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존재’와 가능성을 주는 ‘사랑’




강선구*

 


한 남자가 처참한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며 결국 죽음밖에 답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에 그는 '아무 의미'가 없는 스스로의 존재앞에서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는 죽기 직전에 한번만 더 만나고픈 여자에게 찾아간다.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 한줄기 빛같은 존재이며, 무언가의 '의미'를 가진 그런 신성한 존재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만남을 향해, 그녀에게 정처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끔찍한 죄들을 고백한다.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고백하는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몇초간의 침묵 뒤,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했나요?"  

그리고 비참하게 우는 그를 향해 다가가 포근하게 끌어안아준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죄를 저지른 그를 스스럼없이 받아주고 위로해주었다. 

예상대로라면 그를 혐오하고 비난을 해주던가, 슬금슬금 도망가버렸어여 할 그녀였어야 하는데, 그녀는 그에게 예상치 못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 위로가 그에게는 '의미없는'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사건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은 그에게 자기 삶의 자유를 위해 지탱하고있었던 모든 합리화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거짓되게 만들었는지, 무의미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합리화로 인하여 그는 결국 스스로를 힘들게하고 죽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밖이었던 그녀의 위로는 그가 우상시했던 그 합리화들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정죄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녀는 많이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권력이나 학벌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위해 몸을 파는 신세였다. 

외부적으로만 보면 초라한 신분의 그녀가 가진 내적인 힘은 바로 삶을 해석하는 태도였다. 

비참할 수 있는 삶의 환경들에 억눌린 가운데에서도 밝게 웃는 그녀를 처음 보며, 그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그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라면 자기의 끔찍한 죄들을 고백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가 된 그는, 비난 대신 위로를 받았다. 

존재가 부정당하지 않고, 받아지게 된 사건 가운데 그는 무의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거저받은 위로인 수동적인 사건 앞에서 그는 무의미의 세계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 앞에서 그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관에 참여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두 주인공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았다. 

개인적으로 나의 사랑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장면이다. 


한 존재가 더이상 존재함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생을 포기하려고 했을때의 고통을 상상해본다. 

그 고통은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는 불완전한 이해일수 밖에 없지만, 

스러져 가는 그 순간의 고통 앞에서 홀로 외로이 버텨내는 그장면을 떠올리니, 존재의 비참함에 버거워졌다. 


존재함이란, nothing 혹은 non-being이라는 '존재없음'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비참함이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비참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존재함과 존재없음의 수동적 위치인 '사이'에서 인간은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존재함의 반대말은 가능성 없음이다.  

존재하지 않는 현재 그 자체에 대한 가능성 없음이 아니다.  

아직 있지 않은 존재의 미래적 가능성때문에 '존재없음'은 발생한다. 

가능성 없음은 희망없음과 동의어이다. 

즉, 존재없음이란 존재에 대한 희망이 없음인 것이다. 

희망없는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원래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존재없음이라는 의미가 생성되면서 발생한다. 

존재함 가운데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존재없음 때문에, 존재는 결국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하지 않음은 의미의 죽음이고, 희망의 죽음이다.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는 현실적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죽음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을 hylomorphic being이라고 정의했다. 


복합체인 인간은 현실태라는 완전한 형태를 가질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복합체라는 의미이다. 이 한계때문에 인간은 존재없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된다. 하지만, 이 한계성 때문에 인간은 가능태라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복합체 인간론은 존재론적 설명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한계성 자체가 인간에게 개별적 고유성individuality을 주고, 이 개별적 고유성은 인간 개개인을 다양하고 특별하게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이 개별적 고유성은 인간에게 한계를 주며 존재없음으로 향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존재없음 때문에 인간 개개인들은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함으로 향하게 할 가능성도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합체인 인간이 한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퀴나스의 creation이론을 통해서 마련된다. Creation이론은 인간의 능동적 가능성과 수동적 가능성을 종합하는 학문적 기반이되며 존재함을 향한 기초토대가 된다. 


Creation이란, 순수 현실태 그 자체인 신으로부터 비롯된 out of nothing라는 의미를 생산해내는 구조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creation을 인식 할 수 있는 방법을 유추(analogy)라고 설명하는데,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한 신을 절대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유추의 방식을 통해 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신은 이해하는 것(know)과 의지하는 것(will)을 통해 스스로 드러냄을 보여준다. 

그리고 존재의 원인 되는 신의 지성을 본받아, 인간 역시 이해하고 의지하는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의미생산을 할 수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 진다. 

지성이신 신은 결국 피조물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스스로 존재함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유추는 수동적 이성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수동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을 지성으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관점은 인간에게 '능동적 이성'과 '수동적 이성'의 만남이라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즉, 존재에게 아무것도 아님이 아니라 혹은 무존재가 아니라, 존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신이 우리를 창조함의 의미라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창조론은 인간내부가 아닌 순수현실태인 신으로부터만 존재함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퀴나스의 인간론과 창조이론은 단순히 지성적인 '봄'으로써 존재의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참여'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없음은 존재함이라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의미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해야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단계처럼 점진 적인 것이 아니라, 변혁적인 전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없음에게 존재함이란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변화이다.    


아퀴나스의 창조이론이 존재없음으로부터 존재하도록 구원한다는 기반이라면, 

아퀴나스의 신을 인식함이란, 존재없음에게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게끔 돕는 지성적 기반이 된다. 

신이 존재없음을 존재하게 만들어주고자 하는 ‘의지적 사랑’때문에 인간은 가능성으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흘러넘친 사랑으로 인해 존재없음은 존재함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의미는 단순한 인식적 차원이 아닌 삶의 참여로 획기적으로 전환될때 비로소 존재론적 가능성이 마련된다.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의미하게 만들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향하게하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이론은 존재함과 이성에 대한 존재론적 가능성을 사랑으로 연결하는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비이성적인 사랑이나 그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신이 의미를 부여해주는 지적인 사랑을 통해서 존재함의 의미는 존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인식론적 통찰이 더 새로운 이유는, 인간의 몸과 물질성을 한계이자 가능성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현실적 물질성을 무시하는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줄 수 있고, 

존재론적 가능성을 수동적 이성인  '사랑'을 통해서 유물론의 경계확장 가능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퀴나스가 현대적 의미의 유물론이나 관념론과 같은맥락으로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퀴나스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가진 인간론 (hylomorphic being)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변증법적 존재함의 가능성'을 함의한다.   


다시 소설 ‘죄와 벌’의 두 주인공으로 돌아가 존재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대단할 것 없어보이는 그들의 ‘사랑’은 왜 비참함으로부터 찬란함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을까? 

연약한 한계일 수밖에없는 인간들 가운데에, 서로를 향할수있도록 오는 신으로부터의 사랑은, 비참함 가운데에 있는 수많은 존재없음들에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랑'은 하나의 이론도 아니고,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존재없음으로부터 존재함으로다가가기위한 '사랑'은 비참한 우리에게 살라고 주는 가능성이고 희망이다. 


