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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이름, 짓다 (김윤동)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6. 9. 2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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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 방에는 고서(古書)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소장하신 책은 죄다 한자여서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몇 개 알아볼 수 있는 몇 개의 한글제목 책이 있었다. 그 소수의 책들 의 제목 또한 거의 한글로는 되어 있으나, 대체 무슨 책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한자 음역의 책 제목들이 다수였고, 내 관심이나 깜냥으로는 알 수 없는 책들이 많았다. 그 중에 제목이 너무나 강렬하여 내 눈 속으로 돌격해 오는 제목이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누가 함부로 이름을 짓는가?’라는 책이었다. 책 표지마저 새빨간 색이었던 그 책은 제목은 너무나 강렬했지만,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이름을 잘 지으라’는 이야기겠거니 하며 꺼내서 읽어 보지는 못했던 그런 책이었다. 그 책을 탐독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돌아가버리신 할아버지는 이름이란 자고로 ‘부르기도’ 좋아야 하고, ‘뜻’도 좋아야 한다는 성명에 관한 확고한 이론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6년이 지난 지금 할아버지의 책 중에서 그 책이 가장 생각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그 책의 제목이 어린 시절 내 마음 속에 강렬했던 모양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매우 신중한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줄곧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고, 무의식 속의 그 명령 때문인지 얼마 전 태어난 나의 딸 아이의 이름은 고등학교 1학년인 17살 무렵에 이미 생각해 놓았던 ‘김수현’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나의 이름을 지어가기      


   누구나 — 별명이 아닌 자기 고유의 — 이름은 누군가로부터 지음을 받는다. 이미 태어났는데 이름은 지어져있다. 어느 순간 의식을 차려보면 나는 이름이 있다. 그것이 아버지가 되었든 어머니가 되었든, 할아버지/할머니, 심지어 이름 짓는 작명소가 되었든 나 아닌 다른 이가 나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너는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관해 애초에 나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의미다. 이름이란 모름지기 정체성, 곧 그 존재의 의미를 뜻하는데 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애초에 나에게 결정권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면 그만큼 나란 존재가 이미 타자에 의존된 존재란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애초에 ‘무엇이어야 한다’는 그 일면 축복과 강요가 뒤엉킨 그것이 바로 ‘나의 이름’인 것이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무엇’이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존재의 가능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태어난 것이 미리 예정되었고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앞서 말했듯 축복과 강요의 정치학이 살아있는 한국의 이름짓기 방식은 ‘돌림자’라는 특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요즘은 그 돌림자라는 것이 구태의연하단 생각이 많아서 돌림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고 부르기 좋거나 유행하는 이름을 넣는 방식으로 짓곤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에 가문에 소속되지 못할 것만 같은 부담감을 이겨내야만 하는 숙제가 있다. 그것이 화석화되어 지금은 그저 허울뿐인 가부장제의 잔재로만 남아 있어 그런 부담감마저도 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만큼 이름에는 나의 계보와 근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우주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떠안고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 계보와 근원 말이다.

    고로 내가 떠안고 있는 나의 이름이란 지금 내가 이뤄내야 할 하나의 사명이다. 내가 ‘OOO’이란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이름의 성취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기로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 아주 작지만 매우 소중한 일부분의 일을 맡아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는 동녘 동(東)에 윤택할(또는 빛날, 젖은) 윤(潤)이라는 이름을 쓰는 나는 곧 빛나고 윤택한 삶을 살도록 요구받은 것이다. 윤택하다는 것은 내 존재가 빛나라는 온 가족의 염원을 담아 지어진 것이겠지만, 그 이름은 ‘빛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윤택한 삶’이란 게 무엇인지 날 고민하게 하였다. 나의 이름을 지은 할아버지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그런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 그런 이름을 지으신 것일테지만, 이미 그 의미는 할아버지나 나의 손을 떠나 이제 그 이름을 지닌 나란 존재가 어떻게 윤택하게 살 것이며, 나 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을 이루는 사회 전체가, 더 나아가서는 지구 상의 생명체 모두가 ‘윤택하게 산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로써 ‘김윤동’으로서의 나는 내가 다른 이와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윤택함, 즉 다른 사람의 어둠을 먹이 삼아 얻을 수 있는 윤택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명이 윤택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윤택하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신 것이다. 


