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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평화를 생각하며...(배근주)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4. 1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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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생각하며...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부활절이 지나고,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할렐루야”와 “평화”이다. 예배형식과 교회 절기, 그리고 거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공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는 “할렐루야”를 입밖으로 내지 않는다. 40일 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할렐루야는 부활절 새벽 (또는 부활절 직전 토요일 일몰 후)에, 말 그대로 부활한다. 부활절부터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전까지, 교회에서는 일곱번의 주일을 부활절로 기념한다. 이 기간 동안 읽혀지는 각기 다른 복음서 대부분은 부활한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예수의 죽음 후에, 일상이 파괴되고,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현실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평화가 너희들과 함께 하기를” 하고 기원하는 예수의 인사는 무언가 황당한 것 같으면서도, 시기적절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은 평화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되고, 그 소중함을 갈망하기 보다는, 전쟁과 폭력 등 평화가 없는 상황과 반평화를 경험하면서, 평화를 상상하게 되고 지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평화에 대한 존재론적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진 베스케 엘쉬타인 (Jean Bethke Elshtain)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신학적 고전이 된 “여성과 전쟁 (Women and War)”이란 책에서, 평화는 전쟁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정의되고, 상상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평화 운동은 반전운동으로, 마치 전쟁이 존재하지 않으면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lshtain, 1995).  


          반면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폭력을 사용한 가해자가 무슬림이거나 이슬람과 연관이 있는 경우에는, 논리가 달라진다. 즉 이들의 정신 상태나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분노가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이란 제도화된 종교가 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문제이다. 이슬람이 폭력을 조장하는 비윤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이 종교에 심취한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들이거나,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이다. 더 나아가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 보다 높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는 반이슬람 정서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슬람이 테러리스트의 종교라면,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종교가 될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비종교인들도 충분히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테러리스트는 종교 논리 보다는,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더 많고, 인간들의 본질적인 폭력성이 해결되지 않는한, 테러는 항상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극단주의적 이슬람 교도들이 (또는 극단적인 기독교, 유대교, 불교 등등의 신봉자들) 테러리스트가 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기 전에, 이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또는 정신 상태,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 등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테러리스트들을 행동화시키는 여러 가지 요인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전쟁의 역사는 항상 거대 담론으로 기록되어 왔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지만, 왜 일어났는지, 누가 전쟁을 결정했는지, 병사들은 어떻게 조달되었는지, 병사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전쟁을 견디었는지, 일반 사람들은 전쟁을 어떻게 버텼는지, 전쟁이 끝난 후에 병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와 기억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평화 담론도 전쟁 담론과 마찬가지로 거대 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화 담론이 전쟁이나 전쟁 가능성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암묵적 전재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군사전략, 군대 재배치, 전쟁 무기와 국경 안보 등등이 평화와 안전을 위한다는 정치 담론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시민 평화 운동권에서 들리는 언어들도 대부분,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자,” “군비 감축하자,” “군대 축소하자,” “군사시설을 줄여라,” “주한미군 감축” 등등 군사화되어 있다. 평화에 대한 논의, 언어가 군사화가 되어 버리면, 평화를 위한 정치적 결정들이 일반 시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여기서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평화를 위한다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즉 전쟁의 피해자들도, 평화의 피해자들도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 되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결정할 때,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누가 이익을 얻게되고, (또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전쟁이 사회 구성원들 (또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 정책과 평화 담론 또한 비슷한 방식의 분석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화 유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군사정책에는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전쟁 담론에서 자유로운 평화는 어떠한 평화일까’이다. 어떻게 전쟁과 군사화에서 자유로운 평화 담론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부활한 예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란 단순히 개인의 믿음과 영성 차원에 머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관상 기도와 묵상, 통성 기도 등등의 영성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과 기쁨, 평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종교체험은 중요하다. 그러나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가 기독교 신비주의의 연구를 통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 영성가들은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제대로 보고 맞서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화를 화로 다스리고 악을 악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다스려 평화로운 인간 관계, 사회 관계를 체화하려고 하였다 (Silent Cry, 2003). 즉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셀 수 없는 수많은 관계 속에 사는 존재이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관계의 회복이야 말로 우리의 영성이 향하는 방향인 것이다. 소중히 여기는 관계가 깨어질 때 겪는 상실감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감정적 고통이 크다. ‘나’의 고통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 보이지 않는 세상의 관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영성 훈련을 통해 연마된다. 그런데, 이 관계성과 영적 훈련으로써의 자기 성찰은 ‘일상’을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

  
