저자를 더 잘 알기 위한 노력들이 뒤따랐는데, 책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즉 저자가 처한 환경과 맥락을 통해서도 그 의미를 결정하고자 했다. 서구의 낭만주의 해석학은 이러한 시도들의 한 예이며, 특히 사회학적 해석은 적극적으로 외부를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저자의 의도는 이 해석들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쾨르는 하이데거 이후 비평이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작동될 순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스토리는 작가에 의해 창조된 장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길들여진 문학비평가는 흐릿한 지평 속으로 사라지는 스토리들 안에서 주체가 수동적으로 뒤얽힌 현상의 연장 선상에 놓이게 될 이야기된 스토리라는 이러한 개념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각주:1]고 지적한 바 있다. 한데, 저자와 관련한 문제가 이뿐이랴. 로만 잉가르덴과 볼프강 이저에 따르면 “글로 씌어진 작품은 독서를 위한 스케치이므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독자”[각주:2]임이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저자에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에서 독자로 진행되어온 비평의 흐름은 어떤 한 책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해석의 문제를 주도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우쳐 주었다. 

     불행히도, 성서해석에서 이것은 우상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도적 승계를 입증할 수 있는 제자의 계보에 복음서의 저자가 속해 있기에 복음서가 역사적으로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수와 그 목격자들』이라는 책을 쓴 보캄은 그 한 예다. 확실히 이것은 글을 쓰는 자 이외에는 어떠한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주장으로서, 다시 말해 글과 글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척도가 저자라고 판단함으로써 역사적 연속성과 글의 진실성을 동시에 보장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신이 하나의 기호로 축소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신이 전달한 내용을 보증하는 저자가 기호들 중 하나로 축소된다면, 이것은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기에 단일하고 확실한 소통을 가능케 해주었던 바벨탑을 무너뜨리는 일과 같을 것이다. 놀랍게도 바르트에게 이것은 전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텍스트의 즐거움이라고 불렀다. 사실, 바벨탑을 무너뜨린 이도 하느님이지 않던가. 아무튼, 그에게 저자란 신의 계시의 확실성을 담보하고자 애쓴 일종의 신학적 변증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작품은 더 이상 단 하나의 의미, 즉 모든 다양한 견해들을 수렴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한 단어들의 짜임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 작품 안에 다양한 글쓰기가 내재해 있어 서로 간에 충돌을 빚고 모순을 일으키는 다차원적인 투쟁의 공간이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기에 하나의 의미만을 고집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저자를 죽이고 텍스트를 돌출시킴으로써 텍스트에 다양한 저자/목소리가 내재해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그것도 단수가 아닌 복수의 저자를 말이다. "우리는 이제 텍스트가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저자-신의 메시지인)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다.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안전장치를 부과하고, 최종적인 기의를 제공하고,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이다.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 텍스트에 하나의 <비밀>을,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반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인 그런 활동을 분출시킨다. 왜냐하면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 결국 신과 그 삼위일체 위격인 이성·과학·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3] 

     그렇다면 복음서 역시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읽혀질 수 있을까?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교회의 전통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지 않았다. 유세비우스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특히, 마가복음과 관련한 그의 말을 말이다. 


 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드로의 해설자였던 마가는 주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많은 일들을 비록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그가 주목한 대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듣거나 혹은 주님을 따르던 제자는 아니었다. 후에 그가 베드로와 동행할 때 베드로는 그에게 주님의 교훈을 기록한 완성된 책을 남겨준 것이 아니라 일화 형식으로 주님의 교훈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이 전해들은 교훈들을 그대로 기록할 때에 실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자신이 들은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대로 말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해설자라고 말함으로써 마가복음서의 저자를 사도적 승계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연중에 저자가 복음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중했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을 참작한다면, 역사 속에 계시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역사적 복원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설령 유세비우스가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하더라도,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진술은 마가복음서가 예수의 생애를 가장 잘 나타낸 복음서라는 홀츠만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결론에 철퇴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는 분명 순서대로 적은 것은 아니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적인 학자 레온 모리스의 말도 흥미롭다.[각주:4]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복음서의 끝 부분에 가서 그는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말한 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마가복음서에서 예수에게 사용된 건 처음과 마지막이다. … 제자들은 마가복음서에서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도 재림의 때에 관하여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단 한 번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한 것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유대교의 자료는 그들이 메시야에 관해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마가복음서가 다층적임을 보여주는 단서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초기 제자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예수에게 적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기에 마가복음서 저자는 최소한 자기 이전의 전통과 자신 간에 간격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고고학적 지층들을 보존하고자 애썼다는 점을 드러내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층들을 화석이나 지질학적 단층들처럼 이미 고정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곤란해진다. 던이 말한 바와 같이 전승들은 여전히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원시 교회들은 전혀 예수-전승을 처음부터 확고하게 존립해 있었던 바, 내용과 개요를 함유하고 있는 어떤 고정된 것, 하나의 전승체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전승들 자체는 이미 결정적인 형태로, 혹은 최종적으로 권위 있는 형태로 간주되지 않았는데 그 전승들의 권위라는 것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예언적 영에 의해 제기되는 적용과 해석에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각주:5] 