    즉, 이름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이름을 ‘짊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이름을 설계도 삼아 삶을 짓는 건축가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집을 짓듯 나의 삶을 그 이름에 걸맞게 짓고 만들어가야 한다. 내 이름은 ‘선취(先取)’된 것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만, 이미 지어졌다. 내 이름의 뜻으로 나는 비록 완성되진 않았더라도, 살아서 완성해내야 하는 존재로 탄생되었다. 내 존재의 의미란 하나님에 의해 태초에 계획되었고, 아버지/어머니에 의해 매개되었으며, 나라는 존재에 의해 성취되는 구조다. 설령 나의 이름이 아버지가 딸 낳고 술 잡수신 채로 제발 내 아래로는 아들을 꼭 낳으라는 뜻으로 ‘O자(O子)’라고 이름 붙여졌을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아들을 낳기 위한 염원을 넘어 왜 우리 사회에서 아들을 꼭 낳아야 하는 것인지, 아들을 낳는 것은 어떻게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유익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 그 존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지어진 것으로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게 바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가진 ‘이름의 운명’이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이 우주의 장구한 역사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내 이름을 지어가기 위한 사람이다. 내 이름에 걸맞는 내 삶을 튼튼한 벽돌로 기초를 세우고 비어 있는 틈을 메우고 아름다운 장식물로 꾸며 완성해 내야할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대체 이렇게 저렇게 끼워 맞춰도 의미가 찾아지지 않는 내 이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온 인류의 과제를 짊어진 이름임을 기억해야 한다.


타자를 부름으로써 지어지는 내 이름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존재가 이름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삶의 설계도를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 이름이라는 설계도를 지으려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밥을 지으려면 쌀이 있어야 하듯 설계대로 내 삶을 지을 재료가 있어야 한다. 나 홀로 내 이름을 지을 수 없다. 즉, 나는 설계도만 가졌을 뿐 아무 것도 아니다. 혼자인 나는 ‘가능성’일 뿐 실제로는 존재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름만 가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모든 이름이란 그래서 존재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게 역설적인 특징이다.

    결국 내가 이 세상에 있기 위해서, 나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타자를 불러야 한다. 모든 일은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춘수의 ‘꽃’이 왜 이름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시가 되었고, 우리의 존재를 뒤흔드는 시가 되었을까. 바로 ‘타자를 부르는 일’로부터 우리의 이름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1연과 2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몸짓’과 ‘꽃’은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다. 그가 몸짓이라고 흔들어 대도 내가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몸짓이지 꽃이 아니다. 여기서 ‘그’와 ‘나’를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3, 4연에서는 결국 1, 2연에서 벌어진 몸짓과 꽃의 관계를 근거 삼아 나의 존재를 성찰한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즉, 부름은 모든 일과 사건의 시작이다. 내가 부름으로 타자는 불려지고, 사건은 발생한다. 또한 타자를 내가 부름으로 나는 비로소 그에 대응하는 ‘내’가 된다. 부름이 사건을 만들어 서로의 이름이 되고, 그 이름은 존재가 ‘된다’. 기묘하게도 창세기 2장의 창조기사에서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개역개정)


