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편재와 인간의 공간



유승현

(GTU Ph.D Candidate)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7-8)



New Horizons


   2015년 7월 14일 우리 지구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006년 1월 19일 플로리다 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된 우주 탐사선 New Horizons 호가 약 9년 반 동안 30억 마일이 넘는 여행을 거쳐 목적지인 명왕성 (Pluto)을 서울과 뉴욕 사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로 통과했습니다. 탐사선은 며칠 동안 명왕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과 정밀한 사진들을 지구로 보내왔습니다. 실로 우리는 우리 인간의 과학기술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 탐사선에는 흥미 있는 물체 두 가지가 부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는 25센트 짜리 쿼터 동전 2개 입니다. 동전 한 개는 탐사선이 발사된 플로리다 주 동전이고, 다른 한 개는 탐사선이 조립된 메릴랜드 주의 동전입니다. 왜 두 개의 동전을 달았을까요? 실용적인 이유로는 그 동전 두개가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용적인 이유 말고도 상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작은 명왕성에도 그 둘레를 도는 위성이 있습니다. 그 위성의 이름은 ‘카론’입니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계의 강을 건너주는 뱃사공인데, 그는 뱃삯을 내는 사람만 배에 태워주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명왕성의 위성 카론에게 줄 뱃삯으로 주기 위해 50센트를 매달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쓸데 없는 미신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는 낭만적인 소재입니다. 그리고 이 동전들 말고 다른 한 가지 중요한 물건이 작은 통 안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930년 명왕성을 최초로 발견한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Clyde Tombaugh)의 유해 일부분입니다. 그의 뼛가루가 들어있는 이 작은 통에는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안에 미국인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가 있습니다. 명왕성과 태양계 제 삼지대의 발견자, 아델과 모론의 아들, 천문학자, 교사, 달변가이자 친구: 클라이드 W. 톰보 (1906년부터 1997년)”

   New Horizon호와 명왕성이라는 작은 소행성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서 저는 가슴이 뭉클함과 측은함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바쳐서 연구했고 가 보고 싶었던 작은 별에 그는 85년이 지난 후에 살아서가 아니라, 죽은 후 유해로서 지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우주 탐사선의 이름 New Horizons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새로운 공간의 지평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명왕성을 지나 태양계 바깥으로 끊없이 향하고 있는 그 탐사선과 한 번 교신을 하는데만 약 9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전파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이 일초에 약 삼십만 킬로미터를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빠른 속도로도 왕복하는데 9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이 지구가 얼마나 좁은 곳인가, 그 보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참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꼭 이 곳에 여행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가 보아도 평생을 여행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가 가 본 곳은 너무나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떤 순간에 우리의 몸이 있는 오직 그 곳에만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까?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선을 만듭니다. 통신기술을 개발해서 세계 어디에서나 소통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 탐사선이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4.2 광년 떨어진 별까지 날아가는데는 무려 7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말하는 성경의 구절들


   이런 인간의 유한한 공간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3절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절과 24절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히브리어로 하늘과 땅, 천지라는 말은 온 우주와 우주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들을 모든 방법으로 채우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6절도 말씀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이 우주의 만유에게 생명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저명한 철학자들을 대면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자신이 알고 믿는 우주 어디에나 계시고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면서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이 어렵게 보이는 말을 영어성경은 간단한 말로 표현합니다: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즉,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어디에나 계실까?


   우리는 여기서 미련한 질문이지만 좀 더 깊이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작은 제한된 공간에서만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까요? 이런 물음을 우리만 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근대 시대 유명한 과학자였고 신앙인이었던 아이작 뉴튼은 아무 것도 없는 우주 공간을 통해서 빛이 전달되는 것에 의문을 느꼈고,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테르’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에도 많은 천문학자들이 우주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우주 전체는 23%의 암흑물질과 73%의 암흑에너지, 그리고 4%의 별들과 행성, 생명체 같은 일반적인 물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주가 실제로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들의 실체를 밝히려고 하는 것은 아주 값어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는 많은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우주가 그런 물질로서 채워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연 중에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주가 채워져 있든 비워져 있든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 7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여기서 “주의 신”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물질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서 즉, 영으로서 존재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왜 우주 전체에 충만할 수 있는지를 계속 묻는다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학자 어거스틴 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에 충만한 이유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은 그의 시간과 능력이 무궁하시듯이, 그의 임재에 있어서도 매이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기에 그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라고, 더 나아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기도한 것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라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공간에서 도우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공간에 계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간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 하나님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시고 큰 물고기를 예비해서 그를 삼키게 하셨을 때, 요나는 깊은 심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편재하시는 하나님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요나 2장 2절에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요나의 이 기도가 진실하지 않은 기도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 다음 요나서 3장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을 살펴봤을 때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요나는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생명의 위기를 통해서 물고기의 뱃속, 더 나아가 스올 즉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계시는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9편을 쓴 다윗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왜 다윗이 139편 8절처럼 하늘로, 음부로 9절처럼 바다 끝까지 가야 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소들은 생명이 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 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한계 상황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위기를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곳에서조차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깨닫고 10절에서 고백합니다: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도 4절에서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골짜기에는 마치 명왕성의 위성 카론이 명계의 강을 건너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죽음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는 공간을 점유해야만 하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 땅과 영토를 확보해야만 하고, 큰 집과 큰 자동차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와 이웃과 피조물 전체의 공간이 아니라 오직 나의 공간만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끝내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컴퓨터의 가상 공간을 찾고 끝내 자신의 방 안에 갖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야만 하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1년 통계로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가 7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30만명의 사람들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미국에도 약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이거나 그렇게 될 소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내 자신이며 각종 미디어와 첨단 기기에 빠져 사는 내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공간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시편 139편 23절에서 다윗이 마지막으로 고백했던 겸손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나를 살피시라고 간곡히 기도한 다윗처럼, 내 스스로가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공간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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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장준식

(GTU Ph.D Candidate)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 ‘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보고 듣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 ‘선포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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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 아리스토텔레스, 바실, 그리고 어거스틴



정대경

(GTU Ph.D Candidate)



   고대 원자론자들, 곧 ‘원자’라는 가장 지극히 작은 물질들과 그것들 사이의 충돌과 연합으로 이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그 유명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싫어했다.

   그들의 주장이 특정한 현상들을 설명하는데는 유용했지만, 생명체가 보여주는 경이로움, 즉 어머니의 뱃속의 태아가 지극히 작은 덩어리에서 신생아로 자라나고, 또한 어린 아이가 키가 자라고 몸도 커지는 듯한 현상들을 아무런 질서를 보여주지 못하는 원자들 사이의 충돌과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가’ 그 원자들을 배열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질서 정연한 모습들이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질서를 가져오는 무엇인가를 “형상인 (Formal Cause), 영혼 (Soul), 또는 엔텔레키 (Entelechy)”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이러한 영혼들과 물질 사이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생명체들이 탄생할 때는 그 아버지의 정액 안에 들어 있던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머니의 난자안에 침투하여, 난자의 물질들을 배열하고, 어떻게 자라날 것을 결정함으로써 태아가 생겨나고 자라나며, 후에 큰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론자들과 달리 모든 생명체들이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고 보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그런 아리스토텔레스도 몇몇 종들은 여전히 급진적 자연발생 (Spontaneous Generation)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보았는데, 이는 동물들의 사체가 썩어가면서 그 안에서 발생하는 구더기나, 음식물들이 부패하면서 생기는 곰팡이 등이 마치 부모세대 등을 가지고 있지 않은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출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Aristotle, On the Generation of Animals, 1.1; 3.11)

   혹시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원시 생명체를 이 지구에 생겨나게 하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위배하고 행위하시는 분인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또 생명체를 생겨나게 하셨던 것일까? 

