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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1979년 가을을 떠올리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장운양)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1. 7. 2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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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가을을 떠올리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장운양
(한백교회 교인)


1. 저에게 1979년은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차고도 넘쳤던 해입니다. 국민학교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

2. 1,2학년 시절 우등상장을 타지 못했다고 아버님은 봄방학이 접어드는 그 시절에 어린이들에게 가장 큰 고문인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아버지의 눈빛은 너무 무서웠고 지금도 진저리칠 만큼의 악몽이 종종 꿈자리에서 나타납니다. 당시 아버님은 중학교 서무과 직원이셨는데, 결국은 그 1979년 제헌절날 장로에 임직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서무과 직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던져 버리셨고.... 그 이후 어머니는 온갖 일들을 하면서 아버지가 감당하지 못하는 경제력을 매꾸기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3. 시간을 헤아릴 길이 없이 제대로 공부 못해서 우등상장을 타지 못했다고 규정하시면서 새벽기도 전까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을 꾸짖는 분을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난감합니다.

4. 1979년 3학년에 오르고서, 저는 3학년 1반이 되자마자 담임선생님에게 여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우등상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시 선생님의 이름이 정확하게 떠오릅니다. 최진행 선생님이셨습니다. 전라북도 전주가 고향이었고, 한문이 매우 중요하므로 국어시간마다 3자씩 한문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할아버님 덕분에 한자를 꽤 알고 있었고(천자문 정도) 선생님은 저를 꽤 기특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제 아버님은 중학교 서무과 직원으로서 하셨던 일들이 가리방으로 각 과목 선생님들의 시험지를 대신 필사해서, 제공해 주시는 역할을 맡은 분이셨습니다. 당연히 필체가 상당히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장로 임직 전 이후로 거의 20여년의 시절동안 모교회의 주보를 가리방을 긁어서 감당하셨지요.

5. 1979년 국민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제가 우등상을 타려면, 문제를 많이 풀어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는 표준수련장과 동아수련장이 압도적인 상황이었는데, 이를 구입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결국은 친구들 수련장을 곁눈질하면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먼저 말씀드리면, 국민학교 3학년을 마쳤을 때도 저는 우등상장을 타고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은 또 밤을 새우다시피 저를 잠재우지 않으셨습니다. 매우 분노하신 얼굴로 이번에도 우등상장을 타지 못했다고, 너 그렇게 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래도 자식이 공부를 제대로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희망을 감지하고 싶었던 냉혹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심정으로 받아들입니다.

6. 저는 지금도 두 딸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재미있고 할 만하면 하는 것이고 내키지 않으면 그뿐이지요.... 물론 수학처럼 감당하기 좀 어려운 과목들에 대해서 애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려고는 합니다.  국민학교 1, 2, 3학년을 마칠 때까지 제 유년기에 남아있던 공부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지금도 지옥 그 자체입니다. 누가 성적을 제대로 높게 평가받기를 거부할 학생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제 아버님은 너무도 어린나이에 저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초래하셨던 듯싶습니다.

7. 1979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제게 매우 중요했던 시기였습니다. 모 교회에서 만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형~ 누나들이 자전거를 타고서 교회에 오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저도 자전거를 갖고 싶었습니다. 1979년 경기도 이천의 면단위의 지역들은 거의 7,80%가 가난했던 시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8. 계속해서 중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는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사주면 더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기저기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돈을 때로는 왕창 쓰시기도 했지만, 절대로 저에게 자전거를 사주실 생각이 없던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9. 매달 종종 걸어서 한 시간 걸리는 할아버지댁 큰할아버지댁을 들렀습니다. 사실, 저의 할머니는 친할머니는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항상 제가 오면, 우리 큰손자하시면서 순식간에 맛난 것들을 내주셨습니다. 그 중에 압권은 콩엿이었지요. 할머니는 제가 한 시간 걸어서 할아버지댁에 들리면, 그 콩엿이나, 너무나 제가 좋아하는 감주를 항상 내주셨습니다. 할머니가 자물쇠를 관리하셨던 그 할아버지댁 대문 옆에 있는 광은 지금 기억해도 저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공간이었습니다.

10. 할머니는 항상 광을 들어가시면 뭔가를 제게 건내셨습니다. 우리 장손주 하시면, 공부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11. 할머님은 글을 읽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가끔 금요일에 할아버지 댁에 들리면, 할머니는 성경을 드시고서 저에게 어떻게 읽어야 하냐고 도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띄엄띄엄 성경을 읽어내려고 무진장 노력하셨습니다.

12. 당근, 저는 할머니를 최대한 도와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해 추석에 사단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13.아버지는 장로가 되시고서 지금 뒤돌아 봐도 교만해지셨습니다. 자신의 고향에 기도처를 넘어선 교회가 들어서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너무 인정받고 싶어 하셨고, 결국은 자신의 기준에서 받아들이실 수 없다고 할머니가 사시는 지역에 담임하신 목사님을 반대하시고서 그분이 그 개교회를 떠나가시게 만드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는 막내삼촌의 눈물을 지켜보는 것도, 할머니의 괴로움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고 떠나가시는 그 목사님 내외분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나이에 감당해야 했던 힘겨움이었습니다.

