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성별화된 세뇌(1)





조은채*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가스등(Gaslight)>(1944)은 『가스등 이펙트』의 저자 로빈 스턴(Robin Stern)에 의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명명된 정서적 학대의 양상을 면면이 보여준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가해자(gaslighter)”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gaslightee)” 사이에서 발생한다. 가해자의 반복된 상황 조작과 거짓말에 노출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의 현실감각, 판단력, 기억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피해자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약해질수록 가해자의 영향력은 강화되며, 종국에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권까지 내어주게 된다. <가스등>의 주인공인 폴라(잉그리드 버그만)가 남편에게 결혼 생활 내내 당하는 것이 바로 이 가스라이팅이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이모가 살해된 후 모든 유산을 상속받은 폴라(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어느 날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접근한다. 그레고리를 잘 모르면서도 깊이 사랑하게 된 폴라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물려받은 런던의 이모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그레고리가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듣는다고 주장한다. 폴라가 병에 걸려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거의 매번 소지품을 잃어버린다는 이유로 외출을 금지하기도 한다. 폴라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남편인 그레고리와 그가 고용한 하녀 두 명뿐인데, 그 두 명 역시 폴라에게는 적절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한 명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렵고, 다른 한 명은 폴라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그레고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를 환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폴라는 그레고리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환경 속에서 그의 걱정을 빙자한 교묘한 거짓말과 속임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당신은 잘 잃어버리잖아."

"제가요. 몰랐는데요.” 


“건망증에 의심까지 생겨?” 

 “그럴 리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모르겠어요.” 


 “당신이 아프거나 환각을 보면 슬퍼.” 

 “………”


   폴라는 그레고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 어렵지만, 마땅한 증거도 증인도 없다. 처음에는 그의 말에 반문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점차 폴라는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레고리의 가스라이팅이 점점 그 강도와 빈도가 높아질수록, 폴라는 “갑자기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져요.”, “나도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레고리가 의도했던 것처럼 자신의 판단력과 기억력을 믿을 수 없게 된 폴라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점차 폴라는 그레고리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레고리의 기준과 명령이 있어야만 안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레고리의 “정서적 학대”, 즉 가스라이팅이 성공한 것이다.

   폴라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는 것은 매일 밤 일어나는, 그녀 혼자만 듣고 보는 어떤 사건 때문이다. 매일 밤 그레고리가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고 나면, 갑자기 천장에서 정체 모를 발소리가 들려온다. 방 안의 가스등도 돌연 희미해진다. 그러나 폴라 말고는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다. 둘 뿐인 하녀 중 하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른 하나는 늘 외출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목격담이 완전한 허구, 즉 폴라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레고리에 의해서 폴라의 경험은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징후이자 증거가 되어버린다.

   영화는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그레고리가 얼마나 교묘하고 치밀하게 폴라를 조종하고자 하는지 면밀하게 보여준다. 어렴풋하게 암시만 되었던 그레고리의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이미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고나서이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접근한 것은 폴라의 이모가 생전에 소유했던 “외국 왕실의 보석” 때문이다. 폴라가 매일 밤 들었던 천장 위의 발소리와 희미해지던 가스등의 불빛은 폴라의 망상이 아니었다. 그레고리가 다락방의 불을 환히 밝힌 채로 폴라 이모의 유품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졌기 때문이다. 그는 속편히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 뿐인 폴라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그가 결혼 생활 동안 폴라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정신적 학대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전부터 그들 부부, 정확히 말하면 그레고리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던 런던 경시청 소속의 어떤 경위의 도움과 증언으로 폴라는 그레고리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 경시청에 그레고리를 넘긴 폴라는 자신이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스라이팅은 현실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자행된다. 그레고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스스로 불신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법을 영화 내내 직접 시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고리에게 “외국 왕실의 보석”을 훔치겠다는 비교적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스턴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들도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이유나 의도 없이도 상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이 가스라이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위계이다. 스턴이 예시로 드는 상사와 부하 사이의 혹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의 가스라이팅은 이 위계를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 상사와 부하 사이에 존재하는 직급, 경험, 숙련도 등의 차이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연령, 경제력 등의 차이. 이 차이를 기준으로 권력의 위계 구조가 형성되고, 한쪽이 다른 쪽의 영향력 행사에 필연적으로 취약해진다.

   스턴은 가스라이팅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관계”, 즉 연인, 친구, 가족, 상사와 부하, 동료들과의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20년간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그의 경험에 따르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은 반면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가 가장 빈번했기 때문인지, 스턴의 저서 『가스등 이펙트』는 “남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스라이팅 사례로 빼곡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시는 여성에게는 피해자, 그리고 남성에게는 가해자라는 역할이 처음부터 성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스턴은 왜 대부분의 가스라이팅이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정면으로 맞부딪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대신에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신종 전염병”이라고 명명하는 장에서 부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결과인 세 가지 요인이 이 새로운 질병을 창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성 역할의 근본적인 변화와 그에 대한 반발”, “개인주의 만연과 개인의 고립”, “사회의 압력과 세뇌”을 그 원인으로 제시한다. 스턴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시작된 “성 역할의 변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일종의 “위협”이었다. 이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남성”들은 “강하고 똑똑한 여성”을 “통제”하려고 했고, “특정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까지 남성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들의 통제에 “동조”했다. 스턴은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스라이팅이 사회의 변화에 역행하는 “특정”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합작인 것처럼 진단한다. 이 특정한 남성과 여성을 “새로운 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 내의 “신종 전염병”이라는 말은 가스라이팅을 “특정”한 남성과 “특정”한 여성, 즉 “특정”집단 내의 문제로 축소해버린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성과 남성 사이의 권력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서 비롯된 착취와 폭력은 담론의 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턴은 여성에게 가해져 왔던 폭력과 착취를 가스라이팅과 연결짓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젠더의 위계에서 오는 차이가 가스라이팅을 성별화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셈이다. 성 역할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에서도 가스라이팅이 드물지 않게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가스등>의 폴라 역시 전통적인 성 역할을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그레고리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조금의 위협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젠더의 위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 혹은 영향력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레고리가 폴라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지닌 권력 차이 때문이고, 그 권력의 차이는 결국 그들의 성별에서 기인한다.

   가스라이팅이 애초에 성별화-즉 남성에게는 가해로, 그러나 여성에게는 피해로-되었던 것은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여성혐오(misogyny) 덕분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존재해왔던 위계는 한 성별(주로 남성)이 다른 성별(주로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성애화하고, 이 혐오를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까지를 가능하게 했다. 여성을 그저 사유재산의 일부로 여기거나, 마녀로 몰아가 불에 태웠던 시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이 혐오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까지 했다.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대상을 내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상황을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쉬운 일이다.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은 ‘신종’ 전염병이 아니다. 한쪽 성별이 다른 성별을 아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기로써, 젠더의 위계에 의해 생겨난 아주 오래된 발명품이다. 동시에 수많은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여성혐오의 양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에 이 성별화된 가스라이팅이 전염병이라면, 마을을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전염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는 아직도 철폐되지 않은 젠더의 위계, 그 간격 속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혐오라는 이름으로 배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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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갈 것이냐





 김정원*

   

    오늘도 ‘우는 여자’는 어김이 없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워 울다가, 곧 자신의 처지에 아파하며 다시 울었다. 그녀를 마주한 이들, 그러니까 그녀의 친구들은 그 눈물에 무뎌질 때도 됐건마는, 오늘도 그 눈물과 함께 아파한다. ‘우는 여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불확실성으로 떨고 있었다. 그녀가 쏟아 낸 눈물처럼 자신도 쏟아져버릴까 봐, 그렇게 흘러내릴까 봐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작정한 것처럼 보였던 그녀였지만, 자명한 불확실성이 덮치자 마치 격정과 예술성을 포기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자신의 욕동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그녀의 다짐은 마치 선언과 같았기에, 그녀 앞에 둘러 앉아 있는 근심 어린 얼굴들은 그녀의 다짐에 균열을 낼 수 없음을 직감한다. “죽음과 욕망의 과잉만이 진실에 가닿게 한다”고 말하던 바타유가 그녀 속에 들어 앉았나 보다. 그녀는 그 ‘진실’ 그러니까 그녀의 언어로는 ‘나’를 찾아 떠나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 죽일 놈의 ‘나’ 찾기. 그거 좋게 말하면 ‘자기 완성’이겠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팔자 사나운 년 되는 거 아니겠냐.”


    쓴 소리를 자주 하는 그녀의 한 친구는 이번에도 쓴 소리를 날린다.


