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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춤추는 투쟁을 원한다.(유하림)

페미&퀴어

by 제3시대 2016. 10. 1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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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투쟁을 원한다



유하림*

 


   엄마아빠는 이십대 시절 소위 말하는 운동권 이었다. 덕분에 어릴 적 부터 집회에 참여하곤했다. 그들 대신 나를 맡아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따라 나선 집회 였지만 신나게 ‘2MB OUT’을 외쳤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같은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 그저 재밌었다. 그리고 열네살이 되었을 때 아빠 손에 이끌려 대안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입학하고 2년 정도가 지나서 였을까, 친구들과 내가 조금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5.18에 관한 다큐를 보면 줄줄 흘렀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친구들 몰래 눈물을 닦던 일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책상에 엎드려 시간을 때우거나 담담히 보던 영상들을 가슴이 벅찬 채로 시청했다. 나는 친구들과는 달랐다.  

   학교에는 운동권이었던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 한국 현대사와 정치, 경제 같은 것들을 배웠다. 처음으로 세상의 온갖 불의한 일들에 대해 알게 되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주말에 열리는 집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 때는 2011년 겨울이었는데 한창 한미 FTA 반대 집회가 열리던 시기였다. 평일에는 강원도에 있는 학교에서 기숙생활을 하고,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회에 나가는 것으로 보냈다.   

   솔직히 내가 스스로 찾아간 집회는 너무 지루했다. 영상을 보는 것 만큼 가슴이 벅차 오르지도 않았고 오히려 빨리 시위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는 말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집회에 참여했다. 십대의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FTA 발효를 하루 남기고 있던 평일날에는 선생님께 매달려 수업도 빼고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했다. 그렇게 열정적이던 나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FTA는 2012년 3월 15일에 정상적으로 발효되었다.   

   너무 허무했다. 바뀔 수 있을 줄 알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어른들의 말처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집회에 나갔다. 내 마음 속엔 역사적 존재로서의 사명감 같은게 있었다. 타고난 것도 있고, 어릴 적부터 보고 자라기도 했다. 당장은 내 일이 아닐지라도 결국엔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집회에 나갔다. 그러니까 의리로 집회에 간 것이다. 가면 지루할 것이 뻔한 집회를, 당장 바뀌는 것이 없을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시간을 내고 친구들을 모아 꾸준히 참여했다.  

   작년에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긴 투쟁의 역사를 지닌, 진보 대학이라고 손꼽히는 대학이다. 우리 대학에는 여전히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존재한다. 학생운동, 젊은 사람들이 꾸리는 운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기존의 집회 문화와 다를거라는 기대였다. 그 기대는 얼마가지 않았다. 학생총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대학 구조조정에 대해 반대 하며 다같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치자고 했다. 우리가 보고 자라온 것이 그것 뿐이어서 그랬던걸까? 대학에서도 지루한 그 구호를 외쳤다. 박근혜 정권이 퇴진한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정권의 문제로만 다가가는게 실제 우리에게 닥친 일의 본질을 흐려버린다. 나는 대학 안에서 조차 의리로 투쟁 현장에 나갔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불만이 쌓였다. 어렵게 시간을 내고 마음을 모아 참여한 집회에서 얻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 곳에 왔다는 사실 뿐이라면 갈 필요가 있을까.  

   영화로도 나온 "리스본 행 야간열차"라는 책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다.’ 불의한 일에 대한 투쟁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방식이 늘 똑같을 필요는 없다. 집회는 무언가 바꾸기 위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퍼포먼스다. 기득권을 향한 퍼포먼스 이면서 집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퍼포먼스 이기도 하다. 모든 집회를 재밌고 웃기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늘 비슷한 집회의 구조에서 벗어나자는거다. 30년 전에 부르던 민가를 부르고, 현 정권을 향한 퇴진을 요구하고, 각 소속집단의 대표들이 돌아가며 연설하는 집회말고, 가끔은 꿀같은 주말을 희생할 만큼 재밌는 집회를 원한다. 나는 현실적이던지, 흥미롭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춤이라도 출 수 있는 그런 집회를 원한다. 고등시절에 우연히 본 월가의 시위 장면이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가면을 쓰고,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피켓엔 제멋대로 쓴 글씨들을 채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월가를 점령했던 그들을 떠올린다. 재밌고 신나서 가고싶은 집회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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