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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 (김윤동)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8. 2. 2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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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택하신 족속?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상반절)


교회에서 매우 좋아하는 성서의 구절 중에 하나기도 하고,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전쟁에도 능하시며, 모든 세계의 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 곧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자리에 올라설 수 있으며, ‘거룩한 나라’, 곧 하나님이 친히 소유하고 계신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뛰는 일인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왜 가슴 뛰는가? 왜 우리를 설레게 하는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이야기일까? 우리만 특별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또다른 진술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한 번 차근차근 이 질문들을 풀어나가도록 하자.


종교의 시작


종교의 시작은 인류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 지금이야 종교가 갈등과 분란의 씨앗인 상황이 되었지만, 종교는 본래 인간을 대(大)집단화하고, 그런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초기 인류의 시대에는 인간의 개체수가 적어서 어떤 집단과 집단 간에 만날 일도 별로 없고 자원으로 인해 갈등이 벌어질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점점 인간의 개체수가 많아지고 유목 생활이 아닌 농업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과 만나야 하고, 협상해야 하고, 때로는 싸워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들 간에는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기고 누군가는 그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승리하고 다른 누군가는 배제된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전쟁을 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쟁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죽임으로써 합의를 보자니 끝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의 의사를 배제하고 올라섰다는 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죽이지 않고도 의사결정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에는 누가 더 정당하냐, 누가 더 먼저냐를 평화롭고 순조롭게 합의하기 위해서, 또한 승리한 개인/또는 집단이 계속해서 그 승리를 보증할 수 있도록 이름표를 붙여주기 위해서는 서열이 필요했는데, 곧 시간적, 공간적 기원들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물체나 사건이라기보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곧, 기원을 상정하고 대집단을 이루는 것이 종교의 시작이자 목표다. 다시 말해, 종교와 기원을 만들어낸 이유는 ‘서열’과 ‘순서’를 창출해내기 위해서다.


인간이 대집단을 만들기 전, 그러니까 모두가 조그마하게 유목을 하던 시절에도 아주 단순한 애니미즘 계열의 종교는 있었다. 모든 생물체들이 자기들만의 영(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은 세계의 수많은 생명체, 영을 가진 존재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류가 대집단화 되면서 신들 또한 성장했다 -- 성장시켰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리고, 심지어는 자연마저도 통제하며, 세상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위대한 신’의 등장이 필요했다. 고로 인간 집단의 전쟁이 벌어지면 이는 곧 신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곤 했다. 전쟁을 하면서 신들에게 제의를 올림으로 전쟁의 승리를 염원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면 신들의 서열이 재배치되고, 점점 그 과정이 반복되어 거대한 집단이 제국의 형태로 성장하면 그 제국의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신이 아닌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위대한 신’에서 훗날 ‘유일한 신’으로 바뀌게 되는 궤적이다.


애니미즘 이후 ‘위대한 신’들의 등장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種)의 위치 또한 격상되어야 했다. 많은 뭇생명들 중 하나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신계와 세속을 이어주는 신의 형상을 모방한 자(창 1:27)나 신을 대신하여 세속을 통치하고 경영하는 존재(창 1:28, 2:15)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수많은 생명들 중 하나의 존재였던 인간이 ‘신의 형상’의 자리를 부여받게 되고, 다른 생명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다. 성서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 그 중에서도 1,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시작한다. 인간이란 존재에 부여된 우월성을. 이제 그 우월함과 열등함의 서열 정리는 단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인간 안에서도 격렬하고 첨예한 서열다툼이 시작된다. 창세기 1장에서도 인간은 남자라고 표명되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종속적이고, 모방적인 존재로서 ‘여성’이 등장한다. 이미 기원부터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충분하도록 만든 설정이겠다.


이처럼 종교가 시작되면서 나와 내가 아닌 것,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사이의 격렬한 투쟁의 상태, 그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상태로 우리는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에덴 동산부터 그렇게 지어졌다는데, 그 이전의 존재들 간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상태라는 상상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야훼가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