    필자는 몇 회에 걸쳐서 위의 질문들과 유사한 고민들을 가지고 씨름 했던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철학자들, 신학자들,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다루어 보면서, 현대 과학이 밝혀주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이론 (e.g. 화학적 진화)과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인 창조 교리 사이의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 시작으로 본 글은 현대 환원적 물리주의 (reductive physicalism)의 출발점인 고대 원자론과 그 지지자들이 생명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흥미로운점은 고대의 기독교 신학자들 또한 우연에 의해 생명체들이 생겨나는 급진적 자연발생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가이사랴의 대주교였던 바실은 창세기 1:24절을 해석하면서 부모세대의 성적 결합을 거치지 않는 급진적인 자연발생은 바로 하나님이 땅에게 부여하신 능력, 곧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라고 명령하신 말씀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고,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특정한 종들(e.g. 민물장어)은 계속해서 땅으로부터 부모세대 없이 출현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Saint Basil, Exegetic Homilies, Homily 9.)

   그 유명한 히포의 어거스틴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최초 창조시에 땅에 부여한 능력이 “Seed-Principles (rationes seminales)”라고 주장하며, 식물의 씨앗 안에 나무나 식물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땅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들이 부모세대들의 성적결합이나 급진적 자연발생을 통해 계속해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9.29–32.)

   이렇듯 급진적 자연발생이론은 우연한 작용들에 의해 몇몇 종들의 생명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그 당시 널리 받아들여졌던 자연과학 이론이었지만, 그 이론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위협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위의 바실과 어거스틴의 주장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우연적인 작용 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 될 수 있고, 그 바탕으로 하나님의 세계-내-행위는 우연적인 자연과정을 배제하는 행위가 아닌 그것을 수용하고, 그 우연적인 작용들을 통해 신적섭리를 이루어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실과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에 대해 단순히 기적적인 측면보다 자연과정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였던듯 보인다.

   두 번에 걸쳐서 다루어진 급진적 자연발생이라는 이론은 현대과학의 수혜를 받은 우리에게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러한 이론이 작동했던 시절 신학자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적어도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 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급진적 자연발생이론은 어떠한 목적이나 계획, 질서 등을 통해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것이 아닌 순전히 우연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갑자기 땅이나 갯벌, 동물의 사체, 냇가로부터 생명체가 출현한다는 것인데(갑툭튀!), 이러한 우연적인 작용을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이나 반증의 자료로 보는 것이 아닌 성서를 다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당대의 자연과학과 경쟁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도 현대과학과 신학 사이에, 혹은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에 어떠한 건설적인 관계가 가능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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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변화시키는 기도



류헌조

(GTU Ph.D. Candidate)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했나요.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 기독교인들이 즐겨부르는 복음성가의 1절 가사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주저 앉고 싶을 때, 희망이 보이지 않아 낙심과 염려가 몰려 올 때,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고 이 노래의 가사가 호소하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다시금 힘을 내는 경험을 합니다. 기도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된 기도,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는 실제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듯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기도(prayer)와 명상(meditation)을 대단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수행방법의 하나로 생각하고 이를 수련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기도를 빼고서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기독교에서도 기도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도는 자주 호흡에 비유되곤 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조직신학자이자 영성신학자인 사이몬 찬(Simon Chan)에 의하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성숙을 위해 실천해야 할 수덕(修德)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도는 정말로 효과(effect)가 있는 것일까요?

   기도의 효과에 대하여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한 쪽 입장의 맨 끝에는 기도하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기도를 마치 만병통치약, 만능열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기도를 더 오랫동안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이러한 입장의 반대쪽 끝에는 기도 무용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도는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민중의 아편”이요, 인간이 “심리적 투사”로 만들어낸 신에게 말하는 자기 독백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니체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박탈하고 결국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기도는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가지 극단적 입장 사이에는 기도의 효과를 긍정하고 실제로 경험하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여성신학자인 도로테 죌레(Dorothee Sӧlle)는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반면,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반 디빅(Abraham Van De Beek)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일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해방신학자들처럼 기도와 사회정의의 불가분리성을 크게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최근의 영성신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기도를 통해 한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고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데 집중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의 주장은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에 관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정당하게 짚어주고 있으며,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신학자들 사이에는 참된 기도는 분명히 효과가 있고, 제대로 기도하면 무엇인가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기본적인 믿음, 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기도는 특별히, 인간의 내면(정신 또는 마음)에 어떤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마음만큼 변화무쌍하고 통제하기 힘들며 또한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 그리고 창의성을 가진 것도 드물 것입니다. 한 인간의 마음은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가득 찬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불의와 폭력이 가능한 죽음의 장소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인간의 마음은 죄와 고통이 발생하는 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선(善)으로 지향(志向)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종교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기 위한 도구로서 기도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가르쳐 왔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니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절)

   한 인간의 내면, 한 인간의 마음(정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성서, 특히 히브리 전통에서 마음은 인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이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 중심 기관이며 또한 도덕적인 판단이나 선택을 하는 곳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목사님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켜 “내적 삶의 모든 심층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마음은 한 인간의 중심이요 핵심이며 중추(中樞)입니다. 오늘날 뇌과학(brain science) 또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연구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뇌의 활동에서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정신을 뇌세포들의 물리적 메카니즘으로 단순하게 환원시키거나 축소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더불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뇌(brain)라는 용어와 뇌의 활동을 통해 창발적으로(emergently) 나타나는 인간의 의식/정신을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식/정신)은 뇌세포들의 물리적 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를 생물학적 관점, 특히 인간의 뇌의 활동과 관련지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신경과학자(neuroscientist)이자 신경신학자(neuro-theologian)인 유진 다퀼리(Eugene d’Aquili)와 안드류 뉴버그(Andrew Newberg)는 Why God Won’t Go Away (한국어 책 제목은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라는 책에서 자신들이 시도했던 획기적인 실험과 그로 인해 도출된 흥미로운 결과들을 소개합니다. 티벳불교의 승려들이 기도(명상)을 시작합니다. 기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혈관에 방사성물질을 주입한 후 SPECT(Single Photon Emission Computed Tomography, 단일광자방출단층촬영)을 위해 제작한 특수한 카메라로 승려들의 뇌를 촬영합니다. 카메라의 촬영에 의하면, 기도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이들의 뇌는 아주 활성화되어 있었고 전반적으로 빨간색과 노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촬영영상은 뇌의 색깔을 파란색과 초록색으로 나타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가요? 그것은 OAA(Orientation Association Area, 물리적 공간 안에서 방향과 거리, 각도 등을 인식하고 안전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뇌의 영역)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유진과 뉴버그는 프란시스코회 소속의 수녀들을 상대로도 같은 실험을 하였고 비슷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험에 참가한 피실험자들은 기도의 절정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할 만큼 자신들이 어떤 무한한 실재와의 연합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티벳승려들의 경우 온 우주 만물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고 프란시스코회 수녀들은 하나님과 말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약하면, 기도와 명상은 사람들의 의식에 분명히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고 그것이 실험을 통해 관측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실험을 했다고 해서 기도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자신있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실험은 일정 그룹의 아주 훈련된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실험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기도나 다른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그 결과를 동일하게 적용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촬영영상을 통해 뇌의 활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나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실험의 결과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God)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실험을 통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은 기도와 명상으로 지칭되는 이 특정한 종교적 활동이 인간의 뇌, 그리고 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정신에, 부인할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효과에 대한 경험적인 증거(empirical evidence)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퀼리와 뉴버그는 이후 The Mystical Mind 라는 책에서 인간의 뇌는 일곱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연산자(operators)를 가지고 있고, 이 중 이항 연산자(the binary operator)는 뇌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사건)들을 두 가지 대조적인 그룹으로 범주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뇌는 이 이항 연산자의 기능에 따라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선과 악, 참된 것과 나쁜 것, 정의와 불의, 행복과 슬픔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현실을 효과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악(evil)의 신화(myth)가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뇌는 이항 연산의 기능을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이해하기 힘든 일들 -- 선한 사람에게 왜 악한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 왜 좋은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 을 신화의 형태로 바꾸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악은 이제 실제적인 것(as real)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악의 신화가 작동하게 되면 인간의 뇌는 불안(anxiety)을 느끼게 되고 이 불안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특히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 불안을 해소하려 할 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죄와 기도 그리고 종교적 신비에 대한 논의의 타당성’을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George Tsakiridis는 최근 이 주제와 관련하여 Evagrius Ponticus and Cognitive Science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뇌가 느끼는 불안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이 부작용으로부터 죄(sin)가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에 의하면, 이 죄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방법이 바로 기도와 명상입니다. George Tsakiridis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명한 심리학자 Kenneth Pargament의 임상실험결과를 예로 들며 “기도를 동반하는 영적 치료(spiritual therapy)가 영적인 면을 배제한 심리치료보다 훨씬 더 탁월한 치료효과를 보여준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기도는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인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왔습니다. 아마도 신앙인들의 삶에서 기도를 제거한다는 것은 한 그루의 나무를 뿌리부터 뽑아내버리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새로운 희망, 용기, 위로, 지혜와 평온함을 경험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기도는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삶이 보다 더 건강하고 가치 있게 되도록 도와줍니다. 이를 통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효과는 경험으로 느껴지는 실재(reality)입니다. 오늘날 인지과학과 심리치료의 발전은 이러한 기도의 효과를 예전보다 더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의 작동 메카니즘, 기도의 유효성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과학으로 완벽히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기도의 효과가 실재가 아니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자인 저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초월적인 종교 체험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얻게 되는 이론들보다 때때로 삶의 궁극적 실재를 더욱 더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계속적인 과학 연구의 발전을 통해 이 종교적 신비가 더욱 효과적이고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신학과 과학(또는 종교와 과학)이 인간의 마음을 더 아름답고 선하게 하는데 협력하고 그리하여 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인류의 삶과 나아가 온 세상이 더욱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어 가도록 함께 힘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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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을 생각한다 - +a와 상징의 세계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서양의 해석학이 성경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것처럼 나도 사춘기에 성경을 읽으면서 해석이 중대한 문제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떤 수녀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강좌가 있었다. 많은 것을 배우며 많은 것을 의심하였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반골이어서 성경 해석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축자적인 해석에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 처음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읽고는 얼마나 흥분하였던가? 지금도 어려운 그의 사상을 알았을 리 없지만 니체의 기독교 비판에 깊이 공감하였다. 니체의 비판은 기독교를 순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체의 초인은 결국 예수이지 않겠느냐고 단정하기도 하였다.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종교에 대해 더욱 더 다원적으로 되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석의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하였다. 전공으로 사회학을 택하면서 종교에 대한 나의 사유를 심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대학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가운데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있다. 포퍼와 쿤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에 대한 논쟁은 이 시절 나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해석은 무한하지 않지만 언제나 다양하다. 쿤의 업적은 자연과학마저도 해석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쉬운 언어로 설명했다는 점에 있다. 자연과학에 대해 무의식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인문(과)학자들이 쿤을 환영했음은 아주 당연하다. 나는 포퍼보다는 쿤을 더 좋아하였다. 과학을 포함하여 형이상학을 전제하지 않는 이론은 없다. 예수의 말을 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진리는 오직 허위를 폭로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비판을 거치지 않은 이론은 언제나 독단과 광기로 흐를 뿐이다.

