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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5] 알랭 바디우와 민중사건 (허석헌)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7. 1. 1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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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5]


알랭 바디우와 민중사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근대철학을 넘어서려는 탈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대체로 ‘동일성과 차이’, ‘주체와 타자’, ‘진리와 상황’의 양자 대립적인 개념들 안에서 제기되어 왔다. 탈근대의 철학자들은 두 개념들에서 후자를 선택함으로서 근대철학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즉, 동일성의 철학이 아닌 차이의 철학을, 일자로서의 주체의 철학이 아닌 타자의 철학을, 고정불변의 진리의 추구가 아닌 상대적인 상황을 철학의 소재로 전환하는데에서 근대철학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근대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인류진보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앞서 살펴본 철학자들을 간단히 되짚어 보자면, 푸코는 주체를 지식과 권력의 작용의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고, 라캉은 주체를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문제로 환원하였고, 들뢰즈는 경험을 인식하는 초월적 주체를 부정하는 대신 경험에서 발생하는 차이의 반복 자체를 존재의 힘으로 규정하였다. 플라톤과 일자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들의 비판들은 분명히 다른 서술방식을 가지지만, 이성의 주체에 대한 확신이 전체주의적 세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왜곡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주체와 진리와 같은 근대적 개념들에 유보적이 거나 과감한 포기를 선호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즉, 우리가 마주하는 주체란 왜곡된 존재이며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비판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근대철학이 주장해온 주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은 전통 형이상학의 획일성과 전체성의 폐해를 들춰내고 그러부터 탈피하는 데는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폐기된 주체가 또다시 변형된 왜곡된 주체, 지배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데 있다.   

    이 점에서,알랭 바디우는 지금까지 살펴본 철학자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바디우는 근대철학의 주체가 극복되어야 한다는데 동의 하지만, 폐기하지는 않으며, 탈근대적 주체를 지향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다. 반플라톤 정서가 지배적인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 진영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바디우의 행보는 분명히 이례적이다.물론, 바디우가 근대적사유에 근거를 둔 주체나 초월적 범주로서 진리의 개념으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주체와 진리에 대한 맹신이 초래하는 결과와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이점에서 그는 포스트모던을 지향하는 철학자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그의 존재에 대한 논거를 근대적 성찰의 출발이라고 불리는 데카르트에서부터 전개하기를 거리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반플라톤주의 정서를 거스르고 오히려 플라톤의 재해석으로부터 존재론을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합리주의적인 모더니즘을 발판으로 삼고 있는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철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면, 왜 바디우는 모두가 폐기시키기에 여념없었던 진리와 주체의 개념들을 다시 주워담는가? 모두가 해체, 다양성, 차이, 타자라는 화두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보성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마당에, 그는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받는 낡은 개념들에 미련을 두는가?


