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여전히 먼 이유 하나[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700만 촛불시민이 제기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사람이 먼저다”라고 답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 첫해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을 한갓 도구’로 취급해왔던 것들에 대한 청산이 진행되었다. 물론, 정권을 잃었음에도, 사회 구석구석 굉장히 많은 곳에서 적폐세력들이 제도권력을 쥐고 있기에 빠른 개혁의 속도에도 여전히 전체 사회는 사람을 위해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갈 길이 먼 것은 적폐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제도들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개혁 슬로건, 그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슬로건에 열렬히 환호했던 우리의 심상(心想)에 가장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갑질하는 특권층’ 대 ‘을로 전락해버린 시민/우리’라는 권력의 작동 방식일 것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슬로건이 지향하는 개혁의 중심적 함의겠다. 하여 갑-을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권리의 주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하나가 모호하게 취급되어 있다. ‘을’ 안에서 다시 ‘갑과 을’이 나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자기 자신이 ‘을’이 되어버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기가 또 다른 누구에게 ‘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를 말하는 데 급급하다 비시민으로 추락한 이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그리고 때로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이 ‘갑질’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이라는 문제 설정은 바로 여기에서 요청된다. ‘인권’의 문제는 누군가가 ‘우리’와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이 망각되는 순간 일어난다. 가령, 1980~1990년대 대표적인 민중가요이고 내가 속한 교회의 찬송가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를 목청 높여 부를 때, 그 자리에 함께 노래했던 여성들을 ‘그날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누락시키고 있음을 남자인 내가 떠올리지 않는 그 순간, 인권유린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타자란 이렇게 종종 우리의 심상에서 누락되곤 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릴 때 은연중에 사람에서 배제된 존재를 우리가 자각하지 않는 순간 개혁의 길은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종교성의 장소이자 글쟁이인 내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주된 서식처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이 종교만큼 누군가를 타자로 만드는 일이 잦은 곳은 별로 없다. 그 안에는 적폐의 원흉이라고 할 만한, 증오의 전문가들도 숱하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개신교 신자들은 특별한 증오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개신교 담론의 장치들에 세뇌되어 무심코 혐오주의적 언행들을 반복한다. 문제는, 증오의 전문가들은 개신교 대중을 그렇게 편견과 배제의 수행자로 만들어내는 주역이지만, 동시에 개신교 대중의 무성찰적 태도가 그런 증오의 사도들이 탄생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동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학교는 교수 한 사람에게 해임을 통보했고 학생 몇을 징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된 징계 사유는 ‘학교의 정체성에 위배된 행위’ 때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성애 반대’라는 기조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학교는 동성애 혐오주의를 추구하니, 학교에 속한 이는 누구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해도 안 되고 그것에 대해 알려 해도 안 된다. 그것이 헌법 11조, ‘누구든 성별이나 종교, 신분 등이 이유가 되는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위배되더라도, 이 학교의 구성원은 모두가 혐오를 정체성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수나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이 경우 그런 혐의로 혐오주의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의 이런 반헌법적인 문제적 ‘정체성’, 그런 원리주의적 권력의 폭력을 지지한다. 물론, 말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혐오주의적 집단폭력을 초래할 것이라고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혐오주의적 권력은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제도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 한다. 하여 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의 부속품이 되게 하려 한다. 그사이 ‘사람이 먼저인’ 개혁은, 그 길은 그만큼 더 멀어져버리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192040015&code=990100#csidx0d097d5f31be59da5bbe287ddf67a0a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 19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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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돌아갈 “처음”은 어디인가?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 다시 시작하는 꿈


    내가 속한 성공회의 교회 달력의 구성은 매우 예스럽다. 12월 25일 성탄절, 1월 1일 예수가 예수할례 받고 이름을 얻은 날, 1월 6일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난 공현절이다. 세상 달력으로도 1월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꿈을 꾸게 되지만, 교회의 전례 달력도 세상이 예수와 만났던 처음 순간의 기억 속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고 싶어 한다.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첫만남을 회복했던 순간, 말 그대로 비긴 어게인(begin again) 했던 순간을 계속 보여주면서, 우리를 그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취업을 결심하는 청년들까지 이 때는 모두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비긴 어게인의 결심을 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서화 "처음처럼"을 새삼 떠 올리며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하지만 다시 처음 순간에 선다는 것, 비긴 어게인 한다는 것,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처음을 기억조차 하기 힘든, 너무 먼 곳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처음을 잊어버린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그 처음으로 되돌아 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매년 성탄절이 오고 새해가 되면 습관처럼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지만, 비긴 어게인하기 위해 되돌아갈 출발점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이미 처음을 버리고 멀리 떠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욕심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매년 새롭게 하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돌아갈 첫 순간은 어디인가?


2. "처음"은 어디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우연한 순간에 신비롭고도 뜨거운 만남을 경험하는 그 첫 남은 어떤 것일까?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서툰 날갯짓을 시작하는 어린 새의 하늘과의 첫 만남,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새싹의 첫 만남은 또 어떤 것일까? 하늘과 땅이 처음 만나는 그 창조의 순간, 그리고 다시 만나는 그리스도 탄생의 거룩한 순간은 어떤 처음인가? 갈릴리 나자렛 사람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처음 만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 뜨거운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물신이 지배하는 세계, 편견과 적대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살면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첫 순간의 기억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초 곧 창조의 순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거리와 간격을 만든 순간이라 하였다. 레비나스와 함께 알랭 바디우 역시 사랑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다른 특질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차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경험하는 것이라 하였고, 그래서 사랑은 환원 불가능한 타자의 경험 혹은 타자성의 경험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처음부터 사랑의 바탕에 있는 것은 차이에 기초한 탈중심적인 세계와 삶을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조재룡 역, 『사랑예찬』, 길, 2010). 어쩌면 우리가 시작했던 그 처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의 첫 만남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너나 너가 예상할 수 있는 나의 발견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만들어 온 세계에 대한 확신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갈 세계의 가장 탁월한 조력자를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사랑의 첫 만남은 내게는 없는 당신의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나의 모자란 반쪽을 정확히 알게 되는 그런 순간도 아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서로 모자란 반쪽을 채워 완전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또한 사랑의 첫 만남은, 나와 너 밖에서, 나와 너를 완전히 잊어 버린 채 몰입할 수 있는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발견하는 일도 아니다. 둘의 영원한 차이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계와 삶의 경험 그것이 바로 태초 혹은 처음의 진실이다.


마틴 부버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창조는 하느님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피조물들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순간이 아니다. 하느님이 피조 세계와 거리두기를 한 순간이고, 스스로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인 우리를 모른다고 한 순간이다. 서로 모르는 상태로 만나기를 의도적으로 하신 사건이 바로 처음 순간이고, 창조의 순간이다.


