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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4)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09. 11. 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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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4)
: 누가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가?

이상철
(시카고 신학교 / 윤리학 박사과정)

누가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가?

’주체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현대 철학계의 흐름속에서 주체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스펙트럼상에 존재한다. 주체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디세이처럼 험한 여정을 마감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는, 그래서 자아의 존재를 기어코 발견하고야 마는 가열찬 의지를 지닌 반성적인 주체이고, 또한 주체는 하이데거적인 의미로는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주체, 그리하여 현실을 완전히 독점하는 주체이며, 이는 또한 세계사를 신의 자기 인식, 자기 생성으로 파악한 헤겔류의 역사철학에 등장하는 무한 진보 신화에 빠져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위에서 거론된 주체는 하나의 개별적 주체가 아니라, 근대성 혹은 근대적 프로그램에 의해 조성되고, 근대(성) 일반이라는 담론의 틀 안에서 주조된 주체라는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후기 구조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근대적 프로젝트 일반에 대한 폐기를 선언하면서, 인간의 계몽, 근대적 인식론, 근대적 주체론 등 이른바 근대성의 신화에 입각한 주체에 대한 무효와 해체를 주장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주체의 존재를 절대화한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지만, ‘주체의 죽음’을 운운하는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과도 선을 긋는다.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무리들 역시, 그보다 앞섰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인격성과 타자성, 인간 존재의 윤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각주:1]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

레비나스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이데거와는 달리) 죽음이 알 수 없는 실재, 즉 삶의 타자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죽음과의 관계가 빛을 통해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주체가 신비와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2] 죽음은 빛의 영역(인식, 경험, 지식) 밖에서 일어나는 경험,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관계로부터 도래하는 사건이다: “주체는 이제까지 능동적이었다. 나는 ‘수동성의 경험’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경험은 항상 이미 인식, 빛, 주도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비로서의 죽음은 그렇게 이해된 경험과는 구별된다. 내가 만나는 대상은 파악되고, 간단히 말해서 나를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죽음은 주체가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사건,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그런 사건을 알려준다.”[각주:3]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내가 주인이 되는, 내가 주도권을 갖고 끝까지 밀어 부치는 그것이었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상황, 다시 말해 빛의 명증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두움이고,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를 사로잡는 그 무엇(타자)이다. 그 상황은 <시간과 타자>를 비롯한 그의 저서들에서 ‘얼굴/미래/여성성/타인과의 만남’등 레비나스 특유의 레토릭으로 전개된다. 특별히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소위 ‘얼굴의 현상학’을 전개하면서, 타자는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각주:4] 
얼굴은 레비나스에게 있어 현시가 아니다. 얼굴은 물리적 시.공간에 위치를 점하는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굴은 우리에게 깊이와 근거를 알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우리를 향해 침투하고 관여한다.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아우성대며 우리의 응답을 촉구한다. 레비나스가 윤리학을 ‘제 1 철학’[각주:5]으로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자를 전통적인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응답의 차원, 책임의 차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레비나스가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도 유용하다. 인간의 주체성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발성이다. 주체란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주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인간의 자발성의 영역이 아닐까?’라는 물음도 가능하다. 실제로 현대 철학자들 중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최후의 순간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아니!’라고 답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인간의 주체성은 자발성과 비자발성에 있지 않다.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주체이다. 죽음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책무를 다 했을 때 맞이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책임의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레비나스는 ‘희망’이라 말한다: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일종의 목숨을 건 모험이다”. 계속하여 레비나스는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며 “나는 숨쉰다, 나는 희망한다”라고 선포하는데,[각주:6] 이러한 고백은 전적으로 레비나스의 나치 치하 포로수용소에서의 체험에 기인한다.[각주:7] 

