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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다름'이 인도하게 하라(주안 워딩턴)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7. 8. 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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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인도하게 하라


주안 워딩턴
(뉴질랜드 Ackland University of Technology Ph.D 신약학)

 


    1999년 말, 아니면 2000년 초 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방글라데시에 도착한지 만 3년이 지난 때였다. 우리가 살던 나환자 병원 관사는 깊은 시골마을에 위치해서 전기공급이 아주 불규칙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방글라데시의 언어 <방글라>를 배워야 했고, 이를 위해 낮이면 마을사람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저녁이면 초를 너댓개씩 켜놓고 책과 사전과 씨름을 했다. 그 결과 만 3년이 지난 후에는 어디서 누구와도 방글라로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릭샤>를 타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시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흔한 교통수단인 릭샤는 자전거를 개조해서 만든 것이로 앞부분은 자전거같이 핸들과 운전자가 앉는 곳이 있고 그 뒤에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조그만 의자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두세사람의 무게가 실리는 의자 아래에는 두개의 바퀴가 있어서, 릭샤의 바퀴는 총 세개이다. 그러한 릭샤에 올라 앉은 나는 그날 따라 편안함을 느꼈다. 눈에 들어오는 넓은 논의 녹색도, 불어오는 바람도 내 기분을 고조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나는 즐거워서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느낌이었다. 굴러가는 릭샤를 바라보며 이 릭샤의 바퀴 세개가 릭샤를 안전하게 굴러가게 하듯, 한국어, 영어, 방글라 이 세 언어들이 내 삶속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음을 느끼고 기뻐했다. 세발 달린 솥처럼 위, 촉, 오, 삼국이 있으면서 안정을 유지했다는 중국역사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바퀴가 세개라도 물론 제일 중요한 바퀴는 앞바퀴이다,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면서 나는 내 삶속에 균형있게 안착된 세 문화 중에서 앞바퀴 같은 것은 한국어로 상징되는 한국문화이지, 라고 단정지었다. 그 때였다. 이러한 단정을 바로 뒤집는 소리가 있었다: “아니,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여야 한다.”

   나는 이 말이 하느님 또는 성령님의 소리임을 알아챘다. 그 때까지 내가 들어온 ‘하느님의 음성”은 여러가지 특성이 있었다. 첫째 이 세상의 부드러운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둘째 위로와 격려를 주실 뿐 아니라 종종 나를 돌이켜 반성하게 하고, 또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어떤 이질적인 내용을 품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 하느님의 소리구나, 라고 단번에 알아차리게 하는, 부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적어도 내 경험에 있어서는 그랬다. “아니,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여야 한다” 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좀 멍해졌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 조금 후에 나는 물었다: “왜 영어여야 합니까? 내가 가장 오래 사용해오고 나에게 제일 편안한 이 한국어가, 한국적인 속성이, 내 삶을 인도해 온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왔다: “아니다, 다름이 앞서 가게 해야 한다.”


   그 경험 이후 나는 때로 때때로 그 말을 생각하게 된다. 몇사람들과 그 경험을 나눴지만 그들의 반응에는 별 감동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내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고, 내 안에서는 그 말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생기게 되었다.

    아, ‘다름’이란 얼마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혼란케 하고 외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가! 방글라데시에 오기 전에 이미 나는 남편의 나라인 뉴질랜드에서 8년정도를 살았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뉴질랜드의 삶속에서 나는 의식주의 차이뿐 아니라 ‘예의’에 대한 개념과 관습의 다름 때문에 몸고생 맘고생을 적지 않개 했다. 하지만 8년여간의 삶을 통해 외국에서의 삶이 어느정도 편안하게 느껴지고 자신감도 붙기 시작하던 때에 나는 다시 또 다른 외국을 향해 떠났던 것이다.

    나무를 이식하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이식한 후 한동안은 나무가 몸살을 겪는다.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내리고 죽어 가는 듯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나서 더 크게 자란다. 시들고 말라 죽지 않는 한… .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에서 어린 나무들을 옮겨심으면서 심겨진 나무가 시들어가는 것을 볼 때 나를 보는 듯 했다. 죽은 듯 하다가 다시 새 가지와 잎을 피워내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고 내게 용기를 줬다.

