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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8 - 세미한 소리 (한문덕)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1. 1. 1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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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 여덟 번째

세미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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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개역개정판 열왕기상 19장 11-12절)

서방의 지중해와 동방의 아라비아를 잇는 중개무역로가 개통되었고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이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북이스라엘은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된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는 아합왕이다. 북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독재에 맞서 생겨난 나라였기에 평등을 지향하는 민중전통이 살아있는 왕조였다. 그러나 야훼의 평등주의 전통에서 다소 자유로웠던 비 이스라엘계의 용병출신 오므리는 외세의 위협에 맞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부국강병의 길을 택하였고, 사마리아를 근거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페니키아의 성읍들과 상업동맹을 맺으며, 남유다를 예속화하는 등 평등보다는 발전에 주력하게 된다. 그의 아들인 아합은 페니키아 연합 왕국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아버지에 이어 보다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를 지향하였다.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는 사건(왕상 21장)은 모든 땅이 야훼의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뒤집는 것으로 아합의 권력 남용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왕상 17장)는 국가발전의 명목하에 벌어지는 처참하고 고달픈 민중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모든 정책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합은 야훼주의와 바알주의를 적당히 혼합하였고, 바알주의를 이용해 과도한 사유재산을 합법화하고, 사회불평등을 정당화하였다.

위에 인용한 성서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야는 바로 이러한 아합을 정면에서 공격한 하느님의 예언자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갈멜산의 대결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가져오는 절대권력과 야훼의 평등주의의 한판 투쟁이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과 850대 1로 싸워 승리를 거둔 사건은 어떤 하느님이 참 하느님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인 동시에 절대권력을 향한 욕망을 부수고, 그에 물든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야훼 하느님 신앙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오늘날 교회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네 평범한 심정에서는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을 박살내는 장면쯤에서 야훼 하느님이 등장하시면 그야말로 최고의 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이 거대한 승리의 함성 속에 야훼는 현현하지 않는다. 대신 야훼 하느님은 승리의 싸움을 하고서도 다시 이세벨에게 쫓겨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을 하는 엘리야를 채근하여 하느님의 산인 호렙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그 야훼는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로 등장한다. 이러한 은유, 상징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을 때 생기는 위험과 오해와 편견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엘리야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문자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갈멜산의 대결에서 엘리야가 백성들을 시켜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잡게 하고 그들을 기손 강가로 데려가 거기에서 모두 죽였다는 기사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어떤 이들일까? 물론 이들은 사회의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그래서 약자들의 피를 빨아 강자들의 배를 채우는 데 일조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잡아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난 그러한 생각 속에 또 다른 폭력이 잉태하는 것을 본다. 변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너무 손쉽게 놓아 버리는 가벼움, 모든 성공에는 언제나 그 신화에 가려진 무수한 그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나 자신을,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여도 승리에 도취되는 순간 패배자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는 우리네들의 한계를 본다. 악을 박멸하는 것에 목소리를 높일 때 내 안에 깊이 내재한 폭력이라는 또 다른 악의 모습은 살피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는 용기도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상대편은 다 나쁘고 나는 무조건 옳다”는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도 경계해야만 한다. 어쩌면 바알의 예언자들은 더 잘 살고 싶고, 좀 더 편하고 싶고, 가끔은 내가 좋기 위해 남을 생각지 않는 평범한 우리와 같은 이들일 수도 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수많은 좋은 생각들이 서로 부딪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를 물리쳐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가자고 외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난을 받는다고 그들이 파렴치한 인간이거나 게으른 인간은 아니다. 신앙이 없다고 함부로 평가받을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목사가 빠지는 유혹도 전부 이런 것들과 관련되는 것 같다. 성공한 목회 어쩌구 저쩌구, 삐까뻔쩍한 그 무엇을 이루어야만 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흘러갈 때 혹시 우리는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영영 못 만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 가운데서 작은 성취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심지어 영광스런 자리(?)로 떠받들어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못생겨도, 나이가 어려도, 키가 작아도, 돈은 벌지 못해도, “목사님, 목사님” 하며 떠받드는 소리들만 귀에 쟁쟁할 때도 있다. 홀로 기도하면서, 그것도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오래도록 구상을 하고 발표한 목회계획이 “짜잔~” 멋지게 들어맞아 교인이라도 몇 십 명 늘면 갑자기 목이 굳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목사들을 많이 보게 된다. 몇 몇의 반대의견은 들을 필요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다. 아흔아홉마리 양이 찬성하면 한 마리 어린양은 안중(眼中)에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이제 슬슬 “하느님의 종”에서 “하느님”이 되어가는 징조가 보이는 것이다. 

