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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최종)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09. 12. 3.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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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최종)
: 자살공화국, 대한민국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계기로 시작된 졸고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자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필자는 글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살에 대한 물음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느꼈고, 이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의 죽음관, 근대철학,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나타난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지난 호에 하이데거를 넘어가는 레비나스의 죽음이해를 다루었고, 이번 호에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학)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글을 연재하면서 죽음의 계보학을 거슬러올라가며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리도 해보고, 어설프게나마 자살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당사자들이 느꼈을 절망의 깊이에 대해 가늠해보지만 여전히 그 결론은 지난하여 길을 잃고 있다.

자살공화국, 대한민국
통계에 의하면 작년(2008년)에 12,027명의 한국인이 자살했다고 한다. 하루 평균 33명이 바위에서 떨어지고, 목을 매고, 약을 마신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대통령, 스타, 재벌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 장가 못간 시골총각, 어린 중고등 학생들까지 우리사회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자살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인구 10만명 중 24.8명에 해당되는 수치로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1~2위를 다투는 수치라고 한다. 자살은 한국인의 사망원인 중에서도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네 번째 순위에 위치한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라고 하니, 외출하는 식구들에게 ‘차 조심하라’는 말보다 ‘자살 하지마’라는 경구가 더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왜 자살을 할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문제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무엇이 우리를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될 만큼 모질게 만드는가? 혹자들은 살기 힘들어서 죽는다고 한다. 물론 살기 힘들어서 죽는다. 하지만 세계에서 제일 가난하다는 방글라데시나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자살율이 높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삶에 대한 만족도 부분에서는 우리보다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살한다고 둘러대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통계를 분석한 사람들에 의하면 한국의 자살율은 매우 독특한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1995년 통계에 의하면 4,840명이 자살하여 인구 10만 명당 11.8명 꼴이었는데, IMF를 겪은 1998년에 10만 명당 자살율은 19.9명으로 거의 배로 급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5년 인구 10만 명당 26.1명으로 세계 최고로 등극하였고, 작년 2008년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인구 10만 명당 24.8명이라는 세계정상급의 자살율을 자랑하고 있다. 이상의 분석에서 보듯이 IMF로 대변되는 지금의 (금융)자본주의가 한국사회의 자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늘어나는 수명과 반비례하여 줄어드는 정년,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고무 찬양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인간의 욕망을 저당잡고 팽창하는 암세포 같은 금융 자본. 이렇듯 현재의 자본주의는 아무런 저항과 대응논리 없이 민중들이 짜낸 기름을 동력으로 활활 타오르고, 더 짜낼 기름이 없는 민중들은 어쩔 수 없이 자본이라는 제단 위로 몸을 던져 스스로 자본의 불쏘시개가 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불가리스~’를 기억하시나요?
십 여년전 “불가리스~”하면서 경쾌하게 시작되던 광고가 떠오른다. 화면은 어느 유럽 촌동네를 비추면서 그 동네에 유독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장수의 원인을 추적하였더니 그 지방 특유의 발효식품 ‘불가리스’가 장수의 원인이었음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전하며, 광고는 다시 경쾌하게 “불가리스~” 를 외치며 끝이난다. 기능성 요구르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불가리스’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 광고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다.  
광고의 배경이 되었던 지역은 터키와 그리스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가리아에 속해있는 마을이다. 불가리아 남쪽에는 해발 천 미터 이상 되는 고산지역을 따라 장수촌이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스몰랸’ 지방의 ‘바니테’라는 마을이다. 이 지역은 인구 1000명당 38명이 100살이 넘는다고 한다 (1990년 이전 통계에 의하면). 장수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공기 좋은 고산지대에 살면서 적당한 노동과 운동, 채식 위주로 조금씩 자주 먹는 식습관, 그리고 이 지방 특유의 발효유, 즉 요구르트를 주식과 함께 자주 먹는다고 한다. 이것이 기능성 요구르트 ‘불가리스’의 탄생 배경이다.
