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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2. 1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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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각주:1]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우연찮게 TV를 켰는데 CNN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0년 1월 17일) 로마에 있는 한 유대교 회당을 방문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기사는 교황의 이번 유대교 회당 방문이 1986년에 있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방문이었다는 사실과 (독일출신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만남이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고, 앞으로 양자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데 공감했다는 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황이 관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며 마무리되었다. 표면상 별 특이한 사실이 없이 무난해 보이는 이 뉴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교황이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던 로마의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장소와 1982년 유대교 회당에서 자행된 극렬 팔레스타인 해방론자의 테러로 생명을 잃은 2살 난 아이가 죽었던 장소를 둘러보고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로마교황청은 전쟁 기간 나치로부터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물밑에서 여러 조치를 취하며, 조용하면서도 하지만 용기 있게 행동했었다”고 말이다. 교황의 이런 발언에 대해 유대교 회당의 대표 랍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했다고 전한다: “침묵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문득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한나 아렌트에 대한 추억

2년 전 발터 벤야민을 다루는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다. 벤야민은 신비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의 조화(혹은 긴장)을 파헤쳤던 유물론적인 신학자(혹은 신학적 유물론자)였고,[각주:2]  이는 후에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종교론에도 영감을 주어 유명한 데리다의 신학명제인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각주:3] 를 낳게끔 한 산파 역할을 한다. 벤야민은 또한 인테넷 시대를 예감이라도 한 듯 기술복제(시뮬라크르)시대에 발생하는 예술 작품의 아우라 파괴를 옹호하면서 아도르노의 예술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미학자이기도하다.[각주:4]
미국 진보 신학계와 철학계에서 벤야민 원전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있어 그의 단편을 모아놓은 두 권의 책은 필수적이다. Peter Demetz가 책임 편집에 참여한 『Reflections』과 한나 아렌트의 서문으로 유명한 『llumiantions』이 그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례적으로 60페이지에 가까운 『llumiantions』서문을 통해 벤야민의 극적인 삶과 전복적이고 일탈적인 사상의 궤적을 너무나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필자의 벤야민 입문은 한나 아렌트가 제시해준 벤야민 지도(地圖)에 영향을 받았다. 나의 베냐민 읽기에 있어 한나 아렌트의 벤야민이 먼저인지, 아니면 벤야민 텍스트가 먼저인지 모를 정도니 말이다 (사실 이런 독해는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내 지식의 창에 벤야민이라는 통로가 놓이게 된 것은 한나 아렌트 공로다.
한나 아렌트가 쓴 책 중에(그녀의 책은 난해하고 무겁기로 유명하다) 그나마 대중들에게 많이 소개되었고 가장 쉽게 쓰여진 책이 바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차 대전 전범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총괄했다는 혐의를 진 아이히만 (Adolf Otto Eichmann, 1906-1962)이 남미에서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의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던 아렌트가 자신의 목격담과 생각을 엮어서 출판한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수 백 만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이히만의 얼굴을 본 아렌트는 “악의 얼굴이 이토록 평범하다니”라는 말로 우리에게 전율을 선사한다.

실례로 어느 간수가 혹 불안과 초조에 빠져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히만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소설책 한 권을 전했다고 한다. 그 소설은 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 남자의 성애를 다루는 책이었다. 아마도 그 간수는 아이히만 같은 희대의 살인마는 평범한 내용의 책이 아니라, 약간은 도착적이고 짜릿한 무언인가를 즐겨 찾을 것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아이히만은 그 책을 간수에게 돌려주며 ‘아주 비윤리적인 책’이라고 하면서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잔혹한 악마도 아니었고, 별 이상스럽고 변태스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 역시 성실히 일하면서 승진을 꿈꾸었던 평범한 독일인이었고, 그냥 평생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자신에게 부여된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하며 원칙에 충실했던 표준적인 독일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토록 아이히만 같은 모범적인 독일시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의 공범자들로 연루되어 있는 것이라면?

