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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허석헌)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3.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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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들어가며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현상은 주체의 문제가 문학, 철학, 예술, 신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시 전 분야에 걸쳐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리라. 이런 현상은 계몽주의로부터 니체에 의해 기획된 신의 죽음이 몰고온 예고된 변화이기도 하지만 굳이 니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숨 막히는 질서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던 지성사의 필연적인 흐름 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신의 죽음’의 선언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근대적 주체의 죽음뿐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욕망, 권력, 담론, 지식과 같은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라캉이 주체를 대타자라는 환상적인 실재를 욕망하는 존재로 파악한다든지, 푸코가 지식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밝혀낸 것이라든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개념을 통해 서구역사가 억압해온 사유의 욕망으부터 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친다든지 하는 것들은 상이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되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주체에 대한 관심이 최종적으로 겨냥하는 지점은 억압적인 체제질서의 그 가려진 내막을 들춰냄으로서 인간을 억압한 그 모든 것들의 허구적인 실체로부터 인간의 주체적인 삶, 즉 주인된 삶을 회복시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대한 각각의 진술들을 통해 제시되는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주체의 행동의 방식은 이론가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소 부정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감지된다. 다시 말해, 해체론이든, 포스트구조주의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하든 주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전통적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내지 해체이며, 이는 근대적이고 부즈조아적인 사회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절대 주체에 대한 비판 혹은 해체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역량마저 해체할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마저 버리는 참사는 목욕시키는 엄마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주체가 중요한 문제인가


         데카르트의 근대 합리주의 이후 서양 근대 철학은 주관적인 관념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사유와 인식능력은 실재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배하였던 시대였고, 윤리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이성에 기반한 자율적인 개별자들 간의 합리적인 계약에 의거하여 정치적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낙관적이 기대가 팽배하였던 시대였다. 이것은 중세시대를 지배하였던 전근대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신을 밀어내고 근대의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주체가 그 자리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절대 주체는 형이상학적인 신의 자리를 탈환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주체의 자리로부터 배제된 객체를 대립적으로 구분하여 객체에 대한 차별을 기정사실화하고 정당화하고 만다. 신의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는 승리의 환호 뒤에는 자연이 인간의 정복의 대상물로 전락되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복종의 대상이 되며, 유색인은 백인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비워주어야 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개별자 스스로에게 이데아나 신에게만 부여되었던 초월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서 일어난 이러한 인식론적인 변화는 인간을 둘러싼 삶의 전반을 선과 악, 주인과 노예, 문명과 야만이라는 확연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로 구조화시켰다.

         근대적인 주체의 발견이라는 인식론적 변화가 객체를 타자화 시키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통해 왕권신수설에 의거한 봉건적인 절대주의는 무너지게 되었으며, 시민이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근대적 주체의 등장이 무조건적인 비판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전근대적인 절대주체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고, 뒤이어 등장한 근대적인 이성적인 인식의 주체가 봉건주의를 몰아내고 부르주아 시민 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사조로 전면화 되었다는 사실은,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타파하는 또 다른 새 정치사회는 탈근대적인 주체의 등장을 통해서 열려지게 되리라는 합법칙성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을 한다는 것, 혹은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사회를 지향하는 지적 작업은, 결국 주체를 인식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고 이를 통해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안에서 논의되는 주체에 대한 이론들이 오늘의 자본주의 지배질서로부터 어떠한 변혁적인 의미를 함축하는지를 이 글은 묻고자 한다.


지젝이 말하는 주체


         이 글이 지젝을 특별히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지젝의 책은 읽는 속도보다 출판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유머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물량공세로 대중과의 접촉면을 다방면에서 확보해온 잘 알려진 맑스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유명세도 그렇지만, 그러나 이보다 지젝의 주체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인간의 변혁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론으로 가장 의미 있는 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나름의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지젝은 본 웹진에서 다뤄진 경험이 있고, 지금도 연재되는 관계로 지젝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지젝의 논의와 연류된 주변의 시선들을 참고하여 지젝의 주체이론이 가지는 차별성과 실천적 의미를 구분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이론가로서, 푸코, 들뢰즈, 라캉을 염두하고 있다.

          푸코의 경우, 그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지식을 통해 담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권력이라는 효과를 생성해내는데, 이 때 작동하는 권력은 주체에 의해 통제되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를 형성하고 주체의 자리를 결정짓는 권력임을 분석해 낸다. 정신병원, 감옥, 고아원, 학교와 같이 신체를 통해 가해지는 감시와 통제 시스템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은 곧 권력의 메커니즘이 폭력과 억압의 방식이 아닌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참여를 통해서 창출되고 과정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감시, 규율, 훈육의 통제사회에서 밀려나고 주변화된 타자들이 주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고고학적 계보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권력의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는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은 권력의 주체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사회의 통제시스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일 뿐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자기에의 배려’라는 모호한 답으로 얼버무린다. 푸코는 결국 인간의 개별적인 의식 안에서의 변화만으로 충분하다고 만족한 것일까? 푸코는 이후에 다뤄지는 주체의 철학이론에도 빠짐없이 거론되기에 짚고 넘어갈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라캉을 통해서 의도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법을 통해 정치적 주체성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캉의 주체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고 만족될 수 없고 언제나 항상 결핍된 채로 기표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언제나 결핍된 존재로만 남아 있게 된다. 라캉에게 주체는 타자의 욕망이 거쳐나가는 장소이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체 이해만으로 정치적 주체성을 발견할 직접적인 단서를 찾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다. 물론 지젝이 읽어낸 라캉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가 기획한 주체는 라캉과 다른 것이다. 그가 서구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던 플라톤주의를 전복을 통해서 밝혀내려 했던 것은, 수직적이고 이분법적인 위계질서를 부여한 이데아로서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개별자들에게는 동등한 지위에서의 수평적 차이와 그것의 반복만이 있을 뿐 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이데아를 제거한 칼로 다시 겨냥한 대상은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라캉과의 입장차이가 분명해 지는데, 욕망은 오이디푸스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욕망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의 본성에 숙명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욕망하는 주체는 자본주의의 억압구조를 위협하는 가능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라캉과 들뢰즈의 욕망을 중심으로한 주체에 대한 이해는 차이로 끝날 것인가?

         마지막에 다뤄질 지젝의 주체는 욕망에 대한 해석이 푸코에 대한 비판과 라캉에 대한 변증법적인 해석을 통해 변혁적이고 실천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이론으로 어떻게 가공되어지는지를 보려고 한다.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지젝은 맑스가 설정해 놓은 계급적 혁명의 전선구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맑스가 보지 못한 혁명에서 인간의 주체의 문제를 다룸으로서 진보적인 해방역량을 담보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이론가라는 호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비중 있게 다뤄보고 싶은 생각이다.

         쓰고보니 장황한 글이 될 것같다. 연재를 약속받아 놓은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하는셈 치고 글좀 써보라는 권유에 시작한 글이기에 혼자 장편 시리즈를 기획하는 것은 월권이다. 때문에, 지젝 이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매우 단촐한 소개와 더불어 실천적 의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주체의 문제를 바라보는 상이한 접근방법들이 제공하는 각각의 이론들이 진보를 위한 정치변혁의 과정에서 ‘어떤 주체’가 요구되는지를 비판적인 입자에서 비교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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