    “너를 좀 붙들어 매. 꼭 그렇게 불안전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겠어? 뭘 그리 고생을 사서해. 얼마나 또 쳐 울려고, 꼭 그 지랄을 해야 존재가 완성이 된다니…… 너 얼마나 대단한년 될 건데! 안정성이란 안정성은 죄 쌈 싸먹고 얼마나 잘 되려구!”


    ‘쓴 소리 여자’의 쓴 소리에 ‘우는 여자’는 역시나 죽죽 울며 대답한다.


    “나는 내가 팔자가 사나운 것이 좋아. 나는 자꾸 묻고, 고민하고 자빠지고 하는 내 삶이 좋아. 아프지만 후회가 적으니까. 무섭고 불안하지만, 나는 성숙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시간, 그 고통의 시간이 반가워. 이러다 죽겠구나- 하다 보면 그것은 이미 지나있어. 그리고 나는 ‘나’에 조금 다가와 있지.”


    그녀는 쾌락을 향유하는 만큼 고통스러워했었고, 자유를 누리는 만큼 망가졌었다. 그 시간을 지나온 그녀는 다시 그 시간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분명 담담한 면이 있었고 그 시간 속에 다시 자신을 던질 준비 역시 돼 있었다. 이제 올 시간은 친구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친숙한 언어도 없기에 보다 더 아플 것이 명증했다. 없고, 또 없을 시간. 열 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스무 개가 없을 그 시간. 있는 것이라고는 희미한 꿈과 더 희미할 가능성, 그리고 쾌감과 정념과 눈물과 고통 즉, 끝없을 쥬이상스…… 담보 되지 않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그녀는 환희와 불안, 그 어중간한 위치에서 떨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유독 행복에 집착했었다. 강산은 변했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가 눈물과 함께 떨구는 행복은 ‘나’, 혹은 ‘고통을 감각하고자 하는 나’인가 보다.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힘이 필요하다. 시로서 구원받고자 했던 김수영의 언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모든 진리는 평범하다 

요는 죽음을 가슴에 새기고라도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항상 외국에 온 사람 모양으로 내 나라에 살고 

외국어를 하듯이 내 나라말을 하고 

여자들을 모두 외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

 … 

가슴 속에 깊은 자유가 파묻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밀의 용기가 필요하다. 

앵무새의 발언 같은 허위를 태워 버리고 

발코니 위에 나서면 밤이 슬프지 않으냐

 … 

수많은 수인이 해방된 아침같이 

밤하늘에 떠도는 보랏빛 안개 

거리여 기립이여 설운 기립이여 

나는 완전히 너를 결별한 사람


- 김수영, 미제, 유고시(1958)


    ‘우는 여자’는 자기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었다. 가슴에 박혀있는 자유를 파내고 있었고, 반복되는 언어를 태우고자 했고, 밤을 온전히 갖고자 했다. 그녀는 실로 이방인의 삶을 선택했다. 외국에 온 모양새로 사는 것이 아닌, 실제로 외국에서 제 나라와, 제 말과, 제 벗을 잊어 먹은 여자처럼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 살기를 김수영만큼이나 원한다니, 이제 더는 ‘쓴 소리’로 다그칠 수가 없다.


    ‘그래, 가라. 밥이나 잘 챙겨 먹고-’


    그렇지만 사실 ‘쓴 소리 여자’는 ‘우는 여자’가 흠모하는 그 강렬한 욕구가 미화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혹 그 욕구는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의미만으로도 이미 몹시 아름다워 그저 고결할 것만 같은 그것, 자기 완성! 내뱉기만 해도 내뱉는 그 순간으로부터 곧장 심장을 파고드는 그 숭고한 이름, 자유! 오, 자기 완성이여! 오, 자유여!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과대평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스피노자까지를 들먹이며, “과대평가란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에티카).”라고 그녀의 귀에 때려 박고 싶었다. 스피노자가 다른 이를 사랑할 때 상대에게 과한 점수를 주는 행위를 문제 삼았다면, ‘쓴 소리 여자’는 ‘우는 여자’가 상대방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너무 과한 점수를 준 것이 아닌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을 향한 사랑, 즉 지극히 나르시시즘적이어서 결국엔 빈곤 터지는 ‘나’ 사랑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나아가, 그녀가 사랑하는 ‘자기 완성’과 ‘자유’ 역시 과대평가 된 것은 아닌지 또한 따져 묻고 싶었다.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에 취해 그것들을 향한 그녀의 과대평가를 정당한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적어도 ‘쓴 소리 여자’보다는 ‘우는 여자’는 삶에의 권태로움에 늘 민감했다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쓴 소리 여자’는 권태로움에 후려쳐지는 것이 두려웠기에 끝내는 권태를 부정하며 살았었다. 백날 카뮈를 읽어도 의식이 죽어 있으니, 삶에의 부조리는 부정되기 일쑤였다. 가끔 고개를 쳐드는 의식은 잘 달래어 저-기 멀찍이에 두어야만 했다. 부조리를 향한 적극적 반항은, 구조의 부조리는 물론 자신의 비겁함 역시 폭로되는 것이기에, 그녀는 권태로운 자기 존재를 들춰보기를 주저해왔었다.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열심히 찾는 척했지만, ‘쓴 소리 그녀’의 가슴은 내리 차가웠고, 사회적 질서와 관습 속에서 아늑함을 성취하고자 했다. 그에 비해 ‘우는 여자’는 날 것으로 깨어 있었다. 즉, 삶의 의미 없음에 반항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식 있음’ 앞에서 ‘쓴 소리 여자’는 따져 묻기를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약간 니체의 초인 같기도, 약간 시시포스 같기도, 혹은 김수영 같기도 한 그녀를 그 측면에서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 가라. 밤 길은 좀 조심하고-‘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등장하는 세 여자들의 사연은 그야말로 골치가 아프다. 한 여자는 아이를 잃고 이혼을 하고, 한 여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고, 나머지 한 여자는 의사인 남편의 잦은 외도로 분노한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이 의존하던 것들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불교경전, <숫타니파타>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그 내용 중 일부이다. 그런데, 팔자 센 그녀들이 종국에 선택한 것은 정말 무소의 뿔 같은 치열함이었을까?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던 그녀들은 결국 온전한 자기를 불안정성 속에서 건져내 왔을까?


    여전히 ‘쓴 소리 여자’에게 자유, 즉 불안정성은 불가능으로만 주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주는 위로로 글은 마쳐져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 위로가 가히 무겁더라도 떠나는 그녀와, 곧 떠날 ‘그대’와, 더불어 그 욕망과, 그 불안과, 그 불가능을 지지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었으므로.


“현실주의는 내게 오류의 느낌을 준다. 오직 폭력만이 그런 현실주의적 체험의 빈곤감을 떨쳐버린다. 숨통을 막고, 끊는 힘은 오로지 욕망과 죽음에만 있다. 죽음과 욕망의 과잉만이 진실에 가닿도록 해준다. … 인간 앞에 펼쳐진 두 가지 전망이 있다. 한쪽은 격렬한 쾌감, 공포, 죽음 – 정확히 시의 전망-, 그 정반대 쪽은 과학 혹은 유용성의 현실 세계, 유용한 것, 현실적인 것만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것을 외면하고 유혹을 택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진실이 우리에게 권한을 행사하고, 심지어 전권을 휘두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은 아니되, 그 모든 권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에 응답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전권을 휘두르는 진실을 지움으로써, 소멸을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닿을 수 있는 저 불가능에 대하여.” –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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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노인의 나라에 나는 없을 것이다.



유하림*

 


    서울 시청 지하에 위치한 공정무역 카페에서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한지 2년 째다. 가끔씩 큰 집회가 있을 때면 손목이 뻐근하도록 컵에 얼음을 퍼야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리 바쁜 편이 아니다. 게다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도 있고, 음료의 레시피도 간단하다. 흔히 말하는 꿀알바인 셈이다. 

   바야흐로 2016년 12월. 가끔씩 열리던 큰 집회가 매주 열리면서 ‘꿀알바’는 ‘쓴알바’로 바뀌었다. 시청 광장을 가득 채웠던 ‘태극기’가 카페마저 가득 채우게 된 것이다. 볼이 따갑게 세찬 바람이 부는데도, 어깨와 발등에 쌓이게 눈이 내려도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었다.

   태극기를 든 사람 중에는 노인이 많았다. 가만 보면 그들은 자못 진지해 보인다. 서로를 향해 당신이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어깨를 두드리고, ‘투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며 ‘투투사’ 라고 부르겠단다. 비록 당신들의 커피를 만드는 어린 여자 알바생에게는 “언니가 잘해주면 매일 카페에 와주겠다”고 말할지라도 탄핵반대집회에 나오는 것을 과업으로 여기는 듯 했다.