처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에게 하늘은 이미 알고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무한 가능성의 신비 속에 있다. 그래서 처음은 서로 다름과 서로의 모름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신비와 창조력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르고 모르는 것이 만들어 내는 전혀 새로운 발견들 앞에서 전율하는 경험이다.


3. '차이'와 '모름'의 회복을 향하여


첫 사랑의 순간이 까마득한 태고의 전설이 되어 버린 사람들, 이미 서로를 다 알아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이상 모를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처럼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을 그 근본에서 의심하고 전복하는 일이다. 첫 사랑의 기억을 잊어 버린 우리는, 아니 첫 사랑의 뜨거움을 견디기 힘들게 된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수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쌓아 올린 나의 눈으로 남편이나 아내를 그리고 친구와 이웃을 재단하고 정의한다. 그러다가 자식을 낳거나, 직업을 갖거나, 어떤 신념이나 종교를 신봉하게 되면, 사랑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 일을 위한 동업자적 관계를 만들어 산다. 그리고는 그 동업자적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사랑이라 착각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처음을 잊어 버린 우리는 나와 당신이 둘이라는 사실, 나와 너가 서로 모른다는 사실, 나와 너가 어떤 인연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를 유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나와 너가 둘이라는 사실,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 들 사이의 결코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모르는 사람으로 재 발견하는 일 그것이 비긴 어게인의 출발점이다.


시몬 베유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느님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분명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그 말을 하면서 그리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어떤 것도 하느님과 닮지 안았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이 없다고 확신합니다.”(Waiting for God , New York: Harper & Row, 1973, p. 32.)


시몬 베유의 하느님은 있는 하느님이면서 없는 하느님이요, 아는 하느님이면서도 모르는 하느님이다.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 결코 갇힐 수 없는 분이며, 그렇다고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제삼의 원리나 존재를 허락하는 분도 아니다. 공통분모를 만들고, 동업자적 계약관계를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분이다. 아마도 이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곧 언제나 처음처럼 살아가는 신앙의 삶일 것이다.


진정으로 다시 시작하려면, 시몬 베유가 하느님을 향해서 고백했던 그 표현을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 서로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아는 그대에 관한 어떤 설명이나 정의도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대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처음으로 되 돌아갈 수 있고, 영화 제목처럼 비긴 어게인 할 수 있고, 둘의 모름과 차이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4. 다시 시작하는 평화의 길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보려는 이 꿈이 우리들의 가까운 인간 관계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는 분단의 땅 한 반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치적 꿈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사랑과 정치가 다르다 해도, 둘 다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위한 모험이며, 사람들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보는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단체계는 엄밀히 말하면 이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류 보편의 어떤 가치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편견관 증오심에 기초한 정체성의 정치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질서다. 오직 흡수와 통일만 있을 뿐, 서로의 차이는 물론이요, 서로의 모름도 인정하지 않는 체계다. 분단체계 극복을 위한 근본과제는 바로 이 폭력적인 정체성의 정치와 그것이 만들어낸 관계들을 극복하는 일이다. 이미 처음의 기억은 거의 없다. 유전자처럼 우리의 체내에 뿌리 내린 분단체계는 편견과 독선만을 허락할 뿐, 차이와 모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고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독선과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서로의 차이와 모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재를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서로의 차이와 모름에 기초한 정말로 창조적인 남북 대화를 향해 먼 길을 가야한다. 참으로 위태로운 줄다리기 끝에 대화의 숨구멍이 열렸다. 이 대화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세계와 삶을 시작하는 새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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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세습과 한국 사회의 적폐[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명성교회의 담임목사 부자세습 사태를 주류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함으로써 개신교계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교회세습의 문제는 이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로써 개신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더욱 냉담해졌다. 게다가 이것이 최근 부각된 특채비리 문제와 연결되어 이해됨으로써 ‘청산되어야 할 적폐세력’이라는 개신교회의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문제를 가장 열렬히 제기해온 개신교계 시민단체인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는 교회나 교회와 재산권이 연결된 연관단체를 아들이나 사위에게 세습하는 것을 ‘교회세습’이라는 용어로 규정하였다. 이런 관점은 명성교회 사태를 보는 개신교계 안팎의 시각이기도 하다.

   한데 명성교회 사태를 둘러싼 교회세습에 대한 논의들에는 서로 섞이기도 하지만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두 가지 시선이 뒤얽혀 있는 것 같다. 낡은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보는 시각과 최근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현상으로 나타난 특권의 혈통주의적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낡은 권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영역인 국가, 기업 그리고 개신교회에는 박정희, 정주영, 조용기로 대표되는 카리스마적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장을 위한 총동원 체계를 주도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자원을 자녀에게 세습하려 하였는데, 민주화의 물결은 이러한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권력세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수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작동하는 영역에선 끊임없이 낡은 권위주의적 세습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민주화와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는데, 이 시대는 카리스마적 리더의 도덕적 위상의 격하 현상을 동반했다. 카리스마가 사라진 무수한 삶의 현장에서는 시민사회적 제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장(fields)에서 사람들은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연줄맺기다. 한데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연줄은 직계로 축소된 혈통주의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로운 혈통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원의 혈통주의적 대물림을 위한 경쟁에서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특권적 행위자들이 제도를 활용하는 능력을 더 많이 발휘했다. 그래서 특권의 혈통주의적 대물림 현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삼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가 조사한 교회세습의 사례는 2017년 11월10일 현재 143건이다. 이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국 교회 숫자로 계산하면 0.2%에 불과하다. 물론 이 조사들에 포착되지 않는 세습교회나 교회 총수는 더 많겠지만 그 비율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교회세습은 담임목사의 권력이 압도적인 교회들에서나 가능했다. 요컨대 교회세습이라는 개념은 위의 두 가지 시선 중 첫 번째와 깊이 관련된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담임목사의 위상이 점점 격하되는 추세다. 해서 목사의 압도적인 권력을 전제로 하는 교회세습 현상은 향후 점점 줄어들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이 너무나 퇴행적이고 추잡해 보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화의 문제를 포착하는 데는 충분치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교회세습’이라는 용어보다 ‘교회의 권력세습’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교회세습은 세습의 행위자를 담임목사에 국한시킨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압도적인 권력을 장악한 일부 목사들에 한정된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목사든 특권적 신자든, 소수의 권력집단이 담임목사의 청빙을 결정한다. 이때 교회 대중은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 경우 신임 담임목사는 이들 특권집단에 의존하는 목회사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즉 교회는 특권집단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장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명성교회의 담임목사는 권력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기 전, 일반재정과 구별되는 800억원의 비자금을 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도 소수의 특권적 엘리트들은 사회 각 영역에서 작동되는 무수한, 불공정한 사적 네트워크를 교회를 매개로 하여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목사는 그러한 부조리한 연줄주의의 주요 행위자들의 ‘영적 세탁’을 담당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력세습 문제는 오늘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적폐의 핵심에 맞닿아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242115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1. 24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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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몸짓 '변방의 교회들'[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2015년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 조사결과는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2005년 인구센서스의 결과가 이번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무려 123만명 정도나 증가했고, 최대 종교였던 불교를 처음 앞질렀다. 

