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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자우녕 작가의 〈서울_기억_반기억〉 전시회를 관람하고 라운드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눈 뒤(최진영)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7. 5. 1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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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녕 작가의 〈서울_기억_반기억〉 전시회를 관람하고


 라운드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눈 뒤 



최진영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 교수)

 


    역사서술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박물관, 교과서, 기념비 등은 기록된 역사를 보존한다. 기록된 역사 외에 과거를 보존하고 과거와 관계 맺는 다른 방법들로 구전과 기억 등이 있을 것이다. 역사를 쓸 수 있는 도구와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민중들은 주로 구전과 기억을 통해 과거를 그들의 현재의 삶의 일부로 만든다. 그들은 기억에 기초해서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통해 기억하기도 한다. 때로 기억된 이야기들은 일기나 메모의 형식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공식적인 역사서술은 획일적이고 그 해석도 제한되어 있는 반면, 이야기로 전해온 과거의 전승들과 기억은 다중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 대한 지식, 또는 과거와 관계하는 또 한 가지의 영역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마저도 억제될 때, 그 억압된 과거는 유령처럼 현재의 시간으로 찾아온다. 이러한 현상을 huanting이라고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경험하거나 제대로 장사되지 않은 존재가 혼령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황제 네로가 자신이 독살한 모친 아그리피나의 혼령의 출현으로 시달린 일을 전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 그리고 우리 설화 《장화홍련》의 망령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억눌렸던 과거의 사건들, 당시 현재화되지 못하고 기억에서마저 잊혀진 억압된 그 존재와 사건들은 마치 유령이 돌아오듯 오늘 어떤 자리로 찾아오고 또는 미래의 시간으로 다가가 서성인다. 이야기와 기억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haunting에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유동성 또는 혼종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말로, 공간의 한계가 허물어지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차원적 시간의 순서가 흐트러지며, 그리고 존재와 부재와의 경계가 뒤섞이는 현상이다.

   순전히 나의 관점에서, 자우녕 작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 대한 〈기억, 반기억〉은 바로 이렇게 과거와 현재, 장소와 비장소, 주체와 객채,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서울에 위치한 한강 자락은 작가의 고향으로 잊혀진 과거의 공간인 동시에, 출퇴근 길에 늘 바라보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부재와 다름없는 곳이다. 한강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역사적 기념비가 새겨진 곳이고 한국의 밝은 미래를 예시하는 곳이면서, 또 수많은 이들이 던진 몸들, 죽은 고기떼, 버려진 기억들이 부유하는 곳이다.

    작가는 지난 해 추운 겨울, 기억의 장소, 모래밭이 드넓었던 한강변 광나루를 찾는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양평까지 이르지만 한강은 그의 기억을 돌려주지 않는다. 기억은 오직, 마포대교에서의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2〉 촬영 중 떠오른 시신 한 구의 이미지, 작가가 한강 뻘 속에서 캐낸 한 가족의 한복과 “소원성취”가 적힌 부적, 차와 인적이 드문 광진교를 휘어감는 바람과 물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찾아온다. 그는 한강에서 ‘수행’ 중, 강변에 묻힌 이야기들을 캐어 내고, 강을 스쳐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고통과 욕망을 목격한다. 한강, 그곳은 억눌렸던 기억들이 회귀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출몰하고 배회하는, 그리하여 예기치 않은 타자와 만나는 공간이었기에, 자우녕 작가의 〈기억-반기억〉은 단순한 노스탤지어의 재현도 아니고 도시공간에 대한 이념적 비평도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존재와 부재,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한강이라는 공간을 전시장 안에 형상화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거기 있는 것들은 물화될 수 없는 형상이고, 기억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초시간적 역사이기에 관람자의 몫은 감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예기치 않은 존재-비존재들과의 조우를 엿보는 것이다.

    오늘 한강은 우리에게 있는 ‘비존재’인 동시에 ‘없는’ 존재이다. 도시의 욕망이 강 저변에 똬리를 트는 순간 무의식들은 쉴 새 없이 강의 남과 북을 횡단한다. 나의 그리고 타인의 기억들은 뒤엉켜, 부유하는 바람과 물소리를 통해서만 들려온다. 이렇게 기억되고 기억에 반하여 흐르는 것이 한강뿐일까. 성수대교는 어떻고, 세월호는 또 어떠한가? 기억은 어느 시점까지 살아있다. 그러나 역사에 쓰이지 않고 박물관 안에 박제화되지 않은 어떤 기억들, 존재들, 사건들은 유령처럼 어느 순간 산 자들에게 돌아온다. 자우녕 작가의 작업은 그들을 초대하는 몸짓으로 느껴진다. 역사 속에 억울하게 매장된 망자들의 출몰을 기다리기 위해 온 겨울 끝이 보이지 않는 강변을 걷는 그 걸음은 이제 시작된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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