존재하게 만드는 사랑을 향하여, 존재를 살리는 사랑을 향하여, 

오늘 나는 그 사랑에 삶을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 필자소개

현재 '목회적 삶'과 '목회자의 삶'의 경계에서 고민중에 있으며, 친구들에게는 네살 선구라 불리우고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수련생 과정을 밟고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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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어치운 진보





 김정원*

   

    진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있다. 평화, 정의, 교육, 생명 등등 흔히 한신에서 신학을 했던 이들이라면 빈번하게 접했던 그리 그리한 내용의 것들 말이다. 그 중 ‘진보’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는 거의 언제나 옳았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판에서 끊임 없이 말해져 왔던 진보란 무엇이었을까? 대중없이 나열해 보자면, 양성 평등, 나아가 성 평등, 요즘 말로는 성정의. 다시 말해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에 열려 있는 자세가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또 하나는 타 교단과의 일치, 일명 에큐메니칼, 이 역시 지평을 넓혀 보자면 종교간 대화, 다른 신앙에 대한 존중까지. 그리고 성서 해석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시도. 뿐만이랴, 역사적 예수, 민중 예수, 안병무, 문익환, 김재준, 문동환, 민중, 민주, 통일, 역사적, 사회적……. 여기에 학생 운동과 사회참여, 더 구체적으로는 세월호의 노란 리본, 박근혜 반대, 성명서, 촛불, 반미, 시청 앞 광장 등등을 더하면 얼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진보’는 완성되는 듯 하다.


    만약 이것이 ‘진보’라면 나는 비교적 꽤 진보적인 여자임이 분명하다. 나는 최근까지도 퀴어 페스티벌에 참석하였고, 학창시절 반민주적 상황에 분노하여 광화문에 자주 나가있었고, 4.20도 가고, 4.30도 가며, 만나는 후배들에게 내가 아는 만큼의 진보를 떠들어댔었다. 예를 들면 노동문제, 통일문제, 생태계 문제 등등. 어느 날엔가는 총장에 반대하고, 여느 교수의 행보에 저항하며 성명서를 내기도 했으며 바로 얼마 전까지도 무슬림들과 기꺼이 만나며,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종교간 이해를 돕기 위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관련 설교도 하며 그렇게 살았다. 가난을 ‘노래’하고 가난한 삶을 결심하기도 했었다. ‘민중 교육’을 지향했기에 따라서 민중지향적 삶 역시 지향했었다. 나는 적어도 진보적이기 위해, 진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의미 물음에 있어서 만큼은 게으르지 않았음을 자부할 수 있겠다.


    자, 여기까지가 진보적인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또 한 부분의 나는 어떠할까? 나는 용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 번 한적이 없었고, 등록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학점 관리에 무참히 소홀했다. 다른 동기들이 그것들에 몰두할 때, 그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며 속으로 비웃었고, 그들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이 없는 무지랭이들이라고까지 폄하했었다. 지금 이라크에 파병을 보낸다는데, FTA가 성사된다는데, 농민들이 죽겠다는데, 왜 저들은 저리 A+에 안달이 난 걸까. 저들은 왜 반대하지 않을까. 저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 걸까. 저들은 왜, 저들은 왜. 집회에 한 번 참석하고 우월감 한 번을 선취하고 나면, 명품 가방과 하이힐을 하고서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학생들에게는 버거울 가격의 밥을 먹었다. 남들보다 더한 열정으로 조직을 하고 교육을 하고 글을 쓰고 나면, 여지없이 (남들)보다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를 상찬하였다. 신발장과 옷장은 터져나갈 상태였고, 칼로리를 계산하며 몸매 관리를 했다. 이미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상태라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남들이 취업 걱정에 안달이 나는 것을 보며 속물이라고 얕보았다. 게다가 목사가 되지 않으려는 동기들을 보며 의식이 부족한, 혹은 기독교교육에 대한 열의가 부족한 이들로 치부했고, 보다 풍족한 삶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오해해버렸다. 


나는 정말 모두를 위해 그렇게 뜨거웠을까? 

정말 그 열정은 공동체를 향한 열정이었을까?


    내 배움의 분열, 내 실천의 분열, 내 일상의 분열 곧 나의 분열. 분열 속에 여실히 놓여 있던 내 삶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새 꽤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이 되어 있었다. 내가 얻고자 하던 이미지, 그놈의 ‘진보’를 나는 성취했다. 비록 시간도 들이고 공도 들이고 열정도 들였지만, 때때로 욕도 먹고, 은따도 당하고, 오해와 미움도 샀지만, 결국 내가 손해 본 것은 없다. 나는 ‘진보적인 여성’이 되고 싶었고, (남들)보다 우월한 의미에서의 깨어있는 여성이 되고 싶었으니까.


많이 떠들면 많이 진보적인 인간이 되는 걸까? 

광화문에 많이 나가면 평화를 실천한 인간이 되는 걸까?


    니체는 질문한다. ‘한 영혼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딜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진리를 무릅쓸 수 있는가?‘ (안티크라이스트 중). 우리가 무언가를 대의를 위해 감당하고 있다고, 혹은 타인들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 다시 말해 진리를 위해 그에 따른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고 말할 때 니체의 질문은 속을 파고 들어온다. 그는 대답한다. ‘모든 단계의 지식의 진전은 용기, 즉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부터 유래한다.’라고. 나에 대한 엄격함은 나의 분열을 고백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동시에 말해져 왔던 ‘진보’앞에서 물러나게 한다. 나는 그 ‘진보’로 소비되고 싶었다. 교회 현장에서, 교육의 현장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분열의 김정원이 아닌,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었다. 나는 나를 그렇게 팔아왔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해지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꼭 그렇게 평가되고 싶었다.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즉 진보를 높은 단계의 진리로 생각하는 이들의 강한 신념은 과거 금욕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욕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자신을 더 높여서 금식, 철야, 수행, 묵언을 통해, 한마디로 하자면 적극적인 경건 (제사, 희생, 기도 등)의 행동보다는 궁핍 (privations)을 통해 특별한 신성성(sanctity)을 얻는 사람들이다 (뒤르켐). 즉, 금욕주의자들의 고행과 궁핍을 통해 신성성을 얻었듯이,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 보다 적극적인 진보 이념의 실천을 통해 그들은 진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때의 신성성, 진보성을 권력이라 칭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 신성성과 특이성이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 지는 소위 진보 지식인들을 통해 실로 확인하고 있으니까. 니체는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 시대의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억압 받고 가장 결핍된 사람들 가운데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이때의 억압은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현재 억압받는 이들을 칭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엄격함이 결핍된 이들을 향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 진보성을 획득한 자들은 되려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에서 억압받는 이들을 지배하기 쉽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이들은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하니까, 억눌린 자들의 슬로건을 함께 외치니까. 이런 방식으로 고난 받는 자들을 지배하는 것, 아주 착하게 지배하는 것, 이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내고자 하는 그놈의 ‘진보’는 진보에 있어 가장 결핍되고 진보에 억눌린 이들에게로부터 온 것은 아닐까? 그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착한 위선’이 아닐까?


