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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고대 근동의 Sex & Sexuality 5] "알았다, 임신했다, 낳았다" (송민원)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4. 1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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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의 Sex & Sexuality – "알았다, 임신했다, 낳았다"


송민원

(시카고 대학 고대근동학과 Ph.D. Candidate)


 

  5. 가나안의 Sex & Sexuality – "알았다, 임신했다, 낳았다"

  

       이제 성서의 배경이 되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땅으로 가보겠습니다. 어릴 때 읽었던 만화로 된 성경에 사람들이 멧돼지만한 포도송이를 나무에 꿰어 들러매고 가는 장면으로 이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이 묘사되었는데요, 그 이미지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현대 유전공학도 이루어내지 못한 그 비옥함의 성과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만약 이스라엘의 문화가 그러한 비옥함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면,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3:18)” 같은 표현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사실 이 지역을 지도에서 언뜻 보면, 이집트와 히타이트(헷),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라는 네 개의 거대한 강대국 한 가운데 있는데다 왼쪽으로는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 있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소규모 국가들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지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이 넓은 지중해 해안가 중에 실제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쪽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 지대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과 위쪽은 길게 늘어진 산맥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웃 강대국들이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있는 루트가 극히 한정적이고 그 길마저도 상당히 비좁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의 “풍요” 역시 상대적인 풍요일 뿐입니다. 사막과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사람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곳은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자리잡은 지중해 연안의 저지대와 이스라엘이 위치한 구릉지대 정도입니다. 이 두 지역에서나 어느 정도 강수량이 있고, 내린 비가 땅 밑으로 가라앉거나 산기슭을 따라 흘러내려가지 않아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지도]

       (이 지도에서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 곳이 사람이 살만한 곳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양옆으로 좁고 위아래로 길게 되어 있는 아주 좁은 지역에서만 생존이 가능함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 비효용성과 군사지리적 어려움으로 인해 이 지역은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때로는 이집트에, 때로는 히타이트에, 때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들에 정치-군사-문화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자세히 살펴보는 게 중요한 이유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가 이 가나안 땅의 문화와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속하지 않은 “외부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많은 면에서 주변의 강대국들과는 다른, 가나안 문화권의 하나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고고학적 증거자료에 기반해 재구성한 이스라엘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가나안문화입니다. 이 글의 주제인 Sexuality의 문제 역시 “범-가나안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고대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주장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문헌적으로는, 즉 성경은 주변의 어느 문화하고도 다르다고. 기독교 변증가들의 간절한 믿음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가나안 문화의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우가릿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리아 북부의 라-샴라(Ras-Shamra)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우가릿의 문헌들은 성서연구와 고대 이스라엘 문화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입니다. 사실 우가릿은 청동기시대가 막을 내린 기원전 1200년 경 멸망한 국가라, 고대 이스라엘이 국가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철기시대 초기(기원전 1000년 경)와는 200년 가량 차이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문학, 언어적 형태에 있어서 성서와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보입니다.



    


[우가릿 1, 2 + 우가릿 아크로폴리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그동안 이 “범-가나안 문화”를 정의해온 단어는 “풍요(fertility)”입니다. 풍요는 곧 “다산(多産)”입니다. 농작물이나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풍성한 재생산을 기원하는 것이 이들의 종교심의 핵심이자 발로입니다. 고고학 발굴에서도 이 지역 전체에 고루 다산과 풍요의 상징들이 발견됩니다. 주로 아나트, 아쉬타르테, 아쉐라 등의 여신상으로 추정되는 이 상징물들은, 그러나 놀랍게도 고대근동의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볼 때 성적인 상상력을 거의 자극하지 않습니다.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문화권 속에서 많이 발견되는 남근숭배사상 역시 제가 아는 한 이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여신상 1, 2]


       앞의 글에서 살펴보았지만, 20세기까지의 학자들은 이 풍요와 다산을 성전 매춘(Temple Prostitution)이나 성혼(Sacred Marriage)과 연결시켰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대부분 고대근동문헌 자체 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헤로도투스 같은 고전문헌들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경건한” 학자들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자극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기껏해야 15금 정도 되는 메소포타미아 문화도, “정숙함”에 있어서 이 가나안 문화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여신들과 비교해봐도, 가나안의 여신들은 거의 성모 마리아 수준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여신상]

