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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권태로부터의 사색(feat.교회생활)(김정원)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8. 11. 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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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부터의 사색(feat.교회생활)





 김정원*


    교회적 삶은 권태로움을 몰고 온다. 교회적 삶은 무엇일까? 출근하고, 퇴근하고, 웃고, 듣고 이해하고 나아가 의미작용을 형성해야 하는 일종의 보람이 전제된 감정노동의 장에로의 내던져짐이라고나 할까. 교회적 삶이 일상이 된 이즈음에서 바짝 느끼게 된 권태는 하이데거가 말했던 근본기분으로서의 권태와 얼마나 연관될 수 있을까?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하이데거는 권태를 지루함이라 말하는데, 첫 번째는 ‘어떤 것에 의해서’ 지루하게 됨, 두 번째는 ‘어떤 것 곁에서 혹은 어떤 것을 하면서 지루해 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튼 그냥 지루해’로 구분한다.


    그는 첫 번째 형태의 ‘어떤 것에 의해서 지루하게 됨’을 네 시간 뒤에 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폭 좁은 철도를 휑하게 끼고 있는 어느 한 초라한 기차역에 우리는 앉아있다. 다음 기차는 빨라야 네 시간 뒤에나 온다. 기차역 일대는 삭막하고 배낭 속 책은 읽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기차 운행 시간표를 훑어보다가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다 시계를 들여다 보니 겨우 15분이 지났다. 국도 쪽으로 건너가 보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본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국도변의 나무들을 세어본다. 그러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지만, 겨우 5분이 지났다. 이것저것을 하다가 시계를 꺼내 들여다 보기를 수십 번. 시계를 여러 차례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반시간이 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시간 확인은 사실 몇 시인지를 알기 위해서도 아니고 ‘시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시간죽이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기차역의 내가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은 권태가 아니라 시간이다. 남아 있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그 시간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자 ‘분주함’에 머물게 된다. 결국 기차라는 대상에 대한 관심이 아닌, ‘바쁘게 파묻혀 있음’ 그 자체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권태와 함께 피어오르는 공허 속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공허 속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행해지는 이 분주함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바쁘게 파묻혀 있음’을 통해 시간 속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게 되지만, 도리어 시간에 붙잡히어 결국 공허 속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의도된 분주함으로 다만 시간의 머무적거림이 사라졌을 뿐이며, 사라진 시간과 함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관심은 결국 분주함 속에서 들어나는 사물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권태는 퇴근 시간을 한참 앞 두고 평일 낮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거의 모든 할 일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퇴근까지는 네 시간이 넘게 남아있다. 가만 앉아 내년도 목회 계획을 세울까 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동료 목사의 일을 거들어 보기도 하고, 피아노를 뚱땅거려도 보지만 겨우 1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하는 일 없이 가만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면 공허한 마음이 몰려올 것 같아 분주한 시간죽이기가 시작된다. 분주함에 나를 내맡기어 나의 관심을 돌려본다. 객관적 시간으로는 이제 세 시간이 남았지만, 주관적 시간은 곱절로 느껴진다. 시계를 보고 또 본다. 시간을 제압하고자 시도한 시간죽이기는 권태를 제압하기는커녕 도리어 시간에 붙잡혀 있게 만들어버린다. 여기 저기로 옮겨 다니며 시간죽이기를 하지만, 어디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 공허하다. 아무 할 일 없이 멍하니 있게 되고, 목적을 이룰 길 없이 무기력하게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을 의식할수록 공허감은 커진다. 유예되는 퇴근 시간을 체크할 수록 나의 퇴근시간은 아직도 한참인 것이다. 이제는 시간죽이기조차 그만두고 공허에 사로잡혀 있다. 주변의 사물들을 들쑤셔 봤자 그것들은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기에, 나는 공허해져만 간다.   

 

    하이데거는 권태의 두 번 째 형태 ‘어떤 것 곁에서 지루함’에 관한 설명을 위해 저녁 초대를 받은 상황을 예로 든다. “우리는 어느 집에 저녁초대를 받았다. 우리는 그곳에 굳이 갈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온종일 일에 매달려 있었고 저녁에는 시간이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곳에 가보기로 한다. 식탁에는 입에 꼭 맞는 여러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모인 사람들은 담소를 나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든다. 흥분된 상태에서 음악을 듣기도 재잘거리기도 한다. 벌서 자리를 뜰 시간이다. 오늘 저녁은 정말 무척이나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거나 아주 기분 짜릿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인사치레가 아니다. 지루했던 것이라고는 어느 것도 없는 저녁이었다. 사람들은 흐뭇해하며 집으로 온다. 저녁에 중단했던 일을 다시 얼른 살펴보고, 내일 아침에 할 일을 어림잡아 그려본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난 사실 오늘 저녁초대 자리에서 무척 지루했어.’ “

