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고 덜어내야 남는 나만의 취향 

 <소공녀 (전고운, 2017)>




이희승*



지난 주 제가 사는 뉴질랜드의 대척점(보다도 더 멀리)에 있는 북유럽 도시 헬싱키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 차, 왕복 일주일정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이라고는 하지만, 총 여섯 차례 비행기를 갈아 타는 여정동안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내는 3일 반나절을 빼면 약 4일정도의 일정이었지요. 평소대로라면 학회 준비에 밀려 떠나기 전날 밤에 허술하게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집어 넣을 수 있는 23킬로짜리 여행가방에 행장을 꾸렸겠지만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이라고도 하고, 헬싱키 공항에서 여행가방을 잃어 버리고 망연자실하던 영화 <카모메 식당>의 캐릭터를 상기하며 7킬로짜리 기내 수화물만으로 버텨 보기로 결심했죠. 평소대로 ‘필요할 만한 것’만을 꺼내 놓았는데도, 오도막하게 작은 여행가방 옆에 쌓인 짐은 도저히 다 함께 갈 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결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덜어내고 욱여 넣고 온몸의 무게로 내리눌러서 겨우 기내용 가방만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헬싱키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이었죠. 여행지 지도, 미술관 방문 기념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카달로그들, 학회 기념품, 제가 없는 동안 불편을 감수해 준 식구들에게 하나씩 주려고 산 선물들이 도통 자리를 못 찾고 호텔 침대위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침대 옆에 서있는데 문득 전고운 감독의 데뷔작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실없이…


제 22회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된 영화 <소공녀>는 대학 중퇴 후 가사도우미를 하며 살아 가는 이십대 중반의 미소가 사회적 가치와 타인의 취향에 떠밀리지 않고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지켜내는 과정을 세련되고 엣지있게 보여 줍니다. 스스로 감당못할 만큼 크고, 화려하고, 어수선한 누군가의 집안을 말끔히 정리해 주는 일이 싫지 않은 ‘청소와 가정식의 달인’ 미소는, 일당 4만 5천원의 수입에서 월세, 세금, 식비와 약값의 최소 생계비를 지출하고 남은 돈으로 즐기는 담배와 위스키 한잔만으로도 자신의 자그마한 서식지에서 양심과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 <소공녀 (A Little Princess)>의 주인공 세라가, 하루아침에 부잣집 아가씨에서 무산자가 되어 기숙사 다락방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와중에도 예의와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제목에서 연상되는 멜로드라마틱한 소공녀 세라와는 다르게, 영화의 첫 장면은 잘 사는 친구에게 어렵사리 얻은 쌀이 바닥에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담배를 맛있게 피워 물고 씩씩하게 서울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미소를 애처롭게 불행하지도 강렬하게 행복하지도 않은 인물로 소개합니다.




아무 것도 채워 놓고 쌓아 놓지 않아서 더욱 견고해 보이던 미소의 미니멀하다기보다는 마이크로한 라이프는 월세와 담배값 인상이라는 크나큰 위기를 맞습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담담히 가계부를 정리해 보던 미소는 결국 월세방을 쿨하게 포기하기로 합니다. 가방에 다 못 담는 옷가지는 한 일곱겹 쯤 레이어해서 입고, 과거의 추억을 담은 몇가지 아이템들을 골라 재활용 수거함에 내려 놓고, 살던 방을 다음 세입자를 위해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미소는 자발적 홈리스, 길위의 삶을 선택합니다. 이십년이 훌쩍 넘는 미소의 삶은 커다란 트렁크 하나에 단촐하게 담기고, 생계를 책임질 청소도구를 넣은 가방과 크로백 하나를 맨, 남루하지만 찌들지 않은 행색으로. 물론 영화는 눈에 잘 띄는 글씨로 깔끔하게 정리된 가계부를 클로즈업함으로, 미소가 살던 월세방을 지키려했다면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수도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선택임이 분명한 포기라는 것이 명백한 이상, 관객은 무심한 얼굴로 서울의 거리를 당당히 표류하는 이 젊은 여성을 N포세대의 비애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동정할 수도, 현실을 망각하고 무리한 소비로 자아 실현을 하는 철없는 이십대라고 비난할 수도 없는, 애매한 처지가 되죠.


미소는 예전에 함께 밴드활동을 했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하룻밤 묵을 곳을 청합니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과중한 업무에 예민해진 성격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시댁식구와 남편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을 책임져 준 고마운 친구는 헤어날 수 없는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힌 신세 한탄으로 미소의 마음을 어지럽히죠. 더이상 폐가 될 수 없기에, 미소는 음식솜씨 없는 친구를 위해 정성스레 밑반찬을 만들어 놓고, 드럼 치던 남자 후배의 신혼집으로 향합니다. 결혼 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을 당하고 장기 대출로 산 아파트에 덩그마니 남아 매일밤을 술로 지새우는 후배를 따뜬한 아침밥으로 위로하고는, 남자 후배 집에 얹혀 사는 것이 못마땅한 남자 친구 한솔의 소심한 불안을 달래 주려고 미소는 다시 선배 록기의 집으로 향합니다. 부모님과 한집에 사는 노총각 록기는 미소를 며느리감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이 시크한 방랑자를 억지로 잡아 두려고 하죠. 가까스로 강제결혼의 올가미를 탈출한 미소는, 부자 남편을 만나 여유있는 삶을 즐기는 선배언니의 저택 한구석에 편안히 자리를 잡습니다. 오랜만에 안전한 장기 투숙이 가능한 보금자리를 만난 미소를 보는 관객의 마음이 잠시 평온을 찾는 듯 하죠. 이제야 돈을 좀 모아서 다시 자신만의 월세방을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에 미소와 한솔은 자못 여유있게 맛집 데이트를 즐겨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치기어린 열정이 금수저 남편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되어버린 선배에게는,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즐겁기만 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환기시키는 옛 친구 미소가 단절과 망각 그리고 무기력한 나르시즘으로 지탱해온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만 여겨집니다. 다급한 마음에 그녀는 기성세대의 시각을 빌어 미소의 방관자적 삷의 태도를 비난하죠.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에 불안해하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존재론적 불안을 개인적 불행으로 인식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가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채우려고 버둥대지 않는 미소는 위험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선배의 집에서 또다시 거리로 나선 미소는, 고고한 유배자처럼 물질적 풍요에 취해 밤마다 뭔가를 게워 내는 서울의 한 복판에서 철벽처럼 단단하게 자신이 선택한 소소한 행복 – 담배, 위스키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 – 을 지켜 냅니다. 그렇다고 미소가 인생의 고단함과 매서움을 마냥 피해갈 수만은 없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이 무심한 듯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던 도시의 방랑객은, 웹툰 작가 지망생인 공장노동자 한솔이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확보를 위해 중동으로 2년간 해외 파견 근무를 떠나면서 개인적 선택과 포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냉정함과 마주합니다. 영화 <소공녀>는 한솔과의 이별장면에서 매정하게 푸른 새벽빛과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미소의 흐느낌을 통해, 일곱겹의 옷으로도 막아지지 않는 서슬 퍼런 가난의 칼날을 견뎌야 하는 이 세대 젊은이들의 현실을 정서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죠. 한솔이 떠나고 벼랑 끝에 온 것만 같았지만, 이천원이나 가격이 오른 위스키를 마시던 미소는 첫눈 오는 풍경과 코 끝에 묻은 위스키 향으로 다시 평정심을 찾습니다. 부와 명예를 회복한 소공녀 세라의 해피엔딩 대신, <소공녀>의 미소는 덜어내고 덜어내야 발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취향과 달팽이처럼 짊어진 마이크로 서식지를 기꺼이 선택합니다.