   계산하려고 꺼낸 지갑 안에 박정희 사진이 들어있기도 했고, 어디서 난건지 각종 뱃지를 단 군복을 입고 오기도 했다. 적당히 손님이 빠지면 카페 내부를 정리해야하는데 그 때마다 기괴한 것들을 발견한다. ‘계엄령을 선포하라’, ‘촛불은 종북, 태극기는 애국’이라고 뾰족뾰족한 글씨체로 적혀진 빨간색 종이,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접착성 좋은 스티커, 커다란 성조기.  

   처음부터 태극기 노인들이 카페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최순실에 대한 비리가 밝혀지고 나서 한달 정도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카페를 채웠다.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하려고 선 줄이 카페 바깥까지 이어져있어서 계속해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었다. 특대형 쓰레기 봉투를 자주 교체해야 했고, 영업시간이 끝나면 모아둔 쓰레기만 내 키를 훨씬 넘었다. 그치만 즐겁게 일했다. ’박근혜 탄핵’이라는 문구가 적혀진 피켓을 정리하면서 몇장은 가방에 넣어 챙기기도 했고, 앞치마에는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연대의 의미를 전했다.

   김일성 만세의 자유 뿐 아니라 박근혜 만세의 자유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내 탓일까. 태극기를 든 노인들은 유독 일을 힘들게 만들었다. 어린 여자 알바생으로서 나이 든 손님을 상대한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반말은 물론이고, 돈 던지기, 아무 말 안하고 서 있기, 소리 지르기, 본인 순서가 아님에도 불쑥 끼어들어 주문하기, 성희롱 하기 등 갖은 진상 짓을 마스터하여 우리를 곤란에 빠트린다. 거기에 태극기과 성조기를 나란히 든 모습이라니.

   특히 날이 갈 수록 유려해지는 성희롱 기술에 나는 더 이상 웃으며 주문을 받을 수 없었다. 조금만 미소를 보이고 친절하게 대하면 “예쁘다”, “너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다”며 불쾌한 말들을 남발했다. 스탭 중에 한 명을 지목한 뒤 쟤가 내 스타일이야 하지를 않나, 테이블 정리를 하고 있으면 노골적으로 위아래를 훑어 본다. 유일한 남자 스탭에게는 “꽃밭에서 일해서 좋겠다”며 나름의 ‘유머’를 건네고, 내게는 “커피가 네가 줘서 더 맛있다며” 나름의 ‘칭찬’도 잊지 않는다. 웃지 않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말이 두려워 웃을 수 없어졌을 뿐이다.

   나는 22살, 여자, 알바생.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표적이 되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태극기 노인들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나를 부른다. 기분이 안좋으면 ‘야’하고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아가씨’하고 부른다. 내 몸을 훑고 싶으면 언제든 그렇게 한다. 그러다 한마디 건네고 싶으면 그러면 된다. 내가 농담을 받아주지 않고, 웃지 않으면 ‘좀 잘해달라’며 내 탓을 하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남자고, 나이 들었고, 그들에게 나는 어린 여자 알바생이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어린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해본 적 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꿈꾸는 자유 대한민국에 내 자리는 없겠지. 그치만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커피를 팔아야겠지.

   태극기 노인들과 6개월은 마주한 것 같다. 나는 그들이 태극기를 드는 행위에서 오는 만족감을 마주했다. 그것은 대통령을 ‘수호’하며,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는 나라에 나는 없을 것이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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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브 패러디: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각주:1]




정나진* 




패러디에 대하여


      패러디. 문학, 음악 등의 작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어 놓은 어떤 특징적인 부분을 모방해서 자신의 작품에 집어넣는 기법[각주:2], 이론가에 의하면 이전의 예술작품에 대해 상이성을 염두에 두고 재편집하고 재구성하고 전도시키고 초맥락화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각주:3]이다. 좀 거칠게 적자면 원작의 모방이지만, 그러나 해체와 재구성, 비틀기, 전복 등을 통해서 재해석과 풍자, 교훈을 가져오려는 목적이다. 대부분은 희극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예술의 주요기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패러디’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고전적인 주제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근대의 합리성에 질문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나쁜 패러디'


      옆의 그림은 지난 탄핵심판 정국 때 국회회관에 걸렸던 그림 <더러운 잠>의 원작이 되는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다. 이 작품 또한 16세기 초 티치아노의 대표작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그림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네는 그림의 주인공을 원작의 요염하고 부끄러운 듯 관객을 바라보는 자세와 달리, 관객을 당당하게 응시하는 구도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목을 어느 여신의 이름이 아닌 ‘올랭피아’라는 그 당시 흔한 매춘부의 이름을 빌려와, 여신/성녀숭배라는 위선을 덧입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던 당시의 사람들을 비꼬았다. 

Édouard Manet, Olympia(1863)


      <더러운 잠>은 사실 마네의 이 작품 뿐만 아니라,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원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르조네(Giorgione)의 <잠자는 비너스>도 함께 참고하고 합성하였는데, 박근혜의 잠자는 얼굴이라든지,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체라든지 하는 부분이다. 작가라고 하는 이는 원작의 함의나 의의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성찰도 없이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여러 작품들의 도상을 오직 자신의 의도를 위해 편할 대로 도용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는 ‘패러디’라는 예술기법의 전형적인 나쁜 예, 올바르지 못한 예라고 보여진다. 더구나 <더러운 잠>이 큰 논란이 된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공공미술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동시대적인 성찰없는 ‘편할 대로’의 태도와 시선이 그 속에 여과없이 들어가면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동시에 혐오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도 소위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그룹도 이런 태도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고스란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고민과 성찰이 없는 패러디의 ‘나쁜 예’는 풍자와 재해석을 통한 문제제기와 비판은커녕,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대상화시킬 뿐이다. 고상한 척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결국 성적 쾌락을 위해 여성누드화를 사고 팔았던 남성들을 향한 올랭피아의 무뚝뚝하고 당당한 시선과 목소리는 또다시 희석되고 삭제되었다.  


패러디-낯설게 보기


René Magritte, La trahison des images(1928-1929)


      패러디 기법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왼쪽)이라는 작품이다. 마그리트는 흔한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는다. 실상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이 맞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관객은 저 모양의 그림을 관습적으로 파이프라 부르므로, 곧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는 캘리그래피 문구 사이의 모순에 당착하고, 관습을 벗어나 곧 작품에 대하여 다시 보기, 낯설게 보기를 시작할 것이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마그리트는 이런 식으로 파이프의 패러디를 통해 통속적인 이미지의 재현으로서의 회화에 반발하고, 규범화된 근대의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성서는 어떻게 패러디 되어 왔는가?


      패러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기법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실 패러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있는 대중작품들은 회자되는 동시에 역사 속에서 좋게든 나쁘게든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 패러디를 단순한 모방이나 흉내가 아니라 비틀기와 해체, 재구성을 통한 재해석이라고 할 때, ‘성서’라는 텍스트 또한 각 시대에 따라, 공동체에 따라, 개인에 따라 끊임없이 패러디되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삶의 자리 속에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구전되고, 그것이 편집되어 문자화된 성서 텍스트는 그 행간의 빈틈들과 모호성들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져왔다. 그리고 그 (재)해석에는 텍스트의 삶의 자리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삶의 자리 또한 뒤섞여있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가 남성에 의해 쓰여지고, 또한 성서의 패러디-(재)해석- 또한 주로 남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독자가 여성이라 하더라도) 줄곧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왔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해석되어지는가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서가 모두(의 구원)를 위한 책이라면, ‘남성’이 아닌 이의 눈으로도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성서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숨겨지고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지기 일쑤였다. 성서에 여성이 등장하지만 중요한 구원역사의 순간 여성은 사라지거나 미래의 중요한 아들들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와 희생자로 전락해버리곤 한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아차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한 것은 결국 여성들이었으나, 이름조차 기록되어있지 못하기도 하고,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 보낸 주요인물은 결국 열두명의 남성사도들만으로 기억된다. 사도바울의 선교에 큰 기여를 하고 일약을 담당한 여성들이 꽤 있으나 성서에서 그들을 찾아보기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하는 식이다.  