   문제는 사회적 신뢰도에선 개신교가 다른 두 종교보다 크게 밑돌았다는 데 있다. 불교와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각각 3배와 4배나 더 신뢰받는 종교였다. 그리고 이 수치는 2005년과 2015년에 별반 차이가 없다. 한데 시민사회가 불신하는 종교임에도 2015년에는 신자수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 이상한 현상의 비밀이 개신교의 적극적인 ‘신자마케팅’에 있다고 보았다. 2000년대 이후 개신교는 일종의 대상에 대한 ‘맞춤형 프로그램들’을 적극 개발했다. 연령별, 직업별 프로그램들뿐 아니라 비혼자, 1인 가족, 입시재수생 등 집단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05년 무렵처럼 과거청산의 기조가 강한 시대에는 그다지 효력이 높지 않았던 반면,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의 위기에 휩싸여 있던 2015년 무렵에는 그것들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활용한 주체는 단연 강남, 강동, 분당 등 중·상위계층이 많은 지역에서 급부상한 신흥 대형교회들이다. 이들 교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으면서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반면 새로운 신자마케팅 방법들을 활용할 만한 자원이 부족했던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들은 지속적인 역성장의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여 2000년대 이후 개신교회의 양극화는 한결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중·소형 교회뿐 아니라 대형교회에 대해서도 시민사회는 사라져야 할 적폐에 다름 아니라는 따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신뢰도 조사들에 따르면 이런 비판적 인식은 개신교의 자폐적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세금 내지 않는 목사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탈법과 편법을 마구 써대는 교회들, 편견과 배제를 부추기는 개신교도들의 언행들 등등이 그렇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서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일삼는 무례한 종교라는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교회들의 교세가 빠르게 팽창했다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성공’일 뿐이다.

    한편 가장 위기를 적나라하게 체감하는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소형교회’들이다. 그들 중 많은 교회들은 예배당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어느 곳이든 예배당다운 공간으로 치장하기도 쉽지 않다. 어떤 교회는 다른 이들과 공간을 ‘셰어’해야 하고, 또 다른 교회는 이중 기능의 공간(가령 교회이면서 어린이 공부방)으로 활용해야 한다. 목사가 스스로를 성스럽게 치장하기엔 교인들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 심지어 교회당 문을 열면 바로 시장통이고 위층엔 술집이 있고 옆집엔 식당이 있다. 종교적 성스러움을 과시할 만큼의 이웃과의 거리가 해체되어 버렸다.   

   이런 교회당과 목사의 현실에 부합하는 교회 전통이나 신학은 전무하다. ‘거리두기’를 기반으로 하면서 발전했던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해석들은 소형교회들의 현실과는 너무나 멀리 있다. 하여 오늘 소형교회들은 ‘변방으로 떠밀린 유민들’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변방의 교회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현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목사와 신자의 거리두기가 해체된 교회는 수평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예배 형식과 내용을 발전시켰다. 또 예배당을 종교적으로 변별된 공간이 아니라 삶과 뒤섞인 공간으로 채워갔다. 나아가 이웃들과 간격 없이 직면한 교회는 이웃과 ‘밥’을 나누고 ‘가치’를 나누는 생활의 동료로서 살아가려 한다.

   그런 교회들이 자신의 명칭을 ‘작은 교회’라고 불렀다. 이들 ‘작은 교회’는 자폐적 성공을 추구하고 큰 교회가 되려 하기보다는 작음 자체를 향유하고 이웃과 공공적 가치와 삶을 나누는 운동을 벌인다. 그런 신앙운동을 각각의 지역에서 벌이는 교회들이 매년 모여 박람회를 열었다. 5회째 되는 올해엔 그런 경험들을 전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나누고자 대회 명칭을 ‘작은 교회 한마당’이라고 바꾸었다. 여기엔 신학대학이나 교단 기구들로부터 어떠한 서포팅을 받지 못한 ‘작은 교회’들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재야단체들도 참여한다. 그리고 올해엔 작은 교회를 주제로 하는 신학자들의 책이 발간되었다.

   성장이 아닌, 이웃과 가치 있는 삶을 나누고자 하는 작은 교회들의 소박한 움직임이 이렇게 변방의 교회들로부터 꿈틀거리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개혁의 진정한 몸짓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10272102035 이 글은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17. 10. 27일자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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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총회정치의 민낯[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9월 하반기엔 개신교 각 교단의 정기총회가 열린다. 최상층부의 교회정치가 불꽃을 일으키는 계절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누가 총회 대의원으로 선정될지를 둘러싼 경합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총회장 등 교단을 대표하는 임원과 각 기관장 등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거의 전쟁에 가깝다. 총회 기간이 임박해지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금품이 살포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다. 또 계파 간의 정쟁과 합종연횡이 펼쳐진다. 한편 교단 산하 지역별 교회회의체(노회·지방·교구 등)나 사안별 기구들(위원회)에서 안건을 총회에 상정시키고, 그것에 대한 심의와 결의를 둘러싼 안건정치가 치열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예·결산 정치다. 물론 여기서도 공방의 강도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이번 각 교단의 총회들에선 교단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시민사회에 비칠까? 거의 20년 동안 사회적 신뢰도가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꼴찌를 면치 못해왔고 특히 온라인과 오프라인 영역에서 여론주도층의 불신이 점점 커져 급기야는 파국적 상황이 머지않았다는 재앙담론이 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심각한 불신의 벽을 넘을 작은 가능성이라도 제시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라고 하면서, ‘개혁’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있다시피 한 올해 개신교 교단들은 과연 시민사회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만한 쓸모 있는 개혁의 깃발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예상한 대로 이번 총회들에서 주목할 만한 논점은 동성애 문제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파의 하나인 예장통합은 가장 강력한 반동성애 조치들을 결의했다. 동성애자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는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그리고 대학 등 산하기관의 직원이 될 수 없으며, 신학대학 입학까지 금지하기로 했다.