    제 3의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 8년간을 살아내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온 후에 나는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2006년도에 시작한 신학공부는 2016년도 말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나는 본격적으로 ‘다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다름이란 신학이나 성경해석의 내용뿐 아니라 진리추구의 방식과 표현, 더 나아가서 세계관의 다름이었고, 그에 대한 인식은 한 신학교수와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내가 공부하던 Laidlaw College의 Christchurch시 학장으로 계시던 Bob 교수님에게 나는 Hermeneutics (해석학), Soteriology (구원론),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 Theological Method (신학방법론)등을 배웠다. 나는 Bob 교수의 강의시간에 제일 많이 질문을 던지는 학생중 하나였다. 교수님이 소개하고 제시하는 내용과 다른 생각들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는데, 처음 부딪친 사건은 그가 우리들에게 부여한 과제와 관련되었다. 그 과제는 <해석학>과목의 에세이로서 주제는 ‘How to Read the Apocalyptic Literature’ (묵시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였다. 그 때 나는 ‘Christo-centric’ 즉 ‘그리스도 중심’을 성경전반 뿐 아니라 묵시문학을 읽어내는 주요한 ‘렌즈’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에세이를 마쳤다:


Jesus, who is the Beginning and the End, summarizes the message of the apocalyptic literature in three short sentences: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John 16:33).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예수는 묵시문학의 중심메시지를 다름과 같은 짧은 세 문장으로 요약하셨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환란을 당한다. 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큰 환란과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 가운데 발생한 묵시문학에 필수적인 주제는 ‘핍박’ ‘용기’ ‘마지막 승리에 대한 소망’이었고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 중에 그것이 분명히 표출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 에세이는 “It missed Christology,” 즉, 기독론이 결여되었다는 Bob교수의 비판이 적혀서 되돌아 왔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렌즈를 내가 적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것이 내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에서 보이지 않는가! 나는 교수님에게 내 에세이를 다시 한번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렸고 그분은 다시 읽으신 후에 자신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하셨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는 그에게 일정한 금액의 돈을 그의 통장에 보냈는데, 그는 통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그 답답함을 나는 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Presence and Absence 


He calls ‘presence’ ‘absence.’ 

I’ve given it; he says it hasn’t come to him. 

Did I not give or he did not get it? 


I see ‘presence’; he sees ‘absence.’ 

My ‘presence’ is his ‘absence,’ 

My ‘absence’ is his ‘presence.’ 


Yes, his ‘presence’ is my ‘absence.’ 

But I do not know of his ‘absence,’ 

For he is neither aware nor says of the absence. 


‘있음’과 ‘없음’ 


그는 ‘있음’을 ‘없음’이라 한다. 

나는 주었는데 그는 받지 않았단다. 

내가 주지 않은 것인가 그가 받지 않은 것인가. 


나는 ‘있음’을 보는데 그는 ‘없음’을 본다. 

나의 ‘있음’은 그의 ‘없음’이요. 

나의 ‘없음’은 그의 ‘있음’이다. 


그의 ‘있음’은 나의 ‘없음’이 맞다. 

단지 나는 그의 ‘없음’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없음’을 알지도 말하지도 않기에.