    나는 흔히 ‘촛불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지난 박근혜 탄핵 즈음부터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떼어버렸다. 이재명이 “언제부터 노란 리본 달고 다녔냐?”라고 호통치며 으스대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행위에 담긴 나의 신념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의식 있음과 의식 없음은 구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누군가 묻더라. “학생 운동을 하는 학생과, 전혀 하지 않는 학생 중 누가 선하냐? 혹은 누가 더 의식 있는 학생이냐?”라고.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위와 같은 반성을 통해 이러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다시 또 진보적인 여성으로 소비되고 싶어하는 것인가? 거참, 그러게나 말이다. 다만 영어 과외 자리에 온 맘을 써가며 보내는 요즘, 가난, 그거 ‘노래’할 거 아니란 것 하나는 알게 되었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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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의 황금률[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최근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우리나라에서 삼겹살이 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1970년대에 경제성장으로 육류 소비수요가 늘어난 일본에 수출을 하기 위해 대형 양돈산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장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안심과 등심만 수입해 갔기 때문에 나머지 부위, 즉 삼겹살, 족발, 머리, 껍데기, 내장 등은 헐값으로 국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일본에서 대형 양돈을 하지 않고 고기를 수입해 간 이유였다. 돼지 배설물 처리가 너무 고약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우리나라 사람은 돼지 배설물 치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우리나라 물과 땅은 오염되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게 일본의 이기적인 행태에 대해 부아가 치밀다가 조금 지나지 않아 낯 뜨거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얼마 전에 돼지 배설물 치우는 일을 하다가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소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네팔 등지에서 온 젊은 청년 몇 사람들이 7000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있는 경북 군위의 한 농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돼지 배설물 치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매일 지하 2m의 배설물 저장통으로 사다리를 이용해 내려가서 바가지에 배설물을 담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돼지 배설물에서 발생하는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두 명이 사망한 것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온 청년들을 기다린 것은 돼지 배설물을 바가지로 퍼내는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육식 소비를 위해 운영되는 대규모 공장식 축산에서 왜 이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돼지 배설물 때문에 대형 양돈업을 우리에게 떠넘겼다고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런 질문을 떠올리던 중에 원진 레이온 공장 사례가 생각났다. 원진 레이온 공장은 1960년대 일본 동양 레이온에서 중고 기계를 수입해서 비스코스 인견사를 만들던 곳이었다. 이 공장은 작업과정에서 치명적인 유해물질인 이황화탄소와 황화수소 가스가 발생하여, 노동자들이 중독되고 사망하기도 했던 산재의 대명사였다. 노동부는 무재해기록증을 발급하는 등 감시마저 소홀히 했다.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과 시민사회의 치열한 투쟁으로 인해 결국 이 공장은 1993년에 폐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이온 생산 기계들은 그 이후에 중국으로 (나중에는 북한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우리에게 유독했던 기계들을 중국이나 북한에 떠넘기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는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던 경험을 했으면서도 왜 제국주의적 행태를 답습하는 것일까? 식민지 시절에 경험한 제국주의가 내면화된 탓일까? 우리가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려면 우리가 그러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받고자 하는 대접 그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사회의 황금률이다. 점점 심해지는 기후변화, 방사능 오염, 미세먼지, 새로운 화학물질 등 보이지 않는 다양한 위험이 점점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사회에서도 이 황금률은 지켜져야 한다. 위험을 특정한 민족, 계급, 집단, 지역에 돌려놓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별개이고,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위험이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을수록 우리는 더 연대하고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황금률을 지켜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708211451291#csidx7b2f76b7009a05db511a332cfc5197a 이 글은 주간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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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이 다르다고[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피부색이 다르다고 일하다 다친 상처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이 다르다고 작은 휴대전화 화면 속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그리움이 묻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땀 흘려 일하고 난 뒤 느끼는 바람의 싱그러움을 모르지 않는다. 월급날이면 괜히 마음 한쪽 두둑해져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술이라도 한 잔 사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다. 만나보면 대부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일하려면 피부색이 다르면 아픔을 느끼지 못해야 한다. 지난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다 다칠 확률이 내국인보다 6배 높았다. 문진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의원이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산재보험에 가입된 내국인 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은 0.18%인 반면 외국인 노동자는 1.16%로 6배 높았다. 또한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2012년 0.59%에서 2016년 0.49%로 낮아졌지만 같은 기간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6.9%에서 7.4%로 오히려 증가했다.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일터가 안전해지고 있는데, 피부색이 다른 이주민들이 일하는 일터만 오히려 더 위험해지고, 더 쉽게 다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처리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일하다 다치고도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못한 경우까지 보태어 보면 사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올해 초 대구·경북지역에서 이주노동자 378명을 대상으로 산업재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 중 산재보험 신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 치료비를 부담한 경우가 37.9%, 회사에서 치료비를 지급받은 경우가 35%로 조사되었다. 산재보험으로 치료받은 경우는 27.1%로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다치더라도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올해 5월 한 달 동안에 양돈축사에서 분뇨를 치우던 이주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작업하던 양돈장 정화조는 악취뿐만 아니라 몸에 치명적인 황화수소나 암모니아 등 유해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기계가 하거나, 제대로 된 보호 장비가 지급되어야 했지만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월급도 제때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올 추석을 앞두고 고용노동부가 공식 확인한 외국인 노동자 임금체불액은 515억원을 넘었다. 2012년 240억원이던 임금체불액은 5년 만에 두 배를 넘었다.

    얼마 전 1960~1970년대 독일로 이주했던 한국 간호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전시를 관람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또 다른 분단국가 독일, 특히 분단의 도시인 베를린에서 낯선 한국여성으로 삶을 꾸려가고,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이주민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중 흥미로웠던 점은 그녀들이 당시 독일 사회에서 여성인권과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한국의 짙은 가부장제 그늘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기도 했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독일과 한국 모두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오고 있다.

    인권 선진국을 자임하는 한국의 모습은 이에 비하면 매우 부끄러운 수준이다. 고향을 떠나 먼 한국땅에서 마주한 열악한 노동환경, 장시간 저임금 노동, 높은 산재 발생률과 만성적인 임금체불은 이주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 뿐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들에게 차별과 고통이 아닌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삶의 경험을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10152101025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2017. 10. 15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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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살아진 나날들, 그리고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에 대하여




김의환*

 


    그 더웠던 여름이 사라질 듯 말듯 하는 걸 보니 계절엔 경계가 없는가 보다. 시월이 되면서 낮에는 반팔차림으로 남아있는 여름을 느끼고, 저녁에는 자켓을 껴입은 채 가을을 기다린다.


   1년간의 긴 칩거를 마치면서 대학원 복학을 결정하고,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한 것은 지난 7월이었다. 날이 너무 더우니 별일이 없어도 매일 아침 에어컨이 빵빵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취방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온통 땀으로 흥건해졌다. 도서관에 도착해 로비에서 얼굴을 손수건에 파묻고 젖은 몸을 말리다 보니, 20년 전 일이 불쑥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체육시간을 마치고 교실에 돌아왔더니 체육복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나를 본 담임선생님께서는, 내가 뚱뚱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뚱뚱한 사람은 땀이 많이 난다는 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몸이 소위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니까. ‘팩트'에 기반한 선생님의 말에 상처받아 풀 죽은 채 집에 왔고, 엄마에게 이 일을 말씀드렸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매사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해서 그래.” 어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열심히 하지도 않는, 무척 소심하고 민감한 아이라는 사실을, 평생 세상과 불화하며 살아갈 것을. 그런데 엄마의 그 말이 그때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각할수록 고맙다. 세상이 그토록 추구하는 진실이나 사실, 논리와 객관성, 과학적 근거, 법과 제도 따위를 떠나서,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져 나를 위로했다. 무엇보다 엄마가 나를 깊이 사랑한다고 느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라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사랑한다. 이 구절은 인간이 죄와 결함과 허물 투성이임을 전제한다. 이때 사랑으로 ‘덮어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니, 가능하기는 할까? 내겐 사랑이 없어서인지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허물을 보면 쉽게 지적하고 짜증내고 울분을 토하고 뜯어 고치려 한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무관심과 냉소, 환멸로 자신을 간신히 지켜낸다.


