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영화읽기] 블랙코미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다(권오윤)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8. 4. 25. 16:01

본문


블랙코미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살다 보면 과연 인간에게 선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쁘거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마련이니까요. 자기 코가 석 자라 남의 처지에 관심을 두거나 도울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역시 그런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달 전 참혹하게 살해당한 자기 딸의 사건은 여태껏 해결되지 않고 있고, 이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녀는 동네 외곽도로에 있는, 낡은 대형 광고판에 거금을 들여 광고를 게재합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됐던 이 광고판에 그녀가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는 마을의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직접 겨냥한 것입니다.

그녀의 광고는 당연히 지역 사회를 술렁이게 합니다. 윌러비는 지역 사회에서 나름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러비를 비롯한 지역 경찰서 식구들은 이 광고 문구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특히 흑인 용의자를 무리하게 수사해서 문제가 된 사고뭉치 경찰 딕슨(샘 록웰)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목사나 치과 의사 같은 지역의 유력 인사들은 밀드레드가 괜한 짓을 한다며 말리려 듭니다. 말기암 환자인 윌러비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광고판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밀드레드는 끄떡도 안 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딸을 살해한 범인을 잡아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는 것뿐이니까요.

사진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주)


미스터리 스릴러 설정의 블랙 코미디


줄거리 소개만 보면, 지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진지한 미스터리 스릴러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약점을 후벼 파는 농담을 거침없이 던집니다. 상대를 모욕하고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밀드레드의 말과 행동 역시 일반적인 피해자 가족의 태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실제라면 심각한 수준의 폭력 장면과 방화 사건까지 일어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영화 속 맥락 안에서 관객이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요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게 우리네 삶의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소 과장돼 있긴 하지만, 각자 자기한테 관심 있는 것만 보고 그게 바르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은 아주 비슷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런 모습을 관찰하면 꽤 웃길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추구한 유머입니다.

원래 영국 연극계에서 천재 극작가로 더 유명한 마틴 맥도나는 감독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2008)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세븐 싸이코패스>(2012)도 그랬지만, 그의 장기는 스릴러 장르의 진지함을 비틀어 쓴웃음을 자아내는 블랙 코미디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자락 남아 있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죠. 세 번째 감독작인 이 영화 <쓰리 빌보드>는 감독의 작품 세계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좋은 배우들이 필요합니다. 감독이 의도하는 대사나 연기의 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연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코미디는 뉘앙스가 한 끗만 달라져도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밀드레드 역으로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캐스팅한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신랄한 대사를 내뱉으면서도, 섬세한 표현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내뿜을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받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역시 올해 아카데미에서 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의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마마보이인 데다 만날 농땡이만 치는 나사 풀린 경찰 딕슨이 어떤 감정 변화를 겪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함께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우디 해럴슨의 연기 또한 감독이 지향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잘 보여줍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함께 사는 방법


인간은 누구나 무지와 편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아시아의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에 미국의 흑인이나 저소득층 백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성 소수자와 여성의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경험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부지불식간에, 혹은 생각이 짧아서 다른 인종이나 성적 취향, 젠더에 대해 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 드러났을 때 취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회 구성원과 함께 살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짧은 견해를 자연법칙이요, 진리라고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이란 이런 겁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약육강식은 자연법칙'이라며 무한 경쟁 체제만을 옹호하는 논리를 폅니다. '남자는 원래 씨를 뿌리는 본능이 있다'며 미투 운동을 폄하하기도 하죠. '인간이라면 후손을 낳아 기를 수 있어야 한다'면서 동성애 혐오를 당연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아주 고약한 사고방식이죠.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인간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험난한 자연계의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따라서 정말 '인간적'인 행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에 대한 예의와 기본적인 선의를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싫다면, 그냥 속세를 등지고 야생으로 돌아가 다른 동물처럼 살거나 아예 동물원에 거처를 마련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사나운 저소득층 백인의 긍정적 변화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주리주는 미국 중부 내륙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권위를 무시하고 호전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 저소득층 백인들이 많이 삽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처럼요.

두 사람은 처음에 각자 자기만의 시각과 주장에 갇혀 있는 극단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정당했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받을 상처를 헤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딕슨은 늘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서 타인을 무시하고 배척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변화합니다. 자신을 향한 다른 이들의 아주 조그만 선의를 경험하게 되면서요. 밀드레드는 인권이나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딸의 사건 해결만을 바란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감사할 줄 몰랐던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딕슨은 자신의 편견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과거 자신이 했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듯 온갖 어설프고 이기적인 실수를 하지만, 변화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하는 마음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고 실천한다면요. 이것이 바로 언뜻 보기에 막장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 <쓰리 빌보드>가 남긴 속 깊은 교훈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2018년 2월 2일자 기사 <참혹하게 살해된 딸... 분노한 엄마와 예의없는 경찰>(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14876)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