          몇 해전 경기도 평택의 햇살사회복지원을 방문해서, 우순덕 원장님께 평화에 대해 정의해 달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햇살사회복지원은 평택 기지촌에서 양공주라 손가락질 받으며 일생을 보내신 할머니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쉼터도 제공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도 제공하고, 힐링 프로그램도 제공하는 작은 공동체이다. 원장님이 말씀하신 평화에는 미사일도, 군대도, 한미 관계도, 국경 봉쇄도 없었다. “할머니 한분 한분이 진정한 인간으로써 존중받는 것, 따뜻한 밥 한끼를 매일 드실 수 있는 것, 죽을 때 혼자 죽지 않는 것이 평화입니다.” 십년도 더 지난 예전에 뉴욕 무지개 집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지개 집은 국제결혼 여성들의 쉼터로 출발한 공동체인데, 이 여성들의 대부분이 미군과 결혼하여 한국을 떠난 기지촌 출신 여성들이다. 문화적 차이, 경제적 어려움, 언어 장벽, 가정 폭력, 미군 남편의 외상 후 스테레스성 장애 등으로 인하여, 많은 여성들이 미군 출신 남편과 이혼하거나 버림을 받고, 다시 성매매를 하거나 걔 중에는 홈리스로 전락하기도 한다. 무지개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은, 마약에 중독되어 살다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무지개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답게 사는 법은 “남들처럼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쉬고,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회복하는 것인데, 폭력과 전쟁으로 파괴된 일상을 되돌리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같다. 폭력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겪은 사람들, 폭력으로 가족을 잃어 버린 사람들,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 번 무너져버린 일상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처럼 멀리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4월 16일은 세월호가 침몰하여 304명이 수장된지 2년된 날이다. 작년 세월호 1주기때,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지인이 한국에서 보내주었다. 책에 실린 세월호 유족들의 글은 소중한 가족 구성원들을, 자본주의 탐욕과 버무려진 재앙으로 잃고 난 후에, 무너진 일상, 바뀌어진 일상 속에서 겪는 고통의 기록이였다. 이 고통 속에서 유족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교회의 역할을 묻고, 사회 지도층의 책임감에 의구심을 던지며, 무엇보다 명백한 희생자들이 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회 부조리를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호는 유족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일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세월호 전과는 달라졌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 이전의 세월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세월호 이전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세월호 사건은 이미 예견된 인재였는지도 모른다. 재작년 마지막으로 방문한 강정 평화 운동지에서, 평화 운동가들이 이런 의견을 나누어 주었다. 미군 기지 건설을 위해 평택 대추리를 밀어버리고 원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기지 건설과 원주민 이주 반대시위를 강압적으로 진압한 대추리 사태 (2006), 용산 재개발 과정 중 무리한 강경 진압으로 철거 반대를 주장하는 주민들을 화재로 죽게 만든 용산 화재 사태 (2009), 강압적인 강정마을 해군 기지 건설은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와 결탁한 군사주의, 생명보다 개발 우위의 논리, 위로 부터의 의사결정 방식, 이념으로 분리된 사회 구성원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세가지 사건을 깊이 분석해 보면 “주한 미군”이란 연결 고리도 찾을 수 있다. 이 사건들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일상이 무너진 시민들, 일상이 바뀐 시민들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과 이들 사건들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방산 비리로 인하여 싸구려 무기를 지급받고, 군생활 중 사고로 죽은 젊은 군인들과, 세월호 사건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상관관계가 반드시 있다고 본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비리 뿐만 아니라, 군사문화에 기반한 사회 전반에 퍼진 위계구조, 계층과 성별 사이의 갈등 등등. 모든 억압적인 사회 문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강정마을 평화 운동이 세월호 기억과 진실 운동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세월호 운동이 다른 종류의 평화 운동과 다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들은 오리무중인 한국 사회에서 평화란 무엇이며, 예수의 평화는 어떻게 상상되어질 수 있을까? 우선 나는 평화란 “일상”을 지키는 행위라고 본다. 나와 내 가족만의 일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난 “일상”을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한 폭력과 전쟁, 억압으로 인하여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이 다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힘들어도 폭력의 역사, 거대 담론이 아닌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3월 시카고에서 Pacific Asian North Asian American Women in Theology and Ministry모임이 있었다. 이번 모임은 특별히 시카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시안 사회 운동가들을 초청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시카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온 통계학자 김지인님 이였다. “만약 세월호 사건이 없었다면, 저는 사회 운동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월호 모임에 동참한 후부터는 시카고 지역의 다른 사회 운동에도 연대 차원에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지인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월호를 직접 겪지 않았지만, 더이상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살기 위해서, 나의 일상을 회복하고, 세월호 유족들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유족들이 원하는 것을 지지하고, 세월호 사건과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 이들의 일상도 변하였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 중에 존재하는 평화의 씨앗을 볼 때, 우리는 예수가 이야기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서로의 일상을 지켜주고, 이 일상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함께 기울이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에 참여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 평화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기억해 주는 노력일 것이다. 마포구 정신대 대책 협의회 아래층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 박물관, 강정마을의 평화 도서관, 세월호 기억의 숲, 제주 4.3. 평화 박물관 등등. 한국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노력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의식적으로 찾고, 기억하고, 일상화 시키자. 우리도 다른 일상을 살 수 있다. 노란색의 일상,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노란색을 찾아볼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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