14. 제일 힘들었던 것은 어머니를 지켜보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해서는 안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끈해서 당위성으로 마을에 목사사모가 소문이 무성하게 휘말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아버지는 강경하셨고, 결국은 그 젊은 목회자 부부는 할머니가 소중하게 섬기셨던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15.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는 극도로 뒤틀려졌습니다. 추석날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음식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잘 준비하실 수 있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물론, 할머님도 음식을 잘하셨지만, 어머니보다 그렇게 후딱 빠른 시간내에 맛있는 음식을 내지는 못하셨습니다. 1979년 추석날~ 할머니는 어머니를 쳐다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냉랭한 긴장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장손자의 입장의 저는 매우 괴로웠습니다. 아버지가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느낌과 그렇다고 뭘 어쩌지도 못하는 우등상장도 타지 못하는 저의 처지에서 말이지요...

16. 그리고, 흉년이 닥쳤습니다. 당시에는 통일벼를 심으면 수확이 더 나온다고, 농촌 여기저기서 통일벼를 파종했던 시기였습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잘하셨다고 당시 모교회 오천교회나 주위분들에게 인정받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김치 때문이었습니다.

17. 제가 어머니가 담그신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엄마 김치는 항상 왜 이렇게 맛있어?"  제 어머니는 "김치는 온도란다" 사람이 체온을 잘 유지해야 건강하듯이 말이란다.

18. 어머니는 최대한 빨리 김장을 담그시면, 그것을 바로 광밑에 공구리된 지하창고에 보관하셨습니다. 그럼 약 한 달이 되기 전에 싱싱한 김치가 씹는 아삭아삭한 맛과 숙성된 감칠맛이 느껴지게 처음으로 김장김치가 익게 됩니다.

19. 그러나, 할머니는 김치를 최대한 짜게 담그셔서, 배추를 비롯한 재료를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막내삼촌이 할머니를 향해서, 형수 김치는 그렇게 맛있는 데, 엄마김치는 맨날 짜다고 불평이 자자했습니다. 참고로 막내삼촌과 조카인 저와는 8살 차이입니다.

20. 그러나, 할머님은 엿이나 감자떡, 절편 등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특히~ 감주는 압권이었는데, 약간 시간을 걸리는 음식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하셨습니다. 항상 제게 콩엿을 구워주셨던 것도, 그렇게 엿질금을 다룰 수 있으신 노하우가 있으셨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21. 이런 사태가 일어나고, 1979년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실장의 권총에 의해서 생몰하기 몇주전, 어머니가 저에게 자전거를 타고서 할아버지 댁에 가서, 할머니에게 쌀을 좀 얻어 오라고 시키셨습니다. 아버지는 결국은 자전거를 사주지 않으셨지만 제가 큰할머니 댁에 들려서 집 뒷편에 고장난 채로 앞바퀴가 없는 자전거를 발견하고, 큰 할머니에게 허락을 받고서 끌고 오고나서는 어쩔 수 없이 수리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앞바퀴 브레이크만 작동되었었다는 것이지요.

22. 걸어서는 10리길 한 시간 거리를 자전거를 타니 20분만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엄마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님께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할머니 쌀 좀 주세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시켜서 왔다는 이야기는 일절하지 않았습니다.

23. 할머니는 저에게는 항상 보물창고와 같았던 광으로 가시고서 콩엿은 물론이고 좁쌀과 수수와 옥수수와 우리 식구가 한 달을 먹을 만한 양식을 챙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떠 오릅니다. "운양아~ 네가 할미가 성경을 읽도록 한글을 가르쳐 줘서 너무 고맙구나~ 더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상장도 타고, 나중에 훌륭한 선생님이 되거라"

24. 저는 할머니가 챙겨주신 그 푸짐한 양식들과 입에는 콩엿을 물고 자전거 폐달을 밟았습니다.

25. 그런데, 할아버지댁인 이평리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덕평리-현재 영동고속도로 도중의 덕평인터체인지라고 알려진- 그 고갯길을 넘어서야 합니다. 할머니가 챙겨주신 양식과 콩엿을 입에 물고 너무 신나 있던 저는,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앞바퀴만 작동된다는 것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몰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 덕평리 고갯길에서 신나게 달렸으며, 결국은 돌멩이를 피한다는 것이 앞바퀴 브레이크를 너무 심하게 잡아서, 바로 옆에 있는 논두렁에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할머님이 챙겨주셨던 양식들은
포대가 찢어져서 아스팔트 위에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26. 무릎과 팔뚝은 찢겨져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고, 저는 가까스로 상황을 수습하고 찢어진 푸대에 좁쌀과 수수와 옥수수를 담았습니다. 결국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쩔뚝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오는 저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그냥~ 엄마 품에 안겨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도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27. 저는 그 이후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자전거를 타지 않았습니다.

28.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에 휘둘렸던-부연하자면, 차지철 씨는 저와 고향이 같습니다. 그래서 1974년 광복절 육영수 여사가 소천하시고서 차지철이 판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다양한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듣고서 자랐습니다. 결국은 1979년 10월 26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이등박문이 저격된 후, 적확하게 70년이 지난 바로 그날 김재규에게 박정희 대통령도 저격됩니다. 당시 분위기는 평생 나라님으로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가, 갑자기 그것도 심복중의 심복의 권총저격으로 생몰 당했기 때문에, 30년 후 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상으로 충격이 컸습니다.

29. 아직도 두 딸 2, 3학년 중딩을 키워내야 한다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중딩3학년 딸아이가 "아빠~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행복은 창문으로 나가버린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 종종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느끼는 가난은 더 큰 파장으로 다가가는 듯합니다.

30. 그래서 힘겨운 시절들을 현명하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매일매일의 일상을 소중하게 살아내셨던 할머니와 어머니가 더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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