   그런데 쿤의 논의가 종종 과장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주장은 정상 과학이 패러다임이라는 논증이 불가능한 기반에 서 있다는 것을 논증할 뿐 무한한 패러다임이 가능하다거나 모든 패러다임이 타당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소위 패러다임은 우리가 믿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에는 사람들의 의식을 넘어서는 곳에 각인된 패러다임이 전체 과학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한도 내에서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내게로 왔다. 그때부터 나는 진화라는 아이디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진화론의 도통(道統)을 지키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반골의 자유를 즐긴다. 나에게 있어 종의 다양성은 진화의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특수한) 원숭이에서 진화했지만 그 원숭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 원숭이 +a이다. 이 새로운 원리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질적으로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인간 이하의 동물은 필요(need)에 전적으로 지배되지만 인간은 요구(demand)에 매개된 욕망(desire)에 따라 산다. 이 차이를 설명할 때 +a가 요긴하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크게 두 가지 필요(본능)에 구속된다. 이 두 가지 본능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번식의 본능이다. 프로이트의 성욕과 공격성은 이 본능과 밀접하게 얽힌다. 성욕은 번식의 본능에서 공격성은 자기 보존의 본능에서 파생된다. 인간의 모든 성생활을 번식 본능의 변형이라고 설명하는 이론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 이론이 일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에 성생활은 동물의 번식(교미) 본능 +a로 설명될 수 있다. 단순한 해석이 언제나 미덕인 것은 아니다.

   음식을 예로 들어보자. 몸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음식이 자기 보존과 관련된 양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음식의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들을 보라. 백화점의 음식코너를 둘러보라. 요즘은 양분이 빈약할수록 고급 음식으로 통한다. 인간의 욕망들이 음식에 짙게 배여 흐른다. 인간에게 +a가 없다면 종교적 구도자들이 금욕하는 것은 오직 환상적이고 자학적인 광기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도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a가 있다고 믿으면서 산다.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 지적되는 욕망은 오랜 진화의 단계에서 +a를 전제할 때에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덜 진화한 종을 설명하는 원리로 더 진화한 종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설명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가령 인간을 몸으로 환원하는 의학은 인간의 삶에 대단한 유익을 주지만 의학적 설명이 인간을 전체로 설명한다고 주장할 때 의학은 독단이 된다.

   사람이 고유하게 가진 +a 때문에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에 비해 매우 복잡한 해석을 요구한다. 인간의 삶은 기호(code)가 아니라 상징(symbol)에 의해 얽힌다. 속담처럼 사람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계를 산다. 기호는 아무리 복잡하여도 오직 제한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다. 단순하게 말하면, 궁극적으로는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다. 물론 아주 단순한 기호라도 인간의 삶에 연루되면 언제나 애매해진다. 

   자연과학이 쉽사리 정상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대상들이 기호의 세계를 산다는 점과 관련된다. 벌들의 현란한 소통의 방식이나 개미들의 복잡한 구조들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획일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본능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의 세계를 구성한다.

   상징은 지극히 단순한 경우에도 아주 복잡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상징은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없는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논리를 따른다. 거의 무한한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생산과 유통이 사람의 세계를 이루는 근본 사태의 하나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다 보면 ‘모든 것이 일정하다면’ 이라는 구절을 자주 만난다. 이 구절에서 단순화의 욕망을 읽는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일정한 것은 없기에 경제학 이론들은 과학으로 포장되기는 하지만 지배 지식-권력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분과 적분의 현란한 수사로 포장된 경제학의 ‘한계효용의 이론’은 효용이 적어도 정상적인 다수에게 동일하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종종 나의 쓰레기가 다른 사람에게 보물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가끔 학자들은 말들이 갖는 의미의 애매함과 풍부함을 견딜 수 없는 ‘빅브라더’처럼 말을 단순화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전체주의자들은 언제나 상징을 기호로 만들려고 한다.

   인문(과)학이 직면하는 해석의 다양성은 사람이 기호의 세계가 아니라 상징의 세계를 산다는 점과 관련된다. 상징이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인 한에 있어서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처럼 쉽게 정상과학이 되지 못한다. 정상과학으로 주장하는 대부분의 인문(과)학은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세계마저 벗어나서 억압적인 독단론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인문(과)학은 ‘위기상태’ 또는 정상과학의 전(前) 단계 상태를 항구적으로 견디어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 인문(과)학자들은 정상과학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독단적으로 되는 학(學)을 거부하면서 영구적인 주변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들의 글에 유목이니 유배니 하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속화된 표현을 빌면, 인문학자는 노마드이다. 그러나 ‘자유부동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반항하는 주변인을 닮았다. 