바디우가 주체와 진리를 다시 꺼내든 이유


    바디우가 주체와 진리를 철학이 다뤄야할 주제로 꺼내든 이유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그의 대표작인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이 어떤 상황에서 저술되었는지 볼 필요가 있다. 물론, The Concept of Model(1969)과 Theory of Subject(1982)는 ‘한 시대를 닫고 다음 새 세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각주:1] 바디우의 초기 저작들이다. 특히 ‘주체의 이론’은 ‘존재와 사건’의 예고편이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집합이론에 입각한 존재론, 사건과 개입, 일반 집합, 그리고 바디우의 네가지 ‘조건들’ 에대한 예시들, 즉 ‘시’, ‘정신분석’, ‘수학’ 그리고 ‘혁명’에 관한 유사한 주제들이 등장한다.[각주:2] 그렇다면, ‘존재와 사건’은 초기 저작들의 재판일 뿐인가?그렇지 않다면, ‘존재와 사건’은 ‘주체의 이론’이 저술된 초기 바디우와 무엇이 다르고, 어떤 점이 추가되었다는 것일까? 두 저작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바디우의 주체에 대한 철학적인 발전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존재와 사건’은 앞선 저서들에 무언가가 추가되고 업그레이드 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무언가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바디우는 더 이상 역사와 정치를 분석하기 위해 맑스주의의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사적유물론,당과 프롤레타리아, 혹은 역사변혁의 변증법적 과정과 같은 맑스주의적인 용어와 거리를 둔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존재와 사건’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바디우는 맑스주의의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의 상황에 대해 주목하였다.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과 68년 프랑스학생운동 후 의회민주주의의 후퇴의 상황들 가운데서, 맑스주의를 비롯한 혁명을 위한 거대담론은 해체되었고 철학에서 진리의 문제는 자리를 잃어갔던 것이다. 철학이 미시담론의 소소한 승리안에서 자족해야 했던 현실을 바디우는 위기로 파악했다. 맑스주의자로서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바디우의 지적인 반발은 맑스주의적 혁명 프로젝트를 위한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그 시도로서 철학에서 밀려난 진리와 주체의 문제를 다시 공론화시키고 제기히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존재와 사건’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철학의 해체와 파편화에 맞서기 위한 바디우의 지적 투쟁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존재와 사건’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근본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진리와 그것의 가능성으로서 사건, 그리고 사건의 담지자로서 주체에 대해 서술해 나간다. 이제, 바디우의 ‘존재-진리-사건-주체’로 이어지는 도식을 따라 그의 주체가 오늘 인간의 해방의 요구에 어떤 대답을 제시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자는 없다


    주체의 문제는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바디우 역시 오래된 질문이지만 비켜갈 수 없는 물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존재하는 것은 일자(the one)인가, 아니면 다수(the multiple)인가?’에 대해 먼저 답해야 했다. 그리고, 바디우는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일자성은 항상 하나로 카운트하기(count-as one)의 결과일 뿐”[각주:3]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일자는 비록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로 세기로 한 것’의 결과이지, 실제로 존재가 일자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는 존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로 인정하려는 어떤 작용의 결과물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일자는 하나로 셈하기의 결과일뿐, 존재하는 것은 다수이다’라는 사실은 집합의 기초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알파벳 a, b, c를 원소로 하는 집합 E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E ={a, b, c} 라고 표시된다. 왼쪽 항의 E는 오른쪽 항의 세개를 원소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오른쪽 항의 ‘다수’는 왼쪽의 E집합이라는 ‘하나’로 현시(presentation)된 것이다. ‘현시된’ 집합 E는 a,b,c가 ‘현시되는’ 것으로 만든다. 만약, 집합 E로 카운트되어 지지 않는다면 a,b,c는 불안한 형태로 남게 될 것이고, 존재가 드러나지않을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하나로 카운트 하기’는 ‘있는 것들’을 ‘있게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현시된 것’을 ‘현시되는 것’인 냥 동일시하는 것이다. 집합E를 통해 a,b,c라는 원소들이 드러나긴 했지만, 결국 현시되는 것은 E가 아니라 각 각의 a,b,c라는 원소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왼쪽항의 ‘일자’가 아니라 오른쪽항의 ‘다수’이다 

