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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7 - 청년들과 나누는 말씀 한 자락의 풍경 (한문덕)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0. 11. 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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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일곱 번째

청년들과 나누는 말씀 한 자락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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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엔 자유분방한 20대 중후반의 청년들이 많다. 목사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들먹이면서 교회공동체에 동참하라고 했다가는 바로 정의의 날쌘 검을 들이대어 잘못된 권력행사를 꼬집어 주거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라며(요한 8:32) 새처럼 멀리 날아갈 청년들이다. 이런 청년들이 매 주일 모여서 뭔가를 한다. 그리고 당시 전임전도사였던 나에게 주일청년모임 자리에서 함께 나눌 것들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이든, 기도든, 뭐든 해 보자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뭔지 늘 고민하는 나는 뭔가 하느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슴프레한 새벽 같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왔다. 이른 새벽, 저 멀리서 어둑어둑 밝아오는 여명(黎明)은 밤의 스산한 공기를 바꾸고 생명의 싹을 틔운다. 그 때 우리 몸은 깨어나고, 모든 존재들이 기지개를 편다. 생의 약동이 일어난다. 명징한 언어로 이런 모든 것을 설명해 내기란 참 어렵지만 뭔가 거기서 그 때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참(眞理)”이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언제나 희미하고 모호하겠지만 주일청년모임에서 말씀 한 자락 가지고 대화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 아니겠나 싶어 함께 하기로 했다. 신학을 전공했고, 목사가 되는 길을 밟고 있지만, 갈수록 신앙이 뭔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헷갈리는 일개 전도사가 제 멋을 추구하는 청년들과 떠드는 수다 속에서 뭔가 일어나길 기대하며 그 첫 시간을 열었다. 주제는 “종교체험!”  
 
“종교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청년주일모임의 포문을 연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더 이상 종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시대에 여전히 교회에 오고,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 종교는 아편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여전히 진리의 맥락에 설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체험 또는 종교체험이 인생에 아주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이고 그것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종교 장사꾼들에 의해 맘몬과 결탁되어 있고, 심리적 위로와 조작된 감성에 주로 호소하는 왜곡된 하느님 체험과 종교체험을 성찰할 기회를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체험, 또는 실제 경험한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그날의 모임을 열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시간이라 청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고, 여기에 그 풍경을 그려본다.
한문덕: 종교체험을 한 적이 있나요? 뜨거웠던 경험?

ㄱㅅ: 저는 그렇게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종교체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 사람들과 같이 있고 이야기를 하면 힘을 받고 좋아져요. 그래서 교회를 더 나오게 되고...

ㅈㅇㅇ: 저는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주변에서 병이 낫거나 한 경우 말이죠. 의학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 제 어머니 같은 경우도 암이 걸리셨는데 수술 없이 신앙으로 나시기도 하는 등의 경험이 있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참 저도 모태출석(모태신앙이란 말은 어불성설인 느낌이 들어서 모태출석이라는 말을 사용)인데, 어렸을 때 사소한 경험들이 있어요. 혼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갑자기 손님이 오신다던가 하는 경험.... ^^(웃음).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 기도 모임이 있었는데, 참석률은 저조했지만 교회 안다니던 애들이 ‘마음이 편해진다’, ‘눈물이 난다’ 그러더라고요. 대학교 가서는 내가 선택한 종교가 아니다는 생각에 교회를 안 나갔었어요.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나가게 되었는데, 내가 신문사에서 일할 때, 회사에 뻥을 치고 교회를 간 적이 있었어요. 부활절 예배. 그런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교회를 가는 게 좋다고 느껴지더라고요. 향린교회 나오기가 부담스러운 적이 있었어요.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너에게 기도를 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어’라고 하시면서 내 상황에 너무 잘 맞게 기도를 해 주셨어요. 이런 것들이 제가 느꼈던 종교체험 같아요.

ㅅㅈㅇ: 저는 여러 교회를 등록 안하고 다닌 적이 있어요. 다른 교회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교회 나가게 되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회를 떠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종교는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ㅅㅁㅈ: 저는 엄마의 체험의 결과물이에요. 신앙 좋으신 엄마가 기도해서 얻은 아이니까~ 어렸을 때 방언도 받았어요. ‘한얼산 기도원’ 같은데도 다니고. 초등학교 때 방언을 받았는데, 방언을 구분해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맞다고 해 주더라고요. 중학교 쯤 이게 가짜가 아닐까 생각되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안 되더라고요. 어머니는 꿈을 잘 꾸세요.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어머니는 귀신같이 아세요. 그리고 작은 사소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체험을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느낌이 친구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고요.