    올해 초에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남자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세 자녀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성장이나 극복, 힐링 내러티브로 나아가지 않는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누굴 탓 할 수도, 돌이킬 수도, 헤아릴 수도, 잊을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고통을 안은 채 그냥 살아간다. 회복이나 전환의 기미가 전혀 없으나 그냥 그렇게, 살아지니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나타나는, 고통 가득한 우리네 삶을 향한 건조한 태도와 낯선 시선, 차가운 정서는 역설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온통 뒤흔든다.


    나는 고통받는 인간에게 끌리고, 인간의 추락과 파멸, 실패에 매혹된다. 그 사람을 경유해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으로 가득하던 학창시절부터 어쩌다 서른이 된 지금까지, 삶은 항상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왜 자꾸 실패하고 낙심하는가’. ‘나는 왜 앓는가’. ‘내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딱히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그냥 안고 살아가야 했다. 한때는 타인의 도움 따위 없이 주체적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혼자 지내는 연습도 해보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고립과 자기소외, 단절은 피할 길이 없어 동굴에서 긴 밤낮을 보냈다.


    그러면서 혼자서는 절대 못 산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전히 사람 대하는 건 고단하고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같이 부대끼며 살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지난 여름날, 땀 흘리고 돌아다니며 누구라도 만나고 얘기를 나눠보려 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내 고통과 무관하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음을. 또한 주체적으로 힘껏 살아내는 시간보다는, 저절로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는 시간이 삶에서 어쩌면 훨씬 더 길 수도 있다는 것을.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들을 하나씩 헤아려 본다.


   내가 나를 포기했을 때, 나를 돕겠다던,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던 친한 형의 말.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 아들이라던 아버지의 편지 속 구절.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던 내게 아무 말 없이 매끼 밥상을 차려주시던 어머니. 

   이제 갓 돌을 지난 조카 진이의 옹알이와 걸음마와 표정, 젖내음. 

   매일 저녁 6-8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와 팝송들. 

   아주 이따금씩 읽는 성경 속 피 흘리는 예수. 고통받는 자들의 예수. 

   심연까지, 삶의 나락까지 추락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와 가사로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발견해 한없이 머뭇거리고 서성이게 하는 문장들. 

   이 가을, 해질 무렵 옥상에 올라가면 펼쳐지는, 순간의 황홀한 풍경. 

   시월의 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탈 때 스치는 싸늘한 바람. 

   교회에서 함께 목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들, 함께 나누는 밥. 

   불안하고 위태로운 청춘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과의 술자리, 그 때의 미묘한 표정과 잊을 수 말들. 


    지난 여름 내내 버스 창가에서, 도서관에서, 연구실에서, 방구석에서, 영화관에서, 공연장에서, 홍제천 산책로에서, 이 소중한 것들이 하나씩 불쑥 떠오를 때면 너무 고마워서, 다행이어서 주책없고 뜬금없이 울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짧은 계절에, 밤이 빠르게 찾아오고 한없이 차가워지고 참을 수 없이 쓸쓸해질 때, 속절없이 허비한 청춘을 헤아리다 밤길을 비틀대며 걸을 때, 나를 살린 것들과 저절로 살아진 날들을 생각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살아 있었을까 싶다. 누군가에 기대면서 간신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죽이는 말을 해오지 않았던가. 제발, 부디 그러지 말기를. 나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를, 같이 살기를.


    이인성 작가의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의 마지막 구절이자 나를 살려낸, 살아있게 한, 아니 살아지게 한 문장들을 남겨본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던 어느 순간? 이제, 그것은 지나간 매순간이었으며 다가올 매순간이다. 

이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일을 받아내겠다. 

...곧 개찰이 시작될 것이다."


*필자소개

청춘을 허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한량. 어두운 자취방의 혁명가. 문학과 영화, 음악과 라디오에 기대 하루하루 때우고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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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틈새
    2017.10.12 12: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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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하나의 구절, 삶의 이야기가 위로로 다가옵니다. 멘체스터 바이 더 씨. 저도 그렇게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덤덤해서... 조용한 힘이 되었더랬지요.
  2. 살아지는 것
    2017.10.15 17:4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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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개발을 강요받으며 살아오다 보니,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들고, 무언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들 (가정, 성격, 환경 등) 대부분은 내가 고른 것이 아닌 주어진 것인 만큼,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살아지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글 감사합니다.
  3. 소설
    2017.10.15 21: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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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어김없이 교회에서 맥락없는 설교를 듣고 돌아오니 낮부터 몸과 마음이 피곤해진다. 저녁은 또 뭘먹어야하나 고민하다 샌드위치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아내는 아기랑 식빵을 사겠다며 마트로 갔다.

    의자에 퍼질러 앉아있는데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자신이 쓴 글 하나 읽어 보라한다. 링크를 눌러 한두 문장 슬쩍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글하나 쓰는데 감정을 쏟아 담은 모양이다. 무미건조한 내 감정을 한껏 끌어올려 읽어야 장단이라도 맞추겠다 싶어 나중에 읽어보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아기를 재우고 찾아온 평온한 일요일 저녁이다.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궁상떠니 '감성 돋는다'는 말이 적절한 타이밍이 온다. 냉큼 글을 찾아 읽었다.

    글을 읽기 시작하며 이 글이 친구의 이야기란 사실을 잊고 글 속 주인공에 몰입해버렸다. 소설인줄 착각할 정도로 필자의 시각에 심취했고 공감을 했다.

    몰입은 오래가지 않았다. 베드로전서? 설교를 하려하나? 영화 소개도 해주네? 몰입이 깨진 후 필자는 내가 이전에 몇 차례 보았던 익숙한 문체로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풀어 담는다. 그런 글을 다 읽고 멋진 글을 본 기쁨과 함께 아쉬움도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가 그런 삶을 살았다는 건 잘 알고있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고있다. 그러나 하나의 글로 정리되어 있는것이 싫었다. 다양했던 삶의 모습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싫었다. 각각의 모습과 이야기를 날 것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블로그에 자신의 이야기를 맘 껏 써줬으면 좋겠다. 이 글을 볼때 그의 글은 작은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는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의 삶을 성경 구절 없이 읽고, 영화 주인공의 삶을 바라본 그의 생각을 감사편지 없이 말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그의 속 마음과 과거를 알 기회가 많이 없었다. 피곤한 밤이어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작은 이야기 하나 더 알게 된건 그냥 좋다. 그래서 오늘도 괜찮은 날이다.