    이렇게, ‘현시된 것’과 ‘현시되는 것’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가 존재(being)와 현존재(existence)를 구별하는 형식논리와 같다. 비록 바디우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존재의 차이에 대한 사유방식을 수용하지만, 현존재를 존재론적 사유의 중심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하이데거가 존재와 현존재를 정확하게 구별하고 현존재를 사유의 중심대상으로 부상시켰듯이, 바디우는 다수를 ‘일관적인 다수’와 ‘비일관적인 다수’로 다시 구별시켜야 한다는 점을 제기한다는 논리구조는 유사하다. 바디우가 다수면 다수지 ‘일관적인 다수’와 ‘비일관적인 다수’로 구별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존재론은 ‘존재로서 존재(being qua being)’에 관한 이론이라는 정의에 충실해야 하는데, 일정한 상황의 구조적인 작용을 통해 드러난 ‘일관된(consistent)’ 다수는 이미 ‘존재로서 존재’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가 아닌게 된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존재’는 하나의 구조나 상황안에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음’이 긍정되기 위해서는 그 다수가 어떠한 구조적인 상황 속에 속하지 않았음을 밝혀져야 하는데, 이는 ‘다수’가 상황에 귀속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해야하는 조건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디우가 제시하는 상황의 구조안에서 현시되지 않는 다수를 ‘비일관적인 다수(inconsistent multiple) 혹은, 순수다수(pure multiple)’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다수’라고 말할 때, 그 다수는 ‘비일관적인 다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일관적인 다수는 어떤 형태로 확인되는가? 다수가 상황안에서 구조의 작용을 받지 않은 채 현시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무(nothing)’ 또는 ‘공백(void)’의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황에서 발생되는 구조의 작용으로부터 예외의 상태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없음’, ‘공백’의 형태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일관적 다수성의 예외적인 조건으로 인해, 바디우는 “존재의 적당한 이름을 ‘공백void’”이라고 부른다.[각주:4] 마침내, ‘존재하는 것은 공백이다!’는 명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바디우의 존재론은 일자로 셈하여진 존재는 물론, 일자에 의해 포섭된 일관적인 형태를 띠는 다수를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존재론이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론과학이라면, 존재의 대상은 오로지 ‘비일관적인 다수’가 되어야 하고, 공백은 존재의 자리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부딪힌다. 비일관적인 다수성은 공백과 무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은 어떻게 증명가능한 것인가?술어적인 표현과 설명을 거치는 순간 ‘비일관성’은 ‘일관성’을 가지게 되며, 일자의 규정성안으로 또다시 갇히게 되고 만다. 언어의구조를 통과하지 않고서 존재를 설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디우가 수학을 존재의 논리과학으로 대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디우는 존재의 규명에서 인위적인 규정과 간섭이 순수한 논리과정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를 위해 집합이론을 끌어온다. ‘존재와 사건’의 56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상당부분을 수학의 집합이론을 세세하게 증명하는데 할애하는 데에서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할 수있다. 이제, 바디우는공집합의 이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존재론이 진리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증명해 나간다. 


러셀의 역설과 공집합


    집합이론은 칸토어(Georg Cantor, 1845)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합론은 다음의 직관적인 집합이론(intuitive set theory)에서 출발한다.


    “x에 의존하는 어떤 명제 p(x)에 대해 p(x)가 참이 되게 하는 x들의 집합은 존재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뻔한 명제이다. 어떤 조건을 달아도 그 조건에 해당하는 집합은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의 집합론은 이 명제를 기반으로 확고하게 세워졌다. 적어도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이 이의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러셀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였고, 무신론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저술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로 잘 알려졌다.) 러셀은 오류가 없다고 믿었던 집합론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를 러셀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대상들의 집합을 R이라고 할 때, R이 R에 포함된다면 R의 정의에 위배되므로 R은 R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R이 R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R의 정의에 의해 R은 R에 포함된다.”[각주:5]