다시 와보지도 못할 헬싱키에서 다음달에나 시작하는 전시회 카달로그를 호텔 책상에 가만 올려 놓고 나니, 딸아이 방에 붙여 놓으라고 챙긴 핀란드어로 된 헬싱키 지도가 좀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선물을 선물스럽게 만들어서,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의 체면과 생색을 위한 요란한 포장도 좀 벗겨 봅니다. 대학 로고가 박힌 학회 기념품 중에서 쓸만한 볼펜과 메모지만 꺼내 챙겨 넣으니 작은 여행 가방이 그런대로 잠깁니다. 부치실 짐이 없냐고 묻는 데스크 직원에게 이게 전부라며 핸드캐리 가방을 살짝 들어 올려 보는데 빡빡한 일정에 찌든 얼굴에 살짝 미소가 퍼집니다. 괜시리…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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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살다 보면 과연 인간에게 선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쁘거나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마련이니까요. 자기 코가 석 자라 남의 처지에 관심을 두거나 도울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역시 그런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달 전 참혹하게 살해당한 자기 딸의 사건은 여태껏 해결되지 않고 있고, 이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녀는 동네 외곽도로에 있는, 낡은 대형 광고판에 거금을 들여 광고를 게재합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됐던 이 광고판에 그녀가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는 마을의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를 직접 겨냥한 것입니다.

그녀의 광고는 당연히 지역 사회를 술렁이게 합니다. 윌러비는 지역 사회에서 나름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러비를 비롯한 지역 경찰서 식구들은 이 광고 문구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특히 흑인 용의자를 무리하게 수사해서 문제가 된 사고뭉치 경찰 딕슨(샘 록웰)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목사나 치과 의사 같은 지역의 유력 인사들은 밀드레드가 괜한 짓을 한다며 말리려 듭니다. 말기암 환자인 윌러비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광고판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밀드레드는 끄떡도 안 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딸을 살해한 범인을 잡아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하는 것뿐이니까요.

사진 : 이십세기 폭스 코리아(주)


미스터리 스릴러 설정의 블랙 코미디


줄거리 소개만 보면, 지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진지한 미스터리 스릴러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약점을 후벼 파는 농담을 거침없이 던집니다. 상대를 모욕하고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밀드레드의 말과 행동 역시 일반적인 피해자 가족의 태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실제라면 심각한 수준의 폭력 장면과 방화 사건까지 일어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영화 속 맥락 안에서 관객이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요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게 우리네 삶의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소 과장돼 있긴 하지만, 각자 자기한테 관심 있는 것만 보고 그게 바르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은 아주 비슷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런 모습을 관찰하면 꽤 웃길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추구한 유머입니다.

원래 영국 연극계에서 천재 극작가로 더 유명한 마틴 맥도나는 감독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2008)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두 번째 작품인 <세븐 싸이코패스>(2012)도 그랬지만, 그의 장기는 스릴러 장르의 진지함을 비틀어 쓴웃음을 자아내는 블랙 코미디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자락 남아 있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죠. 세 번째 감독작인 이 영화 <쓰리 빌보드>는 감독의 작품 세계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좋은 배우들이 필요합니다. 감독이 의도하는 대사나 연기의 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연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코미디는 뉘앙스가 한 끗만 달라져도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밀드레드 역으로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캐스팅한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신랄한 대사를 내뱉으면서도, 섬세한 표현으로 다채로운 감정을 내뿜을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연상을 받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역시 올해 아카데미에서 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의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마마보이인 데다 만날 농땡이만 치는 나사 풀린 경찰 딕슨이 어떤 감정 변화를 겪게 되는지 지켜보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함께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우디 해럴슨의 연기 또한 감독이 지향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잘 보여줍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함께 사는 방법


인간은 누구나 무지와 편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저는 아시아의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에 미국의 흑인이나 저소득층 백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성 소수자와 여성의 처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경험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부지불식간에, 혹은 생각이 짧아서 다른 인종이나 성적 취향, 젠더에 대해 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지와 편견이 드러났을 때 취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회 구성원과 함께 살아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짧은 견해를 자연법칙이요, 진리라고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이란 이런 겁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약육강식은 자연법칙'이라며 무한 경쟁 체제만을 옹호하는 논리를 폅니다. '남자는 원래 씨를 뿌리는 본능이 있다'며 미투 운동을 폄하하기도 하죠. '인간이라면 후손을 낳아 기를 수 있어야 한다'면서 동성애 혐오를 당연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아주 고약한 사고방식이죠.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인간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험난한 자연계의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따라서 정말 '인간적'인 행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에 대한 예의와 기본적인 선의를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싫다면, 그냥 속세를 등지고 야생으로 돌아가 다른 동물처럼 살거나 아예 동물원에 거처를 마련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사나운 저소득층 백인의 긍정적 변화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주리주는 미국 중부 내륙 애팔래치아 산맥 인근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권위를 무시하고 호전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 저소득층 백인들이 많이 삽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처럼요.

두 사람은 처음에 각자 자기만의 시각과 주장에 갇혀 있는 극단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정당했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받을 상처를 헤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딕슨은 늘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으면서 타인을 무시하고 배척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변화합니다. 자신을 향한 다른 이들의 아주 조그만 선의를 경험하게 되면서요. 밀드레드는 인권이나 절차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딸의 사건 해결만을 바란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감사할 줄 몰랐던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딕슨은 자신의 편견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과거 자신이 했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듯 온갖 어설프고 이기적인 실수를 하지만, 변화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하는 마음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고 실천한다면요. 이것이 바로 언뜻 보기에 막장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 <쓰리 빌보드>가 남긴 속 깊은 교훈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2018년 2월 2일자 기사 <참혹하게 살해된 딸... 분노한 엄마와 예의없는 경찰>(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14876)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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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맡겨진 책무 