   예장합신도 그 못지않은 강경안을 결의했는데, 동성애자는 물론이고 동성애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포함한 일체의 옹호행위를 한 이들을 면직과 출교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에서도 또다시 ‘동성애연구위원회’ 설립 안이 부결되었다. 연구해 보자는 안건조차 거절된 것이다. 이 주제를 둘러싼 공적 토론조차 일절 안된다는 얘기다. 그나마 이런 안건은 다른 교단들에선 상정조차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최근 대법원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 정국에서 드러난 것처럼 동성애자 문제는 보수주의 정치세력들에는 더 이상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양상이다.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있는 보수대연합을 극우주의 기조로 재구축하는 핵심 어젠다로 부상했다. 온건보수세력의 보수대연합 어젠다가 거의 무력한 상황에서, 극우주의적 어젠다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물으면 동성애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인권적 가치에 따라 관용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될 때는 극우주의적 혐오주의에 견인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막강한 자원을 소유한 개신교 목사들의 주류세력들이 동성애 혐오동맹으로 광범위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극적 관용조차 말할 수 없고 그것을 둘러싼 토론조차 불허되는, 거의 맹신적 합의가 그들을 일사불란하게 엮어내고 있고, 이것이 보수주의적 정치권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개신교계 일각에서 회자되는 음모론적 얘기가 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 관련 인사들이 교단정치에 관여하여 요직을 차지했는데, 그들이 바로 최근 동성애 이단론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국정원의 행보들을 보면 이런 음모론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든다. 

    아무튼 국정원이 개입했든 아니든 개신교 주류권 목사들의 동성애혐오론, 토론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저 맹신적 확신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 보수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던 2014년에도, 동성애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는 이들과 아니라고 보는 이들의 비율은 47.1% 대 23.1%였다. 심지어는 개신교 신자의 경우도 39.9% 대 29.6%로 크게 차이가 났다. 그런데 주류 개신교 목사들은 압도적으로 동성애혐오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의 생각을 담지 못하는 소수 의견이 개신교를 과잉대표하면서 극우적 보수대연합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미움과 공포를 퍼뜨리는 목사들, 다수의 반대 생각조차 경청하지 않으려 하는 목사들, 공존과 상호존중의 미덕을 포기하고 적대를 퍼뜨리는 그들이 과잉대표하는 교단의 총회, 그것을 시민사회, 아니 합리적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총회정치로 대변되는 개신교의 재앙은 이미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22204901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17. 9. 22일자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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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호
    2017.09.28 03: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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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에 대한 반대 논쟁이 지금, 이 상황(진보적-비수구적- 가치관이 활개하며, 그 대표격인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70%를 오가는 사점)에서 퍼져 나가는 이유를 정치적 극우주의자들의 설자리를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상호 결탁 하에 마련하기 때문이다"라고 읽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보수주의는 언감생심 기독교 근본주의자 축에도 낄 수 없는 21세기 한국 기독교 이단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믿으며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고 하지만 그 끝이 다른 이단. 그 끝에는 자신의 천박한 정치적 입장이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조선족 왜곡하는 영화들[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김주환 감독의 영화 <청년경찰>은 외출 중 우연히 범죄를 목격한 두 명의 젊은 경찰대생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최근 <택시운전사>의 스크린 독주 속에서도 누적관람객 300만명을 넘기는 알토란 같은 흥행을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번 영화 <청년경찰>은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 영화 중에서도 ‘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악의적인 혐오가 가장 짙게 그려진 영화다. 영화의 대부분은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일터이자, 수만명의 거주민이 생활하고 있는 대림동은 아무런 개연성 없이 범죄의 소굴로 묘사된다. ‘여권 없는 중국인이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는 곳’이라거나, ‘경찰도 손을 못 대는 곳’이라는 대사가 이어진다.

   여성을 납치하여 불법적으로 난자를 채취하는 인신매매 범죄조직원의 대부분은 어눌한 ‘옌볜 사투리’를 구사하는 조선족이다. 선과 악, 젊고 정의로운 영웅과 무자비한 악당의 대결에서 조선족 동포는 늘 악역으로 소비되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 최근 10년 사이 ‘조선족’을 폭력적인 범죄 집단으로 손쉽게 소비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점도 우려스러운 점이다. 영화 <황해>(2010)에서 조선족은 돈을 위해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적 존재로, 산발한 머리에 짐승뼈다귀를 메고 다니는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신세계>(2013)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로, <차이나타운>(2014)에서는 채무자들로부터 신체포기각서를 받고 장기매매를 하는 폭력조직으로 그려졌다. 최근에는 스크린을 넘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늘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폭압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이주했던 역사를 가진 동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오로지 폭력조직과 범죄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족의 범죄율이나 폭력범죄 발생률이 내국인에 비하여 높은 수준일까? 객관적인 연구자료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조사된다. 형사정책연구원에서 최근 발행한 <외국인 폭력범죄에 관한 연구(2017)>에 따르면 체류 외국인의 범죄율은 내국인의 절반수준에 불과했다. 외국인 범죄자가 가장 많이 증가했던 2011년에도 내국인의 범죄율이 외국인에 비해 2.5배 이상 높았다.

    문화적인 이유로 조선족이 칼이나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있는데,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본국에서는 치안의 부재와 방어 목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치안이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총·칼과 같은 무기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이 많았다. 법제도와 공권력의 신뢰도에 대한 인식조사에서도 조선족의 경우에 ‘한국의 폭력 관련 법지식’이 오히려 내국인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과거 조선족의 잔인한 강력범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의 흉악 범죄가 조선족 전체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외국인의 범죄가 내국인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주목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질적인 타자로 인식되고, 개별 피해자를 넘어 우리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인의 경우 낮은 범죄율을 보이면서도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조선족을 범죄자로 묘사하는 영화적 소비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은 부당한 차별을 만들고 사회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혐오범죄 등 또 다른 사회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근거 없는 혐오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편견을 지우고 바라보는 대림동 거리는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활기차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8201342011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2017. 8. 20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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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그 분파주의적 과거가 되살아나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500년전 유럽의 종교개혁 역사가 한국 교회의 현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애써 무시하고 싶어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지금 되짚어 보는 것이 한국 교회를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많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애써 무관심하려는 회의적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신학과 선교에 끼쳐 온 그 분파주의적 영향을 생각하면 그 기억을 다시 상기하는 것 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유산의 영향을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어떻게 그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할지 판단한 겨를도 없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현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깊이 우려했던 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교회 개혁 노력은 "이단심판"이라는 시대착오적 주제와 깊이 얽혀 들어가고 있다. 예장합동총회 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이단대책을 확실히 정착시키는 것이 개혁신학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며 나아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의미 있게 맞이하는 길이라 하고 있으며, 보수 기독교 신문들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교회개혁이고 교회개혁은 곧 이단대처를 통해서라는 인식을 계속 전파하고 있다.


