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인에게 ‘회개’의 의미는 남다르다. 회개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 앞에 내어 맡기는, 동시에 삶의 총체적 변화를 결단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그는 과거의 죄를 사함(사면) 받는다. 따라서 회개는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경험이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회개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는 왜 나에게 전혀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고, 일부 교회의 문제를 전체 문제인 것처럼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특정한 형태의 신앙의 제도가 한국 교회에 보편적으로 내면화돼 있고, 그 신앙 제도에서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한국 교회의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진실한’ 회개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군사주의적 선교를 떠나고, 사회의 불의에 침묵하는 현실을 보며, 기독교의 회개는 대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의 회개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기독교와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영화 <유레루>(니시카와 미와 감독)를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사진가로 성공해 자유분방하게 살던 다케루(오다기리 죠)가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들러 형을 기다리던 다케루는 자신의 옛 친구였던 치에코가 형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낀다. 그리고는 치에코를 유혹한다. 치에코는 형 미노루(카가와 테루유키)가 연정을 품고 있는 이였다. 형은 어릴 적 세 사람이 자주 놀러가던 ‘하스미 계곡’에 다시 같이 가자며 더 머물다 가라고 동생에게 권유한다. 다음날, 못 이기는 척 하스미 계곡에 함께 간 다케루는 자신을 따라 도쿄에 가고 싶다는 치에코로부터 도망쳐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케루를 좇아 구름다리로 달려온 치에코, 그리고 그녀를 좇아 달려온 미노루. 건너편 강가에서 사진을 찍던 다케루는 형과 실랑이를 벌이던 치에코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형에게 달려간다. 다케루는 당황한 형에게 치에코가 혼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이라고 증언하도록 대응요령(?)을 알려준다.
그러나 형의 무죄방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다케루는 형과의 면회 이후 형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법정에서 보이는 형의 태도를 보며, 그는 형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형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형은, 사실은 동생이 자신(의 결백)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케루가 “나는 형을 믿어”라는 말을 수없이 했지만, 사실 그 이면엔 ‘나는 형이 살인자라는 걸 알아’라는 지식 혹은 믿음이 놓여 있다는 것을 형은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형이 살인죄로 기소된 법정에 증인으로 선 다케루는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그가 목격한 형의 ‘살인’ 장면을 증언한다. 다케루의 증언으로 다리 위해서 형이 내민 손은 치에코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었음으로 ‘판명’된다.
돌아온 탕자-동생 vs. 무한히 자기를 희생하는 자-형 ?
7년을 복역한 형이 출감하는 날, 다케루는 어릴 적 하스미 계곡에서 가족과 촬영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다. 어머니가 촬영한 그 영상에서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형이 내민 손과 고소공포증 때문에 구름다리를 건너기를 두려워하는 형을 보고, 형이 의도적으로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 죽게 했다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에게 달려가는 다케루. 길 건너편 버스를 기다리는 형은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동생에게 얼굴을 돌려 미소를 보낸다. 그 미소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에서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형은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동생의 ‘위증’마저도 용서하고 받아주는 무한한 자기희생의 상징처럼 묘사된 것만 같다. 마지막 장면의 형의 미소가 형제의 아름다운 화해의 증거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인 듯하다. 자애로운 형과 이기적인 동생, 그리고 자신을 살인자로 만든 동생의 ‘실수’까지도 묵묵히 용서하는 형. 그리고 동생의 회개와 관계의 회복. 어찌 보면 너무나 통속적인 서사구조를 영화는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만의 장르적 속성을 이용해 서사의 ‘닫힌 구조’를 교묘하게 비틀고 있다. 예를 들면, 다케루가 형의 유죄를 확신하며 회상하는 장면 ― 다케루는 구름다리 위에서 형과 치에코가 나눈 대화를 마치 명확하게 듣고 보았던 것처럼 그려진다. 치에코가 이 시골마을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며, 이 시골만큼이나 미노루를 혐오한다는 듯한 말을 하자 이에 화가 난 미노루가 치에코를 다리에서 밀어버리는 것이 다케루의 회상 내용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영화평론가 김지미의 표현을 빌리면, “카메라는 미노루의 시선보다는 멀리 있으며, 타케루의 시선이 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모호해진다. (영화에서도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오지만 굳이 설명을 보탠다면, 다케루는 구름다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물소리도 컸기 때문에 형과 치에코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다케루와 형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카메라의 눈은 형을 향해 있지만 면회실 유리벽을 통해 다케루의 얼굴이 형의 얼굴 바로 옆에 선명하게 비치는 것 또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담아낸다/본다. 이때 진행되는 형의 진술은 다케루가 믿는 ‘진실’이 형의 입을 빌려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동시에 이 장면은, 역설적으로, 형이 ‘무죄’라는 사실 또한 관객의 ‘믿음’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형의 ‘유죄’가 다케루의 ‘믿음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면, 다케루의 믿음이 허구이고 미노루가 무죄라는 사실 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눈’이 영상에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다케루와 미노루를 관찰하고 있는 ‘눈’은 관객의 ‘눈’과 동일시된다.