 < 스포트라이트 (토마스 맥카시, 2015)>




이희승*



언론이 존경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언론의 자유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견과 편견이 구분없이 혼재하는 기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사 노출도를 끌어 올려 더많은 광고주를 유혹하려는 천박한 화장칠을 하는 기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들먹이는 언론의 자유란 누구를 위해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인지에 대한 의구심말입니다. 철권 독재나 보도지침이라는 실재적 억압이 사라지자, 곧바로 시장의 논리라는 무형무취의 권력 아래 놓이게 된 오늘날 언론의 처지가 딱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정치적 중립이라는 얄팍한 명분이라도 유지하던 90년대와는 달리, 소유주나 특정계급의 관점에서 사회상을 재단하고 나아가 사실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더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암담함은 마치 만성질환처럼 익숙한 고통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미투운동, 남북한 화해, 그리고 개헌 등 과거로부터의 유산과 적폐를 구분하고, 현재의 혼란에서 중심을 잡아, 다음세대가 속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역사적 거시적 과제들이 산재해 있는 지금, 대한민국 언론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맡겨진 책무에 관한 올바른 태도를 새삼 어디에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인지… 직업병 탓인지 그 해답을 영화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2015년 개봉과 함께, 제 88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토마스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는 교단의 비호아래 수십년간 체계적으로 묵인되어 온 보스턴교구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문제를 파헤치는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탐사 취재팀 스포트라이트의 집요한 노력을 조명합니다. 실제로 스포트라이트 팀의 네명의 기자들과 '보스턴 글로브'는 2002년 1월부터 12월까지, 몇십년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되어온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600건에 가까운 기사를 생산했으며, 그 공로로 2003년 퓰리쳐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는 어마어마한 특종을 터트리고 세간의 주목을 받기 전, 스포트라이트 팀과 '보스턴 글로브'의 편집부가 1년이 넘는 취재기간동안 전방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카톨릭 교회에 대항해, 신의 이름으로 침묵을 강요받은 피해자들의 시각에서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한 흔적들에 집중합니다. 군더더기를 최대한 걸러낸 신문 기사처럼, 간결하고 속도감이 느껴지는 <스포트라이트>는 타락한 권력를 이기는 언론의 승리라는 과장된 결론에 치중하지 않습니다. 지루한 취재과정을 건조하게 따라가는 방식을 앞세워, 진정한 언론의 자유란 객관성과 치밀함을 바탕으로 한 언론의 작동 방식에 충실하고, 강자의 권위를 경계하고 사회 정의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작은 영웅들과 협력하며 약자의 입장에 공감하려는 사명을 놓지 않을 때 언론 스스로가 지켜내는 권리임을 확인시켜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자 사건에 접근하는 영화의 시각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보스턴이라는 도시의 분위기입니다. <스포트라이트>는 18세기 보스턴 차 사건으로 유명한 미국 독립전쟁의 진앙지이자,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도시 보스턴의 묵직한 존재감을 늘 옅은 잿빛 기운이 감도는 도시 전경을 통해 드러냅니다. 수십년간 계속해서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지만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개인차원의 불행으로 치부하고 진짜 가해자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이 사건의 속성 또한 영화가 설정한 뿌연 도시 공간과 일치합니다.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당들이 거리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대부분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고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 출신인 토박이들이 도시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보스턴. 마치 이 유서깊은 보스턴에 불어 닥칠 변화의 바람을 예고하듯, 영화의 초반에 이 도시를 대표하는 정통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를 지위할 편집장이 새롭게 부임합니다. 일년내내 햇빛 찬란한 휴양지 마이애미에서 일간지 편집장을 지낸 유태인 마티 배런 (리브 슈라이버)이 경영 위기에 놓인 '보스턴 글로브'의 보도국을 지휘할 구원투수로 등장하죠. 층 전체가 한공간으로 탁 트인 보도국과는 대조적으로, 미로처럼 얽힌 복도와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와야 하는 반지하층에 자리잡은 스포트라이트 팀은 계속해서 안타를 치는 다른 뉴스팀들과는 달리, 오래 준비한 홈런 한방을 치기 위해 몇달씩 탐사취재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새 편집장의 부임과 동시에 사내를 감돌고 있는 인원감축설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스포트라이트 팀의 팀장 로비(마이클 키튼)는 새 편집장이 슬쩍 찔러 주는 취재거리에 '노우'를 하기 어려운 입장이죠.


대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소도시에 버금가는 촘촘한 사적 인맥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보스턴 주류사회의 속성을 모르는 이방인인 편집장 배런은 부임하자마자 스포트라이트 팀에게 카톨릭 사제의 성추행 사건을 집중 취재할 것을 권합니다. 배후의 거대권력이 바로 카톨릭 교회라는 사실과 이미 단편적으로 여러차례 뉴스에 올랐던 먹잇감이라는 사실 때문에 별로 탐탁치는 않지만, 팀원들은 각자의 역할을 나눠 맡으며 서서히 탐사 취재에 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팀장인 로비와 팀원들은 광범위한 자료 수집, 관련인물들을 향한 끈기있는 설득, 집요한 근원 추적을 통해 몇십년간 침묵을 강요받았다는 아동성추행의 피해자들과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일삼은 사제들을 조직적으로 은폐 관리해온 로우 주교, 그리고 명백한 혐의로 기소된 사제들의 사면을 위한 법정 대리인 노릇을 해온 유력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취재범위를 차츰 넓혀 갑니다. 감춰진 권력의 타락과 음모를 밝히는 언론의 힘을 그린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조쉬 싱어가 차기작으로 스필버그 감독의 <더 포스트 (2017)> 을 집필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죠. 허나, 국가권력에 맞서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신념을 앞세운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 그래햄 (메릴 스트립)과 벤 브리들리 (톰 행크스)의 뚝심과 카리스마에 집중한 <더 포스트>와는 다르게, <스포트라이트>는 언론의 고유한 작동 방식은 정교한 팀플레이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유독 회의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죠.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각자 취재를 통해 접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스포트라이트 팀은, 각자의 장점과 약점에 섬세하게 반응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보완하려는 팀플레이의 정수를 보여 줍니다. 거기에 덧붙여, 묵묵히 팀의 장기 취재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중요한 순간에 취재 방향을 넌지시 던져 주는 편집장 마티와, 팀의 일원일 뿐이라며 솔선수범하는 팀장 로비의 리더쉽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불순한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처럼 혈기 왕성한 젊은 기자들을 보호하죠.


아동성추행에 가담한 50명이 넘는 사제들의 명단과 이들의 범죄사실을 알고도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로우 주교의 편지를 손에 쥐고 당장이라도 특종을 터트릴 수 있는 순간에, 팀장 로비는 모두의 동작을 멈추고 숨고르기를 합니다. 이대로 특종을 터트리게 되면, 사제들의 개인적 일탈과 주교의 일회적 판단 착오로 사건을 마무리짓게 될 거라는 경계심이 작동한 것이죠. 센세이셔널리즘의 기준으로 볼 때, 뉴스의 가치란 바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을만한 사건의 일탈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언론이 묘사하는 사건의 전말이 사회문화적으로 용인된 일상의 범위에서 멀리 벗어나 있어서 대중이 깊이있는 사고를 하지 않고도 손쉬운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면, 기나긴 취재와 복잡한 사실관계에 대한 지리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도 특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독자의 53퍼센트가 카톨릭 교도인 '보스턴 글로브'가 미국의 건국 이념을 상징하는 이 전통의 도시에서 수십년간 지속되어 온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그리고 주교의 묵인이라는 뉴스를 터트린다면 그야말로 특종 중에 특종일 것입니다. 하지만 책임있는 언론은 결코 그 공격 대상을 정상기준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반짝 이목을 끌만한 사건으로 보지 않죠. 팀장 로비는 바로 그 점을 젊은 기자들에게 강조합니다. "신부 말고 교회를, 개인 말고 시스템을, 행동말고 체계를" 고발하는 것이 뉴스의 본질임을 분명히 하려는 이 영화의 의도를 드러내는 극적 장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가치에 대한 도전이야말로 진정한 언론의 역할임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죠.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두 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기자들의 분주한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그들의 총총거리는 걸음을 뒤따르다가 어느새 예상치 못한 현실의 그림자, 가려진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숨겨진 진실에 이르는 길을 상징하는 두번째 이미지는 스포트라이트 팀의 기자들이 끊임없이 찾아 읽고 참고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옛 기사와 자료들입니다. 인류가 객관화된 기록을 후대에 남기는 유일한 종(種)이라고 할 때, 이 영화는 엄중한 팩트 앞에서 자신의 의견과 감상을 자제하고 최대한 자세를 낮추는 언론이야말로 촘촘한 역사기록의 주체임을 적시합니다. 사실을 파고들어 진실에 가까이 가려는 언론은 '노이즈'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게 마련이죠. 느리지만 철저한 스포트라이트 팀의 접근방법에 촛점을 맞춘 <스포트라이트>는 피해자의 심정을 함부로 상상하고, 가해자의 범죄여부를 성급히 판단하여 극적인 한순간을 포착한 싸구려 특종을 수없이 생산하는 이 시대의 언론을 향한 경고장이자 언론의 자유라는 본질적 가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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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선택지에 가려진 것들: <코코>(2017)



조은채*

 

※ 영화 <코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딱히 불편한 감수성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은데도 그 영화에서 어떤 점이 너무 거슬릴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왜 괜찮은 결과물에서도 '굳이' 나쁜 점을 찾게 되는지 스스로 뒤돌아보게 된다. 그건 명백하고 노골적이게 불편한 작업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짚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불편한 경험이다. <코코>(2017)가 그랬다.


