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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기도, 내 마음의 이중성을 마주하기 (도홍찬)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1. 12. 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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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내 마음의 이중성을 마주하기


도홍찬
(면목고 교사)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 화자가 존경하던 ‘선생님’은 평생 은둔의 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세상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까지 증오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는데, 이유는 그의 불행한 인생 경험 때문이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걱정 없이 공부를 하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황이 바뀐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의 숙부가 성심껏 그의 뒷바라지를 해준다. 그는 숙부를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숙부가 재산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서 그와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쫓겨나면서 다시는 고향땅을 찾아가지 않게 된다. 배신감에 인간을 믿지 못하던 그의 마음은 동경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다. 하숙집 안주인의 보살핌에 다시금 가족의 평온함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 하숙집 딸에 대한 사랑이 싹트면서 그의 마음은 다시금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하지만 다시금 비극이 찾아온다. 그의 친한 친구가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지자 하숙집 주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나누어 같이 하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보다 더 세상에 대한 벽을 쌓고 살아가던 친구가 어느날 고민을 털어 놓는다. 하숙집 딸을 몰래 연모한다고. 그는 내심 당황한다. 친구에게 자기 마음을 말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서 있지도 못해 안절부절 한다. 친구와 하숙집 딸의 일상적 관계도 이제 예민하게 바라보게 된 그는 결국 조바심에 친구 모르게 하숙집 여주인에게 딸을 달라고 청혼을 하고 허락을 얻게 된다. 그는 사랑을 얻게 되지만 친구를 잃게 되고 만다. 친구는 이 일의 충격으로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의 비밀은 오직 그만 알 뿐이기에 하숙집 딸과 결혼을 하였지만, 평생 그는 홀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세상과 절연한 채 살다가 결국 자살하게 된다.  

  타인의 욕망으로 상처를 받지만, 똑같이 타인에게 악한이 되는 우리 마음의 이중성을 나쓰메 소세키는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드러내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소설에서도 이렇게 우리의 불편한 내면을 끄집어낸다고 한다. 소세키는 유학의 처절한 경험을 통해서 강자의 논리를 따라서 승리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서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문학 원리를 체득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기본위’의 삶을 위해서는 우리 안의 허위와 가식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응시가 세상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관념적인 자기 결백성에 치중한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선악이 자명하고 이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저쪽 편이 되는 옹졸한 현실에서 우리가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기실 근대의 윤리학은 순수한 인간의 선의지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선악이 자명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도덕법칙을 수립하고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선악의 대립보다는 양자의 침투와 뒤섞임, 상호 혼종을 경험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천사나 악마가 된다기보다는 경계선에서 양자를 오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의 윤리적 상황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 바로 자기 응시일 것이다. 선함의 이면에 위선이 숨어있을 수도 있고, 악역 속에 정의가 내재함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악이 일상의 안주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변혁 또한 작은 자존심 하나 지켜내는 것에서 촉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한다는 것 역시 마음에서 악을 몰아내고 순수한 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 선과 악이 고투하는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자기 정당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확신에 물음표를 붙이는 과정이 아닐까.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 기도하는 시간이 내 욕망을 확인하는 동어반복의 시간이라면 차라리 기도에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평생 상처받고 상처주는 삶이 반복되겠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책하겠지만, 세월을 통해서 최소한의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나와 타인을 응시하는 눈길이 깊어지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다. 선한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이었기에 고민하였고, 그러한 갈등과 고민으로 이른 새벽 자주 기도를 하였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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