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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과학] 생명의 기원, 아리스토텔레스, 바실, 그리고 어거스틴 (정대경)

신앙과 과학

by 제3시대 2017. 4. 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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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 아리스토텔레스, 바실, 그리고 어거스틴



정대경

(GTU Ph.D Candidate)



   고대 원자론자들, 곧 ‘원자’라는 가장 지극히 작은 물질들과 그것들 사이의 충돌과 연합으로 이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그 유명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싫어했다.

   그들의 주장이 특정한 현상들을 설명하는데는 유용했지만, 생명체가 보여주는 경이로움, 즉 어머니의 뱃속의 태아가 지극히 작은 덩어리에서 신생아로 자라나고, 또한 어린 아이가 키가 자라고 몸도 커지는 듯한 현상들을 아무런 질서를 보여주지 못하는 원자들 사이의 충돌과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가’ 그 원자들을 배열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질서 정연한 모습들이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질서를 가져오는 무엇인가를 “형상인 (Formal Cause), 영혼 (Soul), 또는 엔텔레키 (Entelechy)”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러한 영혼들과 물질 사이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생명체들이 탄생할 때는 그 아버지의 정액 안에 들어 있던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머니의 난자안에 침투하여, 난자의 물질들을 배열하고, 어떻게 자라날 것을 결정함으로써 태아가 생겨나고 자라나며, 후에 큰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론자들과 달리 모든 생명체들이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고 보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그런 아리스토텔레스도 몇몇 종들은 여전히 급진적 자연발생 (Spontaneous Generation)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보았는데, 이는 동물들의 사체가 썩어가면서 그 안에서 발생하는 구더기나, 음식물들이 부패하면서 생기는 곰팡이 등이 마치 부모세대 등을 가지고 있지 않은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출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Aristotle, On the Generation of Animals, 1.1; 3.11)

   혹시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원시 생명체를 이 지구에 생겨나게 하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위배하고 행위하시는 분인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또 생명체를 생겨나게 하셨던 것일까? 

    필자는 몇 회에 걸쳐서 위의 질문들과 유사한 고민들을 가지고 씨름 했던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철학자들, 신학자들,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다루어 보면서, 현대 과학이 밝혀주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이론 (e.g. 화학적 진화)과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인 창조 교리 사이의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 시작으로 본 글은 현대 환원적 물리주의 (reductive physicalism)의 출발점인 고대 원자론과 그 지지자들이 생명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흥미로운점은 고대의 기독교 신학자들 또한 우연에 의해 생명체들이 생겨나는 급진적 자연발생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가이사랴의 대주교였던 바실은 창세기 1:24절을 해석하면서 부모세대의 성적 결합을 거치지 않는 급진적인 자연발생은 바로 하나님이 땅에게 부여하신 능력, 곧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라고 명령하신 말씀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특정한 종들(e.g. 민물장어)은 계속해서 땅으로부터 부모세대 없이 출현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Saint Basil, Exegetic Homilies, Homily 9.)

   그 유명한 히포의 어거스틴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최초 창조시에 땅에 부여한 능력이 “Seed-Principles (rationes seminales)”라고 주장하며, 식물의 씨앗 안에 나무나 식물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땅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들이 부모세대들의 성적결합이나 급진적 자연발생을 통해 계속해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9.29–32.)

   이렇듯 급진적 자연발생이론은 우연한 작용들에 의해 몇몇 종들의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그 당시 널리 받아들여졌던 자연과학 이론이었지만, 그 이론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위협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위의 바실과 어거스틴의 주장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우연적인 작용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 될 수 있고, 그 바탕으로 하나님의 세계-내-행위는 우연적인 자연과정을 배제하는 행위가 아닌 그것을 수용하고, 그 우연적인 작용들을 통해 신적섭리를 이루어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실과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단순히 기적적인 측면보다 자연과정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였던듯 보인다.

   두 번에 걸쳐서 다루어진 급진적 자연발생이라는 이론은 현대과학의 수혜를 받은 우리에게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러한 이론이 작동했던 시절 신학자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적어도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 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급진적 자연발생이론은 어떠한 목적이나 계획, 질서 등을 통해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것이 아닌 순전히 우연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갑자기 땅이나 갯벌, 동물의 사체, 냇가로부터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것인데(갑툭튀!), 이러한 우연적인 작용을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나 반증의 자료로 보는 것이 아닌 성서를 다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당대의 자연과학과 경쟁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도 현대과학과 신학 사이에, 혹은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에 어떠한 건설적인 관계가 가능하지는 않을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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