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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우리’는 민중신학에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요(황용연)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11. 2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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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중신학에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 박사과정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이상철 목사님과 김진호 목사님.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를 내기 위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책이 그냥 청탁된 원고들의 모음이 아니라 근 1년간의 연속 심포지엄의 결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수고가 더더욱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수고하신 책을 그 책 중에 언급되는 “민중신학 제3세대”의 일원이라고 자임하는 입장에서 읽다 보니까 뿌듯함과 아울러 뭔가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게 있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려 볼까 합니다. 필자의 일원이라면 이런 글을 쓰기보다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 도리일 터이긴 하겠습니다만…


1.

이 글을 두 분 목사님께 쓰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는 두 분이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좀 과장을 보태어 쓰자면, 저는 두 분이 쓰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이 두 글이 정말 같은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맞나 하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민중신학은 늙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한국 사회 전체를 갈아 엎을 기세로 덤벼드는 ‘거대 담론’ 중의 하나였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그 때와 같은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솔직히 그 정도의 힘을 되찾을 전망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이는 늙은 신학입니다. 그래서 특히 책 전반부에 실려 있는 글들 중에서 이런 늙음을 답답해 하는 글들이 제법 보이더군요.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은 일종의 민중신학 회춘 프로젝트라고 할 만 합니다. 대두된 역사가 비교적 젊은 이슈들을 민중신학의 ‘지혜’를 참고삼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회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고 하면 될까요. 다른 각도로 보면 그렇게 회춘을 하지 않으면 그냥 고사할 것이다라고 말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반면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민중신학은 청년이라고까지는 안 하더라도 장년이라는 말은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대 담론’으로 출발한, 혹은 최소한 그렇게 이해되었던 담론이긴 하나, 그 후 그 ‘거대 담론’이 힘을 잃어 버린 시점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설 자리를 찾기 위해 당대적 이슈들과 분투해 온 시간을 가진 장년으로서의 민중신학. 여기서 출석하는 교회 담임목사님께 이 책을 선물로 드렸더니 한 번 보시고 나서 민중신학자들이 그 동안 어떻게 지내 왔는지 알겠다는 감상을 남겨 주셨던데, 이 감상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에필로그를 읽고 나서 보면, 프롤로그와 몇몇 글들처럼 민중신학을 ‘거대 담론’ 비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어떤 경우엔 아예 지금까지의 민중신학으로는 **를 민중으로 볼 수 없으니 민중신학이 바뀌어야 한다 이런 말까지 하는 글들을 보면, 저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할 텐데 뭔가 좀 뜬금없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듯 합니다. 조금 더 덧붙인다면, 에필로그에서는 제2세대니 제3세대니하는 말이 나오는데, 왜 같은 책에, ‘민중신학’ 책에, 그 제2세대나 제3세대는 모른다는 듯이 쓴 글들이 꽤 보일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네요.


2.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가 방금 그린 두 개의 그림이 하나는 맞는 그림이고 하나는 틀린 그림이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중신학이 거대 담론이라고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는 듯한 구절을 볼 때, 그 동안 민중신학이란 말의, 나아가서는 민중이란 말의 용법이나 이해가 어떠했던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도매금으로 넘어가도 어쩔 수 없는 구석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저에게도 들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에는 ‘운동의 신학’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만, 그 표현으로 직접 지칭되는 소위 제2세대가 아니더라도, 민중신학 자체도,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다양한 영역에서의 민중론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민주화운동이나 민주당계 정당이라는 특정 진영의 지지 담론의 역할을 자임했거나 최소한 그런 성격의 담론이라고 이해되어 왔지요. 그리고 민중신학자들이나 민중론자들 스스로도 그러한 이해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구요(초기 민중신학자, 혹은 그 배우자 중에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단 경력자가 세 분이나 있을 지경이기도 했네요). 이렇게 보면 그 민주화운동/민주당계 정당의 활동이 뭔가 잘 되지 않는 듯한 분야들, 책 안에서라면 여성이라든지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라든지 등의 분야에 대한 글들에서 민중신학과 민중론에 대한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긴 하겠다 싶습니다.

그런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이해를 하는 사람들의 기대(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가 존재한다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어쩌면 그 ‘기대’의 지평이 ‘1987년 이후’에 질적 변화를 겪었다고 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1987년 이전의 기대가 세계를 바꿔 놓을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운동가의 시선을 전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1987년 이후의 기대는 민주화된(그리고 소비 중심이기도 한) 세계의 주체를 자임하는 시민의 시선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그래서 그런지 최근의 민중신학자들의 글이나 책에 대한 공공적 기대의 지점은 ‘민주화된 시대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는 문제아인 한국 개신교’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목사님과 김 목사님 두 분 다, 이 지점에 관해서 책과 글을 쓰셨거나 계속 쓰시는 분들이기도 하네요.


3.

그런데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라는 책을 앞에 놓고서는 과연 이러한 기대만을 염두에 두면 될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해 보게 되는 생각이, 민중신학이 ‘거대 담론’이었다고 한다면, 그 ‘거대 담론’과 관련된 지평에서 건져 내어야 할 것은 없을까 하는 겁니다.

민중이니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거대담론’들이 물론 지금에 와서는 새롭게 운동을 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질곡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 담론들이 근본적인 전복의 사유의 요소로 쓰였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걸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책의 일각에서도 드러나는 ‘거대담론’ 기피 분위기라는 게 ‘거대담론’을 향유했던 사람들의 자업자득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앞에서 언급한 ‘시민의 시선’, 민주화된 세계의 주체를 자임하는 시선에서 ‘근본적인 전복’이라는 것이 이상한 것으로 취급받게 되는 결과이기도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번 곱씹어 보고 싶은 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한 ‘민중 메시아론’입니다. 저만의 생각인진 모르지만, 저는 민중 메시아론이 민중이 메시아라는 걸 증명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도대체 지금 이 세상이 무슨 꼴이길래 민중 메시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인지, 그리고 그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말하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을 해요. 이 책에서 민중신학이 읽고자 한다는 ‘고통의 시대’, 그리고 그 고통의 정체라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것이 아마도 앞에서 이야기한 도대체 지금 이 세상이 무슨 꼴이길래에 대한 대답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전제한다면, 아마도 민중 메시아론을 견지한다면, 민중신학은 앞에서 이야기한 시민의 시선, 이제는 민주화운동의 내러티브까지도 포섭했고, 어쩌면 ‘촛불혁명’의 기억도 내장하고 있을 이 시선에서 출발하는 기대를 배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민 메시아’가 아니라 ‘민중 메시아’다,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달까요. 하긴, 이미 에필로그에서 민중신학 제3세대가 “1987년 체제”라는 당대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응답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런 이야기가 민중신학에 낯선 이야기는 아니긴 하겠습니다. 

‘민중 메시아’를 이야기하는 한 민중신학은 앞으로도 아 내가 지금까지 무지했구나 라는 뒤통수를 맞을 일이 많겠죠. 사실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게 바로 구원이란 뒤통수 맞는 거다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뒤통수 맞는 사건을 구원이라고 여기고 그 사건에 천착할 수 있을 때에만 민중신학이란 것이 가능할 테지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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