    이단문제가 한국교계의 중요한 현안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이단 구별 지침 같은 것을 만드는데 열중했었고, 최근에는 동성애와 이슬람을 반드시 배제해야 할 대상에 포함시켰다. 예장 합동 총회가 금년 9월 총회 통과를 위해 내 놓은 헌법 개정안을 보면 이러한 분파적 배제의 원칙은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여성의 목사 안수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기존 헌법의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로 한다”라는 규정을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인 남자로 한다”로 변경하고 있으며, 목사의 직무 조항에 “본 교단 교리에 위반된 동성애자의 세례와 주례와 또 다른 직무를 거절할 수 있고 목사의 권위로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이단에 속한 자도 이에 준한다)”라는 규정을 삽입했다. 이 개정안을 내 놓은 헌법 개정위원회는 동성애의 확산과 여권신장 등의 사회적 변화에 맞서 자기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개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수정한 국가인권위의 헌법개정안이 통과될 경우를 대비해서 동성애 반대로 인한 고소고발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예장합동총회 이단 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다른 일곱 개 교단이 합세하여 성소수자들과 함께해온 기독교 장로회 섬돌 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를 이단 조사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이단심판 논쟁으로 점철되고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았겠지만, 이단 대처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 속에는 곳곳에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배여 있다. 아니 이미 내부로부터 변화하고 있고 바닥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과거로 되돌리겠다는 무모함이 가득하다. 변화를 새로운 도전이나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 계기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로 재 탄생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고, 그 기득권 상실의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며 공격이다. 자신 교단도 아닌 기독교 장로회 소속 임보라 목사를 향해 이단심문을 해 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런 전략이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내부를 결속 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내부의 문제를 외부를 향한 공격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교계를 이 프레임 속으로 몰아 넣기 위한 전략이다. 기독교 장로회를 포함한 이단논쟁의 프레임 밖에 있는 교회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이다. 그렇게 하면 그 프레임 밖에 있는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들 편으로 더욱 분명하게 뭉칠 것이라는 계산이다. 


    어쩌면 종교개혁이 이단논쟁과 만나는 이 모습은 결코 낯선 예상 밖의 일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종교개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 교파 교회들은 종교개혁에 자신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고, 자신들의 신학적 교리적 진정성과 정통성의 뿌리를 개혁가들에게서 찾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 국가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들도 대개는 이 종교개혁과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각 교파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려는 의지만큼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상적으로 그려졌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국가적 기원과 정체성을 이상적으로 그리려 하는 만큼 종교개혁의 역사 또한 그렇게 그려져 왔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 참혹한 분열과 갈등 그리고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생각하면, 종교개혁은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른스트 르낭은 “망각이 민족 창출의 근본 요소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종교개혁을 통해 갈라져 나온 교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르낭의 말은 종파주의적 대결과 분열의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일체감을 갖는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대결과 분열과 폭력과 전쟁의 과거를 해소하거나 극복하거나 화해하는 것이 아니고 “망각”이라 했을까? 물론 르낭은 다양한 종족, 언어, 문화 그리고 이해관계들이 모여 민족을 이루는 경우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다양한 집단 사이에 과거에 있었던 대결과 적대의 기억을 망각함으로써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역사를 생각해 보면 서로 대결하던 분파들이 공동의 적을 만나서 함께 뭉침으로써 과거의 갈등을 망각하고 하나의 민족 혹은 국민을 이루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종파주의적 대결이 때로는 폭력적 과정을 포함한 긴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론 날 때, 그것은 적을 악마화하고 배제해 온 편견이 일반화되어 의심 없이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짐으로써, 갈등의 해소와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체제가 되는 경우다. 그래서 과거의 갈등과 대결 자체를 자신들의 우월의식을 위한 기초로 삼을 뿐 더 이상 화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지 않는 경우다. 아마도 이것이 종교개혁 역사가 교파교회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작동했던 망각의 실상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교파 교회들이 종교개혁의 유산으로부터 물려 받은 정체성 안에는 이 망각의 영역이 숨어있다. 곧 타자를 향한 체계화된 편견의 영역이 있고, 해결되고 화해되고 해소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분파주의 정신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결과들은 분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그 중도적 혹은 대화적 해결의 길을 찾아서 이루어진 화해의 결과들이라 할 수 없다. 종교개혁 과정은 해결이나 화해가 가능한 중도적 과정이나 중간지대를 많이 허용하지 않는 과정이었고, 오히려 어느 한쪽을 무조건적으로 택함으로써 이루어진 과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성된 공동체의 일치는 그 자체가 이미 배제의 체계요, 편견의 체계요, 분파주의적 일치다. 참된 화해와 일치의 과정과 가능성은 제거되거나 망각된 체계로 보인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 공동체의 경계나 일치가 위협 받을 때는, 해결되지 못한 분파주의적 대결과 폭력적 배제의 태도가 발동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과 이단논쟁이 서로 얽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처럼 망각 상태에서 은둔해 있던 종교개혁의 분파주의적 과거가 되살아 나고 있는 모습일지 모른다.


    갈등과 대결에 대한 참다운 기억, 곧 화해의 책임을 품은 갈등과 대결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 망각은 튼튼하고 높은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편견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체계를 허락한다. 하지만 그 곳은 긴장과 갈등의 현장으로부터의 도피처요, 참다운 평화와 화해를 향한 길을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선교적 순례나 모험의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 울타리 안에 갇힌 공동체다.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경계선은 뚜렷해 보여도 경계를 넘어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공동체다.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단 논쟁에 몰두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처럼 보인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진정한 신학적 성찰과 반성은 이 망각의 영역을 파헤쳐 실상을 드러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갈등과 대결의 분파주의적 승자로서의 자부심이나 명확한 피아 식별의 기준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기 보다는, 갈등과 대결의 현장에서 참다운 화해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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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기 민주정부'가 성공한다면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딴지일보와 한겨레의 합작으로 김어준이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 1인씩을 골라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인터뷰 주자는 단병호 전노협 초대 위원장. 그 인터뷰 에서 김어준이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발모제를 바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고, 단 위원장의 대답은 발모제를 바른다면 자신은 아마도 더 이상 단병호가 아니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김어준이 남긴 코멘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은 그의 '계급'이고, '백성'은 그의 '노동자'며, '구세제민'은 그의 '노동해방'이다. 그를 깨운 건 인간에 대한 연민. 무인정권의 탄압과 자본의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 그 세력을 전국으로 규합하고 관에 맞선 '적두장군 단봉준'. 누군들 거저 사는 사람 있겠냐만 제 살을 깎아 남의 몫까지 대납하는 그 정도 삶 앞에선 주댕이 살짝 닥쳐 주는 게 예다.”

   이렇게 써 놓고, 그는 코멘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지난 17년간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노동계 야전사령관의 강철 화이바, 빨간 머리띠가 풀리는 날, 축배 대신 발모제를 도포해 주리라. 내 몫의 부채는 그렇게 변제하련다. 꾸벅.”

   이 인터뷰가 나간 후, 감동먹었다는 댓글이 대부분인 가운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존경한다니까 권영길(필자주-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3.9%를 얻었고 이 당시는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대표로 재임 중이었음)이 다시 보이는군요.”


   2.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한 구절이 나온다.

   “왜 우리는 노무현을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아이를 불러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 투자로 생계를 이어간다.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 만 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살기 위해서는 삶이 분열되어야 한다. 이 분열의 빈틈에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 엉킨 채 우리는 살아간다.