고통을 대할 때 : 헤로인보다 미메시스




강선구*

 


    멕시코 국경지대인 티후아나에 사는 리카르도(가명)의 삶은 평범했다. 몇 년 전까지 그에게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으며, 직장을 다녔다. 하지만 현재 그는 2불짜리 헤로인에 중독되어 온 몸이 고름으로 덮여 있으며, 그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그를 매일 밤 잠들지 못하게 한다. 고름을 치료할 돈도 없고 직접 자신의 몸을 치료할 엄두를 못 낼 만큼 심각한 상황 앞에서, 그는 고통을 이겨낼 최선의 방법으로 또 다시 헤로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헤로인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구하는 방법은 구걸이었다. 리카르도가 거주하는 멕시코 국경지대인 티후아나는 미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남미 각국에서 모여든 이주민들이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었고,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이후 미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대기중인 이주민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마피아 조직들의 악랄한 움직임이다. 마피아 조직들은 거리로 내몰린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마약과 헤로인으로 달콤한 유혹을 건넨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처음 몇 달 동안 마약과 헤로인을 무료로 나눠주는데, 생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덫이다. 중독은 그렇게 시작된다. 마피아 조직은 그렇게 헤로인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마약 값의 지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으기 위해 구걸을 시작하게 되지만 결국 겉잡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면 마피아 조직들은 더 이상 가망 없는 채무자들을 장기매매나 성매매 등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이는 티후아나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국 캘리포니아 도시의 노숙인 밀집지역인 스키드로우(Skid Row)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멕시코의 경우는 도시경찰이 마피아들과 결탁했기에 더 심각한 상황이지만, 미국의 노숙인들 역시 소위 ‘거리환경미화’를 목적으로 자주 도시로부터 추방되곤 한다. 이러한 풍경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곳 가까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리카르도를 만난건 3주전 8월 뜨거운 여름 어느 날이었다. 그는 더 이상 걸을 수조차 없는, 고름으로 가득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 팀은 매달 한 번씩 티후아나의 같은 지역에 지난 몇 년간 의료와 배식, 미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의 선교사역을 하는 중이었다. 그의 행색은 무척 메말랐었다. 뜨거운 여름날씨라 더 그런지 피부도 메마르고 몸짓도 메말라있었다. 자기의 몸이 치료가 가능하겠냐고 물으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다. 우리 팀의 의료를 담당하시는 한 집사님은 고름이 덮인 끔찍한 몰골의 몸을 주저함 없이 만지시면서 일단 고름을 다 짜내보자고 제안하셨다. 그리고 둘의 사투는 시작되었다. 그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리카르도는 고통을 못 이겨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곧 통곡으로 바뀌었다. 1시간가량 그의 다리를 가득 채운 고름들을 짜내는 동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가브리엘라(가명)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배식팀에서 밥을 받아서 지나가던 중 그의 통곡을 듣고 왔다고 했다.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리카르도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그녀는 사랑스러운 두 아들과 함께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살인청부업자 일행이 옆집에 사는 남자들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는데, 자기 아들들을 옆집 남자들로 착각해 한꺼번에 두 아들 모두를 살해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경찰도 그 어떤 기관들도 가난한 그녀의 일을 돕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의 눈 앞에는 사랑스러웠던 두 아들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 아련함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에 그녀는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맞춰 준 헤로인에 취했었을 때, 그녀는 유일하게 그 고통을 잠시 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망각상태를 지속하기 위해 헤로인에 스스로 중독되는 삶을 이어갔다. 그녀는 헤로인 없이는 잠도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따금씩 기부받은 옷가지들을 팔거나 몸을 팔면서 헤로인을 구하고 있는 그녀는 헤로인에 중독되기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원망스럽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녀의 몸 역시 썩어가는 중이었고, 자식을 잃은 고통은 헤로인이 주는 찰나의 망각을 지나면서 더욱 깊숙이 그녀의 영혼에 새겨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통곡하며 고름을 짜내고있는 리카르도에게 말을 건넨다. 왜 우냐고. 그리고 그녀도 운다. 리카르도는 몸이 아파서도 울지만, 삶의 고통이 너무 버거워서 운다고 말한다.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고통 앞에 그와 그녀는 그저 운다.


   어쩌다보니 나는 미국에 2년째 거주중이다. 이 곳의 풍경은 한국과 많이 다른 듯 하면서도 닮아 있다. 이주민이 된다는 경험은 불안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터득하고 있는 시간들이다. 나는 외부인으로서 미국에 살고 있으면서, 가장 익숙한 곳이었던 한국에서도 외부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외부인이 되어갈수록, 정착인이 되고픈 나의 욕구도 강렬해진다. 하지만 외부의 어느 곳에서도 나의 정착을 확신할 수 없다 보니 내면적 주체에 대한 확고한 무언가를 기대하지만, 그마저도 한없이 불안하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불안이라는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이라는 속성은 존재에게 필연적인데 그 이유는 존재가 세상 가운데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안과 마주할 때, 존재는 본질적인 존재물음을 선택할 수도 있고, 비본질적인 존재물음을 택할 수도 있다. 비본질적인 존재물음은 존재불안의 본질에 직면하지않고, 세상의 기준들을 통해 해결을 도모하는 회피하는 태도이다. 과연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이 내 안의 불안을 극복하게 만들수 있을까. 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말하는 고통의 발생원인인 자기유지적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비동일시적 태도인 ‘미메시스’가 그 답이 될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자기유지적 태도는 동일성의 원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며, 이는 지배와 폭력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나와 다름을 개방하는 비동일시적 태도를 가지고, 외부의 고통을 내면화 해보는 태도를 미메시스적 태도라고 설명한다. 나의 불안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멕시코에서 만난 거대한 고통들의 실체 앞에서, 존재의 질문이나 미메시스적 태도가 과연 잠깐의 망각을 허락해주는 헤로인의 효능보다 삶에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짓눌린 자들에게 있어 고통을 해석하는 행위 그 자체는 삶의 다른 방향성을 가질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석의 출발은 실존적 개인에게 우선적으로 놓여 있다. 하지만 고통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바로 ‘홀로있음’ 때문이다. 물론 불안과 고통은 세상에 타자들과 함께 놓여 있는 상황이기에 발생한다는 하이데거의 지적에 동의하지만, 고통이라는 실존적 상황에 직면해서부터 오롯이 홀로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괴로움을 증폭시킨다. 홀로 해석해야 하고, 홀로 나아가야 한다. 이 때부터 고통은 개인의 고유한 일이 되며,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예수가 말한 복음인 ‘좋은 소식’은 나홀로의 고통이 아닌 ‘신과 함께 함’이 건네주는 치유의 소식이다. 고통은 함께할 때 치유의 가능성을 얻는다. 물론 그 함께함이 간섭이나 정죄의 형태로 흘러가면 더 끔찍한 고통이 된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고통에 함께 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새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얻는다. 그 방식은 전능함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자기의 틀 안으로 통제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아닌, 자기유지의 속성을 접어두고 자기와 다른 상대방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말하는 동일시를 극복하는 미메시스적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리카르도에게 말을 건네는 가브리엘라에게서 나는 미메시스를 느꼈다. 그녀는 본인의 고통을 통해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함부로 조언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자기 안에 가두지 않았고, 상대방에게 고백함으로써 상대방의 고통이 홀로 있지 않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고통에 참여한 것이다. 서로를 동일시(identify)하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를 대상화(reify)하지도 않는 관계가 고통에 대한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와 그녀의 사건적 만남은 ‘나홀로 고통’과 사투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함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치유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가능성은 나로 하여금 불안과 고통에 적응하려는 수동적 태도가 아닌, 불안과 고통을 입체적으로 해석하고자하는 추동적 태도로 나아가게 만들며 ‘함께 해석할’ 동역자들과의 만남을 희망하게 만들어주었다.