종교는 기원을 설정하고, 그 기원을 통해 서열을 정리하는 것이 그 속성이라고 앞에서 정리하였다. 그렇기에 구약을 포함해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내력(תוֹלְדוֹת, 톨레도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창 2:4)으로 시작하고,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한 무수한 사람과 가문의 ‘내력/족보’으로 이어졌으며,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세계(Genesis, 게네시스, 내력)’로 이어진다. 성경에 수많은 족보가 나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지구라는 푸른 별 위에서 시작부터 이어져온 인류 및 각종 생명체가 서로 동떨어져 생겨나지 않았으며, 고로 우리가 태어난 맥락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기원에 대한 정당성, 나아가서 그것들 간의 서열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며 인류 모든 보편적인 기원과 그 족보에 관한 이야기 같이 보이지만, 실로 구약 성경은 인류의 기원과 내력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내력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직하다. 일단 성경은 히브리어라는 말로 쓰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고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각주:1]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구약 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고, 다른 집단에 비해 달라도 뭔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그 기원에 관한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선택되었다 함은 구별되었다는 말과 통한다. 왜 구별해냈겠는가? 당연히 특별한/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앞에서 읽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후반절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택하신 족속’이 된 이유는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다. 한 마디로 선민(選民)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는 애초부터 훌륭한 사람임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다. 종교에서 어떤 이들을 가리켜 ‘선택되었’다 말할 때, ‘흙수저'로 선택되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선택에는 우월감을 부여하려는 목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 선민이 되었다는 의식은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대집단 내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별도로 칭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성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기원은 뭔가 수상한 곳이 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유전자가 우월하거나 전쟁을 잘한다거나 부자거나 특별히 잘 난 구석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Hebrew)의 기원


이스라엘은 히브리인들이다.[각주:2] 이스라엘은 히브리(Hebrew)라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어디서 왔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히브리는 ‘천민’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집트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등 당시 성서가 기록되었던 근동 지역의 문헌에서 천민의 대명사로 나오는 ‘아피(비)루’, 또는 ‘하피(비)루’라고도 표기할 수 있는 말이 구약성서의 ‘히브리'[각주:3]이다. 고대 문헌에서 ‘하비루'가 사용되는 용례를 살펴 보면, 고향에서 뿌리 뽑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남의 전쟁에 목숨을 거는 ‘용병’(메소포타미아 북쪽 도시 마리), 계약을 맺은 노예(티그리스 강가 도시 누지), 일꾼 또는 도둑떼/약탈자(주전 15C 이집트) 등으로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고향에서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각종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 바로 하비루들이었다. 이러한 배경들을 토대로 문익환은 히브리라는 특징적 집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히브리는 종족, 혈족으로 단위를 이루는 배타적인 칭호가 아니라, 당연히 자주적인 주격으로 해방되어야 할 밑바닥 계층,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약자들을 포괄하는 총칭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1. 전쟁포로들이 하비루가 되어 노예로 혹사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고 용병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이 된 사람들, 농촌에서 밀려난 이농민들이 하비루가 되었습니다. 

3. 야곱의 이야기나 모세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떤 이유건 고향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사람들, 남에게 붙어사는 떠돌이, 더부살이, 천더기들이 하비루로 전락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각주:4]


바로 이런 부족이 없는 자들, 소속이 없는 자들, 집단 아닌 집단, 어떤 혈통에서 온지도 모르는 근본 없는 떠돌이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부유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셨다. 이들이 히브리들이고, 그 히브리들을 향해 불같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이기지 못한 야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출애굽기 3:7)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출애굽기 3:18)


왕과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지만, 이런 기원에도 불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히브리들은 자신들이 힘겹게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과 그 눈물을 불쌍히 여겨 압제에서 건져 내준 야훼의 사랑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새로운 ‘내력’을 필요로 했다. 자기네들이 ‘천민’ 출신이 아니라 원래부터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본래 어떤 개인도 그렇고 집단도 그렇고 전쟁에서 승승장구를 하다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진짜 잘 나서 선택 되었고, 어딘가 모르게 잘난 구석이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지점이다. 그것을 성서에서 ‘하나님을 잊은 백성’이라 표현한다.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준 야훼 하나님과 그와 맺은 영구적인 계약을 잊어 버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 시에만 기름 부음 받은 사사(판관)를 세워 위기를 극복하곤 했던 사람들은 급기야는 ‘왕’을 요청하게 된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다른 나라처럼 더 많은 영토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다.[각주:5]


매번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당하다보니 불안했다. 물론, 이제까지의 전쟁을 그 때 그 때 야훼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막아내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가장 훌륭한 방어전략은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토의 확장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종교적인 사제가 다스리는 원시 부족 국가의 형태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왕을 가지고, 그걸 통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낼 수 있는 멋진 정치 제도를 가지고 싶었다. 분명히 사무엘(을 통해 말한 야훼 하나님)은 이러한 요구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경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요구는 끈질겼고, 이제부터 더욱 가열찬 영토 확장 전쟁을 하기 위해 ‘야훼(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선민사상은 왕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그 권력을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 그래서 집단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의 집단 히브리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관한 역사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또한 그것을 강력한 기제로 만들기 위해 불문율이었던 여러 관습이나 전통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자신들만의 규율을 문자로 적어 표현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성문법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을 기틀로 하는 법전이다.


