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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황용연)

시평

by 제3시대 2011. 1. 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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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황용연
(미국 GTU 박사과정)


 
요즘 필자의 살림 걱정 중에 하나는 한 달 전쯤 확 올라가 버린 달러 환율이 좀처럼 그 때 수준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 환전을 해야 하는데 계속 떨어지던 환율이 한 달 전쯤 확 올라가 버린 후 다시 떨어지긴 했어도 예전 수준으로까지는 돌아오지 않으니, 지금 환전하면 그 때 환전했던 금액보다 적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한 달 전 환율이 확 올라갔을 때 터졌던 사건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신 독자분들도 있으실 테다. 그 때가 바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던 때였다.

연평도 포격 사건과 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어찌 보면 오랜만에 북한을 남한 사회의 중심 논란거리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사건 이후부터 계속 이어진 군사훈련을 둘러싼 '본때를 보여 주어야 다시는 안 그런다' vs '안 그래도 긴장 분위기인데 계속 불 지르면 평화란 어디서 찾으란 말이냐'라는 논쟁부터, 이미 소위 햇별정책을 쓰던 정권이 물러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햇볕정책이 맞니 틀렸니라는 식으로 벌어진 논쟁까지.
각자 자기 입장은 뚜렷할 수 있어도, 아니 오히려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쉽게 승복할 수 없이 벌어졌던 논쟁들 속에서, 문득 제목의 질문을 한 번 던져 본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쉬웠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북한은 적이었다. 그것도 실제로 총을 맞대고 싸우기까지 했던, 그래서 현실적인 위협이었던 적 말이다. 그리고 그 적은 동시에 남한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거울 구실도 했다. '야만스러운 공산주의 독재사회'라는 북한의 이미지를 구축해 놓고, 남한은 이 이미지와는 반대이므로 살 만한 사회이다라고 말하기 위한 거울로서의 구실.
그런데 정작 그 거울을 많이 써 먹었던 남한의 정부도 '공산주의'는 아닐지 몰라도 '야만'과 '독재'이긴 마찬가지였음이 폭로되면서 북한에 대한 다른 견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로 이런 견해들은 '동족'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사회주의의 이상적 측면에 관한 호감이 거기에 덧붙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남한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다는 '민족의 원형'이라는 이미지가 덧붙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견해들이 수다히 제기되었어도, 다른 한 편에서는 여전히 북한은 적이었다.

이런 두 방향의 견해는 여전히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유력한 견해로 자리잡고 있지만, 80년대 말 이후 남한과 북한의 행보가 상당히 엇갈리면서 새로운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실 사회주의 사회가 붕괴된 영향과 홍수/가뭄 등의 심각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북한 사회가 식량 걱정까지 해야 되는 지경이 된 반면, 남한 사회는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개최하면서 그 동안 지속되어 온 경제성장이 마침내 국제적인 성공의 증표가 되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물론 중간에 IMF라는 좌절을 겪기는 했어도).
그리고 이 시기에 초등학생들이 "통일되면 거지떼가 몰려 올 까봐 싫어요!"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북한을 '적'으로 여기던 '동족'으로 여기던 간에, 양편 모두에게 북한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갖는 존재였다면, '거지떼' 운운하는 초등학생에게는 북한은 별 비중이 없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어쩌면 월드컵 때 시청광장에서 울려퍼졌던 "대~한민국"은 바로 그 무시의 완성형이었을지도. 이제 '남한'만으로도, 그 '남한'이 한반도 '남쪽'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국가가 되었다는 외침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무시는 사실 연평도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난다고 해야겠다. 연평도 사건을 일으킨 북한의 이미지는 무서운 적이라기보다는 '양아치'에 가깝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그런 양아치를 혼내 줄려면 얼마든지 혼내 줄 수 있었을 텐데(물론 미국이라는 '큰 형님' 허락이 필요할 수도 있긴 하지만) '안 혼내 주고' '퍼주기'만 했던 게 문제지, 혼내 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 '못 혼내 준 건' 아니었다고들 하니 말이다. 물론 연평도 사건 직전에 있었던 '3대 세습' 등의 얼빠진 행위가 이런 '양아치' 이미지에 일조하기도 했을 것이고.
이런 '무시'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그 동안의 대북정책을 두고도 북한을 적대시했다기보다는 북한을 무시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협상이든 적대든 북한에 대해 어떤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기보다 북한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면 도와줄 것이라는 입장만 계속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평도 사건은 적어도 국가 운영의 차원에서는 이런 '무시'만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무시'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햇볕정책'은 과연 자유로울까.
물론 '햇볕정책'은 북한을 무시해서는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기본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보자는 정책이니 말이다. 어쩌면 본격적으로 그 일치의 지점을 찾기도 전에 일단 급한대로 '퍼주기'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 햇볕정책의 현실적 난관이기도 했을 것이고.
하지만 '햇볕'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결국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 '햇볕정책'의 정식 명칭은 '대북포용정책'. 즉 남한이 북한을 포용한다는 이야기지 그 반대는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자신을 남북평화 쪽으로 어필하려 했던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에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남한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트위터에서 이야기했단다. 그렇다면, 햇볕정책과 그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북한은 적어도 '동등한' 위상의 주체는 아니란 이야기이니, 이것 역시 '무시'의 흔적이지 않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연평도 사건은 이제 이런 '무시'만을 가지고는 더 이상 북한 관련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 제목의 질문을 다시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북한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북한이란 무엇인가"에 앞서서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북한을 무시할 수 있었는가"부터 먼저 물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북한을 새삼스럽게 '겁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북한을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 남한 사회의 자신감,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올림픽과 월드컵 등의 계기로 표출될 수 있었던 그 자신감, 도대체 이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 말이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묻게 된다면, 북한 말고도 다른 '무시'의 대상들이 그 물음의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아마 이 글의 제목도 바뀌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우리'라고 할 때는 누구를 이야기하는 거냐, 그 자신감을 주도한 사람들 이야기냐 그 자신감 때문에 어쩌면 무시당했던 사람들 이야기냐라는 질문이 따라오게 될 테니까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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