* 필자소개

현재 '목회적 삶'과 '목회자의 삶'의 경계에서 고민중에 있으며, 친구들에게는 네살 선구라 불리우고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수련생 과정을 밟고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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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하는 자의 책임[각주:1]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한백교회 교인)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가 화제가 되면서 독일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외신기자 중 가장 먼저 광주에 들어가서 취재 후 우여곡절 끝에 필름을 국외로 보냈고, 다시 목숨을 걸고 광주에 들어가서 계엄군이 물러간 평화로운 광주 시내의 모습을 담았다. 그가 남긴 영상은 광주 민주화운동이 폭도들에 의한 만행이고 광주 시내가 아비규환 상태여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는 계엄군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로 작용하였다. 군홧발에 언론이 짓밟혀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의 비극을 알 수 없었을 때,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려는 그의 용기 덕분에 우리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 독일인이 2차 대전 때 했던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도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다. 많은 언론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리영희 선생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들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이를 기록함으로써 언론인의 역사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 선생의 삶은 화려한 영광보다는 탄압과 투옥, 강제해직 등 온갖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지난 8월 초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보도된 기사는 언론인의 역사적 책임이 이제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언론사 간부들이 당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에게 보낸 청탁성 문자메시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신문사 운영이 어려우니 광고비 지원을 더 해달라는 부탁, 사외이사 한 자리 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 아들이 삼성전자 입사시험에 지원했는데 꼭 취업되게 해달라는 청탁, 삼성의 면세점 사업을 언론이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물어보는 문자 등이었다. 읽는 사람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비굴함과 몰염치였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으며, 삼성 같은 재벌이 언론을 얼마나 우습게 여길지 알 만했다. 이재용의 재판에 명백한 증거가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언론들이 왜 삼성 편에서 기사를 작성했는지 그 속내가 너무나 뻔히 들여다 보였다.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는 역사가 제법 길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극에 달했다. 이명박 정권의 측근이던 김재철씨가 MBC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시사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정권 옹호 방송이 증가했으며, 보복성 인사가 늘어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자들이 해고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더 강력한 언론 통제가 이어졌다. 청와대에서 언론의 보도방향과 기조에 대한 지침이 하달되었고, 세월호 참사처럼 정권에 불리한 내용들은 보도 통제가 이루어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에 대한 부당한 해고는 계속 이어졌으며, 언론의 비판적 기능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물론 언론 길들이기에 저항한 기자들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보도로 드러난 언론사 간부들의 행태는 지난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 사회가 자정 능력과 윤리가 실종된 천민자본주의 사회로 완전히 고착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언론인 후배들이 염치와 윤리를 모두 다 버리고 재벌과 정권이라는 권력 앞에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면서 리영희 선생은 어떻게 느끼실까? 힌츠페터 기자는 또 어떻게 느끼실까? 마침 두 분 모두 5·18 묘역에 가까이 누워 계신다. 역사를 기록하는 언론인의 책임감이 남달랐던 두 분의 염려와 한탄 소리가 여름날 천둥소리처럼 가까이서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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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708211451291#csidx7b2f76b7009a05db511a332cfc5197a 이 글은 주간경향에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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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 가브리엘 미션에 가면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

 



박여라*




    칠레 와인 회사 ‘산 페드로’는 1865년에 설립되었다. 그래서 생산하는 와인 라인 중 하나를 ‘1865’라 이름 지었다. 한국에서 아주 인기다. 2004년 발효된 칠레 FTA, 뒤이은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이 가져온 와인 담론도 큰 역할을 했지만, 마케팅 언어가 잘 들어맞았다. 18세에서 65세 누구나 즐기는 와인이다, 골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18홀 65타 치세요~ 선물하고, 세일할 때 마트에서 18천원인데 레스토랑에서는 65천원이라는 둥.


    레토릭으로 흥행(?)을 불러일으키기로는 최근 2천 년 동안 예수가 최고다. 복음서 수많은 이야기 속 예수의 언어는 시대, 나이, 지역, 인종, 문화, 성별 할 것 없이 수많은 차이를 끌어안는다. 여전히 내게는 예수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너희는 가지라 한 요한복음 15장이 화두다. 여기서 포도나무 이야기는, 그러니 너희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여름에 미국 캘리포니아 ‘천사장 성 가브리엘 미션’에서 1861년에 심었다는 포도나무를 만났다. 1860년대라면? 캘리포니아는 동부와 다른 양상이긴 했지만,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벌일 때부터 있던 나무라니!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렸고, 칠레 와인 회사 산 페드로가 설립된 때도 이즈음이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때이며,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살해되고 병인박해,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에도 이 나무에 와인 만들 포도가 열리고 있었다.


    엘에이 도심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샌 가브리엘에 있는 이 미션은 후니페로 세라 신부가 1771년 9월 8일 세웠다. 캘리포니아 21개 미션 중에서 4번째다. 남쪽으로 90km 거리에 있는 샌 후안 카피스트라노 미션과 함께 샌 가브리엘 미션은 대규모 포도경작을 했다. 한창때는 포도밭이 170 에이커(68만8천 제곱미터, 20만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50살 넘은 포도나무를 만나는 일이 소기 목적이긴 했는데, 가서 보니 샌 가브리엘 미션은 과거에 포도뿐 아니라 오렌지, 올리브 같은 과실과 곡식, 채소 재배와 돼지, 양, 소 같은 가축에 벽돌공장과 목공, 수공예, 비누와 초 공장까지 말하자면 꽤 커다란 산업단지 같았다. 실제로 여기서 생산된 것들이 생산이 어려운 인근 미션에 공급되었다고 한다. 교통요충지라 무역이 활발했다고 한다. (물론 일은 원주민들이 했고 고된 노동과 질병 등으로 죽은 원주민 6천 명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ㅠㅠ)


    하마터면 포도나무 고목을 못 만날 뻔했다. 왜냐하면 ‘나이 든 어머니 포도나무'라고 이름 붙은 이 나무는 미션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미션에서 길을 건너 마을회관 마당에 있다. 미션 안에도 제법 큰 포도나무가 하나 있어서 성당 바깥에 길게 난 회랑 위를 이 포도나무의 긴 가지들이 지붕처럼 덮고 있었다. 이 나무가 그 나무인가, 하고 떠나려다가 미션으로 가는 길에 보았던 허름한 대문 앞으로 갔다.


    ‘포도나무 공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대문이 아까는 닫혀 있었는데 다시 가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어머니 포도나무는 거기 있었다. 문헌을 뒤져보니 이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280평(930 제곱미터)을 덮었는데 여러 해 전 깔끔하게 다듬었다고 한다. 그래도 서른 명은 충분히 둘러앉을 수 있을 만한 커다란 공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그 아래에서 캘리포니아 여름 땡볕을 피할 수 있었다.


    수령이 한 80년 정도로 굵고 키 작은 포도나무가 줄지어 있는 포도밭은 가보았어도 이렇게 땅에서 몸을 비틀며 솟아 나오는 커다란 짐승 형상을 하고 있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목격하니 기분이 묘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가느다란 가지가 여러겹으로 촘촘하게 뒤엉켜있었다. 더 놀라운 건 포도 열매가 많이 달려있다는 거였다. 젊은 포도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이 든 어머니는 긴 세월 지나도록 꾸준히, 최선을 다해 열일하고 계셨다. 예수는 이런 사랑을 말한 걸까. 질문을 쥐고 있으면, 놓지 않고 계속 물으면 답을 만나는 날이 오겠지. 


    덧붙임. 와인보다는 포도나무 이야기지만, 꼭 1년만에 와인 글을 쓴다. 다시 시작한 여행이 기대된다.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썼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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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년.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벌써 일년. 남편은 8월 1일자로 회사에 복귀했다. 육아휴직이 끝났다.