  멕시코의 설화에 기반을 둔 <코코>는 아름답고 화려하면서 이승보다도 더 생기가 넘치는 '저승'을 무대로 진행된다. 멕시코에는 '죽은 자의 날'이라는 전통 축제가 있는데, 죽은 자들은 1년에 단 하루 이 '죽은 자의 날'에 이승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다. <코코>의 주인공 미구엘은 바로 이날 죽은 자의 물건을 훔친 벌로 저승에 떨어지게 된다. 벌이라고 보기에는 미구엘이 도착한 저승은 온통 반짝이는 데다가 활기가 넘쳐서 '살아있는 자'도 충분히 마음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이다. <코코>에서 이승과 저승은 오갈 수 있는 이웃 나라가 되고, 죽음은 두렵거나 불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나를 먼저 떠난 소중한 존재가 이승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코코>의 메시지는 기꺼이 믿어보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다. 하지만 <코코>는 자주 '안전한' 선택을 한다. 아니, 안전한 것 외의 선택지는 '굳이' 염두에 두지조차 않았던 것 같아서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코코에서 이야기의 진정한 '발단'은 주인공 미구엘이 아니라 그의 고조할머니와 고조할아버지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여자, 이멜다는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다. 왜 하필 구두 만드는 일을 골랐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의 수완이 좋았던 건지 혹은 손재주가 뛰어났던지 어쨌든 이멜다의 사업은 꽤 성공한다. 고손자인 미구엘이 태어나기까지 꽤 대가족이 되었음에도 온 가족이 구두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고 여유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구두 사업의 성공이 이멜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지는 못했다. 이멜다는 음악을 하겠다며 가족을 버린 남편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녀의 집안에서 음악을 완전히 금지한다. 그 금지는 이멜다와 이멜다의 딸인 코코, 그리고 고손자 미구엘에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금지의 원인이 되었던 떠나버린 가장에 대한 분노는 점차 옅어진다. 이멜다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딸인 코코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미구엘의 증조할머니로만 등장하면서 별 대사 없이 웃기만 한다. 도망친 가장에 분노나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승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는다. 고손자인 미구엘에게 이멜다의 해묵은 분노는 솔직히 이입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남의 일이다. 영화 <코코>는 가족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가족의 중요한 역할을 분노의 대상으로만 남길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코코>는 세대를 거쳐 그 분노를 조금씩 희석한 후에, 가족 외부에서 분노의 원인을 설정하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전설적인 가수인 에르네스토는 여러모로 중요한 인물이다. 미구엘은 에르네스토가 자신의 숨겨진 고조할아버지라고 오해하고 그의 기타를 훔친다. 미구엘은 음악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부숴버린 기타 대신의 에르네스토의 기타로 마을 노래대회에 참가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미구엘은 무려 '죽은 자의 날'에 '죽은 자'의 기타를 훔친 죄로 저승에 오게 된다. 미구엘은 이승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 또 전설적인 가수이자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인 에르네스토를 만나기 위해 왕년에는 뮤지션이었다는 초라한 행색의 남자 헥터와 함께 고군분투한다.


  에르네스토는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손자라는 미구엘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보였다는 사실에 그를 퍽 반가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네스토가 희대의 악인이자, 미구엘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승에서 아무도 자신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주지 않은 데다가 딱히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다는, 내내 우스워 보였던 헥터가 사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였다. 더욱 놀라운 진실도 밝혀진다. 헥터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와 딸을 뒤로하고 에르네스토와 함께 떠났다. 하지만 가족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헥터는 에르네스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에르네스토는 헥터가 만든 곡 없이는 유명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헥터를 독살하고 그의 곡을 훔쳐 유명해진다. 알고 보니 헥터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가족을 깊이 사랑하기까지 했던 멋진 가장이었다. 이멜다는 헥터가 실은 살해당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딸을 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고손자인 미구엘에게 헥터도 돌아오고 싶었지만 '에르네스토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훈계'를 들을 뿐이다. 왜 헥터만 떠날 수 있었고 이멜다는 없었는지, 혹은 헥터에게 어떠한 이유가 있었든 이멜다의 고통이나 분노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너무도 쉽게 곁가지가 되어 <코코>에서 잘려나간다. 헥터가 애초에 가족을 떠났다는 사실은 에르네스토라는 악당의 존재감에 밀려 더는 별 문제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 갖는 위대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코코>는 에르네스토라는 악당의 몸집을 불려 모든 문제를 그에게 환원해버린다. <코코>는 에르네스토라는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지로 우회하면서 가족 문제의 원인을 가족 외부로 돌리는 것에 성공한다.


  <코코> 속 저승에도 영원한 작별은 존재한다. 이승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저승의 존재는 소멸된다. 유일하게 자신을 기억하던 딸인 코코가 모든 기억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에 헥터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저승에서 돌아온 미구엘은 증조할머니 코코에게 달려가 헥터가 만든 노래인 '기억해줘(Remember me)'를 간절하게 부르며 그녀의 아버지를 기억해낼 것을 간청한다. 어느새 정신이 돌아온 코코는 놀랍게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다정했던 아버지' 헥터를 기억해낸다. 아마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일 장면이겠지만, 이 장면은 화해도 용서도 아니다. 용서나 화해 모두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므로 문제를 가족 외부로 돌리려는 <코코>에서 코코에게 이 두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코코에게는 아버지를 망각에서 소환해내 그에게 다시 '가부장' 혹은 '아버지'라는 위치를 돌려주는 선택지밖에 없다.


  <코코>는 가족은 그 자체로 일단 선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코코> 속의 '진정한 가족'은 대단히 협소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저승에서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모여 살면서 유사가족과 같은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코코>는 이들이 '진짜 가족'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그들보다 행복할 수도 없다고 믿는 듯하다. 유사가족은 화려한 저승과 대비되는 어두침침하고 누추한 곳에서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하면서 숨죽이고 살아간다. 하지만 헥터는 고손자의 활약과 내가 떠나도 나를 항상 기억해달라는 어찌 보면 이기적인 노래로 유사가족에서 무사히 졸업하고 진짜 가족에 다시 편입된다. <코코>는 한때 가족을 버리고 꿈을 좇았던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부채를 고손자를 통해 대신 상환해주고, 그가 다시 가족에 돌아올 수 있게끔 그럴싸하고 멋진 사연까지 마련해준다. 하지만 모습을 되찾은 <코코> 속의 '정상 가족'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은 그저 증발해버리고, 누군가의 잘못은 잘못이 아니게 된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블로그(http://eunchaecho.tistory.com)를 드문드문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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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치부 솔직하게 드러내 참사의 본질을 직시한 다큐[각주:1]


 

권오윤[각주:2]



       2009년 1월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권의 비인간성과 자본의 민낯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뉴타운 사업이 철거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지연되자 용역과 공권력을 투입하여 무리하게 진압했고, 그 와중에 일어난 화재는 철거민 5명과 의경 1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법적 책임은 당시 진압을 책임졌던 경찰 지휘부나, 경찰 지휘 책임이 있는 정부가 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옥 같은 불길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철거민들이 그 책임을 떠안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참사에 원인 제공을 한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지요.

       <공동정범>은 불공정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던 철거민 중 다섯 명의 출소 후 모습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당시 용산4구역 대책위원장으로서 함께 망루에 올랐던 아버지를 잃은 이충연 씨는 여러 언론을 통해 가장 주목을 많이 받은 인물입니다. 출소 후에도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반면, 다른 네 사람은 용산 지역 철거민이 아닙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소속의 다른 지역 철거민으로, 당시 연대 행동을 목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용산구 신계동 철거민 김주환 씨 , 동작구 상도4동 철거민 천주석 씨,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 김창수 씨, 중구 순화동 철거민 지석준 씨가 그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아픔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진 : 시네마달


솔직한 묘사, 공감으로 이어지다.