     그렇다면,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라는 바르트의 말이 복음서와 관련해서도 유효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자기 이전의 여러 문화에서 온 전승들을 짜 맞추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마가복음서라고 말이다. 공교롭게도 카독스는 이와 관련해 꽤 시사적인 논지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그는 마가복음서의 전승이 구전이 아닌 문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어떤 것이 더 원시적이고 그로 인해 권위를 갖는 것인지를 논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디벨리우스 역시 생생하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화들이 반드시 원시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지 않던가. 그러나 좀 더 흥미로운 대목은 마가복음서에는 3개의 문헌적 층이 보이는데 이 층들은 각각 팔레스타인적, 디아스포라적, 이방인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층들이 편집을 거쳐 최종적으로 우리가 아는 마가복음서로 정착되었다고 말한다.[각주:6] 또한, 마가복음서가 호머의 서사시를 본뜨고 있다고 역설한 맥도날드의 논의도 눈여겨 볼만 하다.[각주:7] 그는 어리석은 제자들, 천둥의 아들, 배에서 잠자는 제자들, 급식기적, 변화산에서의 변모,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은 여인, 마지막 만찬 등 마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이 호머의 서사시와 매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개론적인 수준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일반적인 주장, 즉 마가복음서가 혼합된 청중을 가진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복음서라는 논의를 참작하면 그리 매력을 끄는 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개론수준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마가복음서가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 온 인용구들의 짜임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바르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예증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연구는 꽤 흥미롭다. 

     한데 지금까지의 주장, 즉 마가복음서가 여러 층들을 지니고 있고 이 층들은 여러 문화의 온상에서 온 색채들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러한 물음은 대번에 아주 유치하고 초보적인 것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마가복음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한 명의 저자에 의해 단번에 작성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벤들링은 마가복음서 내에서 최초의 이야기꾼의 이야기, 후대의 이야기꾼의 이야기, 그리고 최종 편집자를 구분해내고 있다.[각주:8] 얼핏 보면, 이것은 마가복음서의 이야기가 자료와 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자료의 문제만을 말하고 있진 않다. 그러니까 자료의 문제를 넘어 한 이야기꾼에 의해 특정한 줄거리를 갖는 이야기가 마가복음서 내에 잠복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요한 마가 하나뿐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은 그에 따르면 순진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저자의 문제는 아니지만 마가복음서가 두 단계에 걸쳐 작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크롬의 논의는 마가의 이야기가 단번에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꽤 유용하다.[각주:9] 게다가 마가복음 16장 8절 이하가 원래의 것이 아니라 덧붙여진 것이라는 벨하우젠의 주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바다. 하지만 이뿐일까. 얼만에 따르면 마가복음서 1:1의 하느님의 아들은 양자론적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해 첨가된 것이다. 그는 여러 중요한 사본들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란 용어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각주:10] 그런데 잘 뜯어보면 이러한 논의들 역시 벤들링 못지않게 덧붙인 편집자도 한 명의 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마가의 이야기가 16장 8절에서 끝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6장 8절로 끝난다면 우리는 여성들이 부활의 이야기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전해주지 않았다고 여길 것이다. 반면에 첨가된 9절과 10절은 최소한 여성들 중 하나인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마가복음서가 16장 8절로 끝난다면 예수를 처음부터 따랐던 유대인 여성들 역시 남성 제자들 못지않게 우둔한 인물로 간주되어야 하겠지만, 첨가된 9절과 10절을 고려하면 적어도 막달라 마리아만은 깨달은 인물로 변신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서 1장 1절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어구가 없다면, 마가복음서 전체는 예수의 신성과 관련해 일종의 양자론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어구를 첨가함으로써 양자론적 견해를 취하는 이단적 문헌이라는 혐의는 벗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어구 하나를 첨가함으로써 이 후대의 편집자는 마가복음서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사실상의 저자가 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는 바르트의 지적은 촌철살인적인 논평처럼 보인다. 