    끊임없이 서양의 신학과 해석학에 맞춰나가기를 강요받는 듯한 느낌, ‘부족함’이나 ‘없음’은 나 자신 뿐이고, 상대 (서양신학)는 자신의 ‘없음’을 알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특별히 <명시성>과 <암시성>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내가 제출한 에세이에 사실상 ‘Christo-centric’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단어를 몰라서도 아니요, 예수중심적 성경읽기를 반대해서도 아니었다. ‘그리스도 예수 중심’을 표현한 나의 표현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내게 익숙한 암시적인 표현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리라 생각한 것이 실수였고,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한 절대 읽어내지 못하는 서양학자들의 특성을 모른 것이 잘못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의 다른 생각과 방법론을 표현할 ‘언어’와 논리성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어느날인가Bob 교수와 도서관에서 만나 나의 입장을 이야기하려 하다가 내게서 예기치 않은 언어가 돌출되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하자 터져나온 <눈물>이라는 언어였다. Bob 교수앞에서 정말 싫었지만, 피하고 싶었지만, 내가 눈물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는 어색하고 어쩔 줄을 몰랐던 것 같다. 그 ‘사건’ 직후에 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젠가 박사논문을 쓰게 된다면 Bob교수님이 내 수퍼바이저가 되면 좋겠다는. 스스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나와의 ‘다름’이 크고 분명한 분과 계속 함께 가야한다는, ‘다름’이 나를 인도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한켠에 있어서 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훗날 그는 내 논문의 수퍼바이저가 되었다.)

    신학공부가 계속되면서 내 언어를 찾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구차하다, 라는 느낌이 들어도 설명에 설명을 거듭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논리적’이어야만 했다. 나는 어떤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이해는 어떤 근거에서 인가, 그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 어떤 학파와 비슷하고 어떤 학파와 그 입장을 달리하는가, 등의 내용을 유명한 학자들의 주장을 앞세워서, “—한 관점에서 볼 때,” “그러므로,” “하지만,” “이와 아울러”등의 접속사를 사용해서, 비교하고, 대조하고, 비판하고, 제안하고, 주장하고, 또 제한적으로 결론짓는 방식을 익혀 나갔다. 그리고 과학적, 분석적, 명시적, 논리적 성격이 두드러진 서양의 사고및 표현방식에 대조되는, 시적, 통괄적, 암시적, 직관적 성격의 한국적/동양적 사고내용과 표현의 강점을 소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어도단’의 세계를 지향하고, 소중한 내용을 이야기 할 수록 말을 아끼는, 동양의 정신문화의 한 중요한 흐름을, 아이러니칼 하게도 수많은 말들을 사용하여 자세히 설명해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논리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논리 정연함’을 기대하게 되었다. 2013년에서 2015년까지 3년간 나와 남편은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서 남편이 병원장으로 있는 시골병원 컴파운드 안에서 살았다. 컴파운드 안에는 교회가 있었고 일요일이면 우리는 방글라데시 목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곤 했다. 설교시간에 나는 종종 목사님의 설교가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속으로 투덜댔다. 목사님의 설교가 어떤 한 주제로 시작하다가 너무나 많이 옆가지로 흘러서 나중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끝나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쓰는 논문처럼, 설교가 화살을 쏘듯 한 방향을 향해 가서 결론을 맺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이웃들이 그러한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음을 보고 듣게 되면서 내 마음이 돌이켜졌다. 진리를 추구하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쏜 화살을 쫒아가듯 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보슬비가 내리듯 온 곳에 두루 펼쳐지는 방식도 있음을, 아울러 두 방식에는 다름이 있을 뿐, 우열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Bob교수는 내가 박사논문을 쓰는 4년 반동안 든든한 조언자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도 나도 서로 다름을 알지만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 감사하다. 서양인 남편의 다름때문에 내가 많이 변했다. 남편도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와 많이 변했다. 얼마전에 내 막내 아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에게 “설명해봐라”고 주문을 하였다. 그의 망설임 없는 응답은 “설명하지 않겠어. 내가 느끼는 것은 직관이야. 설명하면 그 가치가 엷어져” 였다. 그의 말에 나는 바로 마음을 돌이켰다. 그렇다, 그가 내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내가 들을 수 없는 그만의 어떤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름이 나를 인도하게 하는 일, 여전히 어렵다. 종종 잊고 산다. 그리고 내가 앞서간다. 내가 앞서면 ‘다름’은 잊혀지기가 쉽다. 하지만 내가 뒷서면 그 다름이 보인다. 그 다름때문에 내가 멈추게 되는 불편함이 있지만, 멈춤으로 인해 배우는 것이 많다. 또 하나의 이득은 그 다름은 ‘거울’과 같아서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여지는 나 자신 역시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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