       소수자의 입장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그들을 지지하는 마음이 앞서 논지를 전개하는 데 유리한 측면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치부 같은 불리한 면모를 드러내면 왠지 이들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만 같고,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면만 보여주면 짧은 구호나 뉴스 기사 같은 이미지로만 남게 될 뿐, 관객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이 앞설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오해하거나 왜곡된 기억을 진짜라고 믿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인간이므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노동 계급의 문제를 다뤄온 켄 로치 감독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중심인물의 치부나 한계를 보여주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은 편입니다.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죠.

      <공동정범>의 감독들이 가장 고민했고 조심스럽게 접근한 것도 이런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충연을 비롯한 용산 쪽 사람들과 다른 지역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적 앙금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들 사이에는 참사 당시는 물론 출소 전후의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과 오해, 미안함 같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창작자로서 이들의 갈등을 아예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감정싸움은 벌써 사람들로부터 잊혀가고 있는 용산 참사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선택의 결과는 좋습니다. <공동정범>은 감정적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영화 속 용산 참사 관련자들의 심정은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것들이니까요.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철거민이 돼 본 적도 없을 테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가진 미안함과 서운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용산 참사라는 비극의 본질을 다시 한번 직시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겪은 이유는 턱도 없는 보상금에 분노해서 싸웠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지역 문제에 오지랖 넓게 나서서 연대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자본의 편에 서서 공권력을 동원해 주먹을 휘둘렀고, 부당한 판결을 통해 이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은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니까요.


차이보다 공통점에서 얻는 희망


       어떤 모임이나 단체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공존합니다. 대의와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이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과 연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지요. 이런 견해차는 종종 다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갈등이 노출됩니다. 참사의 진상 규명과 재심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충연의 태도와 인간적인 관계와 연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지향점이 다릅니다.

       양쪽 입장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으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기만 하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또한, 인간관계에만 신경 쓰다 보면 일반적인 동호회 모임과 다를 것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요.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백 사람이 있으면 백 사람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에만 주목하면 세상에는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차이는 인정하되 공유하는 가치와 목표에 집중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 <공동정범> 제작에 힘을 보탠 이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 시급히 이뤄지길 빕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2018년 2월 2일자 기사 <갈등-치부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해 더 마음이 가는 다큐>(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01216)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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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잔향 

<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2017)> 




이희승*



  망자가 살아있는 자들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쉽게 ‘유령’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게 됩니다. 새로 다가오는 것에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는 지나간, 혹은 지나가야만 할 것들을 통칭할때도 흔히 ‘유령’ 혹은 ‘망령’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지요. 선왕의 유령이 준비하지 못하고 맞은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달라며 젊은 왕자 햄릿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햄릿은 “그대는 성령인가, 악마인가? 천상의 영기인가, 지옥의 독기인가? 그대 마음속의 선악의 의도는 모르겠다만, 그런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말을 건네 보지 않을 수 없다”라며 용기를 내어, 밤이슬을 맞고 선 유령에게 말을 겁니다. 일말의 주저없이 선왕의 유령은 너무나 분명하게 살인의 순간을 묘사하고, 복수의 범위까지 세세히 지시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닭이 울어 지하세계로 퇴장해야 하는 그 순간까지 머리가 터질 지경인 아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죠. “아듀, 아듀, 아듀, 리멤버 미!” 이렇듯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령은 결국 덴마크 궁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한 시대가 갑작스레 막을 내리는 비극을 재촉하게 됩니다. 세익스피어의 무대 뿐만 아니라, 영화의 여러 장르에서도 유령의 존재를 산 자의 시공간에서 조우하는 경험의 영화적 재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얀 소복을 차려입고 무덤가에 출몰하는 처녀귀신이든, 피칠갑을 하고 교정을 배회하는 여고생이든, 사랑하는 여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애절한 약혼남이든, 남겨 둔 어린 자식의 육아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고스트 맘이든 말이죠.


  하지만 데리다의 유령론 (hauntology)이 제시하듯, 유령은 존재와 부재의 명확한 구분에 도전하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부재를 전제로 하는 유령의 존재는 근대물리학에 기반한 ‘자연의 법칙’에 도전하는 한편, 직선적인 역사관의 한계를 벗어나는 변화와 확장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조용히 개봉했다가 사라진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상상하는 대로 뭐든 만들어 내는 최첨단 디지털 시네마의 시대에, 구멍이 두개 뚫린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우스꽝스러운 유령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개인과 역사의 혼재에 관한 위험천만한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젊은 작곡가인 C (케이시 애플릭)은 아내인 M (루니 마라)와 함께, 한적한 교외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늘 혼자하는 음악 작업에 익숙한 조용한 성품의 C는 편리하고 깨끗한 도심의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하죠. M은 밤마다 으스스한 소리가 들리는 낡은 집이 무섭기 짝이 없지만 남편인 C는 부부의 짧지만 소중한 ‘역사’가 담겨 있는 이 집은 물론, 보이진 않지만 같은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듯한 존재에 설명할 수 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이 죽고, 가족없이 홀로 남겨진 아내는 물끄러미 영안실에 누워 있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크게 울어 보지도 못하는 아내는 C의 얼굴을 하얀 시트로 덮고는 영안실을 빠져 나갑니다. 잠시후, 죽은 남편의 시신은 하얀 시트를 뒤집어 쓴 채로 영안실을 나와 병원 복도를 배회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죠. 대사 한마디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갔다가 다시 돌아온 ‘침대시트 유령’은 석양으로 물든 드넓은 푸른 초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 갑니다. 이때 영화는 그 흔한 특수 효과나 CG 없이 침대시트를 질질 끌며, 당연하다는 듯 표표히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유령을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 주죠.


   슬픔에 잠긴 아내의 곁을 안타깝게 지키는 유령의 모습은 <사랑과 영혼>에 등장하는 애절한 눈빛의 샘 (패트릭 스웨이지)과 닮은 듯 보입니다. 별반 의심없이 관객은 조금전까지 존재했던 C의 다정했던 모습을 새하얀 시트위에 투영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은 관계의 연속성을 성급하게 단정한 채, 우두커니 집안 한 켠에 서있는,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이 유령을 죽은 남편의 ‘영혼’으로 간주합니다. 마치, 이승에서의 욕망, 의식과 의지가 죽음이라는 단절을 초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입니다. 하지만,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은 서서히 자의식과 기억을 잃고 이승에서 하릴없이 부유하게 됩니다. 햄릿의 아버지와는 달리 이 영화가 그리는 ‘고스트’는 인간성을 한 겹씩 허물처럼 벗어내면서, 머물고 싶다고 하면서도 부단히 앞으로, 미래로 내닫기만 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강박에서 한걸음 비켜 서게 되죠. 산 자의 삶이 한방향으로 전진하는 운동이라면, C의 실존 뒤에 남겨진 잔향과 같은 이 유령은 지상에 매인 존재들을 관장하는 물리법칙과는 다른 궤적과 속도를 가진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아내, 내 집, 내 음악 이라는 주체의식이 무효한 긴 호흡의 시간을 타고 흐르며, 과거-현재-미래-과거라는 순환적인 내러티브가 스크린 위에 몽환적으로 펼쳐 집니다. 영혼이나 유령의 형상에 인간성을 대입해 만들어낸 여타의 유령 이야기들과는 달리,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유령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하지만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관계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이야기를 구술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젊은 부부가 살던 작은 집에 다른 세입자들이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고, 마침내 그 집과 이웃집들이 허물어지고, 별빛이 성성하던 그 자리에 밤을 대낮처럼 밝히는 마천루들이 들어서는 동안, ‘고스트’는 사념없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질을 목격합니다. ‘고스트’의 경험을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은 참으로 인상적이죠. 실재와 부재의 경계에 선 존재와 죽은 C를 동일시했던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합니다. 다소 더럽혀진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고스트’는 요란하게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서, 분명 C에게는 상상도 못할 미래였을 수십년의 시간과 C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방인이였을 사람들 사이를 무심히 스쳐 지나갑니다. 마치 영안실에서 나와 넓은 초원을 걷던 영화 초반의 그 순간처럼 표표히. 전생에 마침표를 찍은 그 지점으로 되돌아온 ‘고스트’는 이제 막 삶을 마감하고 유령이 된 C와 같은 시공간에 서게 됩니다. 이 특별한 시간 여행으로 관객을 이끌었던 ‘고스트’가 영겁의 시간을 경험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새출발을 위해 집을 떠나는 부인 M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신참 ‘고스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아귀가 맞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의 결말을 열어 놓게 됩니다.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 안에서 실재와 부재를 마치 아귀가 딱 맞는 댓구라고 상상했던 우리는 사뭇 ‘위험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은 시종일관 말없이 침대시트를 뒤집어 쓰고 느린 걸음으로 관객을 이끌면서, 세상을, 우주를, 시간을, 공간을, 존재의 속성을, 그리고 유령을 우리가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설정했던 모든 경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존재와 존재가 남긴 흔적들이 얼키고 설켜서 만들어진 <고스트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 대사, 빈틈없이 직조된 플롯, 세심하게 구성한 이미지 등에 의지하지 않고, 한때는 누군가 혹은 무엇이었던 존재가 남긴 은은한 잔향과 조심스런 공기의 울림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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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던 반란...’커닝’ 스릴러 온다[각주:1]


