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갱)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6. 6. 6. 21:12

본문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호프집에선 한 여자가 죽었다


-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0.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던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거, <채식주의자> 읽어 봤냐?” “네, 당연히 읽어봤지요.” 아버지는 내 감상을 조곤조곤 물어보다가, 내가 나름 긍정적이었다고 하자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난 별로더라. 어떻게 그런 소설이 상을 탔는 지 모르겠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왜 별로였냐고 묻는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감동이 없고, 인간적인 정도 없고.. 그런게 뭐 상을 탔나 싶다.” 


   노벨문학상에 버금간다는 ‘맨부커상’에 대해 접하곤, 아버지는 <노인과 바다>나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소설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단단한 근육 위로 바짝 선 핏줄 같은, 노장의 짙은 풍미가 지배하는 세상 말이다.  


   아버지는 어쩐지 추천해드린 <7년의 밤>도 퍽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저 스릴러 영화 같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신 선물을 고민하다가, 고민 끝에 시인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을 골라 들었다. <사슴>을 들고 계산을 기다리면서 나는 어떤 고집 센 취향에 대한 상념에 빠져 들었다.


1.


    얼마 전 SNS에서 대학 시절 교수님의 포스팅을 접했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아득하게 남았다. “실제로 중앙 문단의 한국문학사도 ‘순수/대중’으로 전개되어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순수/대중’의 대립은 ‘순수’ 비평가의 틀이어다. 또 이 틀은 구별짓기에 기초하며 꽤 ‘혐오적’이다. 여성, 소수자, 노동자 및 대중에 대해.”[각주:1] 


   한강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분명 ‘순수 문학’에 속할테지만 이청준, 김훈,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명작 전집’을 읽어 온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장르 문학’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계기들이 일상의 시간을 파열내 버리고, 이윽고 소설의 세상은 현실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 작가의 의견이나 목적같은 건 강하게 휘몰아치기 보다는, 바스라지는 듯한 생의 감각과 섬세하게 엮인 감각의 틀 속에 사라질 듯 말 듯 고요히 잠자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처럼 명실상부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노인과 바다>처럼 직접 대화를 건네지도 않는다. 보여주는 건 실타락처럼 풀어헤쳐지는 어떤 기묘한 감각과 감성들 뿐. 분명 그건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세계명작 전집>에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전집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찾기는 극히 힘들었다. 아버지의 서재엔 <죄와 벌>, <무기여 잘 있거라>,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방인>, <데미안>, <1984>, <위대한 개츠비> 등이 있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고전 명작 시리즈의 팔할 정도가 꽂혀 있었고, 아버지가 구매하지 않은 나머지 이할의 목록을 찾아보니 그나마 <인형의 집> 한 권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을 상황은 눈에 보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결코 순전한 개인의 취향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가 여태 접해 온 세계 명작, 그리고 고전 시리즈 가운데 여성의 세계는 거의 없었다. 여성 작가도, 여성성의 세계도, 그리고 여성이라는 질문 조차도.


2.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호프집의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한 시간이나 화장실을 서성였던 가해자는 이십대의 여자를 발견했고, 그녀는 억울하게 살해 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에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성혐오 범죄’라는 말이 끓어 올랐고, 너무나 쉽게 반대편의 전선이 생겨났다.


   이 전선에서 한 발짝 떨어진 일각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목소리를 두고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 고 했다. 정신분석학과 수사학은 이 사건을 조현증 환자의 개별 문제로 보았고, 사회학과 여성학은 한 사람의 가해자보다 그를 둘러싼 이 사회 속의 여성 혐오 문화를 지적했다. 서로의 결에 따라 분석하고 도출해낸 결과였으나 합리와 객관은 전자가, 비약과 감성은 후자가 각각 차지했다. 남녀 뿐 아니라 학문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학문과 전문가도 그랬는데 비전문가인, 순전히 ‘여성’일 뿐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들의 공포 수위는 끔찍하게 치솟았는데, 일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되려 ‘남성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의 삼일장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한편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영혜는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다. 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느냐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꿈을 꿨어"라고 나직이 답한다. 그녀의 꿈은 붉은 피와 날것의 고깃덩어리로 점철되어 있었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고기를 끊고, 브래지어를 풀어버린다. 영혜의 남편은 ‘고기 냄새가 난다'며 섹스를 거부하는 영혜를 강제로 벗겨 삽입하고,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단지 그녀는 채식을 할 뿐이었다. 


   영혜를 둘러싼 남성성의 세계는 영혜를 혐오했다.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그녀의 유두와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식성, 그리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그녀의 이야기까지- 다른 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입을 틀어 막고, 멸시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던 것이다.


3.


   한강의 소설에 대해 ‘K문학의 쾌거'라고 묘사하는 사람들은 ‘여성혐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같은 날 일어난 대조적인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한 여자의 성공은 사회가 너무나 손쉽게 취득해 가는 데에 반해, 다른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그 책무에 대해 열렬히 반대한다. 그것을 ‘남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일부러 오독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성혐오'라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멸시하고 혐오하고 조롱한다. 심지어는 성적인 표현을 끌고 들어와 모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언제나 ‘너무 과잉되었다.’라는 평가는 늘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몫이다. 채식을 고집했을 뿐인 영혜를 향해 모두가 힐난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모두가 실은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도 하고, 주말에는 아기를 잘 돌보는 사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군대도 다녀온데다가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게 ‘잠재적 가해자'라니, 분노할 수밖에 없을 일이겠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은 오직 당신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고전 문학 시리즈에 여성의 작품이 없는 것, 역사 책에 여자란 선덕여왕과 유관순밖에 없는 것, 대기업 임원급에 여자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사실들. 이 모든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던 영혜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안돼?” 그녀는 그녀의 몸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했고, 그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기 원한 것 뿐이었다. 바라건대 영혜와 함께 질문해주시라. ‘그러면 안되는 걸까? 왜 안됐었을까’라고. 대답이 아닌, 질문조차도 우리에겐 희망이다.


   꽃보다도 아름다울 나이, 그녀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웹진 <제3시대>

  1. 천정환 교수 페이스북에서 발췌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