문덕: 여러분이 이야기 하신 것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종교체험은 분명 삶의 위로가 되었고, 변화를 주었다. 둘째,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참 낯선 것이고 이해가 안 되는데, 사실이다. 방언, 영의 분별 등과 같은 현상이 그런 것 중에 하나인데, 이런 것을 통해 하나님이 있나보다 라고 느꼈다는 것 같아요.

종교체험이 무엇이냐?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하면 참 어려워집니다. ㄱㅅ 교우가 “종교체험이란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종교란 무엇이고 종교인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의 궁극적인 핵은 어디에 있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오전에 교회학교 진급예배를 드리면서 진짜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한 어린이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종교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을 등치시키죠.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서구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종교인이 되는 것으로 보았고 예수님도 도적적인 모델로 생각했죠. 계몽주의 이후 특히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말한 후, 여러 종교학자들이 종교체험의 특성과 종교의 본질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토가 성스러움을 말한다든지, 요아킴 바흐가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성(Intensity), 행위(Act)를, 윌리암 제임스가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ty), 수동성(Passivity), 일시성(Transiency), 깨달음의 요소(Noetic quality) 등을 종교체험의 특징 또는 본질로 말한 것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말한 종교체험도 이들이 말한 어떤 것과 연결되기도 하지요.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시도했던 멀치아 엘리아데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시간의 변화, 세월의 흐름을 무척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였다는군요. 그렇겠지요. 오늘 현대인들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고대인들이 큰 나무나, 바위, 놀라운 자연환경 등 어떤 성스러운 공간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시간이 정지되고, 변하는 가운데 불변하는 그 무엇에 대한 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그 때 그 순간, 또는 장소는 거룩한 곳이 드러나는 곳이 되는데 이것을 엘리아데는 히에로파니(聖顯)이라고 불렀고, 고대인들의 이러한 거룩함의 체험을 통해 불안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여러분에게 고대인들이 느꼈던 어떤 거룩한 공간 또는 시간을 창조해 주는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종교체험과 오늘 성서에서 여러 인물들이 만났던 하느님 체험과는 무엇이 다르고 또 성서는 하느님 체험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모세와 이사야, 그리고 예수와 바울의 종교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남용하고 있는 종교체험을 살펴보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 체험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4명의 하느님 체험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종교체험이 반드시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종교체험이 삶과 유리된 황홀경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야기시켰다는 것입니다. 둘째 종교체험 후의 삶의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 공적 영역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이야기는 이들의 종교체험을 매우 극적이고 신화적인 이야기로 꾸미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들의 삶의 변화는 상당히 점진적이었으며, 이성적인 반성을 동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40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이집트 사람이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다 그만 살인을 저지릅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40년간 목동으로 살다가 타지 않는 가시떨기의 현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히브리의 해방이라는 엄청난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갖게 됩니다. 태양신 라를 섬기던 이집트 제국 밑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히브리들은 태양의 힘에 의해 한 순간에 자연발화 되어 타버리는 가시떨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가시떨기는 태양의 힘으로 불사르려 해도 타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모습을 모세가 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다가 실패했던 과거의 경험과 노숙한 신앙의 단계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고 하는 새로운 깨달음과 힘을 얻은 것입니다. 모세의 종교체험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40년의 세월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위협 속에서 민족의 사활을 고민해야 했던 이사야는 “누구를 보내야 하는가?” 하는 천상회의를 듣고 자신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민족을 놓고 오랜 동안 고민한 사람이 아니면 즉 준비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긴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와 광야에서의 시험, 그리고 갈릴리에서의 첫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에는 간단히 언급되어 있으나 마태와 누가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광야 시험은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를 요구하는 사탄의 시험, 어찌 보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영원한 욕망을 극복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로 갔다고 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을 보신 예수의 이성적 판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 역시 자신이 직접 쓴 편지에서는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자신이 예수 체험 이후 아라비아 선교에 곧 바로 뛰어든 사실을 언급합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도교를 다각도로 분석하였고, 처음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가, 스데반의 죽음과 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과의 부단한 갈등을 겪은 후에 결국 예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한국 교인들의 종교체험을 보면 분명 놀라운 데가 있고, 그 종교체험의 진정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겠지만 문제는 종교체험이 감정의 고양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혹 넘어선다고 할 때에도 그 행동의 변화가 교회에서 원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간증에서 머물고 말지요. 오늘 제가 택한 4명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 모두 종교체험이 역사적 현장과 연결된다는 사실이고, 역사적 현장과 연결되는 것은 이 사회와 문화와 정치경제적 현실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이성적 반성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신비경험이 있고, 예수님도 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만나면서 존재론적 변화의 경험이 있지만 결국 그 분들이 활동한 장소는 산 아래 낮은 곳이며, 이 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서 하나님 만나는 먼 길을 가슴 -> 손발 -> 머리 -> 가슴 -> 손발로 표현했지요. 신영복 선생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손발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깨달음의 진정성과 실천을 말씀하신 거지요. 그런데 종교체험은 가슴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가슴을 때리기 때문에 바로 손발로 실천하지요. 그런데 손발이 움직일 때는 반드시 머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슴을 울린 감동이 절에 들어가서 불상에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 행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합니다. 중세 신비주의와 영성을 대표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만 해도 지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졌고, <팡세>라는 수상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파스칼도 수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뜨거운 그 무엇이 없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교신 선생 같은 분은 사람들이 성령체험을 한다면서 뜨거워질 때 마다 거기에다 찬물을 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가슴에서 손발로 손발을 움직이되 머리로 성찰하고, 다시 가슴이 울리고, 그래서 손발로 내려가는 순환 속에서 차츰 신앙은 성숙할 것입니다. 뜨거운 감동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명의식으로 체화되고 소명의식을 계속 떠올리면서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가슴이 뜨겁지 않다는 거지요? 하느님 체험 자체가 없다는 것이 우리를 난감하게 만들고, 이전엔 뭔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자체가 없어서 종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것! 이것이 고민된다 이겁니다. 특히 뭔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더욱 더 그렇지요. 그래서 다음 주에는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 체험은 기도와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오늘은 이 정도 하지요? 혹시 질문이나 추가로 함께 나누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고요~