      성서가 남자들만을 위한 구원의 책이 아니라면 성서에서 지워지고 잊혀진, 왜곡되고 오해된 이들의 존재와 목소리 또한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의 성서해석이 성차별적인 시선에서 이루어져왔다면, 그 성차별적인 시선 또한 찾아내고, 제거해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브'의 나쁜 패러디 역사


      특히 구약으로 불리우는 제 1성서의 여성 대표주자로 가장 많이 패러디되는 이는 단연 ‘이브’일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교회 안의 여성혐오의 근원에는 이브가 출연하는 창세기의 나쁜 패러디가 자리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나왔으므로(창세기 2장)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나,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본인도 먹고 아담까지 먹여 낙원에서 쫓겨나고 원죄를 입었으며 인류의 고통이 시작되었으므로(창세기 3장), 여자는 만가지 악의 근원이라는 이야기 등이다. 바울로 서신의 여성에 대한 언급들도 결국 그 기원은 같은 창세기의 본문으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장의 “여자여 잠잠하라. ...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라는 말도 창세기 3장 16절(“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특히 야웨기자의 것으로 불리우는 2, 3장 본문의 시대적 배경 자체가 다윗왕조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각 시대마다 있어왔던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관점들 속에서 이브 신화의 나쁜 패러디가 재생산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형성기 때는 교회에 비교적 여성 리더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교회의 제도화와 국가공인 이후로부터 여성들은 배제되거나, 창세기 2장, 이브의 역할의 명명처럼 ‘돕는 자’로서의 존재의 한계가 명백했다. 교부들은 여성이란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남성들에게는 선물이지만 세상의 저주라고 보았고 이러한 교부들의 여성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교회 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결정했다. 존경받기 그지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출산이라는 이유를 배제하면 여자가 남자의 돕는 자로 만들어질 아무런 이유도 상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성은 약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등한 이성에 따라 살기보다는 열등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다고 여성을 인식하며 창세기 주석을 저술했다. 이러한 교회의 여성에 대한 이해는 14세기부터 근대 초까지 이어진 20-50만명이 희생된 마녀사냥에서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교회의 의도를 위한 ‘편할 대로’의 나쁜 패러디는 너무나도 쉽게 여성들을 마녀들로 만들어버렸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여자는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각주:4]


창세기 2장 다시 읽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나쁜 패러디의 전형적인 예는 원작의 의도와 함의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작가의 편의를 위해서 원작을 1차원적으로 흉내, 모방하고 갖다쓰는 것이다. 원작을 비꼬거나 해체, 재구성하려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그렇거니와, 원작의 의도를 다시 살리고 싶은 경우에도 원작의 의미를 깊이있게 성찰해보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보편적 종교로 받아들였던 서구문명 전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그 서구문명을 그대로 세례받은 한국의 문화에 이브의 나쁜 패러디는 그대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브의 나쁜 패러디가 성서텍스트의 원형에서도 진리화되어있는지는 다시 한번 읽어볼 일이다. 성서의 목소리는 일괄적이지 않다.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누구의 진리가 주장되고, 누구의 진리가 억눌려졌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각주:5]


여자, 남자를 돕는 자?


      먼저 여성의 존재를 남성의 소극적이고 부속적인 역할로 정당화시킨 창세기 2장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 장면을 다시 재구성해보려고 한다. 첫째로 야훼는 땅의 먼지(히브리어로 ‘아다마’, 성서에는 알고보면 이와 같은 유쾌한 말장난 식의 단어들이 많다)로부터 사람(아담)을 지으셨다. 아다마에서 나왔으니 아담이다. 나는 여기에서 첫사람인 ‘아담’을 남자로 전제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아담을 남자(man)가 아닌 사람(human being)으로 바꿔 읽어보았다.


“한처음에 야훼는 땅의 먼지(아다마)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첫사람을 창조하셨다(7). 그리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에덴동산을 섬기며 지키도록 하셨다(15). 어느날 야훼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를 위해서 그의 앞에(그에게 맞는, 그의 파트너로) 돕는 사람(에쩨르)을 만들겠다.’(18) ...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해 적합한 돕는 자는 발견되지 않았다(20). 그래서 야훼는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들었다. 야훼는 사람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빈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21)..... 아담이 말하였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23)”


      이렇게 성서를 다시 읽으면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야기는 남성/여성 이분법적인 창조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그를 돕는 자’의 창조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별분업을 정당화시킨 ‘돕는 자(에쩨르)’에 대한 재해석이다. 통속적으로 생각할 때, ‘돕는 자’라면 주체의 옆에서 부가적인 역할을 하는 정도의 존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언어든지, 그 언어권에서든 언어가 함유하는 문화 속의 의미와 용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돕는 자'(helper)의 히브리어 '에쩨르(עֵזֶר)'는 (우리가 그동안 이 본문에서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 놀랍게도) 여성명사가 아닌 남성명사이다. 더 놀라운 것은, '에쩨르'는 구약 전체에서 21회 사용되는데 그 중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세기 본문의 2회를 제외한, 나머지 19회는 모두 '구원자로서의 하느님'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창 2:18,20, 출 18:4; 신 33:7,26,29; 시 20:2; 33:20; 70:5; 89:19; 115:9-11; 121:1,2; 124:8; 146:5; 사 30:5; 겔 12:14; 호 13:9; 단 11:34).[각주:6] 이렇게 본다면 아담의 돕는 자 ‘에쩨르’는 '야훼의 도움'을 표상하는 신적 대행자로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쩨르(עֵזֶר), 온전한 인간을 위하여" : 21세기 이브 패러디


      앞선 창세기 본문을 여성중심적으로 다시 읽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텍스트가 쓰여졌던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 한계를 인식하며 회의적인 이들도 있다. 어떠한 텍스트도 순수하게 친여성신학적이거나 친가부장적인 본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들이 새로운 의미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7]

      사람은 누구도 단독자로 온전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단독자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돕는 자(에쩨르)’와의 결합을 통해서 상호 협력적이고 상호 구원적인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아담과 이브 창조에 대한 이러한 재해석은 그동안 가부장제와 성별분업의 규범을 정당화시켜준 성서해석에 일갈을 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남 이분법적인 정체성의 젠더정치를 넘어서 모든 차이(성별, 인종, 장애/비장애 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차이를 자원으로 새로운 시대의 해방과 구원의 텍스트로 읽혀질 수 있지 않을까?


마치며 : 멀미, 패러디로 시작해보기


      지난 2월,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문제적 성서, 여성의 눈으로 다시읽기”라는 주제로 4주 동안 강좌를 이끈 적이 있다. 그동안 성서가 (독자가 혹시 여성이더라도) ‘남성’의 눈으로만 읽혀져 왔으므로, 이번에는 거꾸로 (혹시 남성이더라도) ‘여성’의 눈으로의 성서읽기를 해보자는 의도였다. 네 번의 짧은 강좌였으므로, 실제로 성서를 함께 다시 읽기보다는 재해석을 위한 선작업으로, 그동안의 남성중심적인 시각을 해체해보고,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객관화해보고, 동시대의 페미니즘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선의 거리차를 확인하는 정도의 워밍업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인가에 강의를 마칠 무렵, 수강자 중의 한 분이 고뇌를 토로했다.

      “아 진짜 힘드네요. 이게 그냥 이론이 아니고, 삶하고 결부되어 있고, 신앙하고 결부되어 있으니 고민이 들어요.”

      마치 파이프를 보고 있는 나에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하는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패러디 앞에서 느껴지는 당황스러움처럼, 성서를 그동안 소외되었던 여성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멀미를 동반한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나의 인식방법으로서의 (남성중심적) 제도와 규범, 언어의 틀이 땅처럼 견고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 규범과 언어, 때로는 신앙까지도 불변하는 진리의 땅과 공간이 아니며 다른 문화들과 더불어 시대의 생산물일 뿐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서해석이 유희나 이론, 머리로만 하는 평등이나 정의의 윤리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존대에 대한 ‘신앙’의 문제라고 보았을 때,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의 태도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로 다가온다. 바라는 바,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동안에 내가 가져왔던, 그리고 사회가 나에게 강요했던 정체성에서의 이탈과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남녀이분법이라는, 우리를 가둬두는 성차별적 정체성 정치의 성서해석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것이다.

      ‘성서 다시 읽기’ 강좌를 이끌면서, 느꼈던 한계 중 한 가지는, 참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스스로 성서를 해석해보는 일을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어려워하더라는 점이다. 그래서 부러 ‘성서 다시읽기’를 ‘패러디’에 빗대어보았다. 교회의 교육은 신자로 하여금 성서텍스트를 주체적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성서의 권위, 사실은 결구 성서해석의 권위에 짓눌려있게 해왔고 성서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고 교회의 해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주로 희극적 요소로 이미지화되는 패러디는 그래서 신자들에게 좀더 성서를 가볍게 다시 읽을 수 있도록 할수 있지 않을까? 행간을 상상하기, 삭제된 목소리 들어보기, 숨은그림찾기. 뒤틀고 해체하여 재구성해보기.