동사무소에서 성실히 근무했던 말단 공무원은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자전거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비군 훈련통지서를 돌리듯 유대인들에게 소집통지서를 섬심껏 전달했을 것이고,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나를 기차의 운행 시간을 주로 야간에 편재하기 위해 많은 역무원들이 전면적으로 기차의 운행 시간과 배차 간격을 조정하느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한꺼번에 수십, 수 백만 벌의 죄수복을 만드는 공장에선 나라에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우리를 위해 일자리를 창출해 줬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며, 그러니 더욱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했으리라. 살인가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내려온 화학식에 맞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일정한 비율로 원소들을 섞었을 뿐이다. 죽은 유대인들의 시체에서 짜낸 기름을 갖고 비누를 만드는 공장에서는 그 기름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나라에서 원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으니 우리 열심히 값싸고 좋은 비누를 만들어 국민위생 증진에 공헌하자며 두 주먹 불끈 쥐었겠지. 그들 모두 하루하루 성실히 근면하게 살아온 죄 밖에 없다. 관료사회의 믿음직한 성원으로 집단의 원리에 충실했던 것이 죄인가?

내 안의 아이히만

나치 정권하의 독일 인민들은 칸트의 후예답게 의무론적 윤리에 충실했고, 의무론적 윤리의 최정점에 있는 선의지에 맞게 행동했다. 불행이라면 그 집단의 정점에 히틀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선의지가 교묘하게 히틀러로 치환되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그 음모를 대중들이 파악하지 못하도록 사회를 분절화 시켰고, 분절된 개인들을 전체의 틀에 가두어 전체(선의지)와 개인(도덕적 주체)간의 네트웍에만 몰두하게 하고 분절된 개인과 개인끼리의 소통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하나하나 살펴보며 나름 선량한 개인들이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모든 일에 주저함이 없이 행동하도록 길들여졌다. 아이히만은 집단이 자기에게 부과한 일만 숙지했지 그 집단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나하면, 집단은 선이기에 그에게는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집단의 명령이 유대인(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성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태를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라 명명하였다.

취향과 전문화의 정도가 심한 현대 사회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분야(혹은 취향) 이외에서 일어나는 증상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리고 그렇게 파편화된 개인을 움직이는 현재의 유일한 원리는 오직 자본의 법칙뿐이다.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뜨거웠던 이념들은 모두 자본안으로 흡수된 지 오래고, 대통령을 뽑을 때도, 대학 총장을 뽑을 때도,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모두 자본의 법칙에 순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제1 관심사이다. 나머지 평가 항목의 총량을 다 합하여도 자본의 원칙 한 종목을 넘지 못한다. 나치가 독일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통용되었던 국가적 의지의 극대화였다면,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자본은 바야흐로 21세기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세계 시민의 의지이자 숭고함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의 명령 앞에, 아이히만이 히틀러의 명령앞에서 그랬던것처럼, 철저히 무사유한 상태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에필로그

“전체는 거짓”이라고 아도르노가 말했던가. 결국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집단은 악’이라고 말한다. 집단은 자신의 의지를 극대화 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항상 시달린다. 문제는 모든 집단의 모든 의지는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극대화되면 악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죽음의 제목들을 기억해보라: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순수의 이름으로……그리고 이제 자본의 이름으로!  악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어 오르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졸고의 제목은 그 부제를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본문으로]
  2. 이에 대한 글을 참조하려면 아래의 벤야민 단편에 주목하라. 「Theological-Political Fragment」 in 『Reflections』, Edited by Peter Demets.(New York: Harocurt Brace Jovanovich, 1978), &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Gil anidjar. (New York: Routledge, 2002), 56. [본문으로]
  4.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로 이어지는 (예술작품에 있어 아우라의 보존이라는) 미학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벤야민의 예술관이 드러난 대표적 글쓰기가 바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다.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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