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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6] 교회건축과 대형교회 (김진호)

[연재]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김진호)

by 제3시대 2016. 11. 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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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여섯 번째[각주:1]


교회건축과 대형교회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990년대’라는 시대성, 그 반영으로서의 교회의 캐릭터화


    앞의 글들에서 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개신교 교세의 정체 상황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 중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이 교회들의 빠른 성장이 ‘1990년대’라는 변화된 시대성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것을 ‘이성의 기획으로서의 제자훈련’과 ‘감성의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이라고 요약하였다. 

    그 변화된 시대성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권위주의 시대는 절대권력의 영웅주의적 통치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오직 충성이라는 덕목으로 무장한 수동적 국민이어야 했다. 이 시대에 사회와 함께 동반성장을 이룩한 교회들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절대일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속된 종교집단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정치에서 영웅주의는 퇴출되었고 ‘주권적 존재’로서의 시민이 민주주의를 위한 주역으로 부상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 계기는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이었다. 이제 정치인은 주권적 시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캐릭터화해야 했다. 여전히 대통령은 ‘제왕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주권적 시민의 선택을 받기 위한 노력이 절대 필요한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국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같은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들은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시민에게 어필하기 위해 새 정부를 캐릭터화 하려 했던 대표적 흔적들이다. 

    한데 이러한 캐릭터 정부의 출현에서 중요한 전제조건은 주권적 시민의 대두에 있다. 이때는 국민의 생활수준이 한결 높아졌고 고학력층도 비약적으로 늘어난 시기다. 그 무렵 사회에는 민주국가를 설계하기 위한 무수한 강좌와 공부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저작들이 출간되었다. 인문・사회 비평적 계간잡지의 전성시대이기도 했고, 무수한 논쟁이 벌어지던 때이기도 했다. 전례 없는 광범위한 지적 탐구 붐이 일어난 것이다. 주권적 시민의 대두는 대안적 사회 설계를 위한 이와 같은 활발한 이성적 탐구의 과정에서 나타났다. 

   한편 이 시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독재권력의 손아귀에서, 국민만이 아니라, 기업도 벗어난 것이다. 아니 실은 기업들은 거의 방임에 가까울 만큼 무분별한 자율공간으로 풀려났다. 고삐 풀린 기업들은 어떠한 공공적 책임의식도 없이 게걸스런 욕구를 무한히 발산하는 시장을 만들어 시민을 유혹했고, 시민은 그곳에서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본주의적 경쟁의 시스템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런데 한번 들어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그 무한경쟁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몸과 정신이 병들어 갔다. 그 시스템에서 경쟁력을 지닌 이들도 예외 없다. 하여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 체제가 일으키는 질병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온갖 치료(therapy)와 치유(healing) 프로그램의 열광적 소비자가 되었다. 이때 치료가 이성의 프로그램이라면 치유는 감성 프로그램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종교적 치유는 감성의 기획으로서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다룬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일각에서 각각 이성과 감성 부문의 종교적 상품으로 캐릭터화된 신앙 프로그램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주권교인들은 그것을 열렬히 소비하였다. 이 두 교회의 빠른 성장은 바로 이렇게 1990년대라는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였다.  


1980년대, 교회건축과 대형교회의 탄생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보자. 캐릭터화된 대형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1990년대, 교회의 위기가 엄습해오던 그 시기와는 달리, 한국교회가 승승장구하던 1980년대에 그 교회들은 이미 대형교회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즉 그 시대는 캐릭터화된 교회들이 대형교회로서 탄생하던 때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형교회의 탄생이 특정 지역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강남, 강동, 분당이 그곳이다. 왜 이곳인가?

    이향순과 이광순의 공동연구인 〈도시 구조의 변동과 대형교회의 성장〉(《선교와 신학》 10집. 2002.12)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이 지역들에서 대형교회가 집중된 것은, 근대도시로 서울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가 정책의 효과로 발생하게 된 도시구조 변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강북의 사대문 인근과 영등포 지역에 한정된 근대도시 서울의 첫 번째 발전 단계는 과잉도시화(over-urbanization)다. ‘과잉도시화’란 도시의 수용능력을 크게 초과하는 인구 밀집 현상을 뜻한다. 이에 정부는 인구 분산을 위해 도시를 확장하는 정책을 취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발전 단계다. 이때 영동(영등포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오늘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지구가 개발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 옆의 강동지역까지 확장된다.(이때 강서, 강북 지역도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만 강남과 가까운 강동지역이 과잉발전 하였다.) 또 인근 지역에 신도시들을 개발하여 서울의 부속도시화하는 일련의 단계를 통해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서울이 완성된다. 여기서도 강남과 인접한 분당이 다른 신도시들보다 월등히 발전한다. 이 두 번째 단계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지만, 1980년대에 와서 본격화되고 1990년대에 절정에 이른다. 