   해석은 기존하고 있는 해석들에 반대함으로써만 가치를 획득한다. 오랫동안 무시되던 면이 새로 부각되고 그 동안 과장되었던 면들이 마모되면서 텍스트는 새로운 삶을 획득한다. 해석은 ‘나름대로 일리 있는’ 의견을 생산하면서 기호의 세계로 환원되어 버린 텍스트를 다시 상징의 세계로 되살린다. 해석의 과정에서 해석하는 사람은 동물과 구별되는 +a를 소유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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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김경래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필자는 '자유의지'가 모든 종류의 지성체가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함축적인 조건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에는 한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또는 이미 인격체로 인정된 모든 이들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는 철학사와 기독교 교리사에서 그 초기부터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논쟁되어온, 하지만 아직도 첨예하게 대립하여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는, 20세기 후반부터 인지과학, 뇌과학, 신경과학에서의 놀라운 발견들에 의해서 더 혼탁해진, 여전히 매우 민감하고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은 주로 결정론과 조화될 수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구분된다. 우선 가장 이해하기 쉬운, 하지만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입장은 강한 결정론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그것은 인간의 뇌작용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뇌에 종속된 정신 또는 의식도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우리의 정신 작용이란 지각된 외부 정보에 자연법칙에 종속된 뇌신경세포들이 현재 체내 상태를 기반으로 물리법칙을 따른 생화학적 반응을 하고, 그 결과들이 우리의 의식속에 생각이나 느낌, 감정으로 나타나며,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조차 자연법칙에 따른 기계적 반응일 수 밖에 없으며, 우리 안에서 자유의지란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18세기에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가 가정했던 것처럼, 우주의 모든 자연법칙과 현재 상황을 아는 (라플라스의 악마(Laplace's demon)와 같은) 초지성체가 있다면, 그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과 상태, 우리의 생각까지도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이러한 주장은 사실 우주의 시작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것과 다름 없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는 것 조차, 이미 빅뱅(Big Bang)의 순간에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이 옳다면,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비결정적이기 때문에, 우주의 시작 순간에 자연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되었다.

      코펜하겐 해석에 기대는 비결정론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주는 듯 하지만, 존재론적 비결정론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은 거시세계가 아닌 단지 미시세계를 서술할 뿐이고, 전자(electron)의 물리량(운동량과 위치)이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우연성만을 보장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적이 없는 무작위적인 우연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여 세계의 비결정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주로 현대의 인지과학, 뇌과학,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들에 주목한다. 1980년대 해묵은 자유의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던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의 유명한 실험이나[각주:1] 뇌 좌우 반구를 잇는 뇌량(corpus callosum)이 끊긴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을[각주:2] 예로 들며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세계는 결정되어 있지 않고, 그 미래도 예측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의식이란, 이러한 불확정성을 포함하는 자연법칙의 결과이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뇌신경 안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반응들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경험은 이러한 반응들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이 관점의 약점은 아무런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의식경험이 도대체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결과들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조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립론자(compatibilist)라 불리는 이들은 어떤 선택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 그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욕망이나 목적이 있는 선택은 그 선택 주체가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이나 욕망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에 충분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은 옳은 것이고, 선택하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에 억눌리거나 방해 받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 안에서 욕망이나 목적에 따라 선택한다면 그것은 원인이 있는 자유의지의 행사이다.   

       그런데 이처럼 양립론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한 선택이 충분한 원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면, 단지 이것이 어떤 다른 외부적 요소에 의해 강요되거나 방해 받지 않은 결정이라고 해서, 이러한 선택을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충분한 원인에 의해서 그 상황 속에서는 가능한 미래가 하나뿐이라는 것인데, 어떤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없었다면" 그것을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와 결정론 이 두 개의 모순되어 보이는 개념을 그저 둘 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조화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들이 양립론자들을 비판하는 지점이다. 자유의지론자들은 이런 결정론을 지지하는 듯한 연구 결과들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출발한 이 세계의 존재론적 비결정성을 바탕으로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선택과 숙고와 결정의 의식 경험을 근거로 여전히 자유의지를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이나, 무의식에서 올라온 충동이나 욕망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엔 그것들이 결정론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각주:3] 하지만 의식 안에서 두가지 이상의 욕망이나 목적이 서로 경쟁하여 그것에 대해 숙고하며 이성적 판단을 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경우에는 "달리 할 수 있었던," 즉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믿음 안에서 자유의지를 위협하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을 설명하려 노력한다. [각주:4]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대전제 아래 과학적 발견들을 해석하는 자유의지론자들의 모습은, 교리를 위협하는 과학적 발견들을 신에 대한 믿음안에서 해석하려 노력하는 신앙인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때로 그들의 설명은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에 위배되는 억지스러워 보이는 가정의 탑을 쌓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숙고와 계획, 선택의 의식경험들이 단지 신기루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보다는, 그 경험들이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단순한 것이 아닐까?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리고 의식경험은 그저 환상이며 우리는 단지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하다면, 이 가정들은 곧 우리를 "인간에게 과연 영혼은 있는가?"라는 종교적 질문으로 이끈다.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결정론에서는, 우리는 단지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며, 우리 안에 영혼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혹시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해도, 그것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기계에 갇힌, 육체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없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은 꼭두각시놀음일 뿐 진정한 순종,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그래서 자유의지론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오랜 기간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의 역사 안에서의 자유의지 논쟁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는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들과 분명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관심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자유의지 논쟁에서 결정론의 원인이 자연법칙이라면, 신학에서는 그것 말고도 하나님이라는 무엇보다 더 중요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1) 하나님의 전지(omniscience)가 미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가? 2) 하나님의 전능(omnipotence)이 인간의 생각도 조작 가능한가? 3)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의 방식이 개입적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개입하시는가? 4) 하나님은 구원 받을 사람을 미리 예정(predestination) 하시는가? 그러면 구원 받을 사람과 유기(reprobation)될 사람은 만세전에 결정되어 있는가? 5)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고 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롭게 응답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금이라도 인간에게 공로를 돌리는 일인가? 등의 질문들을 만들어 낸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시대별 논쟁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통칭 리벳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 실험은 벤자민 리벳이 1983년에 실행한 실험이다. 리벳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시계를 보다가 원하는 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되 그 마음을 먹은 순간을 표시하도록 부탁했다. EEG(Electroencephalography 뇌전도) 스캐너로 피험자들의 두뇌를 확인한 결과 참가자들이 실제로 보고한 시각보다 운동을 유발하는 두뇌의 신호(Readiness Potential 준비전위)가 나타나는 시각이 평균 0.3초정도 앞섰다. 이 실험 결과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무엇인가를 선택했다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였고, 철학, 심리학, 과학, 그리고 신학까지 자유의지에 관련된 수 많은 학문 분야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본문으로]
  2.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는 좌뇌와 우뇌가 정보를 교환하는 뇌량이 끊어진 분할뇌환자들에게서 구술언어를 담당하는 좌뇌가 우뇌의 선택과 결정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결과를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어떻게든 설명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분할뇌환자에게 우뇌가 담당하는 왼쪽 시야에는 눈이 내리는 그림을 보여주고 좌뇌가 담당하는 오른쪽 시야에는 닭발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울리는 그림을 고르라고 했을 때, 우뇌가 담당하는 왼쪽 손은 삽 그림을, 좌뇌가 담당하는 오른 손은 닭 그림을 선택하였다. 환자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질문을 던지자 환자는 왼손의 삽을 보고서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다는 대답을 했다. 분명 그 환자의 우뇌는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삽을 선택했을 텐데, 그 정보가 좌뇌에 전해지지 않자, 좌뇌는 우뇌의 선택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합리화 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본문으로]
  3. 자유의지론자들에게 있어, 우리의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면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진다”는 것이다. 이미 주어진 원인들에 의해 선택이 결정되어 있다면 “달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론자 로버트 케인(Robert Hilary Kane)의 개념을 빌리면, 무의식적 충동이나 욕망에 의한 선택이기 때문에 결정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면적 자유(surface freedom)에서의 선택의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충동이나 욕망이 발생하는 현재의 성향은 선행된 자기형성행동(SFA: Self Forming Action)들의 결과이기 때문, 즉 과거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아니라 시계를 보는 행위가 뇌 상태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2) 판단이 시작되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0.3초가 걸렸을 가능성 3) 판단을 내리기 위해 뇌가 준비되어야 하는 상태에 대한 신호가 포착되었을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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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 신앙과 과학의 랑데부!



 

민기욱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1. “과학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무엇일까?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이 변했다는데 그리스도인의 믿음에도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우리의 믿음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바뀌기라도 한다는 건가? 