* 필자소개

  글쓴이는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을 전공으로 지구화, 공간, 이주 등에 관심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과 오순도순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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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7년 5,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본문으로]
  2. https://ko.wikipedia.org/wiki/%ED%8C%A8%EB%9F%AC%EB%94%94 [본문으로]
  3. Linda Hutcheon, 김상구, 윤여복 역, 『패러디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2, 23. [본문으로]
  4. Heinrich Kramer, Jacob Sprenger,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7. 마녀를 찾는 지침으로 인증되었던 책. [본문으로]
  5. Dana Fewell, “Reading the Bible Ideologically: Feminist Cristicism”(1993), 270-280. [본문으로]
  6. http://biblehub.com/hebrew/ezer_5828.htm [본문으로]
  7. Dana Fewell, 앞의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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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사실 섹스했어



유하림*

 


    개방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믿어왔다.) 물론, 섹스를 하기 전까지.

   엄마 아빠는 이십대에 환경운동을 했고, 아빠는 여전히 시민운동 진영에서 활동한다. 집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한겨레 21이 배달 오고, 가족끼리 대화를 하면서도 구조 문제, 계급 문제, 여성 문제, 환경 문제 등 다양한 정치적 의제를 나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그것에 자부심이랄게 있었다. 건강하고, 진보적인 가족 구성원은 그리 흔하지 않았으며, 무작정 공부하라거나,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고 닥달하지 않는 부모를 만난 것은 여지껏 행운이다. 그러나 그들도 예외인 구석이 있었다.

   엄마는 열여덟이던 내 두 손을 잡고 이야기 했다. 하림아, 뽀뽀는 꼭 스무살을 넘기고 해야한다. 등 한가운데로 땀줄기가 흘렀다. 마음 속으로는 엄마 미안해를 외쳤지만 입으로는 알겠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에 그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차마 엄마의 철썩 같은 믿음을 뒤집을 수 없었고, 엄마가 원하는 열여덟 순진한 소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 때 깨달았다. 절대로 들키면 안된다. 내가 애인을 만나는 것은 알리더라도, 그와 어떤 걸 하는지는 들키면 안된다. 적어도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는.  

   스무살을 넘긴지 고작 2년이다. 그래도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메갈리아와 강남역 사건등이 계기가 되어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각종 언론과 SNS는 페미니즘 이슈로 도배되고, 페미니스트를 타겟팅한 상품과 광고가 나온다. 

   페미니즘이 우리집만 빗겨갈리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엄마 또한 페미니즘 서적 몇 권을 뒤적이며, 내게 종종 질문했다. 우리는 자주 대화했다. 임신중절수술 합법화에 대해서, 동성애에 대해서,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예쁘다’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서, 내 몸에 대해서도 대화했다. 주로 내가 말하고, 엄마는 들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엄마한테 말을 할 것이다. 언제까지 숨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더 이상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친하지도 않은 친구를 유학길에 오르게 하고, 없는 동아리를 만들어 엠티를 가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었으며, 이렇게 둘러댈 거짓말을 생각해내는 것 또한 중노동이다. 그래서 작년 여름, 엄마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이하 우리의 대화.   


   나 : 엄마, 나 다음주에 남자친구랑 여행갈거야. 

   엄마 : (눈이 동그래지며) 갑자기 여행에 간다니까, 뭔가 불안하네. 

   나 : 뭐가 불안해? 내가 남자친구랑 섹스할까봐? 

   엄마 : 그런 건 안물어보면 안될까?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거든 !?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엄마는 괜찮다고 했지만, 엄마의 말대로 불안해보였다. 그런 엄마 입장에서는 다행이었을까, 여행은 가지 못했다. 남자친구와 크게 싸웠기 때문이다. 여행 당일 날 집에 누워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아무것도 못해봐서 어쩌냐고 말했다. 엄마의 말은 틀린 말이었지만, 모른 척 했다. 여전히 내가 섹스를 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이 차츰 변해가고,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나 나의 섹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엄마, 나 사실 섹스했어. 라는 말을 들은 엄마의 표정을 자주 상상한다. 특히나 섹스를 끝내자마자 그런 상상을 하고, 동시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똑같이 우리 엄마의 자식인 오빠도 섹스를 한 뒤 죄책감을 느낄까? 오빠의 ‘나 오늘 안들어가’ 라는 카톡에는 반응하지 않으면서, 나의 ‘나 오늘 안들어가’라는 카톡에는 당장 전화를 걸어온다. 엄마는 오빠가 열아홉이 되던 해에 섹스할 땐 콘돔은 꼭 끼라고 말해줬으면서, 내가 열여덟이 되었을 때는, 스무살은 넘기고 스킨십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섹스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엄마가 성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 사회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성과 남성의 섹스를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남성의 섹스는 경험이며,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록 멋진 남성이 된다. 반면에 여성의 섹스는 헤프거나 싼 것이 돼버린다. 또한 남성의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되면서, 여성의 성욕은 가시화 시키지 않는다.

    나는 잘 모르겠다. 왜 내가 섹스를 한 것이 엄마에게 미안한 일이 되어야하는건지, 왜 내가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숨겨야 하는지. 그것은 이른 아침에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하고, 가방에 넣어놨다가 지하철 역 화장실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고, 사후 피임약을 먹어서 속이 메스꺼워지고, 생리 불순이 찾아오더라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과 이어진다.

   페미니스트라고 섹스가 자유로워야하고, 아무한테나 섹스한 사실을 떠벌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군다나, 엄마와 나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만 건강한 관계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외박할 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임신에 대한 불안을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아니, 그런 결과까지 가지 않더라도 섹스를 하면서 엄마 얼굴이 떠오르며 죄책감을 느끼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여성이 섹스를 한다는 것, 여성도 섹스를 말 할 자유가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은 보장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엄마가 볼지는 잘 모르겠다. 근데 엄마, 나 섹스했어.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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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함과 지능의 상관관계





조은채*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친구가 듣는 여성학 수업에서 저 말과 동시에 강의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한다. 몇몇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고, 나머지는 표는 내지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그 말의 진부함에 기대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고, 친구가 고백했다. 잠깐 말문이 막혔다. 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그 말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쉽사리 부정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반발심도 들었다. 저 말에 진부함을 느끼고 다들 실망해버릴 거라면, 도대체 여성학 수업에 얼마나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는 말인가? 물론, 오랫동안 반복해서 회자된 예시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성별에 따라 밤길을 걸을 때 느끼는 두려움에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차이가 이미 너무 익숙하고 진부해졌지만 조금도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설명할 수는 없었겠느냐고 순간이나마 느꼈던 아쉬움은 곧 희미해졌다.

        물론 저 말에 진부함을 느꼈을 모든 사람을 한 데 묶어 비난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사실 진부함을 표현한 것 정도는 여성학 수업에서는 꽤나 준수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멀쩡해 보였던, 때로는 심지어 아주 배울만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까지도 갖가지 헛소리를 앞다투어 정성스럽게 늘어놓는 마당에, 페미니즘이 진부하다고 실망하거나 지적하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범위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이 그나마 ‘들어줄 의지’가 있는, 그리고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부함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이쪽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페미니즘 수업에서 얼마나 많은 한심한 반응들이 있었는지, 아주 잠깐의 시간만 투자해도 수많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어서 더욱 그랬다. 친구의 수업에서는 적어도, 페미니즘 수업에서 왜 여성의 입장을 위주로 다루냐고 반발하거나, 교수가 ‘심각한’ 페미니스트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학생은 없지 않았는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페미니즘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가 아닐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사례를 제시한 것은 이쪽의 실책이 아닐까? 덜 진부한, 그러니까 더 세련되고 쿨한 방식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여혐은 지능의 문제”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소위 ‘과격’하다고 불리곤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중 하나이다. 친구는 내게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명 높은 지능의 조건을 완비한 주변인들이, 실제로 페미니즘에 관해서 자기보다도 더 많은 학술서나 논문을 읽는 사람들이, 페미니즘 안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지능 문제도 아니고, 그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안에서 그들을 설득할 만한 정밀하고 객관적인 논리나, 과학적인 방법론, 혹은 합리적인 사례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페미니스트인 친구는 조심스럽게 반성했다. 그들을 단순히 ‘지능’이 떨어지는 무리로 매도하는 것은 일시의 후련함 말고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친구는 페미니즘이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이유를, 진부함과 같은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페미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갖가지 영역에서 작동해야만 하고, 때와 상황에 맞춰 그 형상을 바꿔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예시를 마냥 진부한 것으로만 느끼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과연 설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영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밤길을 떠올려 보라는 저 진술이 진부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진부함에 대해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설득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일까? 세상의 절반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외면할 수 있는, 그래서 그 문제에 조금도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감 능력이나 감수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총체적인 의미에서 지능이 떨어진다고 확장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여성혐오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면, 의도적인 태만을 폐기하든지 감수성을 키우든지 해서 이를 반증해야 하는 것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일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서 완전하게 격리된, 안락한 곳에 앉아 새로움이나 세련됨의 잣대만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합리적이라고, 혹은 지능이 높다고 속 편히 평가할 수는 없다. IQ에서 EQ, 그리고 SQ까지 여러 방면에서 사람의 지능을 평가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들이 페미니즘에서 고루함이나 진부함의 흔적밖에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것은 사실 페미니즘의 문제라기보다는 총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지능 문제라고 결론짓고 싶다.