   노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러한 분열적인 삶을 보여 주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던 날 노무현은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하고 읆조렸다고 한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통치자의 자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 집권 중에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는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났다.”

   앞의 두 텍스트가 보여주는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을 수도 있다. 이 텍스트들이 대상이 되는 두 사람과 각각에 얽힌 일들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 텍스트들의 밑에 깔린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등등.

   그렇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간에, 이 텍스트들에서 이러한 느낌은 충분히 추출해 낼 수 있을 듯 하다. 단병호는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동일시’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노무현은 ‘동일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그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을 자임하는 이들의 삶과 관련이 크다고 말이다. 여기에, 설령 ‘존경’은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존경’을 하기에, ‘발모제’같은 ‘세련’을 덧붙이고자 한다는 것까지도 짚을 만 하겠다.



   3. 

   대선 기간 막바지에 문재인 후보의 인권변호사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미담’들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런 트윗이 나왔다.

   “경고한다. 정의당&노동당은 문재인 대통령님 앞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논하지 말라. 니네들 입으로 싸울 때 우리 문재인 대통령님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오신 분이시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극단적’이긴 해도, 분명한 것이 이 케이스가 ‘극소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극소수’였다고 하더라도, ‘극단’이 이렇게 나온다면, ‘주류’도 저런 식으로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속칭 ‘깜’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지 마라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문재인’과 같은 (유능한) ‘인권변호사’, 즉 지원자의 자리가, 당사자를 대변하려 하는(그렇지만 힘이 약한) ‘정의당/노동당’보다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공유할 것이라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성 싶다. 물론 저런 언설과 이런 생각에서 노동자들의 자리는 ‘노동 문제’라는, ‘객체’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고.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단 41%에 달하는 그의 대선 때 지지자들만은 아닌 듯한 요즘인데, 그렇다면 그 때 ‘성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지원자’의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권익을 향상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그 권익 향상과 제도 개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 상황이나 외교 관계의 호전 등도 물론이고. 그런 결과를 통해서 지지를 유지하고 재집권을 이루어낼 때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까. 조금 덧붙인다면,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의 친구’가 15년 전에 집권했을 때도 하고 싶었을 터일 테고.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그의 친구’의 완벽한 복권일 것이란 기대도 있을 것이다. 그의 추모식에서 그를 ‘앞서서 간 임’으로 모시며 ‘산 자여 따르라’고 노래 불러도 정당할 그런 완벽한 복권. 그렇다면, 그런 ‘성공’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되는 것일까.


4. 

   한국 사회 비정규노동 영역의 대표적 이슈 중 하나인 KTX 해고승무원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이런 반응들이 꽤 있다. 정규직 자리를 공정한 경쟁으로 따내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우기는 ‘샛길’을 뚫어서 차지하려는 욕심이라는 것.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행보로 주목받았던 것이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그리고 일부 대기업들이 이에 호응해서 정규직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정규직화’는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 재임 내내 이어질 것 같고.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도, 적어도 고용불안이라는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성과와 진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무기계약직’과 ‘자회사의 정규직’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가 본격화되면 어쩌면 이 ‘구분 기준’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도 본격화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차별 철폐가 아니라 차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에서 바로 앞에 언급했던 KTX 해고승무원 관련 상황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에 따른 결과’라는, ‘합리적 차별’의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사실 KTX 해고승무원 케이스에 드러난 저런 시선은 저 사건이 처음 벌어진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한국사회에 일반화된 시선이기도 하다. 당장 얼마 전의 ‘교육공무직법’ 관련 사태가 딱 이런 경우이기도 했다. 능력이 있어서 공무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이라는 시선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보여 준 사람들의 상당수가 아마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의 지지자들. 특히나 그 정부에 강한 동일시를 보이는 그 지지자들이 꿈꾸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레토릭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기도 하겠고 말이다.


5.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는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이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다. 같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주익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죽어서 내려오고, 이명박 정부 시절의 김진숙은 ‘희망버스’와 함께 살아서 내려왔음을 생각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만들려는 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합리적인 차별’이고, 그것에 ‘능력’을 갖거나 선망하는 ‘보통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사회적 연대’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보다는 같은 ‘민주정부’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과 가깝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기우일 뿐일까. 대통령 선거 당시, 그 때는 후보였던 지금 대통령 본인의 문제발언도 있었고, 지금 당장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군인들이 색출되어 처벌을 받으면서도,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의 비난이 오히려 벌어지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의 상황은, 아마도 그것이 ‘기우’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실마리일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잘못할 때’의 ‘비판’이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적어도 그 때 ‘비판’에 깔린 뉘앙스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비판’한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필요한 마인드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때, 그 ‘성공’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합리적인 차별’과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접’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라면, 그 바램을 제대로 비판해 내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보통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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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다운 나라,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정치를 위해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뉴스 보는 재미가 있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진들과 커피를 들고 산책하거나 청와대 직원들과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유쾌한 김정숙 여사가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평범한 것들인데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기간제 교사 김초원 선생과 이지원 선생의 순직을 인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발표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두 분의 순직을 인정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다하려 한다"는 말에, 지난 10년 아니 지난 반세기 이상 짓밟히고 억눌려 온 사람의 마음 그 당연한 상식과 도리가 마침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처럼 감격하는 사람들의 마음, 기대와 희망에 부푼 심정들이 다시 절망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또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답답함을 견뎌야 할지라도, 바른 길로 꾸준히 걸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아직은 허니문 기간이라, 기득권의 저항이 수면아래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조급하고 노골적입니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고 이틀도 지나지 않아 사면 이야기를 꺼내 들었던 보수 언론의 뻔뻔함은 이번에도 단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수사, 국정농단 사건과 정윤회 사건에 대한 재수사까지는 그래도 말을 아끼지만, 역사교과서 폐지나 싸드 배치에 대한 재검토 정도에 오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옵니다.