ㅇㅎㅎ: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이것도 종교체험 중에 하나 아닙니까?

한문덕: 그렇습니다. 물론이지요. 기도를 통한 문제해결은 아주 중요한 종교체험 중에 하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민족의 문제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문제는 기도행위 자체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간구와 기도는 있게 마련이고 그 종교전통에서도 문제해결이 되지요.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무속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요. 심지어 종교전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냥 혼자서 자기 암시 비슷하게 계속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를 통한 문제해결이 종교체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기도를 드렸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교적인 기도인가 하는 문제지요.

ㅇㅇㅈ: 성경에서 종교체험이 있으면 공동체가 변하잖아요. 그럼 그처럼 공동체에 변화를 이루면 제대로 된 종교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요?

한문덕: 삶의 변화, 행위의 변화 궁극적으로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종교체험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했느냐’이겠지요. 성서의 언어는 고백적 언어이기 때문에 다소 과장되고 급격한 면이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가 그렇잖아요.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끝나지요. 전혀 모르는 여성과 남성이 극적인 상황에 만나서 어려움을 겪고 결국 사랑하고 결혼하잖아요. 영화는 거기서 끝나죠.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그 때부터 지지고 볶고 하는 가정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하루에도 3천명씩 변화를 받았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 은혜롭고 감동이 되지만 변한 3천명의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선 성화(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의 문제라고나 할까요.
 
ㅅㅁㅈ: 차라리 사도바울의 경우처럼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직접 만나 주시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고 말씀해 주시면 정말 편할텐데~

ㅇㅌㅇ: 그 때 당시 사도 바울도 우리처럼 고민 많이 했을 걸!

한문덕: 그랬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지금 세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한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특히 종교인들이 그렇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아시나요? 바로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에서 “진리를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지요.  

ㅇㅎㅎ: 제가 종교체험을 제대로 했다면 아마 그 것은 고등학교 때일 거예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의사가 된 것이거든요.

ㅅㅁㅈ: 그런 것도 있는데.... 좀 디테일 좀 주시면 좋겠어~

ㅈㅇㅇ: 디테일은 자신이 계속 찾아가는 거고, 계속 찾는 과정 속에서 그와 같은 계시가 필요하고, 또 실제로도 있다는 것이지. 나는 일상 속에서 그 같은 경험을 많이 체험하거든.