       남편의 휴직 첫 날, 아이들을 함께 등원시키고 즐겁게 시작한지 채 한 시간도 안되어 부부가 대판 싸웠다. 다툰 이유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절대 서로 하루 종일 붙어있지 말자’는 결론을 내리고 화해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를 둘 키우는 동안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진짜 가족이 된 느낌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지만, 현명한 결론이었다.

        남편은 일년 동안 아이들과 해보고 싶은 일을 그때 그때 적어 내려가고, 나는 육아와 살림을 잠시 내려놓고 '엄마'가 아닌 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모두들 ‘다신 없을 일 년’이라며 알찬 계획을 물었지만, 타고난 부부의 성격상 조급해하지 않고 그때 그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지냈다. 아이들이 없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맛집을 찾아 다니기도 하고, 궁금했던 다른 동네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비수기 저렴한 숙박비와 마일리지 항공권을 이용해 아이들과 장거리 여행도 다녀왔다. 

      남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남편 육아휴직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6개월이었다. 나는 직장으로 돌아갔다. 물론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보수였고 계약직이었지만, 7년의 경력단절여성에게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일터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야근이 일상화 된 업종이라 일주일에 한두 번 겨우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도 있었다. 집에만 오면 쓰러져 자기에 바빴다. 가끔 얼굴 보는 아이들이 이제 나를 보며 "아빠!"라고 불렀다가 "아니, 엄마"라고 고쳐 부른다. 세 남자가 지내는 집안 꼴은 한숨이 나오지만, 나보다 용감하게 다섯, 일곱 살의 남아 둘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남편을 보니 고맙다.

       남편의 복직 후에도, 나의 계약기간은 4개월이 더 남았다. 직장에서도 계약을 더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친정엄마께 아이들을 맡기고 워킹맘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헌데, 남편의 복직과 함께 나는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남편 말처럼 내가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7년만에 돌아간 일터는 즐겁고 신나는 일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이 과중한 업무를 소화해내고 있었고, 남편이 직장으로 돌아간 빈자리까지 메울 자신이 없어 집으로 도망치기로, 아니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서로의 역할을 바꿔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 년이었다. 힘들게 밥벌이하는 남편에게 잔소리 덜 하는 아내가 될 자신이 생겼다. 꾸준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다시 일터로 돌아갈 자신도 생겼다. 아이들이 이 일 년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부부에게 있어서는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복직이 다가온 남편에게 물었다. 

        "어때? 다시 돌아가는 심정이? 아쉽지 않아?" 

        "글쎄, 그냥 후련해. 아이들이랑 해보고 싶은 거 거의 다 해봤어." 

        복직 후 며칠이 지나 남편에게 물었다. 

        "회사생활은 어때?" "어후, 죽을 맛이야." 

        속으로 이야기했다. '여보, 아직 우리에겐 둘째(를 위한 육아휴직이)가 남아 있어.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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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인도하게 하라


주안 워딩턴
(뉴질랜드 Ackland University of Technology Ph.D 신약학)

 


    1999년 말, 아니면 2000년 초 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방글라데시에 도착한지 만 3년이 지난 때였다. 우리가 살던 나환자 병원 관사는 깊은 시골마을에 위치해서 전기공급이 아주 불규칙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방글라데시의 언어 <방글라>를 배워야 했고, 이를 위해 낮이면 마을사람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저녁이면 초를 너댓개씩 켜놓고 책과 사전과 씨름을 했다. 그 결과 만 3년이 지난 후에는 어디서 누구와도 방글라로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릭샤>를 타고 집에서 제일 가까운 시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흔한 교통수단인 릭샤는 자전거를 개조해서 만든 것이로 앞부분은 자전거같이 핸들과 운전자가 앉는 곳이 있고 그 뒤에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조그만 의자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다. 두세사람의 무게가 실리는 의자 아래에는 두개의 바퀴가 있어서, 릭샤의 바퀴는 총 세개이다. 그러한 릭샤에 올라 앉은 나는 그날 따라 편안함을 느꼈다. 눈에 들어오는 넓은 논의 녹색도, 불어오는 바람도 내 기분을 고조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나는 즐거워서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느낌이었다. 굴러가는 릭샤를 바라보며 이 릭샤의 바퀴 세개가 릭샤를 안전하게 굴러가게 하듯, 한국어, 영어, 방글라 이 세 언어들이 내 삶속에서 균형을 잘 맞추고 있음을 느끼고 기뻐했다. 세발 달린 솥처럼 위, 촉, 오, 삼국이 있으면서 안정을 유지했다는 중국역사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바퀴가 세개라도 물론 제일 중요한 바퀴는 앞바퀴이다,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면서 나는 내 삶속에 균형있게 안착된 세 문화 중에서 앞바퀴 같은 것은 한국어로 상징되는 한국문화이지, 라고 단정지었다. 그 때였다. 이러한 단정을 바로 뒤집는 소리가 있었다: “아니,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여야 한다.”

   나는 이 말이 하느님 또는 성령님의 소리임을 알아챘다. 그 때까지 내가 들어온 ‘하느님의 음성”은 여러가지 특성이 있었다. 첫째 이 세상의 부드러운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둘째 위로와 격려를 주실 뿐 아니라 종종 나를 돌이켜 반성하게 하고, 또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어떤 이질적인 내용을 품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 하느님의 소리구나, 라고 단번에 알아차리게 하는, 부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적어도 내 경험에 있어서는 그랬다. “아니,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여야 한다” 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좀 멍해졌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 조금 후에 나는 물었다: “왜 영어여야 합니까? 내가 가장 오래 사용해오고 나에게 제일 편안한 이 한국어가, 한국적인 속성이, 내 삶을 인도해 온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왔다: “아니다, 다름이 앞서 가게 해야 한다.”


   그 경험 이후 나는 때로 때때로 그 말을 생각하게 된다. 몇사람들과 그 경험을 나눴지만 그들의 반응에는 별 감동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내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고, 내 안에서는 그 말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생기게 되었다.

    아, ‘다름’이란 얼마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혼란케 하고 외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가! 방글라데시에 오기 전에 이미 나는 남편의 나라인 뉴질랜드에서 8년정도를 살았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뉴질랜드의 삶속에서 나는 의식주의 차이뿐 아니라 ‘예의’에 대한 개념과 관습의 다름 때문에 몸고생 맘고생을 적지 않개 했다. 하지만 8년여간의 삶을 통해 외국에서의 삶이 어느정도 편안하게 느껴지고 자신감도 붙기 시작하던 때에 나는 다시 또 다른 외국을 향해 떠났던 것이다.

    나무를 이식하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이식한 후 한동안은 나무가 몸살을 겪는다.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내리고 죽어 가는 듯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나서 더 크게 자란다. 시들고 말라 죽지 않는 한… .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에서 어린 나무들을 옮겨심으면서 심겨진 나무가 시들어가는 것을 볼 때 나를 보는 듯 했다. 죽은 듯 하다가 다시 새 가지와 잎을 피워내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고 내게 용기를 줬다.