    적폐 청산은 좌파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배타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고, 우파를 괴멸시키기 위한 전략이라 할 것입니다. 류근일 같은 사람은 적폐청산은 곧 운동권 본색을 너무 조급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국정농단 사태를 방조해온 검찰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임사를하면서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 가려지거나 정의가 외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왔다고 강변합니다. 오히려 새 정권을 향해서 나만 정의롭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충고까지 하면서, 수사의 미덕은 절제라고 가르칩니다. 적폐청산은 새 정권과 그 정권의 배후에 있는 운동권의 전략이며, 반미친중적이고 종북적인 본색을 드러났다고 대 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은 속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광화문 촛불 민심은, 종북적 운동권의 선동에 놀아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의 광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폐청산이 아니라 통합을, 통합을 위해서 박근혜도 사면하고 기득권도 인정하라 할 것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이 기득권의 저항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냉철하게 주시하면서, 길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한 해 겨울을 거리에서 촛불로 지샌 민심이 뽑고 세운 대통령과 정부로서, 당연히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와 대통령은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난 9년간 아니 그 보다 훨씬 오랜 동안, 시민을 모욕하고 협박해 온 권력, 시민들과 유권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결정하고 밀어붙이고 억압하고 강요해 온 권력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중의 개 돼지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과 생명이 물건이 되고 숫자가 되는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외침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오직 권력만을 지킬 뿐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대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와 경제가 만들어 내는 세계 속에서, 여기 인간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요 외침인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도 우리가 보았던 것은 사람과 생명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측 불허의 충동적인 인물 트럼프에게서도,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김정은에게서도, 그리고 그 둘이 벌이고 있는 위험한 게임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우리를 볼모로 잡고 희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과 국가가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와 수용절차를 무시한 채, 고고도비사일방어체계 싸드를 배치하는 동맹국 미국은 물론이요, 동맹국의 요구라 해서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배치를 서두르는 대한민국 정부, 그들에게 과연 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싸드 배치와 관련해서 보복조치를 감행하고 있는 중국, 또 그 기회를 군사적 무장의 기회로 삼고 있는 일본에 둘러 싸인 채, 이 나라의 국민들은 '정말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줄 나라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새 정부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촛불을 계승하는 시민주권의 광화문 시대는, 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여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확신에 찬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새 정부와 대통령이 국정철학과 방향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도 염려가 되어서 몇 가지 생각을 더 말해 봅니다. 먼저 신영복 선생의 도로와 길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도는 도로의 논리가 아니라 길의 마음입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동행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매일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도로와 길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해서 어느 한쪽은 반드시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길의 마음을 잃어버린 도로를 경계함이요, 사람을 버리고 가는 효율과 속도의 논리 곧 자본의 논리가 가진 위험을 경고함이며, 사람의 관계가 야수적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과 생명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되살려 내야 한다는 참으로 따뜻한 가르침이며, 사람 사이에 서로 주고받고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영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대통령과 정부의 마음 또한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에도 길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에 나오는 제자 도마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길에 대한 논쟁도 신영복 선생의 길과 도로에 대한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때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요한 복음 14장 27절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두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권력 유지를 위해서 사람과 생명을 희생시키는 평화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참 평화의 길일 것입니다. 핵은 핵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상호간에 미움과 증오의 팽팽한 대결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는 자만이 애국자라고 외치는 평화의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사람과 생명을 희생해서 지키려는 권력의 평화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의 길에 굳건히 서기를 바랍니다. 열강들의 이익이 각축하는 이 한반도에서 이와 같은 참 평화의 길을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 속에는, 분명히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리는 정치, 사람다운 삶을 향한 소망을 열어주는 정치,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통일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정권이나 권력에게 맡겨 놓고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50년간을 생각해 보면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언제나 권력은 민중을 배신해 왔습니다. 결국 촛불의 소망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와 감시와 견제는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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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묻는다, 


5월 9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리스도인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5월 9일이 다가오고 있다. 헌법 최초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촛불을 들었건 들지 않았건 모두가 ‘내가 바라는 다음 세상’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나의 소중한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선거란 어떤 것일까? 분명 예년의 투표보다 그 무게가 남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짧은 선거 기간만큼이나 응축된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다. 필자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삶의 신념과 정체성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라 고백하는 1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필자보다 더 오래되고 노련한 정치 의식-행동과 삶의 경륜에 의해 다져진 선택 방법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아직 한참 모자라고 설익은 한 마디를 내놓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먼저는 이 질문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정한 선거의 방법 또는 선거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과연 누구이기에 선거를 하는 태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우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럼 예수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의 주인, 통치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처럼 선거를 하면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 생각해보자.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있었던가?


.

2017, 예수의 선택?


   그렇다.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통치에 관한 한 황제 1인이 다스리는 군주제도였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가 있었다. 너무 난감하다. 예수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투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예수와 우리 사이에 있는 2천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한반도라는 공간 이 두 가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한 가지 렌즈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의 역사적 체험을 전제로 하지만, 유럽의 역사 과정 속에서 탄생한 종교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제도와 해석 체계는 유럽의 경험에 기반을 둔 예수 신앙의 산물이다. 즉,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유럽의 문화로 재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재구성되어온 역사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이 다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이미 수많은 텍스트론들이 말하고 있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구성은 ‘읽는 이’의 바람과 삶의 경험들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다는 것이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 것 자체가 물음표로 던진 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팔레스티나에 살고 죽었던 하나의 예수’의 구성은 불가능함이 천명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5월 9일에 투표한다면 0번에 찍을 것이다.’라고 점찍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선거와 투표,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셔서 투표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는 것이다. 곁가지로 생각해 보자. 우리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것의 함의, 곧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 틀거리. 이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 즉 백성(民) 또는 시민이 주인이라 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신과 결별하고 ‘생각하는 인간(데카르트)’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주체라고 이미 천명된 근대 이후의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정말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듯이 예수와 선거를 연결짓는 일은 너무 깊은 작업이라 포기해야만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불가능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나 뿐인가. 비단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


    자, 이제 길었던 서문은 제쳐 두고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행적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야겠다.

    예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삶이 보여주는 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2016)에 진행된 본 연구소 신학아카데미 탈/향 강좌에서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실장)의 ‘예루살렘에서의 7일’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록 하자.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마지널 휴먼)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도살당한다.[각주:1]


    메시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물러나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피안의 세계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도래하여 통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나라 는 죽음 이후인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내면의 안정, 안심을 얻는 ’힐링캠프’는 더더욱 아니다. 메시아란 철저히 현실 내의 정치적인 존재였다. 예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이라 함은 곧 생활 즉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들은 예수를 봄으로써 현실(the Real)을 읽고, 예수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이 화해한 ‘하나의 장소(One Place)’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의 현실은 어디인가? 그리스도라는 공간이다. 그리스도라는 공간 안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삶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는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며 살았다/죽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사람인 동시에 아버지인 신을 도살하는 주체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이 지루한 일상의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전부터 약속된 바로 그 ‘야훼의 날’이 오늘 여기에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모든 죄와 아픔을 치료하는 실천적 존재였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像)을 파탄내는 무뢰배였다. 방금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7일’간의 행적은 모든 메시아로서의 삶을 축약하고 종합하고 결론짓는 일이었다. 즉,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의 삶 전체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지금 그 자리에서’ 고치고 사회 속에서 ‘죄’라고 여겨졌던 고정된 편견과 맞서서 싸워 논쟁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는 삶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49~53)