Episode: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온 희망의 근거

필자가 현재 재학중인 시카고 신학교에 올해 나이로 96세인 노학자가 있다. 시카고에 있는 대표적인 진보적 색채의 신학교라 할 수 있는 시카고 신학교와 Northwestern대학 안에 있는 Garrett 신학교에서 유대교를 가르치고 있는 Rabbi Schaalmann 교수이다. 마틴 부버의 제자이고 레비나스와도 교류를 가졌던 분으로 현재 유대교 학자중에는 최고 원로급이며, 그 자체가 교과서인 신화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강의실에 들어가면 text 없이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들이 질문하면 교수님이 대답하는 형식인데, 모든 질문과 어떠한 상상도 허락되는 시간이다. 교수님이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가끔씩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들려주신다;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형제, 자매, 친구들, 가스실, 삶을 차단해 버린 높은 담장과 철조망, 얼굴에 핏기가 없으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어 끌려가 죽는다. 얼굴에 생기가 있게 비치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어 얼굴에 바르는 사람들…
나치는 응징과 공포의 차원에서 몇몇 마음에 안 드는 유대인들을 골라 시범케이스로 교수대 위에 목을 메달아 공개적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나머지 유대인들은 고개를 들고 그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하면서 교수대 밑을 빙빙 돌아야 한다. 이렇듯 죽음이 선포되고, 집행되고, 확인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을, 인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는 피맺힌 절규가 울려 퍼졌다고 Schaalmann 교수는 회고한다.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이번에는 우리가 신을 용서할 차례다. 이제 우리의 신을 놓아주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계속 의미를 묻고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 Rabbi Schaalmann은 고백한다. 신을 용서하고, 신을 놓아버리니까 (사실, 그 의미가 정확히 뭔지는 필자는 잘 모르겠다. 96살이 되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을런지?), 그 전에는 몰랐던 수용소 하늘 만큼의 자유가, 그리고 희망이 여전히 내게 있다는 것이 전해져 왔고, 죽음의 가스실 담벼락을 비집고 난 풀 한 포기 혹은 감방 창살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아래로 파랗게 낀 이끼들을 보며 여전한 생명에 대한 고귀함과 집착을 느꼈다고 그는 증언한다. 그 힘이 우리를 끝까지 살아남게 했다고 말이다.

레비나스의 책을 읽다 보면 죽음과 자살, 그리고 희망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급격한 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레비나스를 읽는 독자들에게 난제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이는 다분히 아우슈비츠에 대한 전이해 부족과 유대 신비주의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것이라고 Schaalmann교수는 지적한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 경험은 그것을 경험한 대부분의 유대 사상가들에게 그렇듯이, 레비나스에게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가 구사하는 문장 곳곳에 숨어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레비나스는 이런 이유로 “주체의 지배가 보장되는 현재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고 말한 후에 “자살은 모순적 개념”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각주:8] ⓒ 웹진 <제3시대>

  1. 데리다는 자신의 초기 저작인 Writing and Differenc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안에 있는 논문 ‘Violence and Metaphysis: An Essay on the Thought of Emmanuel Levinas’에서 레비나스를 신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레비나스의 타자인식에 대해 분명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 1995년 레비나스가 죽은 후에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회상하며 ’아듀! 레비나스’라는 유명한 추모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이 Adieu to Emmanuel Levians(Stand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란 제목으로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다. 그 대목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적 타자 발상을 상당부분 수용한다.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타자를 둘러싼 논쟁은 타자 담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타자를 둘러싼 논쟁사: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중심으로(가칭)’라는 주제로 차후에 제3시대 웹진을 통해 발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2. 시간과 타자, 77쪽. [본문으로]
  3. Ibid., 77 쪽 [본문으로]
  4.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후반부 전체를 ‘얼굴의 현상학’을 테마로 하여 그의 타자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5. Levinas, Emmanuel. Levinas Reader. Edited by Sean Hand, MA: B. Balckwell, 1989. p.75. [본문으로]
  6. 시간과 타자, 82쪽. [본문으로]
  7.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본문으로]
  8. 시간과 타자, 8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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