       페미니즘이 진부하고 그 어떠한 새로운 통찰도 주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하나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의 올바른 정의나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의식하든 못 하든 감각은 하고 있으며, 이를 결코 포기할 마음도 없다. 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더 밀도 높은 주장을 하고,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페미니즘이 덜 진부한 것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수사 아래 감춰진 그들의 본심은 페미니즘이라는 이 지긋지긋한 주제에 대해 이제 영원히 입을 다물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의지가 없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는 이유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로 환원시키거나, 페미니즘의 한계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이 진부한 것에서 탈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페미니즘은 단 한 순간도 진부했던 적이 없다. 그저 사회에 만연했던 가부장적 감수성이 이를 진부하다고 규정했던 것뿐이고, 그래서 그렇게 믿어져 왔던 것일 뿐이다. 이제 좋게 설득할 때는 지났다. 차라리 문제를 그들의 지능으로 환원시켜, 그들 스스로 반증과 증명의 굴레에 갇히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관심 분야는 페미니즘과 미디어아트를 비롯한 현대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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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 정국, 무지에 대한 거부를 통해 헤쳐가기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진 후 약 2주 동안 한국에 대한 뉴스가 카나다 뉴스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전해지고 있다. 물론 남한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에 관한 뉴스까지 포함한다. 이는 아주 드문 일이다. 지난 주일엔 교회 예배 중보 기도 때, 한 백인 교인이 소리를 내어 북한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남북한 정세에 관한 어려운 상황이 카나다에까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아주 드문 일이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에게 남한에 대해 북한에 대해 물어본다. “어떻게 될 거 같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내 모국이 걱정이 되어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표현으로 닥쳐오는 이 많은 질문들을 받으며, 난… “글쎄… 모르겠어.”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음에 답답하다.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무지하기에 위험하다. 이를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이에 대해 다루어 보자.

    미디어에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은 너무 제한적이고 왜곡되어 있어서 북한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런 내 생각엔 근거가 있다. 올 4월에 남한과 북한의 공식 외교국인 카나다에서 카나다 연합교회 주최로 남북한 기독교 여성 평화 모임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한국 기독교 협의회 여성 위원회가 요청을 했고, 파트너 교회인 카나다연합교회는 이를 긍정적으로 응답함으로써 1년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 중인 일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분단의 실타래를 종교의 관점에서, 여성의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에 대한 실천적 모습이었다. 또한 정전을 포함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수십년동안 노력을 해 온 한국 기독교와 전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의 지난한 여정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결단의 모습이었다. 이 모임에 전세계 다양한 교단과 단체에서도 참가하려고 대표단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이 모임을 치루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연합교회가 “합시다!”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거의 40년, 은퇴할 때 까지 평생을 사셨던 매리온 커런트 (구애련) 선교사님 덕분이다. 당신이 소천하기 전 유산의 일부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증하셨다. 그런 보이지 않는 분들의 힘으로 준비된 일이었다. 그런데, 북한기독교 연맹의 동의를 얻고 여성들을 보낸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한 일인데, 올 2월 말 북한에서 갑자기 불참 통보를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안타깝게도 모임은 취소되었다.  

    박근혜 탄핵 대법원 만장일치 가결을 축하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박근혜 지지자들의 탄핵 결정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집회도 있었다. 5월 9일 대선을 앞두고 남한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 매년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표현하기 위해 3월이 되면 북한이 늘 해 온 일이지만, 올 해3월 북한 미사일 발사는 심상치 않다. 북한의 정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부임한지 고작 2달이 지났는데, 반이민 행정명령과 오바마 도청설, 오바마 케어 무산등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책에 대한 혼란과 저항으로 미국의 정세 역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러한 안개 속 정국을 거닐며 기독교인들은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의 의미는 다양하다. 교단마다 전통마다 또 문화와 신학적 성향에 따라 그 의미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사순절이 기독교 절기 중 가장 진지한 절기, 즉,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통적이다. 그 어느 절기보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머리속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으로 매일의 행위로 훈련하게 하고 결단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순절이 지닌 힘은 대단하다. 소셜 미디어 중독자로 살던 많은 기독교들이 40일 노페이스북을 선언하고, 커피와 초콜렛을 안먹으면 두통으로 하루도 못 버티는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이 음식에 대한 사순절 금식을 선언하고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이 고기냄새만 맡아도 사죽을 못쓰는 고등학교 남학생 기독교청소년들이 사순절 기간동안 육류 안먹기를 선언했다. 이렇게 내 주위에 내가 아는 가족, 친구들이 이런 육적이고 영적인 거부의 실천을 하고 있다. 이런 선택은 단지 유행을 좇는 즉흥적 반응이 아니다. 이들의 결단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윤리적 이유가 함께 동반된다. 소비주의에 찌들은 자본주의적 삶, 특권층 인간의 소비로 희생당하는 소외된 사람들과 동물,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 미디어에 대한 촉각적 반응에 대해 진득한 고려를 하겠다는 일종의 체화된 기도이자 거부이다.

    어떤 면에서 사순절 의미의 핵심은 거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권력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지만) 그 권력이 저지른 폭력 자체를 거부하신 것이다. 사순절은 그 예수님의 행위를 예수님의 삶 아니 죽음, 죽임당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로 하는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우리의 매일 매일 삶의 실천으로 동참하는 기억이자 그 기억을 체화하는 거부다.

    내가 좋아하는 탈식민주의 문화이론가이자 퀴어 페미니스트 학자가 있다. 사라 아미드이다. 영국계 엄마와 파키스탄 출신 아빠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호주로 이민을 갔고, 현재 영국에 살고 있다. 거의 20년동안 8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아미드는 탈식민주의, 이주, 인종, 성, 성정체성, 혼종성, 타자, 문화, 그리고 다름, 이런 굵직한 주제를 탁월한 글솜씨로 다루었다. 가장 최근 출간된 책은 Living a Feminist Life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각주:1]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 그의 이론은 마치 내 살에 닻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삶과 현실에 동떨어진 메마른 이론이 아니라 마치 내 살갗을 뚫고 파고드는 것처럼 날카롭고 신랄하고 살아있다. 그렇게 아미드는 우리 사회, 삶이 지니고 있는 억압, 차별, 불평등, 지배의 문제에 정곡을 찌른다. 나의 삶이 백인 우월사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서, 이민자이고, 여성이어서 내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수도 있다. 아미드 역시, 소수인종으로 호주/영국에서 살아가고, 성소수자이고, 이민자이고, 여성이어서, 그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에 그의 언어의 선택과 표현이 그렇게 적나라하고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칼보다 펜이 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펜의 힘을 땀에 절여진 개념 (sweaty concepts)이라고 표현한다.[각주:2]

    페미니즘이 책의 핵심화두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앞서 열거한 이 모든 굵직한 주제가 마치 한 사람의 몸 곳곳에 필요한 피가 동맥과 정맥을 통해 골고루 전해지듯이 녹아들어 있다. 마치 오장육부가 연결되어 있듯이 아미드는 이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 (intersectionality)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의 결론이 특별히 인상적인데, 이 결론을 보면서 난 “거부”의 힘을 보았다.