 

    이러한 상황에서는 시간죽이기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죽이기는 점잖게 처신하는 나의 태도 속에, 담소를 나누던 내 모습 속에,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 순간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는 분주함 속에 내맡겨진 첫 번째 권태와는 다른 방식의 권태이다. 사실 저녁시간 전체가 시간죽이기인 것이다. 기차역의 상황보다는 덜 대항적이고 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이는 더 깊어진 권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첫 번째 권태를 나의 바깥에서부터 온 것이라 할 때, 두 번째 권태는 나의 존재 자체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시간과 웃음을 내어줌은 물론 기꺼이 바쁜 일을 통제해가며 우리는 다시 공허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담소를 나누며 기분 전환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긴장 해소라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공허 속에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허 속에 내버려 둠’의 방식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저녁초대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의 시간은 초초하거나 머무적거리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되려 ‘느긋함’으로 주어진다. 다시 말해, 이제는 우리 존재를 분주함이 아닌 느긋함 속에 내팽개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번째 권태는 교회적 삶 속에서 어김 없이 느끼게 되는 보람과 연관된다. 맘이 맞는 교우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특히나 나를 지지해주고 따르는 이들과의 식사는 더 없이 그러하다. 딱히 맛집이 아니더라도 맛있고, 풍미가 없는 커피더라도 향기롭다. 가끔 하품이 나오고, 더 가끔 왼손 두 번째 손가락에 껴진 반지를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느긋하게 머무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한층 깊어진 관계를 맺은 것 같아 퍽 보람차다. 그렇지만 큰 보람을 느끼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어김 없이 무겁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는데, 뒤돌아 몇 걸음도 안되어 피곤과 졸음이 달음질쳐온다. 체면을 차리느라 참았던 하품을 입을 쩍쩍 벌려가며 해본다. 돌아보니 좀 전의 대화 자리에서 지루했었나 보다. 다만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죄스러워 지루했었다는 사실에 쉬이 집중하지도 못한다. 밀린 원고와 쌓인 집안 일들이 뇌리에 떠오른다. 지루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 내가 퍽 안쓰러워진다. 저녁 시간 자체가 결국 시간죽이기였던 것이다. 나는 다시 나 자신으로부터 미끄러져 나동그라져 있다. 또, 또, 다시 또 내 안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보다 깊은 내적 권태가 몰아쳐 온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 번째 권태는 ‘아무튼 그냥 지루해’로서의 철학적 권태이다. 이는 앞의 두 권태와는 구별되는 가장 본질적인 즉 근본기분으로서의 권태를 말하는 것인데 관련 예를 따로 들지는 않았다. 다만 이러한 권태는 위의 두 권태와 다르게 시간죽이기를 계기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권태와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권태이다. 지금까지의 권태는 분주함이나 느긋함으로 극복되어야 했었다면, 세 번째 권태는 시간죽이기를 통해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고, 도망가려 애썼던 ‘공허’에 머물 것을 지시한다. 그는 “깊은 권태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귀담아 듣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말하며 세 번째 권태를 논한다. 그러하기에 권태는 더 이상 피해야 할 정서가 아니다. 이 권태로움 속으로의 침잠은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의 반대되는 행위가 된다. 분주함과 느긋함은  이제 머무름이 된다. 권태에 머무름은 기다림의 다른 말이다. 우리는 지루한 권태 속에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 당장의 문제 해결도 아니고 호기심 해소도 아니고 기분 전환도 아니고 체면치레와 관계 개선도 아니다. 세 번째 권태를 철학적 권태라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은 삶의 의미일 수도 있고, 참된 자기일 수도 있고 내면의 소리일 수도 있겠다. 이때의 기다림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지평 안에서 개시되는 시간, 즉 가장 본래적인 나의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나의 시간, 다시 말해 나로부터 흐르는 이 시간 안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만이 단독적으로 남게 된다고 주장한다. 더디 흐르는 시간을 어찌 해볼까 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시간은 나의 시간이 될 수 없다. 또한 사람들에 휘감긴 채 멈추어버렸던 그 시간 역시 나의 시간이 아니다. 이러한 시간들은 모두 나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시간, 나의 개시를 방치했던 시간이었다. 깊은 권태 속에 머무름은 ‘나의 시간’의 회복이라 말할 수 있겠다. 세계와 타인으로부터 개별화되는 시간, 고독한 시간이다.

 

    참고 도서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철학입문> 하이데거 

    참고 논문 

    ‘하이데거의 권태’ 구연상, ‘하이데거에 있어 현존재의 기분에 관한 연구’ 박유정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현재 향린교회에 맘을 풀고 '다시 목사'가 되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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