    제도정치를 주관하여 이 지루하고 억압된 일상을 마비시킴으로 유지시키고 유지시킴으로 마비시키는 제도의 권력들과 싸웠다. 제도의 권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생각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질문으로 일깨우고, 사회적 시선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탄생부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는 순간과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까지 모두 그 한 걸음 걸음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일깨우는 정치적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연극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했지만,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의 곳곳을 치료하며 불의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불을 던지는 사람들로 변화해 갔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특정한 신의 특정한 뜻,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하나님의 통치란 다름 아닌 사람이 어느 하나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꽃까지 모두 일일이 살리고 돌보시는 그 원리에 의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민의(民意)의 화육(化肉),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있음/없음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 떠받드는 - 동시에 떠받들지 않는 - 민심의 지엄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심의 부끄러운 민낯 또한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기도 하다. 훈련되지 않고 오로지 짐승 같은 대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의 몸으로 똑똑히 대면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불을 던져 놓고 그 불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대는 불길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후일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들도 상상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와 예수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와 민주주의는 사실 애당초에 불가능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떤 투표를 해야하는지 어렴풋하게 실마리를 잡아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2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 1조 1항의 말은 언설(言說)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국가이다. 민주 공화국이란 뜻은 사전 뜻풀이를 가져 오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여 ‘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개별 개체로서 ‘내’가 주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합체로서의 민의’이다. 즉, 공동의 의사 결정이 반영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럼 위에서 말한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 체제는 예수가 꿈꾸었던 정치,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제와 모습을 갖추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그 체제의 정답을 어디에도 계시한 적이 없다. 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못마땅해 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사 시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시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하나님과 소위 ‘독대’하여 하나님과의 채널이 단일했던 모세-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광야와 초기 가나안 시절의 ‘임시정부’형 체제가 하나님의 통치에 더 가까웠을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 시대? 에덴동산…? 대체 우리는 그럼 얼마의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아니면 소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 교회가 많아져서 ‘복음화율’이 높아진다면, 즉 교회에 등록한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지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가장 ‘직접’ 반영하는 정치체제야말로 환상에 가까우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체제는 현재 잠정적으로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이것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에겐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다른 한편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도 지니고 있기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있다.[각주:2] 오늘날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 즉 하나님께서 특정 매개자를 통해 통치하시는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속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주의가 희년 정신 즉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정치 체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것은 곧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 곧 누가복음 4장 16, 17절의 말씀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정신을 구현한 체제일 것이라 고백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170509 대선의 의미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비단 정치체제의 조형(造形)만이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치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금번 국정농단 사태, 소위 박근혜-최순실의 비(반)민주적 통치의 상태가 드러낸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은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각주:3] 특히 박근혜-최순실은 삼성의 이재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각주:4]



    즉,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 특히 이번 선거와 이어지는 정치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제도)의 개혁, 경제의 민주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면서 통일과 외교에서의 주도권 장악, 점증하는 생태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시급하고도 안전한 대책 등이 이번 선거를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결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체제”의 심판과 그 사태의 종결로서 인지 되어선 안 된다. 이제 대한민국,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야 그 기초를 쌓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내는 투표란?


    예수, 나, 민주주의, 그리고 2017 대통령선거라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번 대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단은 선거를 해야 한다. 아무나 되겠지 하면 정말 ‘아무나’ 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지도자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옛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자. 마키아벨리를 통치기밀의 폭로를 통한 반-폭정주의 및 공화주의의 실천자로 인식했던 바로크시대 보깔리니는 법정에 선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검사는 마키아벨리가 한밤중 양떼 속에 숨어들어가 ‘개의 이빨로 만든 의치’를 끼우려다 발각되었으며, 그런 행위는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목자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며, 이후 양떼는 목자들의 ‘휘파람과 지팡이’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밧줄로 둘러친 울타리’로는 더 이상 양떼를 관리할 수 없게 될 것인바, 바로 그때 ‘양털과 치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의 이빨로 만들어진 의치는 양을 개처럼 물어뜯을 수 있게 하는 힘, 목자들의 호명과 지시를 거절하는 힘, 목자들이 매번 재설정하는 목양의 울타리와 영양배분의 경계를, 목자들이 정립한 법의 경계를 무화하는 힘이다. 개의 그 이빨, 그 힘은 검사에 의해 ‘극히 위해한 성격의 안경’으로 기소되는데, 그 안경은 그들 목자들의 법 연관이 양털과 치즈 가격의 관리를 통한 축적의 보호상태임을 문제시하는 시력을, 그런 축적의 보호가 ‘신성의 가장’과 ‘국가이성이라는 폭정의 비밀’에 의해 관철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시력/시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각주:5]



    투표는 가장 작지만 확실하게 당신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하다. 15명의 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했다. 누구를 찍든 찍는 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선거는’시작’에 불과하다. 근본부터 시작하는 선거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내가 운명처럼 태어나게 된 이 곳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뜻’이 있다고 믿는 이 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현실’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 단번의 투표에 이룰 수 없다.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찍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세계가 당신이 점찍어둔 사람을 찍을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 후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 비록 당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그 때부터 그를 사정없이 움직여야 한다. 정당 가입과 활동으로, 시위와 집회에 참가함으로, 전화로, SNS로 말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당신’의 시작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6 신학 탈/향 강좌 <예수, 트랜스-크리스천 히스토리를 위하여>(강사 : 김진호)의 1강 ‘역사의 출발, 십자가에 달린 그 이’ 중 한 단락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2017 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 지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 (2017, 동연) 11쪽 인용 [본문으로]
  3.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두 인물이 있지만, 사실 그들과 그들이 가지고 논 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층위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비호하고 키운 정치 기관들 -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헌법재판소 등 - 과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그리고 군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입(Speaker)’ 역할을 한 그들의 입장을 매일 매순간 퍼나르고 재생산해낸 언론권력(조중동 등의 일간지, 공영방송과 종편방송 및 포털사이트)이 있을 것이다. 비단 그것 뿐인가.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소위 각계각층의 지식팔이 ‘전문가 집단’과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주관하는 종교권력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들을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직접 책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금씩의 힘을 보태어 만든 사태가 결국 여기-지금 오늘의 생명-삶을 갉아 먹는 체제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사회학자 윤인로는 박근혜 정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권력들을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간접권력’이란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 보호능력 없는 채로 복종을 요구하고, 정치의 위험을 몸소 받지 않고서 명령권을 가지며, 책임을 다른 기관에 강요하면서 그 기관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간접권력’ (칼 슈미트,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교육과학사). 여기의 간접권력이란 무엇인가. 체계적인 무책임의 통치상태, 곧 기술적(객관적, 기계적, 외적)으로 된 통치체의 중성화(다원화, 분권화, 합리화) 상태, 공모한 사적 당파성들의 ‘영원한 수다’ 상태.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90쪽) [본문으로]
  4. 가장 왼쪽은 실제 타임지(아시아판, 2012. 12. 17) 표지, 그리고 이후 2장의 사진은 패러디물이다. 각각 왼쪽부터 ‘독재자의 딸(박근혜)’, ‘독재자의 딸의 무당(최순실)’, ‘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이재용)’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139쪽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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