     이제 결론적인 물음을 하나 던져보도록 하자. 이처럼 저자들이 뒤섞여 있고 덧붙여졌다면, 어떻게 우리는 마가복음서를 일관된 흐름을 지닌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낼 수 있었을까를 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오독이었다고 판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독자에 의해, 즉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고자 욕망하는 신앙적/신학적 독자에 의해 마가복음서의 사상 내지는 신학이라는 틀이 건져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오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럼으로써 한 가지는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들뢰즈가 말한 바와 같이 고유명사의 퇴락이다. 저자라는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사고해야만 텍스트의 원래의 의미가 얻어진다는 믿음. 신학에서 혹은 경전에서 최종적으로 신의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지표로 사용되는 저자에 관한 믿음. 이것은 붕괴되어야 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책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펼쳐 낸 들뢰즈의 지적처럼 말이다.[각주:11] 


     무한한 동일성 속에서 등장하는 이 모든 뒤바뀜들은 엘리스의 인칭적 동일성의 흔들림, 고유명사의 전락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고유명사의 전락은 앨리스의 모든 모험들을 관통해 반복되는 모험이다. 왜냐하면 고유명사 또는 단수명사는 한 지식의 항구성에 의해 그 동일성을 보장받으며 이 지식은 일정한 고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지와 휴지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들 속에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칭적 자아는 신과 세계 일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명사와 형용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정지와 휴지의 명사들이 순수 생성의 동사들에 연결되고 사건들의 언어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자아, 세계, 신 등의 모든 동일성은 상실된다. 


     그리고 이러한 반신학적 붕괴가 텍스트의 즐거움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서에서 텍스트의 즐거움은 어떻게 추구될 수 있을까? 이것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하지만 텍스트의 즐거움이 어떠한지를 에코의 말로 대신하면서 마칠까 한다.[각주:12]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들도 아래에서 에코가 전하는 즐거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물론, 마가의 말처럼 귀 있는 자는 이미 듣고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레나 코스추코비치는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기 전에 이 작품에 관한 긴 글을 쓴 바 있다. 어떤 대목에서 그녀는 에밀 앙르와의 브라티슬라바의 장미를 언급하는데, 이 책에는 어떤 신비로운 원고의 추적과 도서관의 최후의 화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프라하인데 나의 소설의 첫머리에서도 프라하가 언급된다. 더구나 내 책에 등장하는 사서의 이름이 베렝가리오인데 그 책의 사서는 벵가르 마르라는 이름이다. 내가 경험적 저자의 자격으로 앙르와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고 그런 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말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읽은 평론들 중에는 비평가들이 내가 잘 알고 있는 출처를 찾아낸 것도 있다. 비평가들이 스스로 찾아내도록 내가 교묘하게 감췄던 것을 그들이 교묘하게 찾아낸 것을 보고 나는 아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출처를 전혀 알 수 없었던 글을 읽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출처를 밝히며 그런 책에서까지 내가 인용하고 있다고 지적했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또 어떤 해설자는 내가 작품을 쓸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에 읽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책들을 찾아내기도 했다(내 친구 조르지오 첼리는 옛날에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는 드미뜨리 메레쥐꼬프스키의 소설도 있었을 거라고 귀뜸해주었는데 나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웹진 <제3시대>

  1.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1』, 김한식․ 이경래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p.167 [본문으로]
  2. 폴 리쾨르, 같은 책, p.170 [본문으로]
  3.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pp.32~34 [본문으로]
  4. 레온 모리스, 『신약신학』, 박용성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pp.165~167 [본문으로]
  5. 제임스 던,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김득중․ 이광훈 공역, 솔로몬, 1990, p.129 [본문으로]
  6. Cadoux Arthur Temple, The Sources of the Second Gospel,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본문으로]
  7. Macdonald Dennis R, The Homeric Epics and the Gospel of Mark, Yale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0. [본문으로]
  8. Wendling Emil, Die Entstehung des Marcus-Evangeliums, J.C.B Mohr: Tubingen, 1908, pp.214~237 [본문으로]
  9. Crum J. M. C, St Mark's Gospel: Two Stages of its Making, W. Heffer & Sons Limited: Cambridge, 1936 [본문으로]
  10. Ehrman, Bart.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93, pp.72~75 [본문으로]
  11.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pp.46~47 [본문으로]
  12. 움베르토 에코 외, 『해석이란 무엇인가』, 손유택 옮김, 열린책들, 1997, pp.99~1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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