국가로서의 체제가 정비되고 영토가 확장되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의 신화는 정비되고 민족이 형성된 기원의 이야기가 정리되기 마련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법을 수령한 이야기와 출애굽의 이야기는 본래 다른 이야기였는데, 국가의 태동기에 두 이야기가 합류되었다고 주장한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떠돌던 규모가 작은 유랑 공동체에게 기록되고 명시된 법문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울 뿐더러 의사결정에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6] 광야를 떠돌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그런 상황 변화에 고정된 ‘법문’으로 대처하기보다 역동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체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 수령 설화와 출애굽 설화)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말이 두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야훼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하비루들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비루들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은 진실이며, 그것이 ‘열 가지 계명’이라는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와 국가가 형성될 때 정비되고 다듬어져 국가 법령의 정신이자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각주:7] 아무튼 이제 정착을 하고, 안정된 국가 체제를 가지기 시작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점점 더 이질적인 부분이나, 각 부족들의 이해관계를 넘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성을 강고하게 가져가기 위해 십계명을 기초로 하는 법문을 세워 ‘법치국가’임을 천명하는 등 여러 가지 방책을 펼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내부적인 결속을 위해 법을 만든다는 의미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어떤 선명한 바리케이트를 치게 되는 작업이고, 다시 이스라엘이 애굽 시대에 겪었던 것처럼 경계 바깥 사람들, 집단 없는 집단, 소속 없는 사람들을 새로이 ‘생산’해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겠다는 ‘의도하지 않은 의도’가 되는 것이다. 타자(곧 적, The enemy)의 생산 없이 어떤 집단이 생성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연관되어 또 하나 법을 세워 통치하겠다는 의미는 중요한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야훼 하나님을 ‘타자’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본래 유랑민이었을 때의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관계이다. 상황을 만날 때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물었고, 서로 의사가 교류되는 관계였다. 공동체 안에 맺어진 대원칙은 있었겠지만, 결코 어떠한 텍스트나 문자 속에 갇히지 않고 맥동치는 바로 그 살아있는 ‘긴밀한 관계’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천이었다. 사사 시대의 그것은 다른 국가들의 강력한 법치보다 느슨해 보였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유연하고도 긴밀한 관계’가 국가의 더욱 소중한 요소임을 시간이 갈수록 잊었다. 그럼에도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진했던 것일까? 자신이 법문 안에 갇힐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상 8장의 경고를 남기고 자신의 자리를 왕과 법에게 내어주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찬란한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나라는 쪼개져 버린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있다. 어떤 한 존재가 그 언어를 벗어나서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어란 단순히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음성과 문자가 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관습과 생각의 집합체, 즉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성경 또한 이스라엘의 언어로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구성원의 이데올로기 즉, 그들의 ‘창’으로 본 것이고, 그 창으로 보여진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이스라엘이라는 언어의 ‘창’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문으로]
  2. 현재 서부 아시아의 남쪽, 이집트의 동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국가’로 정의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고학적이고, 역사적인 기원을 따지자면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아지므로, 마지막 별도의 내용으로 기술하도록 한다. [본문으로]
  3.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정한책방, 27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32쪽. [본문으로]
  5. 다음과 같이 사무엘상 8장에서는 사무엘과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해 놓았다. 4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11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12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입니다. 13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입니다. 14 그는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당신들이 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16 그는 당신들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17 그는 또 당신들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18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9 이렇게 일러주어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20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6. ’법의 백성’이라는 호명은 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성서의 문맥을 보면 출애굽과 십계 이야기는 광야를 유랑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이 법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텍스트의 역사적 자리는 ‘국가'라는 세속적 실체다. 유랑민들은 법이 필요 없다. 그만큼 규모가 작고 단순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법이 필요한 것은 여러 종족이 한 정치체로 묶이고 전이해와 현실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기억과 경험들이 교차하는 상황에서다. 그리하여 법은 유랑 시대가 아니라 국가 시대에 등장한다. 그것도 원시국가 형태가 아니라 '잘 발달된' 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김진호 외 9인,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글항아리, 8~9쪽) [본문으로]
  7. 출애굽기 20장에 나타난 내용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 내용은 서로 상반된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1~2절)이라고 서문을 맺고 바로 계명이 나오는 반면, 신명기 5장의 경우 1~5절이라는 긴 서문을 진술한 후에, 서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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