    아미드는 페미니스트들이 ‘killjoy’ 로 낙인을 찍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즉, 잔치상에 찬물을 끼얹는 자, 따끈한 있는 분위기를 싸늘케 만든 썰렁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미드는 기죽지 말고 그 일, 그 일이 기쁨을 죽이는 일일지라도 계속하자고 독려한다. 아미드가 제안하는 구체적인 거부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자로서 글을 쓸 때, 이미 기득권자 그룹에 속한 저자들을 인용하는 것을 거부하자고 제안한다. 대신, 소수자, 억압받는 자, 주변부에 속한 학자들 (소수인종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을 인용하자고 주장한다. 아미드는 실제로 이 책을 통해 서구 백인 이성애자 남성 학자들을 인용하지 않아도 훌륭한 학자들, 이론가들, 실천가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주변부 소수학자들을 인용하면서 얼마든지 아니 더 멋지고 이론적이고 비판적이고 생생한 글을 써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자인 내게 가장 도전을 주는 거부제안이다. 실제로 강의를 준비할 때, 책과 저널 아티클을 선정할 때, 교수로서 꼭 해야하는 일이다. 백인 남성,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학자들의 글만을 소개하지 않고, 소수 인종, 여성, 성소수자들, 유럽, 미국을 벗어나 3세계 학자들의 글을 소개하는 형평성을 유지하는 일은 선생으로서 기본 원칙이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로서 저명한 저널에 원고를 기고하고, 저명한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책을 쓸 때, 아미드처럼 기득권 학자들을 거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심지어 치루어야 댓가가 있기에 고통스럽다. 그래서 이 사순절 아미드가 제안하는 거부는 학자에게 교수들에게 글을 쓰는 지식인들에게 특별히 더 의미심장하다.

    두번째,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그 상대방을 대상으로하는 농담 (대부분 여성비하, 성소수자,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을 때 다수에 휩쓸려 웃는 일을 거부하라고 제안한다. 따뜻한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자가 되라고 한다. 세번째, 이미 지난 일이라고 세상이 말하지만, 역사가 실제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 역사가 종결되었다는 주장에 거부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정신대 여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으니 그 역사는 끝났다고 일본정권이 아무리 말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거부하는 정신대 할머니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 거부의 메아리를 함께 울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득권 세력이 정해놓은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거부하자고 한다. 한 예로 “여자가 독신으로 살면 힘들어. 나이가 들었으니 대충 남자 만나 결혼해 그게 행복이야”라는 세상의 규범 (이성가부장결혼제), 순리라는 논리로 치장된 억압적 규제를 차별적 행복이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그 음식이 몸에 좋다는 허황된 이유 (기득권 논리)로 먹는 것과 같다. 거꾸로 “남자가 되어가지고 울기는… 참아야지” 하는 남성억압적 논리 역시 참지 않고 우는 행위로, 마치 그 음식을 토해내는 것처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 남성에게 종용되는 논리이외에도 억압적 차별적 규제들은 정말 많다.

    아미드가 제안하는 거부의 핵심은 바로 세상이 오리무중이고 안개속 정국이지만, 세상을 탓하면서 무지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곧 운동이다. 지난번 원고에서 무지가 주는 폭력에 대해 말했다. 사실이 거짓으로 진리가 기만으로 둔갑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 비판적 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세월호, 미국 선거,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 세상은 오리무중이고 안개속이다. 한국 대선이 어떻게 될 지, 북한 미사일 문제가 어떻게 될 지, 트럼프의 반이민정책, 오바마케어 정책이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한가지는 있다. “무지가 권력과 야합하면 정의가 대적해야하는 최악의 적으로 둔갑한다”는 걸 말이다.[각주:3]

    남은 사순절 무지가 권력에 야합하지 않도록 무지를 거부하자. 억압과 차별을 행복의 이름으로 세상의 순리라고 치장하고 종용하는 부정의를 거부하자. 사순절을 마치면 그만두는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 꾸준히 우리를 무지하게 만드는 논리, 기득권의 힘을 향해 거부 실천을 하자. 거부가 습관이 되어 우리 몸에 배일때까지. 마치 이빨을 매일 닦듯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하는 실천이 될 때까지. 일상의 거부로부터 (예. 쓰레기만드는 물건 안사기) 큰 역사를 바꾸는 거부의 물결을 일으키자.


ⓒ 웹진 <제3시대>



  1. Sara Ahmed, Living a Feminist Lif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7). [본문으로]
  2. Ibid., 12. [본문으로]
  3. James Baldwin, No Name in the Street (New York: The Dial Press, 1972). “Ignorance, allied with power, is the most ferocious enemy justice can hav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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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이유



유하림*

 


   6개월 정도 만난 애인은 어쩐지 나를 답답하게 만든다. 그에게 귀엽고, 착하고, 애교많고, 철없고, 왈가닥인 나는 진지하고, 예민하고, 거칠고, 폭력적일 수 없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서 시작 전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가 엉덩이를 쭉 내민 자세의 운동을 하는 장면이 광고내내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더 저렴하게 이용하자!’ 같은 카피가 나왔다. 광고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저렴한 가격이었는데, 내가 본 것은 한 여자의 몸매와 그것을 통한 섹스어필이었다. 화가 나서 “아니, 저게 무슨 광고야.” 하고 투덜댔다.


   “통신사 광고지.” 

   “그걸 내가 몰라서 물어?” 

   내가 어떤 의미로 말한지 뻔히 알면서도 눈치 없는 답을 하는 그에게 쏘아댔다. 

   “왜 또 짜증났어. 좋게좋게 하자.”   


   애인은 내게 자주 그렇게 말했다. 좋게좋게 하자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학교에서 있었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흥분한 채로 가해자를 욕했다. 애인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항상 그렇게 많은 곳에 열을 쏟으면 힘드니 진정하라고 말했다. 진정하라고? 같이 화내주지는 못할 망정, 진정하라니. 힘이 풀리는 말이었다.  

   비슷한 몇번의 사건을 겪고 나니 애인의 앞에 설 때면 자기검열을 하게됐다. 내가 흥분하며 말한 것은 아닌지, 좋은 우리 사이를 방해할 정도로 다른 일에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봤다. 그가 내게 좋게좋게 하자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싸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혔다. 분노 해야 할 대상에게만 화내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애인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심지어는 그에게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누구는 싸움이 체질이라 여기저기 시비걸고 다니는 줄 아나. 좋게좋게. 나도 좋아한다. 그거 못해서 안하는 거 아니다. 이 세계는 나를 자꾸만 화나게 하고, 지금 나는 나의 정당한 분노를 대중적인 언어로 푸는 것에 한참 흥미를 느끼는 중이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에 대해서 신경끄기로 작정한 상태였는데 나는 다시 그를 상대 할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언어를 골라야만 했다. 그래서 말 수가 적어졌다.

   애인에게 몇번 말했다. 싸우지 않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잘 싸우는 게 중요하다고.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서로의 삶과 경험과 생각을 자꾸만 나누는 것이 관계를 맺는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역사와 역사가 만난다는 거라고. 그러니 우리 서로 오만해하지 말고 열심히 들어주자고. 그런데도 그는 그냥 싸우는게 싫단다. 서로 좋다고 말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왜 싸워야 하는건지 모르겠단다. 아니. 무작정 싸우자는게 아니라,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 하자는 거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알게된다면 당연히 못마땅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상대에게 기대를 걸고, 그 기대에 못미치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대 안한단다. 본인은 그냥 나 자체를 사랑한댄다. 애인이 생각하는 ‘나’는 뭘까. 잘 모르겠다.

   그는 고양이를 예뻐하고, 뭘 먹든지 옷에 다 흘리고,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소한 것에 화내고, 때로는 거친 언어로 분노를 표현하고, 어떤 사람이든간에 적절치 못한 말을 한다면 신랄하게 까버리는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싫은 모습은 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연애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 그리고 상대가 그것을 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혹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여주고 보는 것. 그렇다면 내 정의로 우리는 연애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것을 하는 중이다. 그는 나의 분노를 보지 못하니까. 나의 분노를 예민함 따위로 취급하니까. 그래서 나는 애인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으니까.