    이 러셀의 역설이 문제가되는 것은, 칸토어의 집합이론에 따른다면, X의 집합에는 조건문이 제시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대상들의 집합 R을 만족시키는 원소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러셀의 역설은 예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예외가 존재하는 한 칸토어의 집합이론은 성립될 수 없는 수학체계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러셀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수학자들이 연구하였고, 마침내 새로운 수학의 집합의 공리체계를 아홉가지로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제일 첫번째의 공리는 ‘공집합이 존재한다( )’이다. 공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집합이 존재한다(Axiom of exsistence)’는 기본적인 공리로부터,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가장 중요한 집합론의 공식이 되는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 집합이다”[각주:6]가 파생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집합의 존재와 그 공집합이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라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공집합이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는 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집합을 구성할 수 있는 원소가 없는데, 그 없는 것을 집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어떤 집합이든지 그 안에 있는 원소를 확인하면 공집합은 셈해질 수 없으나, 셈할 수 없는 공집합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서, X={a, b, c}라는집합이 있다고 할 때, X라는 주머니 안에는, a, b, c도 들어있지만, ‘없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다. 이 수학적 논리를 바디우의 존재론으로 대입하면, 집합은 ‘상황’이다. 모든 상황에는 현시되는 다수성의 이름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아래에서 안정되게 현시되는 다수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다수는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로 남게 된다. 반면, 존재하는 것은 하나로 셈하기를 거부함으로서 구조화 작용안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공집합 처럼 모든 상황(집합)에 부분으로서 현시불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공백’인 것이다. 따라서, 구조화된 상황에서 ‘있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없음’이며, ‘없음’이라고 간주되어 것은 오히려 ‘있음’으로 긍정되는 것이다. 언어에 의해 설명되지 않고 구조에 의해서도 포섭되지 않는 현시의 영역 외부에 ‘없음(nothing)’ 혹은 ‘공백(void)’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비일관적인 다수성’이 존재론의 출발점이 된다.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공백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백은 일자에 의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설명되고 파악될 수 없으며, 경험에 의해 감각되거나 인지될 수도 없는 돌발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때문에, 공백은 일관적인 다수의 상황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요소가 된다.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존재의 사실은 부정할 없기 때문에, 공백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황의 안정성과 통일성의 구조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결국, 일자의 형이상학에 의해 구조화된 획일적인 세계는 바로 ‘공백’의 존재를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진리, 사건 그리고 주체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공백 혹은 순수다수가 존재규명의 원리로 되는 것은 차이,다양성, 혹은 타자와 같은 테마들을 탈근대의 화두로 제시해왔던 데리다, 레비나스,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적잖은 도전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들뢰즈에게 존재는 차이에서 발생한다. 차이가 없다면 존재도 없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레비나스 역시 존재론과 윤리학의 출발은 타자이다. 주체는 자기의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이다. 데리다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런데, 근대적 주체를 일자의 영역이 아닌 차이의 영역, 즉 다수의 영역에서 존재의 근거를 발견하려 했던 일련의 시도들에 대해, 바디우는 상황의 구조에 이미 포섭되어 있는 다수는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는 주체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차이, 상대주의, 다양성, 타자와 같은 테마들은 탈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적 주체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역사적 문화적 상대주의가 확대되는 것이 결코 오늘의 상황안에서 자유가확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시장의 끝없은 욕망의 증상일 뿐이다”[각주:7]라고 지적한바 있다. 타자는 자기 동일적인 주체에 의해 상대화된 또다른 형태의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탈근대를 주창하는 이들이 근대주체를 비판하는 것이나 차이와 타자의 문제를 철학의 화두로 삼는 것이나 사실은 동일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존재는 일자도 다수도 아닌 공백에 있다는 말은 ‘일관된 다수’안에서는 존재에 대한 진리가 발현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구조에 의해 장악된 다수 안에서 벌어지는 차이와 다양성은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문제와 무관한 것이다. 상대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에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차이라는 이름으로 존재의 보편성이 간과되고 부정되는 현상을 문제삼는 것이다. ‘일자의 진리’는 부정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존재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차이와 다양성으로 부정하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탈근대 혹은 해체의 이름으로 부정되었던 보편적인 진리는 바디우에 의해 다시 복원된다.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는 공백이라는 자리를 통해 출현하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면, 보편적인 진리는 공백이라는 자리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 진리가 드러나는 자리가 공백이라면, 그 방식은 사건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진리가 사건의 형식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상황의 구조에 속하지 않고 언어와 사유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상황의 외부로부터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에서 바디우가 헬라의 법과 유대의 법 모두에게 귀속되지 않는 새로운 예외적인 법의 형식을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보았던 이유는 이것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상황은 구조와 법에 의해 지배받는 어떠한 것도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직 돌발적이고 예측불가능하며 우연적인 계기로만 주어져야 하기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서 보편진리가 도래할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사건’이다. 따라서 공백은 진리가 나타나는 자리이며 사건은 진리가 드러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은 진리를 드러내는 필요조건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진리가 항상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그 자체로 진리와 관계하고 개입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만으로는 사건은 스스로 상황안에서 관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결정권자가 되지 못한다. 사건이 진리와 관계 맺기위해서는 사건은 사건이 상황에 관계할 수있어야 하고 모든 안정적인 구조를 초과하여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방식을 지속시켜야 한다. 이것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y)’이라고 하는데, 사건에 대한 충실성은 상황에 속하지만 상황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공백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대하는 주체의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바디우에게 주체는 이처럼 ‘상황-공백-진리-사건-충실성’과 치밀하게 얽혀있고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지,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잠재된 진리의 가치에 대해 충실하려는 결단과 실천이 없다면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사건에 충실하려는 주체만이 진리를 드러낸다. 이렇게 주체는 진리와 사건과 유기적으로 관계하면서 하나로 통합된 안정적인 질서를 지향하려는 지배질서에 균열을 내고 보편적인 대안적 질서를 제시하는 힘으로 출현한다.