       이 구절 전까지 아담은 그 최초의 개체로서의 인간, 바로 그 사람으로서의 ‘아담(Adam)’이라고 불려지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했을 때는 그 개체가 속한 종(種)의 집합적인 이름으로 일컫는 것이고, 또한 그를 일컫는 말 ‘남자’, 또는 ‘생령’이라는 그의 다른 이름은 종의 집합(무리)이 가진 특질(Character)을 말하는 것이었지, 그 개체의 고유 이름 ‘아담(Adam)’은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하와가 창조되기 전이므로 복수(複數)의 인간이 없었기에 이름에 개체적 특징과 집합적 특징이 구분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성경에서 그가 단독적인 몸을 가진 바로 그 한 사람 ‘아담’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각종 들짐승과 새들을 이끌어 가셔서 관계를 맺게 하실 때에 마침내 그는 ‘아담(Adam)’이 된다. 전까지 아담이 아니었던 그가 하나님이 들짐승과 새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시면서 비로소 ‘아담(Adam)’이라는 고유성을 획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담(Adam)은 ‘흙’이라는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가 그만 타락했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짓게 된 인류는 이후 ‘이름이 없는’ 죽음과 무(無)의 심연 속에서 고통받으며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성경에서는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 언제 어떤 형태로 죽을지 어떤 이유로 죽게 될지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린 ‘죄의 결과’라고 매끈하게 단정짓기 전에 죄란 게 당최 무엇인지 해명해내야 하며, 그 전까지는 ‘매우 지당한 죽음’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매우 그럴싸해 보이는 알고리즘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나 존재의 죽음 앞에서 – 보통의 사람이라면 – 우리는 ‘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두 번째 아담이자,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는 탄생부터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승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죽음과 그에 따른 고통에 이름을 짓는 자리에 늘 계셨다. 그 분이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 그 자체를 몸소 겪으신 분이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 알려져 세상에 빛도 보기 전에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바로 그 분이 바로 ‘임마누엘’ 아니던가? 헤롯왕이 휘두른 영아 살해의 칼날 앞에서 홀로 살아남아 겨우 도망친 ‘유대의 임금’아니신가? 이 세상의 무자비한 전쟁과 폭력 속에서 늘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자체가 아니신가?

       그러나 그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셨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수군수군거릴 때, 그 천한 신분으로 가장 신성하고 높으신 야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눅 2:49) 이후에도 예수는 거침이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던 촌뜨기들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역자로 불렀다. 이러한 부름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등 권력자들이 보기에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고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눈엣가시와도 같은 부름이었다. 또한 안식일에 배고파 하는 자들을 위해 직접 일을 지휘하심으로써 안식일을 ‘사람을 위한 날’이라 개명(改名)하셨다. 하지만, 이름 없어 고통당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다. 베드로에게는 게바라는 이름을 더하셔서 그를 튼튼한 반석 위에 존재를 세우셨다. 또한 매일 밤낮 소리 지르고 자기 몸을 못살게 구는 이에게 모두가 한결같이 ‘귀신들린 자’라고 낮춰 부를 때, 찾아가 대체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신 것이 바로 예수였다. 앞뒤 모르고 경계없이 날뛰는 자에게 한계를 일러줌으로써 귀신들림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셨다. 또한 죄인이라 낙인 찍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그 이름들에 다정하게 ‘순결하고 의로운 자야!(삭개오의 이름 뜻이다.)’라고 부르시며 그가 단지 세리나 죄인이 아닌 ‘삭개오’라 호명(呼名)하셨다. 예수의 사역은 곧 권력자들이 독점하고 악용하는 이름들에 대한 개명(改名) 사역이요, 이름 없이 사회 속에서 존재 없는 자들에게는 명명(命名)사역이었으며, 잊혀진 이름을 다시 불러 이 세상으로 소환하는 호명(呼名)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를 부르고 이름을 짓는 일들을 통해 예수는 ‘자기 민족을 구원할 자’라는 선취된 자기 이름을 지어갔던 것이다.


남겨진 과제 : 지어가야 할 이름들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짓지 말아야 함을.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왜곡 자체란 것을. 사실 우리는 이미 십계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함부로) 짓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다. 내 멋대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짓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나와 타자의 이름 또한 함부로 지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서 비롯된다. 5. 16을 ‘군사혁명’이라 부를지, ‘쿠데타’라 부를지, 5. 18을 ‘민주화운동 또는 민주화혁명’이라 부를지 ‘사태’라 부를지, 4. 16을 ‘사고’라 부를지 ‘학살’이라 부를지 모든 것이 이름의 문제다. 어디에 설 것인가는 어떻게 부르고, 어디까지 다다를 것(이르다->이름)인지에 대한 문제다. 이름 안에 실체가 있고, 이름이 실체다.

       하지만, 우리는 명백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을 ‘모퉁잇돌’이라 기억하는 그 이름 예수의 비밀을 믿는 자들 아니던가.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이름, 짓는’ 모습들을 말이다. 가서 이와 같이 하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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