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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이태원과 파사주(심정용)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9. 5. 1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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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과 파사주

심정용

이태원을 제대로 둘러본 건 작년 이맘때였다. 한적한 주말, 홍제동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자전거도 타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신 참이었다. 이태원에서 저녁 약속이 있다는 친구를 무작정 따라나섰다. 도착하자마자 친구를 보내고는 처음 보는 이스라엘 식당에 들어가 처음으로 후무스와 난을 먹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갈 곳을 못 찾고 시끌벅적한 보광동 일대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좋은 식당과 카페를 찾아가 보기를 좋아하던 평소와 다르게, 그 날의 나는 혼자 가볍게 한 잔 할 만한 장소조차 찾지 못했다. 이곳에 내가 들어가도 될까, 내가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여기에는 학부 때 지내던 한적한 바다마을의 경험과 서울 한복판 사이의 문화적 격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날 다행히 한적한 수제 맥주집을 한 군데 찾아냈다. 운이 좋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오히려 그래서인지 나는 자리를 잡은 다음 생각에 빠져들었다. 책, 영화는 물론이고 술, 음식, 공간, 나아가 장소까지, 충분한 경험에 기초한 나만의 취향의 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곧이어 그 ‘경험’의 필수조건은 뭐니뭐니 해도 돈과 시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두 가지를 오롯이 연구에 쏟아붓기에도 모자란 인문계 대학원생이었다.

그 즈음의 나는 막 무기력증에 걸린 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당시 부쩍 심해진 증상이 대체로 무기력증의 그것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대체로 잠이 안 오거나 지나치게 오래 자 버리곤 했는데, 어떤 경우에든 그 밀도는 피로를 덜기에 한없이 부족했다. 식욕이 없다시피 하다가도 막상 뭔가를 먹을 때면 공허한 마음에 자꾸만 이것저것 집어먹었다. 그때마다 술은 빠지지 않았고, 침대 머리맡에는 언제나 맥주 한두 캔이 함께했다. 돌이켜 보면 학부 때 군복학 이후 갖가지 활동을 하며 쉬지 않고 살아왔는데, 심지어 대학원 입학 후에도 학사 조교로 일하며 방학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렇게 소위 말하는‘번아웃’을 겪고 있다고 실감하면서도, 남은 학기는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버텼다.

이태원에서 사로잡힌 생각은 대학원생으로서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무기력증을 부채질했고, 이내 몇 가지 고민이 따라붙었다. 하나는 대학원생, 혹은 연구자로서 생산하는 지식이 도대체 어떤 효용을 가질 것인가 하는 회의였다. 여기에는 내가 그런 지식을 생산해낼 수는 있을 것인가, 인문학에‘효용’을 따지는 것은 맞는 태도인가 같은 자잘한 걱정들을 포함되었다. 또 하나는, 그래서 나는 연구자로서 도대체가‘글밥’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고민들은 대학원생이라는 내 위치 자체를 질문하도록 이끌었다. 어쩌면 나는 취업전선에서 유예를 두고 싶어 도망치듯 대학원 생활을 이어나가는 건 아닐까? 연구자로서의 자질도 부족한데 억지로 이 신분을 이어나가면서?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유서 깊은 조언이 있지만, 고민이 이미 똬리를 틀어버리면 몸도 마음도 저당잡혀 버리니 당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이태원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파사주(passage)’를 마주한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파사주를 분석하면서 근대성과 대도시, 자본주의의 속성을 규명하려 하였다. 건물의 소유주들이 공동투자하여 사이사이에 유리창과 대리석 회랑을 만들어놓은 파사주는 그 자체가 조그만 도시, 혹은 세계이다. 거리와 실내의 중간물로서의 파사주를 채우는 것은 환등상 같은 상품들이다. 파사주를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는 만보객들은 그 상품들에 한껏 감정을 이입하며 그 교환가치, 또는 전시가치라는 물신적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그때 나는 유사-파사주 같은 퀴논길을 걸으며 눈부신 간판과 조명(상품)을 쬐었다. ‘먹고 사는’ 미래의 문제를 당장은 생각하지 않고 소박한 소비와 생활패턴을 유지하며 텍스트를 읽던 세계에 상품의 환등상이 엑스레이처럼 비쳤다. 그렇게 드러난 ‘대학원생’은 오직 생산한 지식이나 글로 자신의 교환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품으로서, 변변한 뼈대가 없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환등상의 눈부신 아우라를 뒤집어쓴 욕망과 부족하고 비루한 내 현실의 틈새를 오로지 교환가치로만 재어 보며 허우적거린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과목의 어떤 과제를 어떻게 써냈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는 도통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앙금처럼 가라앉았다. 장학금을 최대한 받아놓으려 기어이 저번 학기까지 조교 생활을 이어나갔고, 학기가 끝나자마자 일단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으로 종합시험을 쳤다. 그렇게 더 들을 수업도 없고 정말 논문밖에 안 남은 상태로 선언하듯 휴학을 신청하여 지금에 이른다. 요즘의 나는 논문 주제는 물론이고 졸업 이후까지, 여전히 도통 알 수 없을 것들 투성이에서 자주 무기력에 얻어맞고 가끔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불확실성과 불안을 안고 살아내기(반드시 살아’낸다’고 표현해야 한다!)’ 같은 레토릭을 공허하게, 하지만 다소 감상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낭만화하여 말할 수 있다는 건, 아직 그것들에 본격적으로 치여 보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졸업, 서울로의 상경, 대학원 생활 등 마음속에 품었던 갖가지 환상들이 서로 충돌하며 차츰 무너져내리는 이 서사에 나는 줄곧 사로잡혀 있었다. 살아가는 한 삶에는 마땅한 결론이 없겠지만 글에는 결론이 있어야 하겠는데, 나는 구태의연한 교훈으로 가득한 자기계발 세미나를 거치지 않고 이 서사를 끝내고 싶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른 층위에 속하는 것만 같은 연구와 상품이 아직까지 부대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필자소개 

비교문학은 대관절 뭘 공부하는 건가요? 늘 질문받지만 매번 잘 대답 못하고 나도 모르고 심지어 아무래도 계속 모를 것만 같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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