'영동' 신시가지 조감도 (1971)


    그런데 강남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안정계층을 이 지역으로 유치하는 조치들을 노골적으로 밀어붙인다. 특히 이곳에 현대화된 아파트 대단지가 조성됨으로써 자산능력이 있는 젊은층이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다양한 특혜조치가 마련된다. 여기에 토건세력들이 이러한 정책기조에 기생하여 활개 치면서 지대가 다른 지역들보다 놀라울 정도로 크게 상승한다. 즉 이곳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 이주민들은 지대 상승으로 인해 보다 안정된 중상위계층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강남과 그 주변의 지역들에서 대형교회로의 성장이 집중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단지 아파트로 인구집중이 빠르게 일어난 덕이다. 강남의 인구 증가는 1970년대 빠르게 증가하다 1980년경부터 급가속화되기 시작해서 1990년경 절정에 달하고, 이후 거의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즉 강남으로의 인구 유입의 급격히 일어난 시기는 1980년대이고, 바로 이때에 인구가 많이 유입된 지역들에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그것은 1980년대는 인구 유입 현상과 대형교회 현상이 서로 정비례 관계였음을 뜻한다.  

    담임목사들이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교인들의 총화를 이룩했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함으로써 대형교회로의 성장이 이룩되었다는 공식은 이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다만 이 시기의 특이점은 그 리더십이 ‘교회 건축’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교인들을 총동원하여 대규모 교회 건축에 성공하였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교회의 비약적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강남, 강동, 분당이라는 지역의 특성과 교회의 독점적 리더십이 결합된 결과 대규모의 교회 건축이 실현되었다는 얘기다.  

    대규모의 교회 건축은 막대한 비용을 조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때 수완 있는 목사들은 교인들을 설득하여 발 빠르게 개발 초기에 큰 땅을 비교적 저렴하게 매입하거나 대단지 아파트의 종교부지 입주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비용 절감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당 건축은 일반 건조물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게 상례다. 하여 교인 규모에 비해 월등히 큰 교회당 건축을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계획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특별한 능력에 속한다.  


광림교회 담임목사인 김선도는 신동아 그룹의 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빌렸고 교인들로부터 2억 원을 기부받아 1976년부터 강남구 서초동에 대규모의 교회당 건축을 시작하여 1978년 완공한다.


    물론 그것은 교인들이 그럴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강남, 강동, 분당이 서울과 인근 신도시의 다른 곳들과 명확히 대비되는 점은 대규모의 중상위계층이 유입되어 들어오고 지대의 급격한 상승으로 그들의 자산이 빠르게 증가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지대로 인한 초과이윤의 상당부분을 건축헌금으로 교회에 기부했다. 그 결과 대규모의 교회당이 건축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 교회들로 몰려들어왔다. 

    오늘날 강남 못지않은 중상위계층의 밀집지역이고 지대가 급격히 상승한 곳인 목동과 과천의 경우에는 대형교회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지역의 중상위계층의 규모가 강남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그 인근지역은 여전히 중하위계층이 많고 지대상승이 상대적으로 지체된 곳들이기에 대규모 교회당 건축을 위한 재원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요약


    이것을 글 서두에 언급한 교회의 캐릭터화와 연결시켜 정리해보자. 강남의 교회들은 1980년 어간부터 빠르게 증가하는 젊은 중상위층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신흥교회들임에도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 성공의 주된 요인은 대규모 교회당의 건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 건축은 지대의 상승과 밀접히 관련된다. 이때 지대로 인한 초과이윤을 건축헌금으로 기부하도록 이끈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 건축과 대형교회로의 부상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교회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은퇴 혹은 사망의 국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교회 권력구조가 변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뜩이나 이들 교회의 교인들인 젊은 중상위계층은 고등고육을 받은 데다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를 겪으면서 선행세대보다 더 주권의식이 강했다. 반면 신학대학은 퇴조하고 있었고, 목회자들의 수준은 퇴화했다. 교인들의 의식에서 이러한 지적 역전 현상이 뚜렷이 각인된 시기가 1990년대 이후다. 바로 이 시기에 많은 엘리트 교인들이 교회를 떠도는 현상이 심화되었고 그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과정은 주체의식의 차원에서 그들이 주권교인이 되는 것과 겹친다. 이러한 상황의 초기에, 떠돌이 교인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대표적 교회가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다. 시대성과 부합하는 캐릭터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양적인 성공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이 이 두 교회의 캐릭터를 벤치마킹하여 모방하는 붐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이 두 교회는 1990년대 한국의 대형교회 현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교회의 모델은 2천 년대에 오면 그 위상이 격하되거나 좌초해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대형교회의 캐리터화 현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교회들이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캐릭터화를 모색하는 시대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권교인의 신앙적 정치문화가 새롭게 형성되어 갔다. 한국사회의 보수주의는 1990년대 이후 이렇게 변모하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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