 

권오윤[각주:2]



       끊임없는 시험의 연속인 학창 시절에 ‘커닝’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만큼 흔한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좀 덜했지만, 입시 부담이 높아지는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심지어 대학에서도 크고 작은 부정행위 시도는 늘 있었습니다.

       유형도 다양합니다. 남의 답안지를 무단으로 훔쳐보는 것부터 처음부터 여럿이 짜고 공부 잘 하는 친구의 답안을 공유하기로 하거나, 자기만 아는 곳에 공부한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놓기도 합니다. 남의 답을 그대로 베꼈다가 탈이 나는 경우도 있고, 좀 더 머리를 굴려 적절히 알아서 다르게 적거나 그냥 자기 풀이에 참고하는 정도로만 쓰기도 하지요.

       <배드 지니어스>는 바로 이 ‘커닝’을 소재로 한 스릴러입니다. 방콕의 명문 고등학교로 전학한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같은 반의 바로 뒷번호 학생인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와 친해집니다.

       그런데, 연기자를 꿈꾸는 그레이스는 일정 성적 이상을 받지 못하면 연극반 공연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걸릴까 봐 고민입니다. 린은 그레이스가 제일 어려워하는 수학을 따로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막상 시험 시간이 되자 그레이스는 전혀 답안을 쓰지 못합니다. 보다 못한 린은 그레이스에게 시험 감독의 눈을 피해 답을 직접 알려 주게 되지요.

       그레이스의 부자 남자 친구 팟(티라돈 수파펀핀요)은 이 소식을 듣고 린에게 접근합니다. 자기에게도 답을 알려 주면 과목당 3천 밧(우리 돈으로 약 1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죠. 팟뿐만 아니라 다른 급우 몇 명도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린은 고민 끝에 본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완벽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사진 저작권자: (주)팝엔터테인먼트


흥미진진한 '커닝' 스릴러


       불법 행위를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와 스릴에 집중한, 전형적인 케이퍼물의 공식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블랙 유머, 서스펜스 넘치는 장면들이 돋보입니다. 그런데도 범죄극의 필수인 피와 죽음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순전히 돈으로 좋은 성적을 사려는 금수저의 욕망, 실력은 있어도 돈이 부족한 흙수저의 처지, 기발한 커닝 기법이 맞물리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은 감독 나타우트 폰피리야는 2012년에 <카운트다운>이란 데뷔작을 내놓은 신예로서,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잘 짜인 샷 구성과 감각적인 편집을 통해 탄탄한 연출력을 보여주는데, 특히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과장하고 영화 속 시간을 늘려서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실력이 발군입니다.

      무조건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만을 원하는 과도한 교육열, 뭐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극심한 빈부 격차가 동시에 존재하는 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낸 것도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태국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경제 성장 과정에서 겪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배드 지니어스>가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휩쓸었던 데에는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가 친숙하게 느껴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극 중 린 역할을 맡은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을 비롯한 태국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편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미숙한 구석은 있지만, 자기 이익이 걸리면 어른 이상으로 영악해지는 중심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잘 살려내었습니다. 린의 아버지 역할로 출연한, 태국의 유명 록 뮤지션 타네 와라카누크로 역시 진솔하고 안정감 있는 연기로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합니다(그는 올해 BIFF 상영작이자, 선댄스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싱가포르 영화 <뽀빠이>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부정행위 이면에 도사린 사회의 책임


       어떤 경우든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단 꼼수로 좋은 성적을 받겠다는 계획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반칙 행위를 저지른 학생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굳이 이렇게 남을 속여 가며 점수에 연연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시험 점수로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고 미래까지 결정해 버리는 사회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요 인물들이 그토록 부정행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벌과 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자식의 진짜 능력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시험 점수와 좋은 학교 입학 여부에만 관심 있는 부모는 모두 이들의 공범입니다.

       또한, 부조리한 기성세대의 행태도 이들의 윤리 의식을 흐릿하게 하는 데 한몫합니다. 영화에서 모범생 린이 커닝 사업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학교가 학부모들로부터 추가로 운영비를 뜯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불법을 저지르는 학교를 속이고 돈을 버는 행위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젊은 세대나 청소년의 비행을 언론 보도로 접하면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요즘 애들 참 문제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며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죠. 하지만 그렇게 모른 척, 아무 상관도 없는 척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에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젊은 세대의 악행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먼저 돌아보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고 힘든 부분이 있다면 곁에서 도와줄 수도 있어야겠지요. 이것이 바로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의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자, 이 영화가 제시하는 현명한 대안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3일자 기사 <그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던 반란... ‘커닝' 스릴러 온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73707)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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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믿는 것이 인간의 길 

