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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율아, (김난영)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4. 1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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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아,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율아,

오늘 다시 첫 등굣길에 오르는구나. 우선, 엄마가 상의 없이 갑작스레 학교를 옮기게 되어 정말 미안해. 첫 학교에서 적응하느라 많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 힘든 과정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니 엄마도 마음이 많이 아파.

우리 가족이 새 터전으로 옮길 때, 엄마와 아빠는 율이가 폭신한 잔디가 깔린 학교운동장에서 실컷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했어. 그런데 입학 첫 날 다녀온 학교는 확장공사로 운동장 출입도 어렵고, 같은 반 친구들도 기대보다 많아서 조금 실망했지. 그래도 공사는 일 년 안에 끝난다하고 율이에게 친구들이 많은 건 좋은 일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지낸 이야기를 시시콜콜 풀어놓지 않는 네가 어느 날 하굣길에 이런 말을 했어.

       “엄마, 나 오늘 벌섰다.”

       엄마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벌’이란 단어에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엄마보다 더 묘한 표정의 너에게 다시 물었지.

       “율아, ‘벌’이 뭐야?”

       그랬더니 조용히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씩 웃더라.

       “아, 그게 벌이야? 그럼 벌은 왜 서는 거야?”

       “음, 복도에서 뛰어서.”

       “복도에서 뛰면 왜 벌 서?”

       “다칠까봐,”

       “아, 그렇구나. 복도에서 여러 친구들이 뛰면 다칠까봐 선생님이 벌을 주신거구나. 율이도 알고 있었어? 복도에서 뛰면 벌 받기로 선생님이랑 약속한 거야?”

       너는 대답을 않고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지.

       입학한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어. 네가 벌을 받았을 그 순간만큼이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단다. 몇 주 뒤 선생님과 상담 중에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냈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말이야.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한참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지만, 현재 학교 여건상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 위험요소가 많아요. 그래서 복도에서 뛰는 행동은 벌을 주기로 1학년 선생님들과 정했어요. 아마, 율이가 복도에서 장난치다 다른 반 선생님께 혼났나봐요.”

       그래, 선생님의 이야기는 당연해. 사실, 맨날 이 산 저 산 뛰며 놀러 다니던 네가 복도를 날아다녔으면 날아다녔지, 설마 발뒤꿈치까지 땅에 대고 얌전히 걸었을까. 부주의한 너희들의 안전을 위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등하굣길 만나는 엄마들에게 ‘단체벌’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으면서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는 학교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라고 생각해. 특히 1학년은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기’부터 시작해야 하지. 복도에서 여러 사람이 뛰어다니면 위험하듯이, 함께 생활하다 보면 안전과 편의를 위해 서로 지켜야 할 약속과 규칙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야. 그런데 말이야, 엄마는 그런 과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기다려 줄 수 있는 어른들이 많은 곳에서 율이가 지냈으면 좋겠어. 먼저 배운 어른들의 편의를 위한 규칙을 어떤 방식으로든 강요하는 것은 너와 친구들이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빼앗는 거라고 생각해. 더욱이 그 방식이 어린 너희들의 몸을 힘들게 하고 수치심을 자극해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엄마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그래서 며칠을 고민한 끝에, 집에서 멀지 않은 작은 학교를 찾게 됐어. 체육관은 없지만 마음대로 뛸 수 있는 운동장이 있고, 화려한 놀이기구는 없지만 하교 후 심심한 친구들이 모여드는 놀이터가 있더라. 함께 뛰어 놀 친구를 찾는 너에겐 최고의 조건이지. 음, 솔직히 선생님은 어떤 분일지 모르겠어. 그래도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어른들은 좀 더 여유롭지 않을까? 엄마와 아빠는 그럴 거라 믿기로 했어.

       그런데 모든 결정을 마치고도 또 다른 고민을 생겼어. 과연 이곳은 너에게만 힘든 곳이었을까? 이 학교에 남게 될 다른 친구들은 괜찮을까? 왜 나는 선생님한테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묻지 못했을까, 왜 너의 적응을 핑계로 작은 학교로 옮겨야겠다고 했을까? 새로운 학교에 너를 데려다 주고 홀로 앉아 마시는 커피가 꿀맛일 줄 알았는데, 커피는 여전히 쓰고 엄마 마음을 어지럽힌다.

       율아, 오늘 학교는 어땠니? 잘 지내고 있는 거지?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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