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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병영이 되어가는 세계 (백승덕)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2. 2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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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이 되어가는 세계



 

백승덕*


 

          장모님 회갑을 맞아 처가식구들과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이라곤 일본으로 다녀온 신혼여행을 제외하면 10년 전에 가톨릭학생회에서 한국 대표로 아시아 지역 총회에 참가하느라 말레이시아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이나 날아가 본 경험이 없었다. 한 달 조금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방문했으니 그 나라들을 깊게 볼 수는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에 방문해서 사진을 찍고 숙소 주변을 걷는 정도의 일정을 겨우 소화했을 뿐이다.  

          그래도 몇 가지 광경들은 인상에 남았다. 그 중 하나는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군인들이었다. 한국의 군사주의가 예외적으로 대단하다고 하지만 총을 든 군인들을 일상에서 직접 만나기는 어렵다. 반면 로마나 파리의 명소들을 돌아다니는 중에 군인들을 참 많이 만났다. 여행이 끝날 무렵엔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군인들이 입구에 서서 직접 검문을 하는 모습이 익숙해지기도 했다. 주요 지하철 역사 내부에도 이런 군인들이 경계를 펴고 있었다. 작년 말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 이후에 유럽에선 이런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총을 들고 지하철을 탄 군인들을 만났던 것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출근시간이라 사람들로 꽉 채워진 지하철에서 공교롭게도 군인들 바로 옆에 서다보니 총구에 옷깃이 스쳤다. 그 느낌이 아주 묘했다. 내가 손을 조금만 뻗으면 움켜쥘 수 있는 거리에 총이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군인들이 총을 들어 장전할 공간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총을 들고 지하철에 탈 수 있는 것일까.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웬만큼 큰 상점들에는 입구에 선 경비들이 방문객들의 가방을 열어 보이라고 요구했다. 고객들은 너무도 순순히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가방이나 핸드백 속은 가장 사적인 공간일 텐데, 경찰이 아니라 사설 경비원이 일일이 확인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낯설었다. 한국에선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민주화의 상징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권리와 권한과 관련해 유럽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내가 경험한 유럽은 예상과 적잖이 달랐다.


익숙한 베를루스코니의 인기


         IS 테러 위협 이전에도 이런 광경이 펼쳐졌던 때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테러를 염려하지 말라며 비슷한 선례가 있었다며 소개해줬다. 2000년대 중반에 소매치기를 박멸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베를루스코니가 명소마다 군인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특공대들을 투입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주민들과 집시들이 이 때 곤욕을 많이 치렀다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런 '단호한' 정책으로 승승장구를 했다. 한국인 투어 가이드는 여기까지 이야기해주며 소매치기 역시 많이 줄었다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안심시켰다.

         숙소에 돌아와서 기사를 검색을 해보니 가이드의 말은 대부분 맞았지만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2010년까지 베를루스코니의 인기는 대단했고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보기 어려웠다. 2010년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자신의 스캔들 상대가 소매치기 혐의로 검거 당하자 베를루스코니가 경찰에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소매치기 단속을 위해 특공대씩이나 투입했던 그의 단호한 모습과 너무 모순된 행태였다. 마치 국민들에게 단호한 안보태세를 요구하면서 방위산업 비리로 엉터리 무기를 채워 넣은 한국의 군부를 보는 듯하다. 안보와 치안의 위기 그리고 군대 투입 결정과 높은 지지율까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들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흡사했다.

         흔히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라서 일상이 병영처럼 꽉 막혀버렸다고 하지만 어느 사회든 금세 전쟁 태세를 일상으로 받아들일 만큼 자유의 토대는 취약하다. 사설경비에게 가방을 순순히 열어 보이는 파리 시민들이나 베를루스코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단호한 군사적 조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며칠 전 프랑스 의회는 지난 파리 테러 직후에 선포한 국가비상사태를 3개월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 안보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혐의만 있어도 영장 없이 수색과 구속할 수 있는 조치가 5월 말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뜻밖에도 낯선 유럽에서 국가보안법이란 익숙한 형체를 만났다.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의 한계


         물론 안보 위협에 직면해 사회가 병영화된다고 해도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치렀으니 유럽이나 다른 지역과 다른 고유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분단사학’이나 ‘분단체제’와 같은 개념들은 이처럼 고유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했던 새로운 시각이었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이 유독 민족을 내세우며 독재를 강화하던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경제위기를 겪으며 곤란에 빠져있었다. 정부가 나서 차관을 가져다 키운 기업들 중 절반 가까이가 부실화했기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는 탈냉전 국면에서 미군 철수라는 안보 위기도 겪게 되었다. 1971년 대선에선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에도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가 야당 후보인 김대중에게 근소하게 이길 만큼 정권의 안정성이 떨어져있었다. 1972년 시작된 유신체제는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내세워서 권력 안정성을 확보하려던 일종의 쿠데타였다. 유신헌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능률의 극대화”나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 같은 말들은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피치자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독재자의 수사였다. 