그러나 지금 그 지역은 장수촌이 아니다. 요구르트의 효험이 다한 것인가? 1990년대 소련붕괴 이후 사회주의 경제원칙을 근간으로 하던 동구 유럽은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급박하게 자본주의 내지 자본주의 색채가 강한 경제 시스템으로 그 체질을 전환한다. 불가리아는 다른 동구유럽 국가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전환이 늦었지만 자본의 원칙은 어김 없이 그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Global Capitalism이라 불리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어 놓고, 노동, 자본, 재화, 정보의 흐름과 교환을 100% 시장에 맡겨버렸다. ‘무한경쟁’, ‘2등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등 당시 등장했던 광고 문구들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시장, 상도가 무너져 개판이 되어 버린 세상을 향한 찬미 내지는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간을 무한 경쟁의 약육강식의 논리로 재편하려 하는가? 기억되는 않는 2등, 3등, 4등…꼴등은 어찌 살란 말인가?
하지만,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그 경과에 맞추어 불가리아에 있었던 장수촌도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90년대 이후 진행되었던 동구 유럽의 자본주의화와 발맞추어 노인들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제는 예전 불가리아 장수촌지역과 다른 지역의 장수노인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왜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은 사라졌을까? 그래도 예전에는 부족하지만 일정량의 양식이 인민들에게 정기적으로 분배되어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었는데, 새로운 경제체제하에서는 날고 뛰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먹을 것이 전보다 많아지고 다국적 유명 브랜드들이 거리를 메우면서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선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라도 정지하는 순간 우리는 금방 도태된다. 이 강압을 자본의 원칙에 노출이 적었던 순박한 불가리아 산골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실패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를 들먹이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예가 한국 사회의 자살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 !
IMF이후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는 진정한 계급사회로 진입하였다. 더 철저하고 완고해진 부와 지식의 대물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실례로, 필자가 유학하고 있는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사립대학인 Northwestern 대학과 Chicago 대학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부모들은 거의 대부분은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대기업 임원, 정부 관료의 자식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교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IMF이전에는 그래도 장학금 받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IMF 이후 달러강세, 미국 경제 악화로 인한 미국 대학의 인터내셔널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축소 정책 이후 이른 바 미국 내 명문대학 (명문 대학들은 대부분 비싼 학비를 자랑한다) 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우선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재력이 있어야 미국유학을 올 수 있다. 당연히 있는 집 자제분들 아니면 꿈도 못꾼다. 이렇게 세습된 부와 지식의 혜택을 받은 젊은이들은 해외유학 이후 유망한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강남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차를 굴린다.
반면에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그럭저럭 지방대학 나온 청년들은 취직도 잘 안 될뿐 아니라, 설사 취직이 되었다 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88만원 세대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힘겨운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의 교육은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고, 시골의 야심 찬 어린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통로가 아니라, 부모의 계급과 재산과 지식을 대물림하는 확고한 계급재생산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심지어는 교회조차 아버지 목사에서 유학 갔다 온 아들목사에게로 대물림되어 유전된다. 한국 사회는 이렇듯 성(聖)과 속(俗), 모든 영역에서 급진적인 양극화 단계로 진입하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버거움
미국 진보신학의 성취라 평가되는Womanist Theology와 Queer Theology는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배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던 인종(Race)과 성(Sexuality)의 정체성, 그리고 그로 인한 폭력의 (철학적, 신학적, 정치적, 사회학적)구조와 연쇄고리에 대한 폭로를 시도한다. ‘나의 피부색깔과 내가 지닌 성적 정체성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분히 태생적이고 존재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나 눈을 뜨자 마자, 평생을 살아갈 이 세상에서 내가 어느 특정한 곳에 위치되어져야 함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때 느꼈던 서늘함과 분노와 좌절을 그대들은 아는지? 흑인으로 그것도 흑인 여성으로 살아왔던 내 삶을, 동성애자 신학자로 목회자로 내가 교계와 신학계에서 받았던 ‘특별한 관심(?)’을 이해하겠느냐?’