       어떻게 “풍요”와 “다산”의 문화가 이 정도 수준의 정숙함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을까요? 한 문화권 속에 존재하는 이질적 개념들의 공존, 논리적 불일치는 고대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들의 풍요와 다산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가나안 문화의 핵심이 풍요와 다산인 이유는, 오히려 이 지역 사람들이 단 한번도 가난과 후세에 대한 걱정을 그쳐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도 풍요롭지 않았던 지역, 한번도 인구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던 지역, 그 곳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인 아트라하시스는 홍수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밤마다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워 신들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즉, 신들이 홍수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인구과잉 때문으로 보입니다. 문화유물론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한다면, 어느 지역나 시대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위해 어느 정도 인구증가를 억제하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정착문화-도시체제는 꾸준한 인구증가를 양산했고, 어느 순간 더이상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는 순간에 다다랐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천재지변에 의한 인간청소라는 것이죠.


[아트라하시스]


       성서가 그리는 홍수이야기는 이것과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악함”(창 6:5) 때문이죠. 이 “악함”의 내용이 무엇인지 성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주지 않습니다만 인구과잉 때문은 아닌 듯 보입니다.[각주:1] 오히려 성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사라 이야기, 한나 이야기, 다말과 룻 등, 다른 고대근동문헌에 비해 성경은 놀랍게도 여성들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넘쳐나는데요, 그 대부분이 아이 낳기의 어려움에 대한 것들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역시 자손에 대한 것이었죠.

       우가릿에서 발견된 문헌들 중 3대 서사시로 불리는 것이 바로 “바알신화(Baal Cycle)”, “아카트(Aqhat) 이야기”, 그리고 “키르투/키르타(Kirtu/Kirta) 이야기”입니다. “우가릿의 욥”이라고도 불리는 키르투는 이야기 초반에 일곱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잃고서 신 일루(’ilu = 성서의 “엘”)에게 후손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카트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일(Dan’il = 성서의 다니엘)”인데, 그 역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렇듯 이 가나안 지역은 힘들게 땀흘려 일을 하지 않고는 삶을 버텨내기가 힘든 지역이었고, 대를 잇기 위해서는 시동생이든 시아버지든 가릴 처지가 못 되는 곳이었습니다. 후처를 들여서든 이방인 며느리를 친척에게 재가시키든, 자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용서되는 것이 “성서적 윤리관”입니다. 이런 윤리관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땅의 척박함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문화의 풍요와 다산에 대한 집착은 바로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현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문화권 속에서 “성”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자손번식의 수단이라는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자손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모든 성행위는 “죄악”이 됩니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피임은 수간이나 동성관계와 마찬가지로 죄악입니다. 생리기간의 여성에게 성서가 “불결”이라는 라벨을 붙인 이유 역시, 가임기간이 아닌 여성과의 성행위로 자손을 번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풍요와 다산과 금욕이 서로 연결됩니다. 성경을 비롯한 가나안지역 문헌들은 성행위나 사랑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극도의 자제력을 보여줍니다. 성서의 “알았다-임신했다-낳았다”, 혹은 “누웠다-임신했다-낳았다”는 극히 간결한 삼단논법 이상을 가나안 문헌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읽은 문헌들 중 그나마 가장 “야한”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두 여자는 일루(엘)의 아내가 된다 / 일루의 아내, 영원히 그의 것(이 된다) 

그는 몸을 숙여 그들의 입술에 입맞춤한다 / 그들의 달콤한 입술, 석류 같이 달콤한 

그가 키스했을 때 그들은 임신했다(직역: 임신이 발생했다) / 그가 안았을 때 정열(뜨거움)이 있었다 

그들은 쭈그려 앉아 샤하르(새벽)와 샬림(황혼)을 낳았다 

(KTU 1.23, rear 47-55)



[KTU 1.23] 


       이 장면도 사실 우가릿 원문으로 보면 “키스했다-임신했다-낳았다”에서 단어만 몇 개 더 추가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오늘 살펴본 가나안은 거대한 남근상들과 다양한 체위의 묘사들이 특징이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는 전혀 다릅니다.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정숙과 금욕”의 문화가 탄생한 것은 “젖과 꿀이 흐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나안 땅의 척박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성 하에서만 성서의 성윤리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인구가 한 곳에 밀집하는 것의 위험함에 대한 이야기는 홍수사건(창 6-9장)이 아니라 바벨탑사건(창 11장)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성서가 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예루살렘 근처로 보지 않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그려낸 것은 상당히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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