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여섯번째

의심 많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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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 새번역 요한복음 20장 24-25절

목사가 되기 전, 평신도 시절에 나는 많은 목사들에게 실망을 했다. 보통 교회에서 생기는 문제의 대부분은 목사들의 잘못된 신학, 권위주의적인 목회방식, 믿음을 가장한 고집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된 지금도 난 역시 목사인 내가 못마땅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가장 골칫거리는 목사 자신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수제자 베드로가 순식간에 사탄의 대열에 낄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마가복음 8장 33절) 잠시 멈추어 어쩌다 목사가 되어버린 나를 돌아본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다.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 속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자가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 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인)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

한국인들에게 꽤 친숙한 이탈리아 철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의 입을 빌어 이런 충고를 하고 있다.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목사가 되는 과정은 교단마다 교파마다 다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리스도교 진리와 목회에 대한 열정을 가슴과 몸에 아로새긴다. 그래서 목회지에 가서는 그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그 열정이 바른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 살펴볼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성찰의 시간을 일부러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지한 회의주의자는 어쩌면 현재 한국교회의 목회현실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지한 회의주의 없이 함부로 자신이 예수와 함께 간다고 확신할 경우 목회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얼마나 많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가!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마치 기업가가 자신의 기업을 세우고 확장하듯이 하고 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탐욕과 성취욕을 채우려 한다. 이것은 평신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를 찾기보다는 세속적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관리하고 성장시킬 지도자를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불리는 유진 피터슨은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 책에서 목회자가 오히려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첫 장을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의심 많은 도마처럼 나의 목회에 대해 차근차근 따져보고 싶다. 기존에 해오던 것을 모두 다 내려놓고 차분히 점검하고 싶다. 내가 목회하고 있는 현장을 깊이 살피고 싶다. 내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다. 내 욕망과 아직 걸러내지 못한 쓰레기들을 먼저 치우고 싶다. 내 행동을 거울에 비춰보고 싶다.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나의 어떤 점들을 발견하고 싶다. 궁극적으로 목회는 하느님이 하시도록 하기 위해 나는 살짝 빠지면 좋겠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함께 구상하고, 서로 나누고 의논하면서 한걸음씩만 가고 싶다. 성큼성큼 앞으로 가 놓고 왜 못 따라 오냐고 윽박지르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나는 오늘 대뜸 물위를 걷다가 이내 빠져 버리는 베드로가 되기보다 따져보고 믿겠다는 의심 많은 도마가 되고 싶다. 오히려 그의 불신앙을 배우고 싶다. 이런 불신앙을 가진 목사를 받아주는 교회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교회는 건강해지고 더 성숙할 것이라 믿는다. 신앙은 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본질적인 물음을 묻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맹목적인 기독교, 저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독교에 만족하는 당시 사람들을 위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러분! 이 말과 함께 이 강의를 마치면서 내가 이 강의에서 제시한, 첫 시간에 말한 나의 과제가 그렇게 어긋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앙인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내세의 후보자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기독교인 자신의 고백과 자백에 따르면 ‘반은 동물이고 반은 천사인’ 기독교인에서 인간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과제이다.”[각주:1]
포이어바흐의 강의가 당대의 사람들을 얼마나 깨우쳤는지 나는 잘 모른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포이어바흐의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아마 포이어바흐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신앙인이야말로 아래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 또한 바로 그런 사람이고 싶다. 
“신의 친구이자 인간의 친구, 사유하는 신앙인, 기도하는 노동자, 새하늘 새땅을 가슴에 품은 현세의 학생, 인간의 불완전함을 기억하면서 노력하는 인간!”

ⓒ 웹진 <제3시대>


  1.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강대석 옮김, 한길사, 401.&#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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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16 10: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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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리 선생은 <사반의 십자가>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한없이 의심했다고 말합니다.예수는 주님이고,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케뤼그마는 성령에 의해 갑자기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지 고민한 결과라는 말이지요.
    개신교 신학자들인 마틴 루서 킹 목사와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그분의 평전을 읽어보니까 예수가 정말 부활한 것인지, 노아의 홍수는 정말 있었는지, 마태복음서에 예수가 태어났을때 동방의 박사들이 예물을 드렸다는데 왜 프롤레타리아로 살았는지등에 대해 회의와 의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고,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테레사 수녀도 평생 하느님이 계신 것인지 고민했다지요.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우리네 평범한 그리스도 교인들은 어찌 회의가 없겠습니까? 의심과 회의와 씨름하면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찾아갈 뿐입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성공회의 표현을 빌리면 성서와 전통을 이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 성격이 급한 것 같다는 겁니다.
    신앙이 성숙하면서 성서에 대해 의문과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한데, 그래서 루터, 깔뱅, 존 셸비 스퐁 성공회 주교(Episcopal Bishop John Shelby Spong),구스따보 구띠에레즈, 레오나르도 보프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도 읽고, 필요하면 리처드 호슬리처럼 그리스도교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맑스주의까지도 응용하는 노력이 용인되고 장려되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한문덕
    2010.07.17 16:5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200년이 넘어간다지만 유대-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볼 때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집만 비대하게 할 것이 아니라 속을 튼실히 해야할텐데요.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자란다는 것은 겪을 것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 같아요. 그래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있고요.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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