는 질문들을 접하면서 내가 들었던 생각은, 성격과 강도가 다르긴 하지만, 2009년 현재 한국사회의 고착화된 계층구조 역시 한국이라는 틀 안에서 이미 확고한 존재론적인 함의와 법칙을 띄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상고 나와서 고시 공부해서 나중에는 대통령까지 되었다는데, 이명박도 노가다 뛰고, 노점상 하다가 대통령 되었다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껄껄거리며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그 희망은 이미 부와 지식을 대물림한 사람들의 것이다. 옛날에는 소 팔고 논 팔아서 자식 교육 시키면 가난한 필부의 자식들도 판검사, 의사 되고, 배 나온 사장님도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희망이 없다. 존재론적으로 태생적으로 한국사회의 판이 전보다 더 (운명결정론적으로) 촘촘히 빽빽하게 짜여진 까닭에 초등학교 6학년이면 삶의 윤곽이 대충 판가름난다. 역전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쭉 가는 거다. 그래서 인생은 버겁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승부는 이미 정해져있다. 예정된 패배를 경험하고 난 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낙오자라는 낙인, 가난을 혹은 좌절과 실패를 오직 그(녀)의 무능과 책임탓으로 돌려버리는 사회풍토,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잣대가 되어 그 절정을 구가하는 사회가 지금의 한국사회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단순히 가난하고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존엄을 스스로 불신하고 혐오하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앞으로 잘 될 가능성과 희망이 없다손 치더라도 옛날 사람들은 꾸역꾸역 자신들의 삶을 그럭저럭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하는 거지?  가난한 사람들끼리, 못난 사람들끼리,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끼리 막걸리 한 사발, 소주 한 잔에 취해 육두문자 섞어가며 한바탕 걸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오곤 했는데, 그래도 세상은 별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사람들끼리 부딪쳐 사는 맛에 현실의 고통과 모욕을 겨우겨우 버티어 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공동체(성)도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희망도 없고, 자신에 대한 존엄성도 없는 개인, 이런 개인들끼리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공동체) 조차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 2009년 자살율 1위를 자랑하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인 셈이다.  

에필로그: 레비나스의 제안,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발견했다는 레비나스는 자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유대민족 특유의 메시아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죽음이 인간 실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근거하고 있는 한, 죽음의 압제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메시아의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날이 오면 우리를 짓눌러온 모든 폭압의 구조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지금까지 불확실했고 불확정적이었던 사건과 역사의 진리들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진리와 심판의 순간과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삼키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이 메시아적 도래를 현실에서의 ‘타자의 얼굴’로 치환한다. 우리의 동심원적 의식의 범주안으로 포획되지 않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것을 ‘책임’이라 부르든, ‘제1철학’이라 부르든, 그것이 바로 메시아적 도래를 체득하고 경험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죽을 수 없고 죽어서도 안 된다. 그러기에 살아남아서 인간을 무한경쟁의 난장판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야만성과 싸워야하고,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서 정글의 법칙을 습득해가는 우리의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하나 하나의 과정과 사건의 연속이 메시아적 도래이고 죽음의 극복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누구 말처럼 올 한해 대한민국은 1년 내내 상중이었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은 그 이름이 곧 시대였고, 당대 의식을 규정했던 별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큰 상실이고 슬픔이었다. 그 밖에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여섯 분의 죽음과 배우 장자연의 죽음은 2009년 한국 사회의 단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어떻게 죽었는가?’는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그가 지녔던 삶의 치열함과 비장함을 보았고, 용산의 죽음에서는 민중들이 지니는 한과 울분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렇듯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삶만큼이나 주목하는 이유는 죽음이 가장 그들의 삶을 가장 정제된 언어와 압축된 밀도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형성케한다. 어쩌면 역사는 이 진리를 계속 증언하여 왔는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죽음이 그랬고, 전태일의 죽음이 그랬으며,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그렇다. 그렇게 죽음은 부활하여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지금 우리와 함께 맞물려 살아있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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