< 블레이드 러너 2049 (드니 빌뇌브, 2017)>




이희승*



  1982년 개봉했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19>는 ‘저주받은 명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극장판, 감독판, 최종판을 거듭 내놓으며 한 세대의 미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성비가 내리는 로스엔젤레스 시내.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암울한 도시 전경을 더욱 음산하게 비추는 네온 불빛.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무덤같은 건물들. 미국과 소련이 양분한 세계가 냉전시대의 논리 아래 안정된 듯 보이던 1980년 초반, 스콧 감독이 스크린 위에 정교하게 빚어낸 미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시간이라기보다는, 환경오염으로 벼랑끝에 내몰린 생존과 기술의 발달로 극대화된 기형적 쾌락 사이를 오가는 죽음의 시간에 가까워 보입니다. 극도로 자동화된 세상에서 노동의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자발적으로 운동성을 잃어버린 인류. 그 인류를 대체하는 복제인간들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세상. 2019년이 2년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돌아 보면, 35년전 아날로그 기술로만 만들어진 이 SF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그럴싸한 이름표를 붙이고 이윤의 극대화라는 일관된 목표를 위해 쉼없이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가히 선구자적 비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1982년 원작은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과학기술의 발달은 바로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던집니다. 복제인간 ‘로이(룻거 하우어)’는 인간보다 더 나은 능력을 지니고, 경험과 기억을 통해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지만 이미 프로그램된 4년이라는 수명으로 철저히 제한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품고 지구로 잠입합니다. 신모델 넥서스-6를 개발한 타이렐 박사를 만나지만, 로이가 창조주 혹은 아버지라고 여겼던 타이렐 박사와 개발자들은 더이상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이 의식있는 존재에 대한 질문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재주많은 미숙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죠. 말할 수 없는 무상함에 괴로워하며, 자신을 제거하러 온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던 로이는 건물꼭대기에 매달려 위태로운 데커드의 목숨을 구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리고 주어진 수명을 마감합니다. 의식과 생명력을 지닌 복제인간을 자신들의 장난감인양 취급하고, 쓸모를 다하면 무자비하게 제거해 버리는 인간들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영웅적이기까지 한 로이의 죽음은 비가 눈물처럼 흐르고 시퍼런 새벽빛이 빗줄기 사이로 떠오르는 영화의 결말에서 데커드와 관객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듯 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은 개정판을 거듭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그을린 사랑>, <시카리오>, <컨텍트> 로 한창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는 캐나다 출신의 드니 빌뇌브 감독과 손을 잡고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기획합니다. 젊은 감독의 비전을 존중하면서도 제작자로써 지원을 아끼지 않은 스콧 감독의 노력에, 원작의 과중한 무게나 장르적 요구에 매이지 않으려는 빌뇌브 감독의 고뇌가 더해져 만들어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더이상 재갈을 물릴 수 없는 기술만능주의의 폭주에 대항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로 미래를 맞아야 하는가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압도적인 카메라 워크의 공중쇼트로 미래도시의 전경을 스크린 가득 채운 원작의 출발과는 달리 희뿌연 하늘아래 보이는 살풍경한 도시외곽을 훑어 지나갑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유전자 합성작물 농장을 지나, 어느 농가에 내려 앉은 경찰 비행선에서 내린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은 간신히 와이어로 여기저기를 지탱해 놓은 죽은 고목 옆을 지나 아무도 없는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곳은 30년전에 뿔뿔이 흩어진, 수명기한이 없는 복제인간 넥서스-8 중 하나가 숨어 사는 곳이지요. 농장에서 일하고 집안으로 돌아온 초로의 리플리칸트 새퍼는 K를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합니다. ‘제거’되기 직전, 그는 K에게 묻습니다. 동족을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로 사는게 어떠냐고. 그리고는 너는 기적을 체험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노예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노라고… 이 뜬금없는 퍼즐 조각은 순종형 복제인간이자 맡은 일을 성실히 잘하는 ‘착한’ 블레이드 러너인 K의 뇌회로에 불길한 바이러스를 심어 놓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을 생산, 폐기하는 것이 일상인 이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적’의 존재에 혼란스러워진 K의 내면을 반영하듯, 영화는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이윤과 편리, 그리고 찰나의 쾌락을 위해 헌신짝처럼 버린 2049년에도 꿈꿀 수 있는 기적을 형상화됩니다. 어려운 임무 수행으로 받은 보너스로 K는 가상애인인 홀로그램 ‘조이’ (아나 디 아르마스)에게 휴대용 홀로그램 장치를 선물합니다. K 의 배려로 바깥 세상 구경을 하게된 이 아름다운 홀로그램 애인은, 내리는 빗방울을 전자파장으로 느끼며 디지털 신호로 구성된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서 세상과 조우하는 흥분과 경이를 고스란히 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K 또한 30년전 데커드와 함께 사라진 레이첼(숀 영)이라는 복제인간이 임신과 출산을 했었다는 단서를 찾아내 추적하는 동안, 자신이 유전공학적으로 대량생산된 보통의 복제인간과는 달리, 부모의 사랑을 통해 탄생한 기적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제 그는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될 수 없었던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합니다. 이 기적과도 같은 체험을 통해 K는 제도와 시대에 순응하던 조용한 일상을 송두리채 내던져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하죠.


    도주하는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임무 수행을 위해 생명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죽음의 평야를 자동비행모드로 가로지르며, 눈을 감고 졸던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한 복제인간 블레이드 러너 K는 이제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험, 목숨을 위협하는 고난, 유일성 (singularity)라는 인간 정체성의 핵심을 공유하는 존재이고픈 강렬한 욕망,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상실의 고통, 환상과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절망,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의 허무,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자아의 영역을 초월한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 윤리적 체험을 차례로 통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K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소복히 내리는 눈송이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마치 자신을 사랑했던 홀로그램 조이가 처음 빗줄기에 손을 내밀던 그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말이죠. 자신이 사랑과 소망을 통해 탄생한 기적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믿음으로, 확신으로 바꿔 주었던 조이. 그녀와 함께 뛰어든 혁명같은 삶의 소용돌이에 모든 것을 내던진 후에야 찾아온 휴식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K는 기적을 믿는 것만이 기적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토록 찾던 인간의 길임을, 그리고 기적의 체험을 통해 또다른 기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35년전 원작의 결말이 그러했듯,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라는 어려운 질문을 다시한번 꺼내 놓고 끝을 맺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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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가부장제의 역설,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각주:1]


 

권오윤[각주:2]



       전쟁은 모든 것을 망칩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인류가 성취한 경제적 번영은 잿더미로 변하고, 사회 문화적 자산은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이 영화 <프란츠>는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어느 마을,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은 안나(폴라 비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살며 날마다 무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나는 아직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프란츠의 무덤가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프랑스 청년 아드리앙(피에르 니네이)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저녁 무렵에 우수에 젖은 얼굴로 집까지 찾아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요. 안나는 아드리앙이 프란츠가 프랑스 유학 시절 사귀었던 친구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안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드리앙은 이후로도 여러 번 집을 찾아 프란츠에 대한 추억을 들려 줍니다. 프란츠의 부모와 안나는 예의 바르고 섬세한 아드리앙에게 금세 매료됩니다. 안나는 프란츠 부모의 배려로 아드리앙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드리앙으로부터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에 대해 듣게 되고, 감정적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할리우드 고전의 리메이크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독일 출신 명감독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내가 죽인 남자>(Broken Lullaby)(1932)를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리메이크힌 영화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남성의 죄책감에 초점을 맞춘 원작과는 달리, 안나의 감정에 집중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 로케이션, 촬영 이렇게 세 가지에 공을 들여 담백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입니다. 프랑수아 오종 하면 재기발랄한 내러티브 구성과 도발적인 문제 의식 같은 것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형식상 매우 고전적입니다. 그림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를 이끌어 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담는, 영화 제작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에 충실합니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신중히 계획된 인물 샷들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앵글과 샷의 크기, 초점 이동 등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화면에서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도록 하지요. 극의 구성상 중요한 장면들은 물론이고, 무덤가에 서 있거나 기차역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등 언뜻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까지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장면의 흑백 화면에서 꿈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컬러 화면으로 바뀌는 순간들, 아드리앙이 프란츠의 가족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의 애수어린 멜로디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사한 연인의 친구에게 끌리는 안나의 마음에 집중하며 서서히 절정에 다다릅니다.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여배우 폴라 비어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주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보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와 드러낼 때의 극적인 차이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입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16년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 초래한 가부장제, 그것을 뒤엎는 역설


       이 영화는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가부장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적시합니다. 극 중 프란츠의 아버지가 후회하듯,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은 조국의 영광을 앞세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희생양입니다. 약혼자의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장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권유받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극 중 안나가 겪게 되는 일들은 가부장제의 미몽과 억압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독일 마을에서 벗어나 파리와 프랑스 시골 저택까지 간 끝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만이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안나의 각성은 두 가지 역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안나를 중심으로 오가는 거짓말들입니다. 프란츠나 아드리앙은 안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 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녀를 가부장적 질서 안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안나는 이것을 프란츠의 부모에게 고스란히 돌려 줍니다. 그들의 낭만적 환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내지요. 한 때는 그녀를 옭아맸던 허구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나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보게 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자살>입니다. 살롱 전시에 선정되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화가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그림은 생생한 죽음의 현장을 담고 있지만, 안나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스토리가 안나의 애초 바람대로 흘러갔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낭만적인 연애담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감독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안나는 좌절을 겪은 끝에야 진정한 희망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절망의 끝에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그것을 붙잡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 <프란츠>의 미덕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7월 30일자 기사 <전쟁과 가부장제의 상처,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653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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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입장 