       2. 우리는 날마다 “과학”과 “기술”이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변화가 너무 빨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인해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됐지만 예전에 퍼스널 컴퓨터의 사용이 쉽지 않아 아예 포기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는데 훗날 필자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봐 다소 두렵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3. 7월이 되면 생각나는게 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에 위치한 로고스 교회에서 “신앙과 과학” 연속 특강에서 소개한 바 있다.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 등의 우주비행사들이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를 발사해 7월 20일 달에 처음 착륙한 이후 2년이 지난 1971년 7월 30일 아폴로 15호가 다시 달에 착륙했는데 이 때 한 실험 중 “해머와 깃털의 낙하 실험”이란게 있다. 일명, “갈릴레이 실험”의 확증이었는데 이는 “등가원리”를 증명해보이려는 것이었다. 실험의 이름 그대로 지구에서는 해머와 깃털을 떨어뜨리면 당연히 해머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 왜? 그것은 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갈릴레이는 중력에 의한 질량의 가속도 실험으로 물체가 가속되는 양은 질량과는 상관없음을 최초로 보였다. 그러나 갈릴레이 당시에 실험이 쉬웠을리가 없다. 이에 아폴로 유인우주선이 가져다 준 선물은 달 표면이었고 그곳은 공기가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4. 여기서 잠깐! 등가원리(equivalence principle)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등가원리란 일반상대성이론의 기본 원리로서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이 같음을 다룬다. 중력 질량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힘을 작용하는 양이고, 관성 질량은 운동 제2법칙에 의해 정의되는 가속에 대한 저항이다. 이 둘이 선험적으로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놀랍게도 아주 똑같은 값을 갖는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이 둘을 완전히 같은 물리적 개념이라는 논리로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큰 산을 넘어보려는 갈릴레이의 노력이 결국 몇 세기를 너머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졌고 1907년 등가원리라는 이름으로 확립되었으며,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이 같다는 중력 이론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과학적 증명을 아폴로 15호의 데이빗 스캇이 다시 재현했던 것이다.[각주:1] 그런데, 이와 같은 때는 아니었지만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그 촌각을 다루는 엄밀한 과학기술의 홍수 속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5.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 중 한 사람인 올드린이 혼자서 성찬식을 달 표면에서 했던 것이다! 그 당시 NASA는 그리스도인인 우주비행사가 아폴로 8호로 달의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창세기”를 낭독했던 것으로 인해 무신론자로부터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즉, 우주에 있는 동안 우주비행사는 종교 활동을 금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올드린은 달에서 성찬식을 한다는 자신의 계획을 아내한테도 미리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 지구로 귀환한 후에도 당분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올드린에게 성찬도구를 제공했던 휴스턴의 장로교회는 그 때 사용한 잔을 그로부터 받아서 매년 7월 20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달의 만찬의 날'로서 기념하게 되었다. 성찬식 장면을 지구로 송출하려는 원래의 계획을 포기했지만, “라디오 방송이 끊어진 상태에서 빵과 포도주가 들어 있는 조그만 플라스틱 꾸러미를 개봉했다. 나는 교회에서 준 성배에 포도주를 부었다. 중력이 지구의 1/6밖에 안 되는 달에서 포도주는 느리게 물결 치면서 컵의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어서 나는 성경 구절을 읽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올드린은 1970년 가이드포스트 잡지에 기고했으며 NASA는 그 날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http://history.nasa.gov/SP-350/ch-8-4.html (NASA)  

       6.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과학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했던가? "기독교인의 삶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물론 유명 학술 저널이나 논문을 쓸 때야 논리와 논증 등의 치밀한 학문적 전개와 설득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쩌면 올드린의 행동처럼 누가 보기에 따라 무모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7. 필자는 유학생이자 목회자로서 작은 교회에서 꽤 긴 시간동안 목회한 적이 있다. 교회를 개척하고 10여년 목회했던 선배 목회자를 존중하고 교회의 전통을 지키고자 애쓰는 교우들을 배려해서 예배 예전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7-8년 동안 사임할 때까지 지켜낸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학위 과정 중이라 한 주에도 수없이 많은 논문과 책과 씨름하면서도 교회에 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묵묵히 매주 성만찬을 집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차갑고도 냉철한 학문의 세계 속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살과 피를 교우들과 서로 나눌 때 나 스스로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을 했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8. 버즈 올드린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텍사스 휴스턴의 장로교회의 장로로서, 그는 MIT에서 궤도상 랑데부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NASA 우주비행사로 뽑힌 수재였다. 또한 당시 그가 쓴 궤도역학 논문이 이후 궤도상 랑데부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주비행사뿐만 아니라 우주개발사에 남긴 영향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과학자로서 꽤 영향력있는 사람인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해서 한 일이 “성만찬”이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매우 고무적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 혹시 이 역사적인 순간의 일을 처음 접하셨다면 이 일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라 생각한다. 유명한 과학자가 특별한 역사적 순간에 한 엉뚱하고도 위대한 일! 성만찬! 이보다 더 멋진 “신앙과 과학”의 랑데부가 또 어디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http://web.hallym.ac.kr/~physics/course/grcm/pisa.ht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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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과학"(Scientia)의 개념



유승현

(GTU Ph.D Candidate)


   과학은 신학의 적인가, 동지인가? 신학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현대 신학적 이해의 장단점 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의 신학자들이 과학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의 신학에 적용했는가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현대의 자연과학에 국한된 특정한 연구 영역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지식의 총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들의 폭넓고 깊이 있는 과학이라는 용어 이해에 대한 관점이 오늘날 과학과 신학의 논의에 적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2회에 걸쳐서 고대와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과학”의 개념에 관해 논의하려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후의 논의는 다음 세가지 물음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1) 그들의 과학 개념을 형성한 철학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2) 그들은 과학과 신학의 관계성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3) 그들은 당시의 자연 과학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과학' 개념의 철학적 배경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론적 지성 (speculative intellect)의 성격을 지혜 (wisdom), 과학 (science), 이해 (understanding)으로 세분화한다.[각주:1] “이해”는 그것 자신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진리인데 반해서 “지혜”와 “과학”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 인식된다. 더 나아가 “지혜”는 본성에 의해 우선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을 나타내는데 반해서, “과학”은 다양한 인식 가능한 질료 (matters)에 의해 인식된다. 그렇다면 지혜, 과학, 이해의 세 가지는 어떤 층위를 가지고 있는가? 토마스에 따르면, “과학은 보다 상위의 가치인 이해에 의존한다. 또한 이 둘은 최상위에 이르기 위해 지혜에 의존한다. 과학의 결론과 과학과 이해가 기반하고 있는 원리들 모두를 판단함으로써, 지혜는 그 하위에 이해와 과학을 포함한다.”[각주:2]

   토마스는 과학이 지혜 뿐만 아니라 제일원인인 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런 토마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몇 가지 주석서들을 열정적으로 집필했다.[각주:3] 토마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단적으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 (the Philosopher)라고 지칭한 것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의 영향력은 형식 논리학 (formal logic), 현실태와 가능태 (actuality and potentiality), 4원인설, 지식에 대한 이해, 형이상학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체계를 따라 아퀴나스는 명증적 삼단논법 (demonstrative syllogism)을 과학의 적절한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논리학과 수학에 국한된 명증적 삼단논법의 결과로서의 토마스의 scientia에 대한 설명이 과학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토마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과학이 가능한가?

   이 문제에 관해서, 1912년에 출판된 The Catholic Encyclopedia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의 과학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정의를 제시해 준다: “과학은 자연과학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증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그들의 원인들로부터 파생되는 사물들 (things)에 대한 지식으로서 토마스의 과학에 대한 정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각주:4]

   이 인용에서 나오는 토마스의 과학에 대한 정의는 그의 “이교도 대전” (Summa contra Gentil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의 과학에 대한 정의에 근거한 신에 대한 하나의 명제를 제시한다: “만약 과학이 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지식이라면, 또한 신이 모든 원인들과 결과들의 순서를 안다면, 또한 그에 따라 개별자들의 적절한 원인을 안다면, 적절한 의미에서 그것은 신 안에 과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5] 이러한 추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삼단논법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만약 토마스가 신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적용한다면, 신에 대한 과학은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추론과 증명을 사용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이성인가 믿음인가?