나에게는 7살(선규), 4살(동규) 먹은 두 아들이 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하루에도 수 십 번 아이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윽박지르거나 내 맘대로 할 수는 없기에 아이들의 의견을 계속 묻는다. 아이들은 아직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판단을 못하고[각주:1]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막무가내의 요청을 하거나 떼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다른 해결방식을 찾기 위해 엄청 머리를 쓴다. 잘 설명하기도 하고, 한가지로 쏠린 아이의 욕구와 생각을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안을 내놓기도 한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잘 해결되는 편이다. 

팽이를 놓고 두 아이가 싸운다. 팽이가 두 개나 있건만 둘째가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둘째를 혼낸다면 분명 울음소리는 더 키울 뿐이다. 잘못은 분명 둘째가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둘 사이에 협상할 거리를 찾는다. “선규야, 동규가 팽이를 무척 좋아하나 본데, 일단 두 개다 동규를 주고 선규는 이따가 동규 낮잠 자면 그 때 팽이 놀이를 하면 어떨까?” 실패다. 선규가 양보를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동규를 꼬신다. “동규야, 이 팽이는 형아 것이고 레이 유니콘 팽이가 네 것이니까 우리 하나씩 나누자.” 이것도 실패다. 동규가 두 개의 팽이를 두 손에 쥐고 놓지를 않는다. 다시 선규를 설득해 본다. “선규야, 아빠랑 숨박꼭질할까?” 이번에도 또 실패, 팽이에 필(feel)이 꽂힌 선규가 절대 포기할 기세가 아니다. 다시 동규를 꼬시기로 했다. “이게 뭐냐! 와~ 붕붕 자동차네, 삐뽀삐뽀 놀이 해볼까?” 아이들과 상관없이 내가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한쪽에서 새로운 놀이를 시작해 본다. 동규가 걸려 들었다. 금방 움켜잡았던 팽이를 놓아 버리고 자동차를 집으러 온다. 웬 걸! 이렇게 되자 큰 아이 선규도 이제 팽이에는 관심이 없다. 

개인의 작은 욕심들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악으로 증식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또 하나의 자만심, 욕망, 지배욕, 고집 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것을 성찰하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의견들을 놓고 싸움을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한 사람의 열걸음이나, 다섯 사람의 두걸음이나, 열사람의 한걸음은 모두 같은 열걸음이지만 공동체를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손잡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흔아홉마리를 들이나 산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신 예수는 아마 길 잃은 양의 세미한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침묵에 쌓여 있는 그 소리를 듣고 싶다. 어느 누구도 잘 돌아보지 않는 한 구석에서 조용히 그러나 부드럽게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듣고 싶다. 

갑자기 노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혹시 하느님의 세미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입거나 욕을 먹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조심)하라. 큰 환란을 제 몸처럼 귀히 여겨라. 왜 ‘사랑을 입거나 욕을 먹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조심)하라’고 하는가? 사랑을 받으면 승진하고 욕을 먹으면 강등이 되는 법, 그러니 총애를 얻어도 놀란 듯이, 총애를 잃어도 놀란 듯이 하라. 그래서 사랑을 입거나 욕을 먹거나 깜짝 놀란 것처럼 (조심)하라고 말한 것이다.”(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上, 辱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道德經』 13장 중에서)
 
ⓒ 웹진 <제3시대>


  1. 물론 성인이라고 상황판단을 다 잘하는 건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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