ㅅㅁㅈ: 나도 그런 경험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것이 힘들더라고.

문덕: 그래서 기독교에 있는 것이 있죠. 기도와 말씀. 이건 다음 주에~ 숙제 꼭 해오시고요~. 오늘은 이것으로 마칠까요~
짝짝짝~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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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용하였던 청년신도회 주일 모임 자료
제 1 강 종 교 체 험
 
2월 3일 한문덕 전도사

1. 기도(위대한 기도문을 통한 성숙한 기도 배우기)            

Pa,ter( 아버지, (누가복음 11장 2절 일부) [각주:1]
Pa,ter h`mw/n o` evn toi/j ouvranoi/j(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장 9절 일부)[각주:2]


2. 마음 열기
- 교회 나온 이야기 나누기
-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하나님 체험

3. 하나님을 만나는 먼 길: 가슴→손발→머리→다시 가슴으로→손발   
1) 성서의 인물들
- 모세(출애굽기 3장 1-10절) :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태양신 라(Ra)도 스네(가시떨기)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르지 못한다. 
- 이사야(이사야 6장 1-13절) : 천상회의를 듣고 자기를 보내달라고 하는 이사야(소명의식)
- 예수(마가 1장 9-15절) : 하늘과 소통(11절 참조 마 3;17), 세 가지 시험, 삶의 세계로 투신.
- 바울(갈라디아서 1장 11-17절) : 바울의 열성, 종교체험, 선교활동
- 성서 인물들의 하나님 체험의 특징: 성스러움의 체험(전체성, 두려움, 궁극성, 강렬성 등등), 소명의식(이성적 차원), 행위로 연결(실천) 
2) 하나님 체험(종교체험)에 대하여:
- 쉴라이어마허: 절대의존의 감정(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다):
-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 - 두려움(Tremendum)과 매혹(Fascinas)의 신비(mysterium)
- 요아킴 바흐: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성(Intensity), 행위(Act)
- 윌리암 제임스: 말로 할 수 없음(Ineffabilty), 수동성(Passivity), 일시성(Transiency), 깨달음의 요소(Noetic quality)
- 멀치아 엘리아데: 히에로파니(聖顯), 고대인의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변하지 않는 무엇 즉 본질 추구-> 시간이 멈춘 순간의 경험 
- 이길용: 종교란 세계설명 체계와 인생문제 극복체계, 완전함의 추구-완전함의 발견-완전함의 고양

4. 보살핌과 결단   
- 현재 나의 삶을 추동하는 하나님 체험의 강렬함은 어느 정도인가? 냉장고인가? 용광로인가?
냉장고 ---------------------------------------------------------- 용광로

5. 삶의 적용 모색/기도   
- 자신의 소명을 찾아보자. 하나님이 이 시대에 나를 왜 부르셨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본다.
- 어떻게 하면 나를 추동하는 하느님 체험을 계속 할 수 있을까?

6. 다음 모임 알림(2월 10일) “주제: 기도”  

- 자신의 기도체험을 반영하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도란 이런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적어오세요.
- 자신이 요즘 드리고 있거나 이전에 했던 기도제목들을 모두 적고, 하나님에 관한 것, 자신에 관한 것, 이웃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봅시다.
※ 참고문헌
『종교론』슐라이어마허/최신한, 대한기독교서회, 2002.
『기독교신앙』슐라이어마허/최신한, 한길사, 2006.
『성스러움의 의미』루돌프 옷토/길희성, 분도출판사, 1987 초판.
『Religionswissenschaft: Prolegomena zu ihrer wissenschaftstheorethschen Grundlegung』<종교학: 학문이론적 토대를 위한 서설> Joachim Wach, 1924 초판.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윌리엄 제임스/김재영, 한길사, 2000.
『종교학의 이해: 쉽게 풀어쓴 종교학 입문서』 이길용, 한들출판사, 2007.
  1.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나? 우리의 존재 근원에 대한 성찰(인간성의 문제). [본문으로]
  2. 하늘에(초월성, 전적타자, 낯섬, 구원의 가능성) 계신 우리(내재성, 친밀함, 근접, 돌봄과 배려), 예수의 아버지 개념과 어머니 마리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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