   앞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토마스의 체계에 내재되어 있는 이성과 믿음, 과학과 신학에 대한 관계성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토마스의 입장이 어거스틴과 다른 점은 어거스틴의 경우 과학과 이성의 모호성을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 모두에서 논의하는 반면에, 토마스의 철학은 믿음과 모순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그의 체계에 있어서 보다 필수적인 위치를 점유한다는데 있다. 토마스는 때때로 이성에 관한 어기스틴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그는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On Christian Doctrine)에 나타난 철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용에 관해 인용한다.[각주:6] 그러나, 토마스는 어기스틴이 의도하는 것과 같은 철학의 신학적 전용을 의도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토마스에게 있어서 믿음과 이성은 각각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신성한 교리 (sacred doctrine)가 믿음의 빛에 기반하는 것처럼, 철학은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존한다.”[각주:7] 이 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신학과 신에 관한 지식은 오직 믿음의 빛에만 의존하는가? 토마스에게 있어서, 비록 이성이 철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신학에서 뿌리 깊은 역할” [각주:8](ineradicable role in theology)을 수행한다.

   과학에 있어서 이러한 철학의 확장된 기능은 토마스가 “신성한 지식” (scientia divina)과 “신에 관한 지식” (scientia dei)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신성한 지식”은 신적인 문제들에 관련된 모든 영역들, 예를 들면 제일철학, 형이상학, 철학적 신학, 자연신학을 포괄한다. 반면에 “신에 관한 지식”은 계시의 영역에 제한된다.[각주:9] 중요한 점은 토마스가 계시에 의해서 드러난 지식까지도 과학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에게 있어서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인식의 차이점들에 기인한다. 만약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이 인식의 차이점들에 의해서 다르게 인식된다면, 신적인 계시에 기반한 또다른 과학이 인간의 이성의 빛에서 이해되는 것이 가능하다.[각주:10]

   이성에 대한 토마스의 강조는 믿음의 기능에 대한 약화로 잘못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이성의 궁극적인 과제는 단지 “믿음의 머리말”[각주:11] (the preambles of the faith)이라고 말함으로써 믿음이 이성에 의해서 완전하게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신성한 교리가 인간의 이성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성은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위해서 사용될 수는 없다. 그것은 믿음의 가치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이 교리 안에 놓여진 다른 것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각주:12] 따라서, 토마스의 체계 안에서 신학적 추론이 가진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모든 것으로 확장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들에 대한 토마스의 입장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과학에 대한 토마스의 개념은 논리학, 수학, 기하학과 같은 자연 세계로부터 분리된 선험적 진리들에 치우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있어서 그러한 전형적 과학 (paradigmatic science)의 영역들은 사실적 증명들이 필요한 비전형적이고 (non-paradigmatic) 종속적인 과학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왜 대상들에 대한 비전형적인 인식들은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과학”에 미치지 못하는가? 비전형적인 인식들이 우발성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 세계에 있는 물질적인 대상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것들의 보편적인 특성 때문에 과학의 범주로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특수성과 보편성, 감각적 인식과 신학적 추론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연 과학에 대한 토마스의 이해에 있어서 그는 과학의 영역을 단지 인식론으로 제한하지 않고, 세계의 물질적인 모든 대상들로 확대한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체계 속에서 그가 제시한 과학의 개념과 함께 이성과 믿음의 관계성에 관해 간략하게 고찰했다. 그가 철학적 추론의 신학적 전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철학과 이성을 단지 신학과 믿음을 위한 시녀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성의 철학적 사용, 믿음의 신학적 사용을 구분해서 언급함으로써 과학과 신학이 평행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과학은 신학의 적인가, 아니면 동지인가? 이 둘의 관계성을 정립하기 위해서 수 세기 전의 신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은 때로는 무의미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에 국한된 현대적 이해로는 모든 인식의 영역을 “과학”이라 지칭하는 그들의 입장은 너무나 포괄적이고 막연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의 scientia에 대한 관점은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결 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1. Aquinas, Summa Theologica Ia-IIae, q.57, a.2. 앞으로 제시된 신학대전의 모든 인용은 영문판 http://www.ccel.org/ccel/aquinas/summa.toc.html 의 개인적인 번역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2. Ibid., Ia-IIae, q.57, a.2, r.2. [본문으로]
  3.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토마스의 주석서들의 목록은 to Ian. A. Aertsen, “Aquinas’s Philosophy in Its Historical Setting,”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Aquinas, ed. Norman Kretzmann and Eleonore Stump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1.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4. Charles G. Herbermann and others, ed., The Catholic Encyclopedia: An International Work of Reference on the Constitution, Doctrine, Discipline, and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vol. XIII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2), 598. [본문으로]
  5.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1, 94. [본문으로]
  6.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I, 40, 60, quoted in Thomas Aquinas, Faith, Reason, and Theology: Questions I-IV of His Commentary on the De Trinitate of Boethius, trans. Armand Maurer (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1987), 48; cf. Summa Theologica, I,1,8 and II-II,1,a.5, ad 2 and 3; Summa contra Gentiles 1,2 and 9. [본문으로]
  7. Ibid; cf. Summa Contra Gentiles, II, 4. “신자와 철학자는 피조물들을 다른 방식으로 고찰한다. 철학자는 피조물들의 적절한 본성에 속한 것들을 고찰하는데 반해서, 신자는 오직 피조물들이 신에 관계되는 한에서, 예를 들면 피조물들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에게 종속된다는 것과 같은 진리에 대해서 고찰한다.” [본문으로]
  8. Denis J. M. Bradley, Aquinas on the Twofold Human Good: Reason and Human Happiness in Aquinas’s Moral Sciences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7), 78. [본문으로]
  9. Aquinas, Summa Theologica, II-II, 1, a.5. [본문으로]
  10. Ibid., Ia, 1, 1, ad 2; cf. scientia의 세가지 범주에 대한 토마스의 구분에 관해서는 Ia. 85. 1, ad 2. 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1. Aquinas, Summa contra Gentiles, I, 9, 3. [본문으로]
  12. Aquinas, Summa Theologica, I, 1, a.8, ad 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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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과 하나님의 행위 (Divine Action):


엠페도클레스와 고대 원자론자들의 급진적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


정대경

(GTU Ph.D Candidate)


 



   현대 우주론이 밝혀주듯이 우리 우주는 특이점의 폭발, 곧 빅뱅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4차원의 시공간이다. 약 137억년 간의 팽창 역사 가운데서 무수한 별들이 생성 되고 소멸 되기를 반복 하였다. 그 역사 안에서 약 45억년전쯤 우리가 사는 행성 지구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생명체들이 생겨나고 소멸하기를 반복했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계가 형성되었다.  

   생명이 출현했던 환경적 배경에 관해서는 의견들이 아직도 분분하지만 아마도 위의 그림이 부여주는 용광로와도 같았을지 모른다. 행성 자체가 생성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 내부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지진과 화산 활동들로부터 용암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며, 동시에 태양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던 미행성체 디스크 파편 물질들이 지구 원시 대기를 뚫고 무수한 폭격을 가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우주 안에는 전방위적으로 무질서를 창출해내는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인 엔트로피 증가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혹은 열역학 제2법칙) 지속적으로 일어나는데, 지구에서 발생한 생명의 출현과 진화는 마치 이러한 경향성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원시 지구 환경에서, 그것도 모자라 전 우주적인 무질서로의 경향성 아래에서 어떻게 생명이 출현했을 수 있을까?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 것일까? 아니면 용광로와도 같은 원시 지구 환경과 열역학2법칙 자체에 생명을 출현시킬만한 무슨 특별함이 있는 것일까? 

   혹시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원시 생명체를 이 지구에 생겨나게 하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위배하고 행위하시는 분인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또 생명체를 생겨나게 하셨던 것일까? 