해석자를 통해 완성되는 서사구조와 언어지옥
영화의 절정 부분에 등장하는 이 두 장면 때문에 관객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화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부분이 된다. 관객이 해석자로 동참함으로써만 돌아온 탕자로서의 동생 대 자애로운 형의 서사구조가 완성된다.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 영화의 서사는 완성된 구조 또는 닫힌 구조가 되는데, 이와 동시에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바꿔 말하면, 모호해진 회상의 지점(앞에서 든 첫 번째 예)과 다케루의 시선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점(두 번째 예)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영화의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구별하고, 영화의 서사가 허구인지 진실인지를 판단하던 ‘주체로서의 관객’ 대(對) 해석과 판단을 기다리는 ‘대상으로서의 영화’라는 이분법은 허물어진다.
다시 영화 ‘안’의, 또는 우리가 영화 ‘안’이라고 믿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케루는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영상에 담긴 형과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착오’였음을 깨닫는다.(“흔들리는 다리에서 발을 헛디딘 것은 형이 아니라 나였다” 운운하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유지되고 있는 형의 이미지―자애롭고 자기희생적인―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 것일까. 형은 어머니의 기억, 다케루의 재현(그나마도 오락가락하는),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을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는, 그 스스로는 자신을 재현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재현할 능력이 없는 타자에 대해 ‘잘못된’ 재현을 한 결과 그 타자는 ‘살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재현을 한 주체가 ‘아, 그 판단은 실수였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타자는 마술처럼 다시 ‘자애로운 자기희생적인 형’이 된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주체의 변덕이 다시없으리란 보장을 할 수가 없다. 다케루는 자신의 판단의 착오는 인정했을지언정, 그 판단을 하는 주체 자체는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주체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주체 자체가 틀렸을’ 가능성은 전혀 사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주체의 ‘앎/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진실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다케루의 회개는 매우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케루의 반성과 회개는 그것이 ‘진실한’ 것이었다 해도 결국 주체의 경계 자체는 사유하지 않는, 여전히 타자를 배제함으로써만 성립하는 반성과 회개일 수 있다. 그는 회개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저 회개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앞서 이 영화는 관객의 해석을 통해서만 완성된 서사를 갖게 되며, 그 과정에서 영화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노루가 ‘타자’ 또는 ‘보여지는 자(재현대상)’에 대한 은유라면, 다케루는 ‘주체’ 또는 ‘보는 사람(관객)’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는데, 감정이입을 통해 자애로운 형 대(對) 돌아온 탕자 동생의 이분법과 서사구조를 완성시켰던 관객은 과연 미노루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다케루를 언어지옥에 빠지게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다케루와 미노루의 화해를 상상한 관객은 과연 ‘화해’라는 언어의 지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영화 안의 주인공에 대한 사유를 넘어 관객인 우리의 사유하는 태도 자체에 대해 그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나 회개하지 않는 기독교인
기독교인에게 회개와 관계회복의 전형처럼 수용되고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유레루>의 서사구조와 상당히 닮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사 자체가 닮았다기보다는 서사가 수용/소비되는 방식이 닮았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이러한 서사 수용방식―달리 부른다면, ‘돌아온 탕자’ 담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무한히 자애롭게 그려지는 타자로서의 하느님과 그 신 앞에서 어떤 죄도 마술처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 주체뿐이다. 이 기독교 주체의 회개는 ‘진실하다’. 그러나 그 진실함은 주체의 경계 안에서 느끼는 자기애의 정도에 비례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욕하는 상황에서, 욕하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진실하게 기도하는 기독교 주체의 이해 못할 행동은 이러한 회개 담론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독교 주체에게 회개란 무엇일까, 그를 언어의 지옥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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