    제 3의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 8년간을 살아내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온 후에 나는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2006년도에 시작한 신학공부는 2016년도 말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나는 본격적으로 ‘다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다름이란 신학이나 성경해석의 내용뿐 아니라 진리추구의 방식과 표현, 더 나아가서 세계관의 다름이었고, 그에 대한 인식은 한 신학교수와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내가 공부하던 Laidlaw College의 Christchurch시 학장으로 계시던 Bob 교수님에게 나는 Hermeneutics (해석학), Soteriology (구원론),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 Theological Method (신학방법론)등을 배웠다. 나는 Bob 교수의 강의시간에 제일 많이 질문을 던지는 학생중 하나였다. 교수님이 소개하고 제시하는 내용과 다른 생각들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는데, 처음 부딪친 사건은 그가 우리들에게 부여한 과제와 관련되었다. 그 과제는 <해석학>과목의 에세이로서 주제는 ‘How to Read the Apocalyptic Literature’ (묵시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였다. 그 때 나는 ‘Christo-centric’ 즉 ‘그리스도 중심’을 성경전반 뿐 아니라 묵시문학을 읽어내는 주요한 ‘렌즈’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에세이를 마쳤다:


Jesus, who is the Beginning and the End, summarizes the message of the apocalyptic literature in three short sentences: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John 16:33).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예수는 묵시문학의 중심메시지를 다름과 같은 짧은 세 문장으로 요약하셨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환란을 당한다. 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큰 환란과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 가운데 발생한 묵시문학에 필수적인 주제는 ‘핍박’ ‘용기’ ‘마지막 승리에 대한 소망’이었고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 중에 그것이 분명히 표출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 에세이는 “It missed Christology,” 즉, 기독론이 결여되었다는 Bob교수의 비판이 적혀서 되돌아 왔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렌즈를 내가 적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것이 내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에서 보이지 않는가! 나는 교수님에게 내 에세이를 다시 한번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렸고 그분은 다시 읽으신 후에 자신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하셨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는 그에게 일정한 금액의 돈을 그의 통장에 보냈는데, 그는 통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그 답답함을 나는 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Presence and Absence 


He calls ‘presence’ ‘absence.’ 

I’ve given it; he says it hasn’t come to him. 

Did I not give or he did not get it? 


I see ‘presence’; he sees ‘absence.’ 

My ‘presence’ is his ‘absence,’ 

My ‘absence’ is his ‘presence.’ 


Yes, his ‘presence’ is my ‘absence.’ 

But I do not know of his ‘absence,’ 

For he is neither aware nor says of the absence. 


‘있음’과 ‘없음’ 


그는 ‘있음’을 ‘없음’이라 한다. 

나는 주었는데 그는 받지 않았단다. 

내가 주지 않은 것인가 그가 받지 않은 것인가. 


나는 ‘있음’을 보는데 그는 ‘없음’을 본다. 

나의 ‘있음’은 그의 ‘없음’이요. 

나의 ‘없음’은 그의 ‘있음’이다. 


그의 ‘있음’은 나의 ‘없음’이 맞다. 

단지 나는 그의 ‘없음’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없음’을 알지도 말하지도 않기에.


    끊임없이 서양의 신학과 해석학에 맞춰나가기를 강요받는 듯한 느낌, ‘부족함’이나 ‘없음’은 나 자신 뿐이고, 상대 (서양신학)는 자신의 ‘없음’을 알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특별히 <명시성>과 <암시성>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내가 제출한 에세이에 사실상 ‘Christo-centric’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단어를 몰라서도 아니요, 예수중심적 성경읽기를 반대해서도 아니었다. ‘그리스도 예수 중심’을 표현한 나의 표현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내게 익숙한 암시적인 표현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리라 생각한 것이 실수였고,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한 절대 읽어내지 못하는 서양학자들의 특성을 모른 것이 잘못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의 다른 생각과 방법론을 표현할 ‘언어’와 논리성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어느날인가Bob 교수와 도서관에서 만나 나의 입장을 이야기하려 하다가 내게서 예기치 않은 언어가 돌출되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하자 터져나온 <눈물>이라는 언어였다. Bob 교수앞에서 정말 싫었지만, 피하고 싶었지만, 내가 눈물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는 어색하고 어쩔 줄을 몰랐던 것 같다. 그 ‘사건’ 직후에 내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젠가 박사논문을 쓰게 된다면 Bob교수님이 내 수퍼바이저가 되면 좋겠다는. 스스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나와의 ‘다름’이 크고 분명한 분과 계속 함께 가야한다는, ‘다름’이 나를 인도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한켠에 있어서 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훗날 그는 내 논문의 수퍼바이저가 되었다.)

    신학공부가 계속되면서 내 언어를 찾는 노력도 계속되었다. 구차하다, 라는 느낌이 들어도 설명에 설명을 거듭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논리적’이어야만 했다. 나는 어떤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이해는 어떤 근거에서 인가, 그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 어떤 학파와 비슷하고 어떤 학파와 그 입장을 달리하는가, 등의 내용을 유명한 학자들의 주장을 앞세워서, “—한 관점에서 볼 때,” “그러므로,” “하지만,” “이와 아울러”등의 접속사를 사용해서, 비교하고, 대조하고, 비판하고, 제안하고, 주장하고, 또 제한적으로 결론짓는 방식을 익혀 나갔다. 그리고 과학적, 분석적, 명시적, 논리적 성격이 두드러진 서양의 사고및 표현방식에 대조되는, 시적, 통괄적, 암시적, 직관적 성격의 한국적/동양적 사고내용과 표현의 강점을 소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어도단’의 세계를 지향하고, 소중한 내용을 이야기 할 수록 말을 아끼는, 동양의 정신문화의 한 중요한 흐름을, 아이러니칼 하게도 수많은 말들을 사용하여 자세히 설명해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논리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논리 정연함’을 기대하게 되었다. 2013년에서 2015년까지 3년간 나와 남편은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서 남편이 병원장으로 있는 시골병원 컴파운드 안에서 살았다. 컴파운드 안에는 교회가 있었고 일요일이면 우리는 방글라데시 목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곤 했다. 설교시간에 나는 종종 목사님의 설교가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속으로 투덜댔다. 목사님의 설교가 어떤 한 주제로 시작하다가 너무나 많이 옆가지로 흘러서 나중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끝나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내가 쓰는 논문처럼, 설교가 화살을 쏘듯 한 방향을 향해 가서 결론을 맺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이웃들이 그러한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음을 보고 듣게 되면서 내 마음이 돌이켜졌다. 진리를 추구하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쏜 화살을 쫒아가듯 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보슬비가 내리듯 온 곳에 두루 펼쳐지는 방식도 있음을, 아울러 두 방식에는 다름이 있을 뿐, 우열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Bob교수는 내가 박사논문을 쓰는 4년 반동안 든든한 조언자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도 나도 서로 다름을 알지만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 감사하다. 서양인 남편의 다름때문에 내가 많이 변했다. 남편도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와 많이 변했다. 얼마전에 내 막내 아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에게 “설명해봐라”고 주문을 하였다. 그의 망설임 없는 응답은 “설명하지 않겠어. 내가 느끼는 것은 직관이야. 설명하면 그 가치가 엷어져” 였다. 그의 말에 나는 바로 마음을 돌이켰다. 그렇다, 그가 내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내가 들을 수 없는 그만의 어떤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름이 나를 인도하게 하는 일, 여전히 어렵다. 종종 잊고 산다. 그리고 내가 앞서간다. 내가 앞서면 ‘다름’은 잊혀지기가 쉽다. 하지만 내가 뒷서면 그 다름이 보인다. 그 다름때문에 내가 멈추게 되는 불편함이 있지만, 멈춤으로 인해 배우는 것이 많다. 또 하나의 이득은 그 다름은 ‘거울’과 같아서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여지는 나 자신 역시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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