    필자는 몇 회에 걸쳐서 위의 질문들과 유사한 고민들을 가지고 씨름 했던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철학자들, 신학자들,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다루어 보면서, 현대 과학이 밝혀주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이론 (e.g. 화학적 진화)과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인 창조 교리 사이의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 시작으로 본 글은 현대 환원적 물리주의 (reductive physicalism)의 출발점인 고대 원자론과 그 지지자들이 생명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생명체 화석은 약 34억년 전의 것이다. 다소 논쟁의 여지는 아직 남아 있지만 일각에서는 그린랜드에서 발견된 퇴적층이 약 38억년전 존재했던 생명체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학자들은 작년인 2015년 생명의 기원이 약 41억년 전쯤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최초의 생명체가 지구의 형성 직후 운석과 혜성들로 인한 대폭발기를 지나자마자, 혹은 그 기간 내에 대폭발의 충격이 다소 완화 되었던 장소에서 (e.g. 해저 열수공) 이른 시기에 생겨 났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고대인들 또한 위와 같은 질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듯 하다. 그 당시에는 급진적 자연발생설 (Spontaneous Generation Theory)이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주된 이론이었던 듯 보인다. 급진적 자연발생이라는 것은 생명체들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기본 물질들과 그것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자연스레 출현했다는 이론이다. 언뜻보면 당연한 듯한 소리이지만, 그 당시 고대인들은 이러한 급진적 자연발생이 단순히 생명체들의 머나먼 기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생명체들의 출현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개구리와 같은 몇몇 종들은 교배나 교미가 아닌 세상의 기본 물질들로부터 ‘곧바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는데, 이 맥락에서 고대 철학자들과 일군의 신학자들은 성적인 결합과 더불어 급진적 자연발생을 생명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매커니즘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Empedocles, ca. 495-435 BCE)는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세계와 그 안의 존재들은 모두 네가지의 기본 물질들 (불, 공기, 물, 흙)과 그것들을 상호연관 시키는 두 가지의 기본 물리력 (사랑과 증오)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사랑은 기본 물질들을 연합하게 하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증오는 그 물질들을 흩어버리는 파괴적인 힘으로 인식되었는데, 그 두 가지 기본 물리력들 사이의 조화로 인해 보통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생명체들이 생겨나지만, 그 둘 사이의 균형이 깨져 파괴의 물리력인 증오가 지배적인 때에는 미노타우로스와 유사한 “소의 머리를 한 인간의 자손 (ox-headed offspring of man)”과 같은 기이한 생명체들이 출현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레우키포스 (Leucippus, ca. 5th century BCE), 데모크리토스 (Demokritos, ca. 460-380 BCE), 에피쿠로스 (Epicurus, ca. 341-270 BCE)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엠페도클레스의 두 가지 기본 물리력을 배제하고 자연현상을 기술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비가시적인 원자들 (invisible atoms)”을 근본 물질과 힘으로 이해했다. 원자들은 그 자체로 모든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뻗어 나가려는 운동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운동 때문에 원자들 상호 간의 충돌과 연합이 가능했으며, 원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명체들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레우키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운동하며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극히 작은 크기 때문에 비가시적이며 그것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있는 것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질이다. 원자들은 심연 (the void), 비존재적 공간 안을 끊임 없이 돌아다니다가 상호 간에 충돌과 연합을 거쳐 모든 물질들을 생겨나게 하였다. 그 원자들이 흩어지고 해체되는 순간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이미 엠페도클레스에게도 전제되어 있었지만 고대 원자론자들은 생명체들의 기원과 형성이 비생명체들의 기원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은 바 생명체와 비생명체 사이에는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도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원자론자들에게는 모든 개별자들은 그것의 크기와 형태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차이도 없고, 그러한 맥락에서 생명체들은 비생명체들과 비교하여 조금 더 복잡한 존재자들일 뿐이었다. 원자론자들은 생명의 출현과 관련하여 모든 종류의 목적론이나 신적인 개입들을 거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명 현상은 순전히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지적하였다.

   에피쿠로스주의자이자 로마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 (T. Lucretius, ca. ??-50 BCE)는 원자론자들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 인격적 신이나 신적 존재의 목적과 섭리 등을 거부하고, 원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 곧 생명의 기원이 일어나는 근본 장 (field)을 “the Mother-Earth”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비록 그의 단어 선택이 범신론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적어도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것, 곧 모든 것들의 기원이 벌어지는 장으로 인식했을 뿐, 어떠한 종교적 혹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함의를 드러낼 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원자론자들과 같이 루크레티우스에게는 생명의 기원은 단순히 우연히 발생한 또 다른 종류의 원자들 간의 조합물이었다.  

   엠페도클레스, 루크레티우스와 더불어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은 합리적이지만 다소 우리의 직관, 곧 ‘생명현상은 비생명현상과 어떠한 이유로든 구별된다,’ 과는 반대되는듯 보인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일부는 앞서 밝힌 바 있는 환원론적 물리주의 (reductive physicalism)의 입장에서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에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나 어거스틴과 같은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은 원자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현상은 비생명현상으로부터 뚜렷이 구별되는 것 이었고, 더 나아가 생명의 기원에는 초월적인 존재와 힘이 작용 하였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다음 글에서는 고대 원자론자들과 급진적 자연발생설을 공유 하기는 했지만 그들과는 사뭇 다른 생명 현상과 기원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장들을 살펴 볼 것이다.


참고문헌 


  Alexander I. Oparin. Origin of Life. Translated by Sergius Margulis.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65. 


  Elizabeth A. Bell, Patrick Boehnke, T. Mark Harrison, and Wendy L. Mao. “Potentially Biogenic Carbon Preserved in a 4.1 Billion-Year-Old Zirc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12, no. 47 (2015): 14518-14521 


  Ernst Mayr. The Growth of Biological Thought: Diversity, Evolution, and Inheritance.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Ernest L. Abel. Ancient Views on the Origins of Life. Cranbury: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1973. 


  Iris Fry. Emergence of Life on Earth: A Historical and Scientific Overview. New Jersey: Rutgers University Press, 2000. 


  J. William Schopf. “Fossil Evidence of Archaean Life.”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iological Science 361 (2006): 869-885. 


  Jonathan Barnes.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2nd ed. Boston: Routledge & Kegan Paul, 1982. Malcolm Schofield. “The Presocratic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Greek and Roman Philosophy, ed. David Sedle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Stephen Toulmin and June Goodfield. The Architecture of Matter. New York: Hutchinson & CO, 1966. 


  Yoko Ohtomo, Takeshi Kakegawa, Akizumi Ishida, Toshiro Nagase and Minik T. Rosing. “Evidence for Biogenic Graphite in Early Archaean Isua Metasedimentary Rocks.” Nature Geoscience 7 (2014):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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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과학과 그 너머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베르그송의 첫 저작인 『시간과 자유의지』를 읽을 마음이 생겼다. 몇 년 전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으로 한글로 새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영어번역본인 Time and Free Will 에는 “An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가 부제로 달렸다. 영어번역본은 베르그송이 한창 활동하고 있던 1910년에 나왔다. 원저는 1888년에 출판되었으니 상당히 빨리 번역된 셈이다. 윌리엄 제임스 등의 영향이 클 것이다.  

   베르그송의 테제는 ‘의식의 흐름이 구체적인 경험이라면, 시간을 양화(量化)하는 당대의 철학은 그것을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 없다면, 근대 과학에 구현된 연장(extension)의 방법으로 현상을 해명하는 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근대 과학은 상식과 동조하여 의식의 현상들을 마치 연장인 것처럼 다룬다. 시간은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작업은 다음 물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은 공간인가? 그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의식 현상들에 적합한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 지속이다.  

   베르그송의 당대에 사상계에 나타난 가장 큰 충격의 하나는 『종의 기원』의 출간이었다. 더 광범한 맥락에서 본다면, 19세기 중반에 과학의 심대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근대 과학이 19세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는 화이트헤드 등의 통찰이 맞는다면,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이 헤게모니는 다방면에서 흔들렸다. 위기의 시대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패러다임은 현저하게 교조적인 특성을 갖는다. 차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패러다임의 내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심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단순히 과학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의 위기와 전체 사회의 위기는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동안 삶을 고정하던 상징 세계의 위기는 합리적인 해결을 향하지 않고서 파국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베르그송은 19세기 중반에 공부하면서 당시 주도적인 방법에 천착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H. 스펜서의 사유에서 당대의 주도적인 방법의 현신을 보았다. 이 방법은 보통 “실증주의”로 불린다. 실증주의는 근대과학의 독단적인 표현이다. 콩트와 스펜서의 실증주의와 페히너의 심리물리학과 경험론에 터하는 연상주의(associationism) 등은 가족유사성을 갖는다. 보통 소박한 경험론으로 한데 묶인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관심의 하나이다. 이미 칸트는 강력한 경험론의 비판을 제시한다. 많은 면에서 칸트는 이후 철학을 지배한다. 베르그송이 칸트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칸트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누구의 철학을 비판한다면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에 기대어, 누구의 사유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에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부차적이다. 경험과 현상을 우선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순수’ 경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방법과 이론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직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직관을 통한 순수 경험의 획득이 가능하다면, 이 경험은 현존하는 과학 이론에 대해 일종의 비판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포퍼 등의 진화론적인 인식론은 이 가능성에 정초된다. 그가 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아무튼 경험이 이미 있다고 하자. 이 경험은 방법의 참과 거짓을 선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 경험의 풍부함이라는 착상을 생각해 보자. 풍부하다면, 어떤 방법이 이 풍부함을 제대로 포착하는가? 