< 택시운전사 (장훈, 2017)>




이희승*



  영화라는 매체 혹은 예술형식의 탄생부터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영화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은 숙명처럼 영화의 역사 그 자체와 궤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란 ‘과거’ – 그것이 역사적 과거를 복기하는 드라마적 구조이든, 카메라 앞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액션이 스크린 위에서 현재화된 환시라는 매체적 구조이든 – 를 현재의 시점으로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역사에 대한 주관적 기록 혹은 과거를 기억하고 소통하는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 중 하나라는 점도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고 현재화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과정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나라 영화사도 이런 영화의 근원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과 <평양성> 처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슬랩스틱 코메디, 유하 감독의 <쌍화점>이 보여 주는 성리학이 도달하기 전 고려시대 상류층의 섹슈얼리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수한 역사 드라마들, 일제 강점기를 살아 낸 한국인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다양한 영화적 시도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처럼 군사독재와 개발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발묶인 한국의 현대사가 빚어낸 비극적 인간상을 직시하는 영화 등, 수많은 한국 영화들이 역사와 영화라는 두 축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나름의 좌표를 찍어 왔습니다. 올해 화제몰이를 하며 개봉한 두 영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이런 맥락에서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네요. 결코 밝지 않은, 회한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가 마구 뒤엉킨 시대를 돌아 보는 우리의 입장에 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거의 동시에 개봉한 두 영화에 대한 평가를 분분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최근 한국 영화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에 대한 소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저에게, 일본 문화사를 가르치고 있는 일본인 동료가 자신이 논문지도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인 한국 학생과 함께 뉴질랜드에서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를 함께 보자는 제안을 해 온 일이 있습니다. 영화 관람 후, 셋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참으로 오묘한 조합이었습니다. 그후 며칠 간격으로, 정확히 같은 세대로 같은 시대를 통과한 동갑내기 남편,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사춘기 딸아이와 함께 <택시운전사>를 보러 갔지요. 두 눈이 벌겋게 되어 영화관을 나오는 엄마 아빠를 올려다 보던 딸아이의 표정 또한 형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경험에 관한 정리된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역사가 만나서 만들내는 공간이 결코 어떤 시제, 시점, 시선에 갇힐 수 없는 다면체적 경험을 유발한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네요.


  5월의 광주를 영화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전두환 - 노태우 정권의 삼엄한 통제, 민주화이후에도 터부시되어온 소재에 대해 상업영화 제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 왜곡된 보도를 통해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는 관객들의 혼재 등의 이유로, 아직도 5.18은 다루기 어려운 영화적 소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처 깊은 과거사가 늘 그렇듯, ‘80년 5월 광주’를 스크린에 담는다는 것은 창작과 기록이라는 두개의 서로 다른, 심지어 배척되는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해야 하는 과정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예상되는 불이익, 상업적 비평적 불확실성, 그리고 불투명한 역사기록 등등에도 불구하고 – 80년 5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광주 사람들은 어떤 비극을 견뎌내야 했는가, 이 비극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적 답변을 시도하는 일은, 주관적 사고를 통한 수단적 접근이나 어떤 선행적 목표에도 의존하지 않는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절대명령(absolute maxim)은 광주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스토리의 외적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택시운전사>는 이런 절대명령에 반응하는 자각한 시민으로써의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일본에서 근무하고 있던 독일의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토마스 크레취만)은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옵니다. 영화의 초반은 환상적인 근무지인 일본에서 안온한 일상을 보내는 서양의 외신 기자들과 쾌적한 환경이 결국 언론인에게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일본을 떠날 때도, 그리고 다시 한국을 가까스로 빠져 나가 일본으로 돌아 가는 후반부 장면에서도, 그는 언론인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거대하고 초월적인 시대정신의 환상에 젖기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임박한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람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직업적 윤리 안에서 충실하게 이행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화의 제목 <택시운전사>는 이 영화가 가진 옳은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의인 ‘김사복 혹은 김만섭’이 아닌 <택시운전사> 김만섭이라는 주인공은 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맞닥뜨린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선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관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선을 담지하고 있지요. 영화의 중반부에 김만섭이 순천에서 딸아이에게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사정을 전화로 설명하는 대사도 이런 해석을 확인해줍니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역사의 변곡점에 존재하는 비극들의 원인과 극복도 바로 이 정언명령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정희 암살 이후, 신군부는 정언명령에 배치되는 가언 명령에 충실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즉, ‘당연히’ 국민을 위한 최선을 추구해야 하는 국가 권력을, 야심에 눈먼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독점하고 국가의 방향을 자신들의 사적, 정치적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리고 만 것이지요. 앞선 18년간의 군부독재의 결과로 엄청난 강도의 국가 권력이 일부 세력의 손에 좌지우지될 수 있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잘못된 국가 권력의 사용은 무고한 시민을 향한 어마어마한 폭력이 되고, 언론 장악으로 인해 초법적인 국가 권력의 폭력행사는 정당화되고 일상화되어 버립니다. 아직도 광주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이런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영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조우하는 우리 모두의 ‘지금’은, 이런 중첩된 역사적 과오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시나리오인 ‘북에서 내려운 간첩과 용공세력이 힘을 모은 광주 사태’라는 왜곡된 역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현재진행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택시운전사>는 이런 역사적 현상이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을때, 개인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벗어난 초월적인 시선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능력이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위르겐도, 김만섭도, 그리고 위르겐과 김만섭을 사력을 다해 쫓는 사복경찰들도 ‘이게 도대체 다 무슨 난리인지’ 알지 못한채 80년 5월 광주로 흘러 들어 오게 됩니다. 이때, 영화의 주된 관점이 외부인의 시선과 동일시된다는 설정은 아직도 한국현대사가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비극을 겪은 내부자들의 시선과 합일되지 못한 채, 신군부의 ‘빨갱이들이 주도한 광주사태’라는 날조된 시나리오와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충돌을 통해 아주 천천히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과정 속에 있음을, 그 뿌리깊은 현대사 인식의 한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 <택시운전사>가 광주 택시가 아닌 ‘서울 택시’의 시선으로 5월의 광주를 통과하는 구조를 선택한 점은, 개인의 시점과 이해는 언제나 역사의 흐름에 대해 외부자로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한계와 함께, 권력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 왜곡으로 인해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문제점을 묶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택시운전사>는 다소 안일한 감상적인 접근이나 상업영화로써의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한 듯한 작위적인 설정들이 가지는 한계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가 가능하게 한 <택시운전사>의 정점은 간과하기 어려운 영화적 힘을 발휘합니다. 순천의 한 식당에서, 바로 옆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해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허겁지겁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던 김만섭은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됩니다. <택시운전사>는 송강호의 연기를 통해, 일상화된 폭력의 진짜 얼굴을 목격하고도 그대로 눈을 감는 ‘보통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예상 가능한 모든 위험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두고온 손님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무조건적 명령에 반응하는 자각한 시민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의 고뇌를 정직하게 전달합니다. 온몸이 벌벌 떨리는 고뇌 끝에 택시를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하는 김만섭(송강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잡은 클로즈업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합리적 분석도 정언명령 앞에 선 개인을 도울 수 없음을 절절하게 표현합니다. 오로지 정언명령에 반응하는 윤리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을 행동으로 발현하는 용기와 결단은 평범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도 말이죠. 저에게도 <택시운전사>의 클라이맥스는, 역사의 외부자에서 역사의 주체로 전위하는 그 순간의 고뇌와 희열을 경험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시민사회가 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26년>, 그리고 <택시운전사>를 통해 80년 5월의 광주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는 이제 시작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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