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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2015년 가을의 사진일기 (신윤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6. 2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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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의 사진일기



신윤주*



9월 9일: 사치 

습도가 낮아지고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가벼워지고 볕은 더욱 맑아지는 계절이 책상 앞에 드리운 옅은 그림자 끝에 걸려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기쁜 마음으로 고요를 발견한다. 가을볕이 드는 창가를 고요히 누리는 것. 살아있음의 특권이다.


9월 25일: 자녀 

언젠가 너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염려하고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은 눈을 뜨면 맞이하는 아침처럼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일상이라는 교묘한 함정조차 망각한 채 나는 네가 없었던 시간도 없을 시간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지금 내가 그를 사랑하는 모양처럼 꼭 그렇게. 망각할 숙명이 싫었다. 두려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각 이후의 애도를 요청 받을 순간까지 꽤나 긴 찰나를 살게 될 거라고, 뜻밖에도 쉽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그때까진 모른 체 하고 살아볼까 보라고, 한번 그래볼까 보라고 말을 건넨다. 성급히 붉어진 단풍에게, 커다랗게 지는 붉은 해에게, 흙빛 심장이 시샘하는 순간의 흔적이 거기 있음으로 인하여.



9월 29일: 할머니 혹은 거짓부렁 

행복감의, 살아있음의 휘발되지 않은 잔여물이 일으키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죽음은 그보다 더 거짓말 같은 것이다. 비존재는 언제나 농담처럼 건네진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일이 년 있으면 죽을 거야. 실존의 측면에서 그녀는 나의 과거로부터 존재하나 생활의 측면에서 그녀는 다만 과거에 있다. 그럼에도, 만일, 그녀의 죽음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도적 같고 거짓말 같을 것이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여자. 저무는 인생의 모습이 아름답기를 원하는 나의 욕망은 그녀와 나의 관계만큼이나 오래 묵은 것이다.



10월 14일: 수치 

빛은 지는 빛이었으나 색을 압도했다. 푸른 나뭇잎이 주홍빛 석양을 등에 지고 실루엣으로 변하였다. 존재는 한낱 그림자가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잎을 만나고 석양의 속임수로부터 존재를 확인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노래 한 소절을 불러보았다. 노래는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였다. 숨을 고르고 말해주었다. 나역 때로 나의 존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른 존재의 진실로 다가가지 않는다.



11월 2일: 반성문 

연극 공연이 영화 상영과 다른 점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아마 그것의 재생 불가능성일 것이다. 일단 조명이 들어오고 무대가 시작되면 의도된 연출이 아닌 이상 준비한 공연이 마칠 때까지 무조건 'go'다. 요리도 그렇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준비하기 시작한 요리는 신호탄과 함께 출발한 단거리 주자처럼 그렇게 앞만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상연을 마친 공연처럼, 재생될 수 없다. 요리가 완성된 직후 그것의 온도가 아직 최적의 맛을 선사하는 동안 식사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무대를 보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특히 어떤 분야의 요리는 더더욱, 데워먹는 경우 방금 만든 음식과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음식 만든 사람은 안다.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몹쓸 '이것만 끝내고 가야지' 때문에 집에 도착한다고 한 시간이 다 되어 출발하게 되었다. 남편이 요리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내가 얼마나 잘못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반성문을 작성하였다. 여보 미안합니다.



11월 10일: 사치 II 

오늘 아침, 세 번째 마주침. 나는 그간 나무가 잎을 떨구는 거라고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가벼운 바람결에도 우수수 지는 잎을 보며 애초에 나무에게는 잎을 떨구고 말고 할 힘이 없었음을 듣게 된다. 가능한 것이 있다면, 놓치는 것뿐이다. 흩어지도록 내버려두는 일뿐이다. 우아한 흩음조차 나무의 몫은 아니다. 앙상해져가는 동안 풍성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쯤은 가능한 옵션일지 모르겠다. 또, 아주 앙상해질 날들을 준비하는 것도. 떨구는 행위인줄 알았던 것이 실은 그저 놓치는 일이었던 거라고 해도 내 손에 쥐어진 아주 작은 몫의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노래하고 싶은 아침.



    * 필자소개  

메모광. 학부에서 국제어문학을, 석사과정으로 비교문학을 공부했으며, 향후 프로이트 라깡주의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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