         국가권력의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저항적 지식인들 중 일부는 민족을 독재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로 새로이 발견했다. 이들에게 한민족의 얼굴은 독재자 박정희가 아니라 전태일처럼 찢기고 갈리고 빼앗기고 신음하는 민중이었다. 그러니 민족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독재를 포함한 현실을 바꾸는 주체일 수 있었다.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민족과 자주에 기반을 둔 평화통일원칙을 정권 차원에서 내세움으로써 민간 차원에서도 민족의 분단이 민중의 처참한 현실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에 대한 뜨거운 기대감을 가졌던 지식인들은 그 직후 선포된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강만길의 ‘분단사학’이나 백낙청의 ‘분단체제’와 같은 개념은 이와 같은 정치적 지형 속에서 태어났다. 이들과 관점을 공유했던 리영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단은 한국사회를 “비정상과 일그러짐”으로 이끈 근원이었다. 요컨대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은 독재정권의 민족주의를 넘어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민중 모두가 민주주의를 매개로 삼아 민족사회의 주인이 되는 이상향을 향하고 있었다.

         분단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면 ‘분단시대의 극복’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 수립’이나 ‘올바른 근대화’ 등의 과제와 연관된다. 분단을 강조하는 관점 역시도 민족통일이 그 자체로 평화나 인간해방의 최종적 단계라고 보지 않았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문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해결하는 가장 근원적인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분단을 강조하는 관점은 민족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가 오히려 민중들의 현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작년 초 전국건설노조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불법 고용 근절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국건설노조 관계자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쿼터를 지키기는커녕 불법체류자도 감독하지 않아 정부에 대해 부글부글 끓는 심정"이라며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불법체류자들 중에는 조선족 ‘동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동질성 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법체류자 중 한민족의 피가 섞였다고 볼 수 있을 사람들을 분리하여 구제해주는 식의 대처는 오히려 갈등만 더욱 키울 것이다. 국가주의를 넘어서 민중 전체의 해방을 꿈꿨던 저항적 지식인들의 바람도 그와 같은 ‘그들만의 민주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유럽을 병영사회로 몰아가고 있는 테러 역시 ‘그들만의 민주주의’ 바깥에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난 이민자들에 의해 자양분을 얻고 있다. 현재 기한 없이 연장되고 있는 프랑스의 국가비상사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국가비상사태가 처음 선포된 것은 10년 전이었다. 파리 외곽에서 경찰의 검문을 피해 변압기 쪽으로 피했던 10대 이민자 2명이 감전사를 당한 것에 분노한 도시 외곽 지역 청년들이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나선 ‘방리유 사태’가 그때 벌어졌다. 국가의 강력한 진압과 국민 대다수의 지지에 힘입어 이민자들의 봉기는 금세 진압되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차별에 대한 분노는 10년 만에 테러라는 방식으로 돌아오고 있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 테러에 관련된 자들이 대부분 도시외곽지역 이주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한국이 분단을 극복하겠다며 민족동질성 회복만을 강조한다면 오늘날 유럽이 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근원적 해결책일 수 있을까?


         길지 않은 여행 중에 접한 유럽은 온통 테러에 맞선 비상사태였다. 프랑스에선 ‘빅 브라더 법안’이라고 비판받을 만큼 강력한 반테러 법안이 작년 11월 테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시행 중이었다. 이 법안은 정보기관이 법원의 승인 없이도 전화를 감청하고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등을 열어볼 수 있도록 했으며 피의자의 기록은 기소만 되어도 40년 간 그대로 남게 했다. 이처럼 강력한 조치가 시민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벌어지기 반 년 전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지만 테러를 막지는 못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실험으로 인해 또다시 비상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는 북한의 돈줄을 끊기 위해 개성공단 운영을 중단해버렸다. 또한 프랑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강력한 반테러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압력을 넣고 있다.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비판이 나오더라도, 이 정부는 언제나처럼 그저 밀어붙이고 있었다. 북한과 전쟁을 막기는커녕 사드를 도입해서 중국과도 갈등을 키우고 있다.

         어디를 가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대다.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딱히 탈출할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근원적인 해결책이 절실하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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