   아무래도 우리의 연애는 여기까지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과의 연애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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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화된 불평등과 대상화된 여성




조은채*

 


       남자 지인 중에 페미니즘 강연을 종종 들으러 다니고, 그 주제에 대해 나름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친절한 편이었고, 딱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이전에 저질렀던 성폭력이 sns를 통해 폭로되고 고발되었을 때, 나는 놀라기는 했지만 경악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그런 행동을 직접 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어떤 태도나 말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느끼던 의혹을 사소한 것으로, 혹은 괜한 것으로 치부해서 넘겨버렸다. 그가 나에게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 성 소수자의 인권, 그리고 옳다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에게 여성은 사실 자신과 동등한 주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이라는 소리에 페미니즘에 관심은 가졌지만, 자기 주변의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진리는 인식하지 못했던, 흔한 여성혐오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해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내가 엄청나게는 충격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서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통하던 남자 지인은, 같은 무리 여학생들을 ‘부위 별로’ 등급을 매겼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누누이 밝히던 동료는 무리 내의 페미니스트를 뒤에서 성적으로 희화화하고 조롱했다. 앞서 언급한 ‘그’에게서 몇 가지 조건을 더하거나 빼고 이름만 바꾸면 똑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말이 통하는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음에도, 가끔 그 생각이 내 착각이었나 싶은 질문을 던지는 남자 지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질문 안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더욱 답답해지곤 했다. 다른 문제에서는 대단히 이성적이고 중립적이었던 친구들이 남성 장애인의 성욕 해결을 이유로 들며 성매매 합법화를 역설했다. 하지만 그들의 논지에서 여성 장애인이나 그들의 성욕은 등장조차 하지 않았고, 남성의 성욕은 누군가 반드시 해결해주어야만 하는 불가피하지만 절대적인 것으로 치환되었다. 왜 남성의 성욕에만 애정 없이도 그것을 해소해줄 대상이 필요한가? 왜 그 해소 방법을 여성과의 성관계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정하는가? 그들은 남성 장애인이라는 특수한 경우를 예시로 들며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주장은 얼마든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될 수 있었다. 기러기 아빠라서, 여자친구는 혼후관계주의자라서.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성관계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에게는 비슷한 논리로 성매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그 논리대로라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결국, 그 주장은 여성을 철저하게 타자화시켜, 남성의 성욕을 위해서는 보급되거나 구입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인식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사람임에 앞서 여자로 규정된다. 여성이 등장하는 기사에는 ‘여(女)’ 자가 빠지지를 않는다. 여대생, 여교사, 여배우, 여교수. 며칠 전에 본 기사의 제목은 ‘IS 대원 100명을 사살해서 현상금 11억이 걸린 23살 여대생’이었다. ISIS 무장세력때문에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 소식을 접한 뒤, 대학을 그만두고 시리아의 쿠르드족 군대에 자원입대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미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린 지 오래이며 최전선에서 저격수로 활동하고 있음에도, 기사 속의 주인공은 군인이기 이전에, ‘어린 여대생’으로 먼저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반면, 남성은 사회 안에서 성별로 규정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정규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청년’ 혹은 ‘청소년’, ‘교수’, ‘의사’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남성 주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문 기사에서도 굳이 ‘남의사’, ‘남교수’, ‘남기사’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여’와는 달리 불필요한 수식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청소년’이라는 말에 남성 청소년만 연상하기 때문에 ‘청소녀’라는 괴상한 명칭이 실제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인간의 디폴트 값은 남성인 것이다. 결국 어느 한쪽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버린다. 이 연장 선상에서 여성이라는 집단의 이미지는 종종 과잉되게 성애화된다. 그리고 남성 집단이 이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여성을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뒤에 앉은 남자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된 적이 있다. 그는 꽤 큰 목소리로 이름 모를 형님에게 오늘 ‘연애’를 하러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가격도 괜찮고 ‘여배우’ 같은 애들도 널렸다며. 잘 말해두면 시간도 길게 할 수 있다며. 그는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 오늘은 안된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형님에게 ‘연애’를 하러 가자고, 자기가 오늘 다 알아봐 놓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형님은 된다고 한 것인지 그가 신나서 계획을 읊었다. 절대 당사자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이 양념처럼 곁들여졌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통화 내용을 들을수록 그 남자가 말하는 ‘연애’가 성매수를 가리키는, 성매매 산업에서 흔히 쓰이곤 한다는 은어인 ‘연애’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졌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통화 내용을 들어야만 했던 나는 문득, 그리고 아주 뜬금없이 남자는 만나는 모든 여자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제법 자주 쓰이는 농담이 떠올랐다. 물론 이 농담에서 말하는 연애가 그 남자가 통화로 형님들에게 같이 하자고 조르던 그 ‘연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애’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할 수 있는 남자가 하는 또 다른 연애는, 과연 그 ‘연애’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여성을 구입할 수 있는 성애화된 객체로 여기는데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그와 같은 여성혐오자들이 하는 또다른 연애는 ‘연애’가 아닌 연애라고 해서 무고(無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여성을 동등한 주체가 아닌 성적 대상화된 객체로 간주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가 발화한 말들로 선명하게 입증된 기분이었다. 친구였으면서 단체카톡방에서는 말로 온갖 성추행을 다 하고, 연인이었으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에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으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혐오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증명되는, 그리고 그 증명이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그리고 별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 필자소개

      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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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않아도 돼



유하림*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난 뒤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말이다. 가느다란 팔 다리에 잘록한 허리,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 큰 눈과 오똑한 코, 빨간 입술, 매끄러운 피부.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쁘지 않은걸까? 그럼 나는 예쁘지 않은거네. 근데 나는 꼭 예뻐야만 하는걸까? '예쁘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만들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는 4kg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어딜가나 덩치가 큰 편이었고 덩치가 큰 사람들에겐 으레 따오르는 별명들이 내게 붙여졌다. 엄마는 소아당뇨나, 이른 초경을 걱정하며 더 이상 살이 찌지 않도록 먹던 밥을 빼앗아 버리기도 하고 큰 돈을 들여 다이어트 약을 사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옷을 사야 할 시간이 오면 꼭 우울해진 채로 집에 돌아왔다. 내가 입고 싶은 짧은 치마나 무늬가 화려한 옷들을 고르면 엄마는 ‘뚱뚱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옷들을 사주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래도 사달라며 졸랐던 것 같은데 조금씩 머리가 크면서 이내 엄마 말에 수긍하게 됐다. 싸우기도 싫었을 뿐더러 엄마 말 처럼 뚱뚱해보이는 옷은 입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선호와는 상관없이 무난하고, 덜 뚱뚱해 보이는, 그리고 사이즈가 맞는 옷을 찾아서 구매했다.   

   어린 시절은 내 몸에 대한 혐오와 덜 뚱뚱해 보이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예뻐지고 싶었고, 뚱뚱한 사람은 예쁘지 않으니까. 음식을 보고 식탐이 생길 때는 죄책감이 들었고, 입안 가득 달달한 음식을 먹을 때면 불안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그나마 타고나게 낙관적인 구석이 있었다. 언젠가는 빠지겠지, 뭐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중학생 정도 되니 대놓고 ‘뚱뚱하다’고 놀리거나 면박을 주는 애들은 없었다. 그러나 예뻐지고 싶은 욕구는 날이 갈 수록 강해졌다.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교생이 20명 남짓한 기숙형 대안학교에서 생활을 했는데, 남자와 여자가 각각 10명씩 있었다. 언제인가 그 10명의 남자애들끼리 모여 여자애들의 얼굴, 몸매, 성격 같은 것들로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를 매겼다고 했다. 여자애들은 화가 나서 다같이 남자애들에게도 똑같이 순위를 매기고, 칠판에다 그 순위를 적어놓았다. 나도 화가 나기는 했지만 실은 남자애들한테 왜 매력적으로 보이지 못할까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아마 그때 그 경험이 내가 내 몸을 더 혐오하는 계기이자, 예뻐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한 동기가 되었던 듯 싶다. 

   겨우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혐오에서 아주 조금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 그 때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 애는 학교의 신입생이었고, 자신을 잘 챙겨주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1년 정도 연애를 하며 뚱뚱하지만 매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뚱뚱하진 않다는 말로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래도’ 매력적이라는 말로 용기를 가졌다. 그러나 스스로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마음 속에는 날씬한 몸과 예쁜 얼굴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삶은 앞서 말했듯 태생적으로 낙관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성향 덕에 견뎌낼 수 있었던거지 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내 몸을 계속해서 혐오하고 있었다. 정작 나는 내 몸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 사람들은 자꾸만 내 몸에 대해 말했다. 통통하게 나온 배나, 친구들보다 한 사이즈 옷을 크게 입어야하는게 걱정스런 일이 된건 그런 주위사람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내게 해방이고 곧 구원이다. 세상이 만들어낸 ‘예쁨’의 기준 따위에 내가 나를 맞춰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부터 갑자기 내 몸이 자랑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다만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 혐오하지 않음으로서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사실’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많이 편해졌다.  

   뚱뚱함은 상대적인 기준이지만, 어쨌든 난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뚱뚱한 여자다. 근데, 뭐, 어쩌라고.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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