    이 책에서 베르그송이 집중하는 것은 의식 현상들이다. 의식 현상들의 학은 가능한가? 베르그송은 프로이트와 같은 주제를 천착한다. 19세기에 정신 현상 내지는 감정들 등등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이미 로크와 흄에 의하여 일종의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까? 라캉은 어떤 곳에서 근대 학의 승리는 측정(measure)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측정이라는 이상. 이 방법의 특징은 모든 주관성의 요소를 지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근대과학 이전에도 공간의 측정이 있었고 시간의 측정이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시간의 측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8세기에 서학이 동양에 전래될 때 그 형이상학은 거부되곤 했지만 달력은 매우 진지하게 검토되고 수용되었다. 그런데 달력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의 측면이 아니라 공간으로 환원된 양화된 시간의 측면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잠시 소설을 언급한다. 물론 자기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법이 반드시 반(反)-과학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베르그송의 철학에 깊이 기대면, 우리는 기술 자체가 갖는 한계를 검토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기술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큰 문제를 제기한다. 베르그송은 내적 통찰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심층을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내면성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내면성을 다른 사람과 교통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 내지는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사용은 곧 내면 상태를 공간화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에 종사하는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가 문제된다.

   한국에서 스펙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끈다. 스펙이라는 단어는 원래 공산품의 특징을 기술하는 용어가 아닌가? 이 스펙이라는 단어는 자본주의라는 시장에서 매력 있는 상품으로 사람이 전화되는 극단을 표현한다. 그 단어에 대해 구토를 느끼는 대신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인한다. 베르그송이 제시하는 사유를 통하여 이를 해석한다면, 사람으로-있음의 자본주의적인 양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양화의 도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의 사유를 예수의 언명과 관련하여 고찰할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물론 말씀이 환기되는 순간 베르그송은 말할 것이다. 말씀마저도 양화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그런데 말 또는 언어는 절대적인 지평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말없이 사는 존재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말이야말로 사람으로-있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말은 이미 획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으로-있음에서 변모하는 것이라고. 베르그송이 책의 한 대목에서 소설을 다루면서 표현하는 난점들을 기억한다. 내적 상태를 양화하지 않고서 기술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시. 또는 그림과 음악.

   1888년에 베르그송은 이 책을 출판했다. 그는 1859년생이니 서른이 되던 때였다. 그의 나이에 견주면 나는 십 수 년을 더 살았다. 세상에 내어 놓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공인된’ 자리 하나 잡지 못한 채 늘 막연한 고민에 시달리는 처지이다. 나는 이 세계적인 철학자 앞에서 부끄럽다.

   그런데 문득 이 부끄러움은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참된 자기(self)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ego)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사람에게 있다면 그것은 양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사회적이고 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ego)와 관련하여 사람은 비교된다. 비교된다는 말은 측정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일정한 키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키가 사람으로-있음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한다면, 문득 키를 아주 세밀하게 측정할 것이다. 키에 따라서 차등하게 자원을 분배하는 세계를 생각해 보자. 이 세계는 분명 당혹스럽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의 한 사유의 입장에서 사람으로-있음의 값을 매기는 모든 일은 궁극에 있어서 키에 따라 사람을 일렬로 배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이것은 현실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람으로-있음은 그렇게 양화할 수 없는 차원을 갖는다. 양화할 수 없는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평등하다. 양화할 수 없는 것을 배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관점에서 현대의 문제는 양화할 수 없는 것을 양화하는 매우 섬세한 방법을 개발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화할 수 없는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사유는 매우 심대한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을 갖는다. 다시 나의 부끄러움으로 되돌아가면, 나의 자아 또는 사회가 나에게 강요한 양화를 극복하고서 참 나(self)와 ‘더불어’ 자족하는 경지를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 경지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 자족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일은 다시 자기를 양화의 세계로 이끈다. 정말로 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 머물면 무슨 유익이? 나는 그렇게 묻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양화하는 어떤 정신의 강고함을 느낀다.

   요컨대 베르그송의 자기는 지속으로 파악되는 세계이다. 그러면 지속을 긍정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가능한가? 지속은 오직 부정적으로 포착되는 것이지 않을까? 정말로 긍정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앞서 예술을 거론하였다. 과학은 양화의 기술로 남아야 한다. 이 점에서 과학과 예술의 화합이라는 면이 거론될 수 있다. 과학이 문제되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독단 때문이다. 과학이 만능이라고 착각할 때, 베르그송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삶의 영역은 축소되고 왜곡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삶의 완전한 지속에 대한 헌신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다. 삶은 어떤 면에서도 불완전하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영역들을 완전히 한쪽으로 환원하지 않고서 어떤 중도를 발견하는 ‘지혜’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이 자기와 자아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첨언한다. 자기는 지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자아는 자기가 공간화 또는 양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양화된 것은 측정될 수 있으며, 이 영역이 심대하게 양화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대 사회는 자아의 양화를 매개로 한 착취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이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면 양화되고, 양화는 총체성(totality)을 지향한다. 만약 철학이 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학 내지 지식은 언제나 양화의 문제일 것이다. 더 섬세하고 말랑말랑한 양화가 있겠다. 그래서 학에 맞서는 것으로 비(非)-학이 있겠는데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문학과 예술은 사람으로-있음의 복잡한 지속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타락과 위축은 베르그송적인 시각에서 현대가 직면한 큰 문제가 될 수 있겠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있어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방식이다. 특히 과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중에 그가 기억에 관한 책을 쓴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있음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현상이다.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현재의 순간을 산다고 하자. 그런데 비유한다면 사람은 한 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공간이랄 수 없지만, 공간의 비유를 빌 수밖에는 덩어리로 산다고 해야 할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주체성은 출생 이전에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또는 유전자의 형태로 주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많은 의문이 든다.

   나는 주체성이 출현한다고 보는 편이다. 주체성은 경험적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환경은 같을 수 없고, 유전자도 같을 수 없다. 이 미세한 차이에서 삶은 출발한다. 유전자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온갖 가능성들의 집합이고, 환경은 온갖 우연의 집합이다. 이 둘의 결합과 더불어 삶은 시작된다. 불현듯 시작된다. 우리는 말 이전에 정말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할 방도가 없다. 동물에게 의식이 있는가 하는 점이 아직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듯이. 이것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 소통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또한 오직 말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무(無)라는 말인가? 무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소통되기 위해서는 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아직 말이 없는 시절에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말의 너머에 존재하는 그 세계를 아이의 세계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 너머의 세계마저도 말이 있고나서야 존재하지 않을까?

   이 글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와서는 일기장에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을 적은 것에 비할 수 있다. 그런데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그와의 만남은 나를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와의 만남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질 수 있다. 한편으로, 그 만남은 나라는 기존의 사람으로-있음에 오직 피상적인 흔적만 남길 것이다. 자유의 실현이 없는 반복과 리듬이 부각된다. 극도로 미세한 관찰에 의하면, 여기에도 변화와 창조가 있기는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만남은 과거-현재의 연속체와는 매우 다른 자기, 즉 사람으로-있음을 창조하거나 구성하기도 한다. 이런 자기창조의 가능성 때문에, 사람으로-있음의 해명은 과학 내지는 지식의 방법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내적인 의식 현상들을 양화하는 일은 사회생활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있음을 온전히 해명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과학의 너머를 지시한다. 너머에서. 물론 과학이 자신의 너머를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반드시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베르그송의 첫 저작에서 그가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과학에 맞서는 또는 나란히 존재하는 지속의 세계를 강조한다. 베르그송의 책을 읽고서 사람으로-있음, 너머와 자유, 창조에 대해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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