사건과 민중


    바디우는 진리, 주체와 같은 메타담론들이 철학의 주제안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한편,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거대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은밀한 방식으로 억압적인 착취적인 경제를 가속화시키는 현실로부터 그의 진리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의 길은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의 사건에 대한 충실성과 실천안에서 발견됨을 보여주고자 했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가 그리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의 역사안에서 변화발전의 주체로 호명되었던 ‘민중’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한때 민중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체계화시키고 규정함으로서 사회학적인 논리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할 때에도 민중은 그렇게 쉽게 규정당하지 않았다. 또, 시대의 변화안에서 민중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었으며 퇴색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등한시 될 때에도 민중은 그렇게 쉽게 역사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민중을 바디우처럼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해명해 낸 적은 없었지만, 민중은 쉽게 정의될 수 없고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민중은 민중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분별해 냈다. 누가 민중이고 누가 민중이 아닌게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어진 사건이 자신과 어떻게 관계인지를 스스로 결단함으로서 민중의 실체는 드러나게 되고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혹독한 역사를 통해 통찰할 수 있었다.

    4.19, 5.18. 6월항쟁을 거쳐서 지금 탄핵정국의 뜨거운 촛불의 항쟁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혹자는 이전의 미완의 혁명을 돌아보며 오늘의 항쟁 역시 실패의 역사가 재현될 수 있을 가능성을 논하고 있을 지 모른다. 어찌보면, 군사독재 정권보다 훨씬 더 후진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낄 때, 민중의 저항, 변혁과 같은 말들이 무색하게 들려지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바디우의 주체철학은 변혁의 변곡점마다 실패를 거듭해온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한가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해 주고 있다. 바디우에게, 보편적인 진리사건이라는 것은 정의가 승리하고 불의가 패배하는 객관적인 결과로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사건이 드러나는 것은 사건에 충실성을 가지고 달려드는 주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이다. 질서의 구체적인 변화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 즉 주체화의 과정이 한 사회안에서 진실성있게 발현되고 신뢰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공산주의 혁명이든, 민주주의 혁명이든, 또는 기독교적인 진리의 변화이든 결국 잠재적인 진리사건을 실재화시키는 힘은 주체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건의 의미는 혁명이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사건을 통해 주체가 조직되었는가,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경험이 전개될 앞으로의 사건에 대한 높은 수준의 결단과 실천을 제시해 주었는가, 공고하게 보이는 체제에 맞서 보이지 않는 공백의 힘으로서 주체를 신뢰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확실한 태도와 입장을 확립하는 것이 변혁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임을 바디우는 말하고 있으며, 후퇴하는 듯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져야할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Oliver Feltham, Alain Badiou: Live Theory (Bloomsbury Academic, 2008), 32. [본문으로]
  2. Theroy of Subject, 143. [본문으로]
  3. Being and Event, 24. [본문으로]
  4. Ibid., 55. [본문으로]
  5. 러셀의 역설은 유명한 ‘이발사의 역설’로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본문으로]
  6.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다’에 대한 증명은, 간단히 말하면 ‘공집합의 원소를 x라고 할 때, x는 어떤 집합 A의 부분집합이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한다면, 이후의 모든 명제는 어떤 경우에도 참이된다. 공집합의 원소 x는 이미 잘못된 조건이기 때문에, 조건에 대해 어떤 명제를 붙여도 거짓일 수 없게 된다. [본문으로]
  7. Alain Badiou, Ethics: An Essay on the Understanding of Evil (Verso; Underlining edition, 2001), 2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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